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이 오르는 계절이다. 곡우에 딴 찻잎으로 덖은 우전에는 계절이 순환하며 만드는 자연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쌉싸래하면서 단맛이 돌고, 허전한 것 같으면서 입 안에 그윽한 향기를 전하는 차 한 잔. 그래서 일까. 봄이 오면 푸른 불꽃을 튀기며 이랑을 따라 번지는 싱그러운 찻잎이 그립다.
차하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일생을 산사에 머물며 차의 향기에 취했던 스님, 초의(1786~1866년). 그가 있어 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한국의 차는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가 있어 봄날이면 남도의 차밭에서는 차를 덖는 구수한 향이 밤늦도록 이어진다.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는 전남 무안 출신이다. 어린 시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지나던 스님이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불가에 입문했다.
▲ 두륜산에서 일지암으로 가는 길
▲ 대흥사에 있는 초의선사 동상.
초의선사는 승려이면서도 유학, 도교 등 다방면의 지식을 섭렵했으며 문장과 그림에도 뛰어났다. 스승으로 모셨던 다산 정약용, 동갑내기로 도타운 우정을 나눈 추사 김정희, 남종화의 창시자 소치 허련 등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이들과 사귐에 있어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초의는 햇차를 만들 때마다 추사와 다산에게 보냈고, 추사와 다산은 고마움으로 시를 써 보냈다.
초의선사는 입적할 때까지 40년을 해남 두륜산 일지암에 머물며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다서인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다. 선사는 또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립하고 차 문화 중흥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선사는 대흥사가 배출한 13대종사의 한 분이기도 하다.
대흥사에서 일지암까지는 산길로 700m 거리. 어른걸음으로 15분이면 족하다. 그 길은 너무 벙벙하게 넓지도, 그렇다고 토끼길처럼 좁지도 않다. 복잡한 머릿속을 맑게 비울 수 있을 만큼 녹음이 우거졌다.
▲ 천불전 앞에 서서 대흥사의 유서깊은 역사를 더듬어 보는 등산객들.
▲ 해남 땅끝마을에 서 있는 전망대.
사실 이처럼 녹음 짙은 사색의 길은 두륜산을 찾아들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매표소를 지나 대흥사에 이르는 십 리 길은 푸른 비가 내리는 것처럼 녹음 짙은 길이다. 혹자가 대흥사를 찾은 기쁨의 절반은 이 숲을 거니는 데 있다고 할 정도다. 또 한 시인은 ‘옥구슬 굴리는 듯한 물소리를 곱게 달래며 아홉 구비 구교-매표소에서 대둔사까지 9개의 다리를 건넌다-를 다 밟아도 피안교(彼岸橋)에 이르면 걸어온 뒷길 다시 한 번 돌아볼 일 부디 잊지 말자’고 읊을 만큼 마음에 남는 길이다.
해남군에서 다선체험센터를 조성하고 있는 일지암은 암자라기보다 큰 사찰처럼 규모가 커졌다. 초가로 이엉을 얹은 정사각형의 암자와 여연 스님 홀로 기거하던 당우가 전부였던 예전과는 천양지차다. 물욕과 담을 쌓고 오직 차와 선만을 벗하던 초의선사의 무소유의 정신을 떠올리면 조금은 씁쓸한 풍경이다.
초가로 이엉을 올린 일지암 곁에 연못(초의다합)이 있다. 여름이면 연꽃이 피는 연못에는 피라미가 노닌다. 대통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3개의 돌확을 거치는 유천은 예나 지금이나 그 만큼의 물이 흘러나오고, 물맛 또한 여전하다. 또 찻잎을 다루던 맷돌, 초의선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다선삼매에 들던 돌평상, 대밭과 어울린 차밭이 있어 여기가 차의 성지였음을 말해준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식히노라면 일생을 차와 함께 선(禪)을 일구던 초의선사의 소탈한 모습이 떠오른다.
▲ 아침 이슬처럼 맑은 기운을 선사하는 찻잎과 차의 향기를 담아내는 다기.
두륜산을 찾은 기쁨은 초의선사와 일지암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찍이 두륜산은 서산대사가 점찍어둔 땅이기도 했다. 어느 해 해남을 찾은 서산대사는 두륜산의 빼어난 산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도해를 발아래 품은 산이면서도 돌아선 서쪽의 산자락은 깊고도 깊다. 마치 봉황이 날개를 모아 알을 감싸듯이 산자락이 포개어 대흥사를 감싼다. 이 형국을 보고 서산대사는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란 뜻의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 칭송했다.
두륜산의 정점에 대흥사가 자리한다. 유구하면서 깊은 역사성은 당우마다 걸린 편액이 말해준다.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는 대웅보전과 침계루, 추사 김정희는 무량수각, 정조는 표충사,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은 가허루 편액을 썼다. 그 편액을 하나씩 뜯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절을 찾은 노력이 헛되지 않는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mountainfire
여행길라잡이
해남 두륜산은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한다. 목포IC에서 나와 2번국도를 따라 가면 강진군 성전면이다. 이곳에서 13번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30분을 가면 해남읍이다. 해남읍에서 대흥사까지는 8km 더 간다. 주차장-대흥사-일지암은 3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본다.
해남은 두륜산 외에도 볼거리가 지천이다. 대흥사 가는 길에 있는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이자 국문학의 비조 고산 윤선도(1587~1671년)가 나고 자란 곳이다. 녹우당은 또 사실화의 거장 공재 윤두서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륜산에서 땅끝을 향해 달리면 불교남방전래설을 간직한 달마산 미황사가 있다. 땅끝은 이 땅의 끝에 선 감회가 남다른 곳으로 해돋이와 해넘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또 진도로 가는 길에는 우황리 공룡화석지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승리를 거뒀던 명량해협이 있다.
해남읍에 있는 진일관(061-535-5500)은 남도음식의 진수인 떡갈비와 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 집이다. 2인 4만원. 대흥사 가는 길에는 토종닭을 잡아 코스요리로 내놓는, 이른바 ‘통닭집’이 20여 집 있다. 호산정(061-534-8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