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장 16 - 20절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빌라도가 재판 과정에서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람이 이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선고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너희 유대라는 나라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나라이냐! 이런 비아냥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런 비아냥거리는 마음으로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뜰 안에 세워놓고 조롱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16절에 보면 “온 군대를 모으고”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이 군대라는 단어는 천부장의 군대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 뜰에 모여 있던 군인들의 숫자는 대략 300-600명 사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얼마나 심한 조롱을 당했는지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조롱은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조롱이기 때문에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매어지는 고통을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이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 입었던 옷의 색깔인데 그런 귀한 옷을 예수님에게 입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홍포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홍포는 로마의 군병들이 입었던 붉은 색 계통의 외투를 의미합니다. 그런 옷을 입혀 놓고서 예수님을 심하게 조롱했기 때문에 마가는 그 현장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자색옷으로 표현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가시관을 엮어 씌웠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는 면류관을 쓰고 공식적인 장소에 나타났었기 때문에 그것을 본 따서 면류관 대신 가시로 엮은 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씌웠던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는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고 우리의 허물을 속죄하시기 위해서 참으셨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심각한 죄의 상태를 확인해 보는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운 다음 경례를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런 말로 조롱을 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를 알현할 때 로마의 군인들은 경례를 하면서 “황제 만세”를 외쳤는데 예수님에게 장난을 치듯 비슷한 상황을 연출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고 비아냥거리면서 꿇어 절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조롱을 당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정말 영광 받으셔야 하는 분이고 세상의 그 어떤 왕보다 최고의 대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신데 그런 분이 이런 조롱을 당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치욕스러운 장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받아야 할 치욕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이 모습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이런 예수님의 모습과 우리의 삶을 분리해서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이 고통스러운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주실 구원의 은혜도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기도문으로 유명한 성자 프란시스코의 생애 가운데 가장 힘겨웠던 사건은 아버지와 함께 법정에 섰던 일이었습니다. 부유하고 성공적인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기독교의 허황돼 보이는 환상을 지닌 자기 아들과 뜻을 같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를 증거 하던 파란시스코가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자 그로 인한 아버지의 분노는 대단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이 자신의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어느 날 격분하여 아들의 멱살을 쥔 채 자기 집으로 끌고 가서 캄캄한 방에다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중인 틈을 타 갇힌 아들을 안쓰럽게 여기던 어머니가 풀어 주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마침내는 자기 아들을 주교 앞으로 데리고 갔고 이 일은 열띤 법적 소송으로까지 번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교의 판결을 받던 날 호기심에 찬 시민들이 그들의 소송을 보기 위해 장터에 운집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먼저 화가 치민 아버지가 부모의 고마움을 모르는 아들이라고 그를 비난하자 프란시스코는 갑자기 자기 옷을 벗어 아버지 앞에 던지고 평민이 입는 노동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들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를 내 아버지라 불렀으나, 이제 나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므로 그가 값을 치르고 사준 옷가지는 물론이고 그가 무척이나 관심을 갖는 그의 돈을 되돌려 드립니다. 이제부터 나는 더욱 떳떳하게 하늘에 계신 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흰 백묵으로 자기의 등에 십자가를 그려 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십자가가 그려진 옷을 입고 천천히 퇴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모와 결별을 해야 했던 프란시스코의 고통도 컸겠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해야 했던 조롱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데 이런 은혜를 제대로 못 누리고 산다면 이 또한 예수님을 두 번 실망시키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조롱과 멸시를 다 참으셨던 것은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셨던 은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은혜 때문에 참고 인내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께서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헤아리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난을 당하시고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셨을까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장면이 우리의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고난과 조롱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런 조롱 섞인 인사를 들으셨을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이 조금도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항상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당하게 될 조롱과 핍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와 비교도 안 되는 조롱과 핍박과 고통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조롱과 멸시도 참으면서 묵묵히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은혜를 누리면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