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의 문화재를 보호하려거든 주민들이 송파신도시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주민들이 소유한 땅과 국·공유지인 송파신도시를 맞바꾸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선문대 이형구(역사학) 교수는 2005년 8·31 부동산대책 발표 직후 이해찬 당시 총리에게 이처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답변은 ‘송파신도시는 강남 대체 신도시로 개발되는 것이고, 서울 풍납동 지역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문화재가 손상될 위험이 없으므로 주민이주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풍납동 일대는 초기 백제 유적이 발굴되면서 엄격한 개발 규제를 받고 있다. 15m 이상의 건축물은 세울 수 없고, 지하 2m 이상은 팔 수 없다. 아파트 재건축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리모델링마저 쉬운 일이 아니다.
지하주차장을 만들려고 해도 지하 2m 이상은 파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규제가 심하다 보니 집값은 주변 잠실동의 3분의 2 수준이다. 주민들은 동네 이미지라도 바꿔보겠다며 동명을 ‘잠실동’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풍납동부동산월드 이정희 대표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주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손해를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개발 vs 보존
개발업체나 건설업체 관계자들은 “현장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굴착기로 파던 땅을 붓으로 파야 한다”며 “우리에게 유물이나 문화재는 언제 튀어나와 발목을 잡을지 모르는 지뢰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사업자는 지표조사나 유물 발굴 비용, 사업 지연에 따른 손실까지 물어야 한다. 결국 비용은 주택 구입자 등에게 최종적으로 전가된다. 보존지역으로 지정돼 아예 개발이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있다.
진주평거3지구 택지개발사업은 문화재 발굴 건으로 아직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대한주택공사 경남·울산본부 관계자는 “2004년 4월부터 9월까지 시굴조사를 끝내고 2005년 2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1차 발굴조사를 실시했지만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발굴업체 의견에 따라 2009년까지 착공이 늦어질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1차 발굴에만 36억원이 들어갔고, 2차 발굴에는 잠정적으로 81억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M사 관계자는 “건설현장에서 문화재가 발굴되더라도 그냥 묻어버리라는 지시를 받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 발굴 조사로 인한 공사 지연 사례는 크게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구제발굴(개발사업 전 문화재 출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 건수는 1999년 246건에서 지난해 1207건으로 5배가량 증가했다. 전체 발굴 중 구제 발굴이 92.85%를 차지했다.

이 같은 발굴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공산이 크다. 정부가 행정중심복합도시와 10개의 혁신도시, 6개의 기업도시 및 경제자유구역, 지역특화발전 특구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업은 대부분 2005년부터 2015년 사이에 집중돼 있다.
정부 추진 사업의 지표조사 대상은 행정도시 7471만㎡(2260만 평), 혁신도시 6023만㎡(1822만 평), 기업도시 1억740만㎡(3247만 평) 등 모두 2억4234만㎡(7329만 평)다. 발굴 법인 36곳만으로는 일손이 모자라게 마련이다.
주공 관계자는 “공사는 늘어나는데 문화재 조사 인력과 전문기관은 그대로여서 개발 사업 차질이 우려되는 사업장이 급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개선안 논란
문화재청은 최근 ‘매장문화재 조사제도 개선안’을 공표했다. 개선안은 개발업체에 유리한 내용이 많아 그대로 확정되면 민간과 정부의 개발사업은 지금보다 수월해질 전망이다. 개선안은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면적을 현행 3만㎡에서 10만㎡로 확대했다.
또 환경영향평가 이후 사업계획을 수립할 때 시행하도록 했던 지표조사를 한 단계 앞당겨 환경영향평가 때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함께 문화재위원회 심의 대상은 발굴일수가 100일 이상일 경우에서 200일 이상인 경우로 줄였다.
개발업체의 발굴비용도 줄어들 전망이다. 현행 지표조사와 발굴에 소요되는 비용은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사업 시행자가 부담하고 있다. 이것을 조사 규모에 따라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문화재가 발견돼 개발이 불가능해진 땅에 대해서는 정부에 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매수청구권)를 인정해주거나, 주변 개발 가능한 땅에 대해 용적률을 올려주는 방안도 제시돼 있다. 현행법상 문화재 보존 지역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에는 말뚝 하나 박는 것도 어렵다. 개선안은 이에 대한 ‘보상’ 개념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그러나 기획예산처 관계자는 “우리나라만큼 매장문화재가 많이 출토되는 지역도 없다”며 “이미 지정된 문화재에 대해서도 매수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출토 유물이 발견된 지역에만 인정해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현재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을 사들이는 데 최소 5조원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된다”며 “문화재청 1년 예산이 4000억원 정도라 토지 매수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건설교통부는 개별적으로 용적률 완화를 해주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다만 지구단위계획 수립지침을 통해 유적지나 문화재로 지정된 지역을 공공 용도로 기여하면 다른 지역을 개발할 때 인센티브로 용적률을 완화하는 방안을 제도적으로 마련해놓고 있다.
개선안이 제시된 뒤 고고학계는 성명서를 내며 개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고고학회 최병현 회장은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숫제 밀어 없애버리겠다는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대규모 개발사업을 해온 토지공사나 주택공사도 시큰둥하다. 주공 관계자는 “정부가 추진 중인 개발계획은 지표조사 대상 면적이 커 혜택을 보기 어렵다”며 “다만 소규모 개발 사업에서도 개발 도중 유물이 출토되면 오히려 사업이 더 꼬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연대 황평우 간사는 “개선안은 개발업자의 논리에 정부가 놀아난 꼴”이라며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이 경제적 이익이 더 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안은 없나
문화재 조사 대상은 모두 개발지역으로 하더라도 발굴 조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인력 공급과 사업비를 예상할 수 있는 통계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원광대 안승모 교수는 “영국은 면적에 관계없이 모든 개발사업에 대해 시행 전 지표조사를 하고 있고 일본은 모든 땅 밑에 문화재가 있다고 본다”며 “급증하는 수요에 대처하지 못하고 발굴 비용 등에 대한 통계 작성과 자료 제공을 소홀히 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영국은 박물관과 같은 문화재 관련 기관에서 발굴법인을 따로 세워 운영하고 임금을 현실화하고 있다”며 “발굴기관을 확대하는 동시에 임금을 올려야 구제발굴의 수급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발양도권(TDR)과 같은 현실적 보상 체계의 도입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지역에서 개발을 못하는 대신 그 권리를 주변 지역에 팔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건국대 심교언(부동산학) 교수는 “소유권과 개발권을 분리한다는 개념이 국민정서상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자료원:중앙일보 2007.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