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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마세요
참고말씀: 삼상12:23; 시42:5; 잠24:10; 사62:7; 마6:30; 8:26; 14:31; 막7:26,27; 9:24; 눅2:36-38; 17:5; 행17:32,33; 롬1:17; 갈6:9; 엡4:27; 5:16; 골4:2; 살전5:17; 요일5:14
읽을말씀: 눅18:1-8
주제말씀: 눅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첫째, 기도생활의 최대의 적은 낙심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명부하셨습니까?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1절 상) 그러면서도 무엇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낙심(落心)입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1절 중)
어째서입니까? 기도생활의 최대의 적은 언제나 ‘낙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생활뿐이겠습니까? 선을 행하는 일에도 ‘낙심’이 가장 큰 적이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갈6:9 상) 전도하는 일에도 ‘낙심’이 제일 큰 적이듯이,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행17:32,33)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적 중 하나는 바로 이 ‘낙심’일 것입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시42:5 상)
기도생활에 열심 하던 사람에게 낙심이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먼저는, 기도생활이 중단됩니다. 어째서입니까? 기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도의 동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갈멜 산상에서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던 엘리야가 어쩌다가 광야 한 복판까지 도망가서 널브러져 있었습니까? 낙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네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19:2-4)
또한 기도시간이 푸념하는 시간, 곧 즉 마음속에 쌓이는 불평과 원망 등을 쏟아내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어째서입니까? 기도가 중단되면 엉뚱한 것들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대신에 어떤 것들이 나오게 됩니까? 불평이나 원망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73:13,14)
예수님도 이런 점들을 잘 아시기에 무슨 비유를 더해주셨습니까?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비유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1-3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기도하다가 낙심이 들었습니까? ‘기도하다가 낙심이 되어’ 더 이상 우리의 기도를 이어갈 수 없습니까? 기도시간이 변질되어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푸념만 늘어놓고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즉 중단되었던 우리가 다시 시작되며, 변질되었던 우리의 기도시간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둘째, 낙심하지 않으려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눅18:3)
낙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의외에 간단합니다. 무엇입니까? 기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팽이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돌아야 하듯이,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않으려면 기도를 계속 이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중간에 고비가 여러 번 올 수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망설이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도생활을 언급할 때마다 어떤 단어들을 즐겨 사용하곤 합니까? ‘계속’, ‘항상’, ‘쉬지 말고’ 등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 상) /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1절)
이처럼 우리가 기도를 계속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틈을 메워서 더 이상 낙심이 틈 못 타도록 막아주십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소리나 원망, 불평의 소리 등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도와주십니다.
비유 속 과부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녀 역시 ‘자주 가서’ 재판장에게 하소연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3절) 참고로, 이 재판장은 유대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법정인 산헤드린에 제기해야만 할 큰 소송거리 외에는 대개 장로들을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아마도 로마 정부가 임명한 이방인 재판관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오직 자기 관할지역 내의 행정 문제만을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이 재판장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했던 불의한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주’와 ‘가서’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둘은 기도생활의 두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도생활을 잘 하려면, 우리는 ‘자주’ 기도해야 하고, 또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 과부처럼, 우리도 자주 나아가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까? 낙심이 들 기미가 보일수록 더더욱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물론 기도를 하더라도 무엇을 각오해야 합니까? ‘얼마 동안은’ 기도응답이 없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4절 상) 아마도 여선지 안나의 경우처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으며,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 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6-38)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처럼 대놓고 외면당하고 무시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6,27)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무엇만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까? 포기입니다. 어째서입니까? 포기는 낙심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써, 낙심한 사람은 언제든지 나중에 재기할 수 있지만, 포기해버린 사람은 다시는 재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링 위에 있는 선수가 경기를 포기해버리면 무슨 수로 이를 만회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지쳐서 쓰러져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만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하)
셋째,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도로써 번거롭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 과부나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18:5)
비유 속 과부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재판장을 번거롭게 했습니다. “이 과부나 나를 번거롭게 하니...”(5절 상) 늘 와서 그를 괴롭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재판장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5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도 과부처럼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무엇으로써 말입니까? 우리의 기도입니다. 즉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을 늘 번거롭게 하고 또 귀찮게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번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번거롭거나 귀찮게 여기실까요? 아닙니다. 번거롭게 여기시기는커녕 반가워하시며 귀찮아하시기는커녕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바로서 우리가 밤낮 기도와 찬송으로써 하나님을 쉬지 못하시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62:7)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번거롭게 여기실 때까지 기도해보았으며, 하나님이 귀찮아하실 때까지 밤낮으로 부르짖어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우리의 기도와 찬송으로써 쉬지 못하시게 해보았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고 한두 번 기도하고 말았다면 제대로 다시 한 번 시작하기를 원하고, 몇 차례 스치듯이 기도했다면 이제라도 진중하게 다시 시작해보기를 원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번거롭게 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피아조’는 ‘눈을 멍들게 만들다’는 말로서 곧 ‘명예를 손상시킨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특이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재판장은 과부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귀찮아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염려하여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또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구하기만 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그런데 만일 우리가 끊임없이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의 명예를 실수시키는 일이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리의 간구에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어찌 해야 합니까?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되 기도로써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넷째, 믿음으로 기도할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5,6)
끝으로, 낙심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까? 믿음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6절 하)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에 오래 참으시지 않을 것인데,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7절 하) 이를 기다리려면 믿음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에서 누구를 보기 힘들다고 하셨습니까?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6절 하) 어째서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하는데,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하)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믿음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는 믿음 있는 사람입니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믿음으로’ 구하고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 결코 오래 참지 않으시지 않고, 오히려 속히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8절 중) 관건은 우리에게 그것을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 인 것입니다.
참고로, 믿음과 낙심은 어떤 상관관계에 놓여 있습니까? 믿음이 작아질 때 염려하게 되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 믿음이 작아질 때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게 되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마8:26) 믿음이 작아질 때 의심하게 되듯이,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믿음이 작아지면 낙심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합니까? 믿음이 작아질 때 낙심도 찾아온다는 점을 깨닫고, 우리의 작아진 믿음을 크게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17:5)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9:24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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