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날은
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 1979)
[작품해설]
이 시는 절대자와 인생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수녀(修女)인 시인의 인생관이 잘 드러나 있다. ‘살아 있는 날은’이라는 제목은 시인 자신이 유한자적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러한 표현은 항상 죽음을 인시갛고 살아가는 사람의 진실한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이 시는 시적 기교보다는 삼의 진실성을 추구하는 시인의 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곧 삶의 전부인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것과 같기에, 그는 열심히 시를 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시는 늘 화자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시 쓰기에 매진한다.
이 시는 5연 16행 형식으로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단락은 1.2연으로 올바른 글을 쓰기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모습을 ‘몇 번이고 지우며 / 다시 쓰’는 행위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수도에 정진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마른 향내’는 은은하게 풍기는 향내로, 수도자가 지녀야 할 경건한 삶의 태도를 함축하는 것이며, ‘연필’은 자신을 깎아 내며 진지하고 경건하게,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종교인의 삶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2단락은 3연으로, ‘연필처럼 / 정직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말하고 있다.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는 종교적 삶에서 오는 자기희생을 의미하며, ‘단정하고 꼿꼿한 연필’은 그 같은 연필의 생김새를 통해 연상할 수 있는 인간 내면의 품성이라 할 수 있다. 3단락은 4연으로, ‘당신’으로 표현된 절대자가 원하는 글을 쓰겠다는 순종적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을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이 쓰는 시가 자신의 뜻과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절대자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말이자 참 빛의 언어이다. 4단락은 5연으로, 향내가 사라지듯 소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당신을 위하여 / 소멸하겠’다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정결한’ 태도로 오직 절대자만을 노래하다가, 향내가 사라지듯 소멸하겠다는 다짐을 드러낸다.
이렇게 본다면, ‘연필’은 시상 전개에 따라 그 상징 의미가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연의 ‘끝없이 지우고 쓰면서 수도에 정진하는 자’로부터 출발한 ‘연필’은 3연에서는 ‘몸을 깎이는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자’와 ‘곧고 올바른 삶을 사는자’로, 4연에서는 ‘절대자에게 순종하는 자’로, 5연에서는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죽는 자’로 변주된다. 이것은 화자가 지향하고 소망하는 종교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인 셈이다. 이처럼 화자와 ‘연필’의 관계는 점층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바로 화자가 ‘몇번이고 지우며 / 다시 쓰는’것에서부터 ‘당신이 원하시는 글’로 완성시켜 나아가는 글쓰기 과정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1.2연에서는 단순히 사용자와 도구의 관계였던 화자와 ‘연필’의 관계가 3연에서는 ‘연필’에 인격이 부여되고 직유에 의해 화자와 좀더 밀착된 관계로 발전되었다가, 4여에서 이르러서는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이라는 온유로써 완전히 합일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이해인(李海仁)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1964년 부산 성메네딕도 수녀원 입회
1970년 『소년』에 동시 「하늘」, 「아침」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85년 제2회 여성동아 대상
1998년 제6회 부산 여성문학상 수상
시집 :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민들레 영토』(1981), 『시간의 얼굴』(198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93),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었네』(1999), 『ㄲ초마음 별마음』(1999),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2000), 『작은 위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