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오다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30년간 이어진 전국 시대가 마감된 후 도요토미 가문을 물리치고 전 일본의 패권자가 되어 에도 막부 시대를 연 인물이다.
평화의 시대라 불리는 에도 시대는 250년간 지속되며, 안정된 정권을 바탕으로 사회적·경제적·문화적으로 많은 것들이 번영한 시대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오다 노부나가와 드라마틱한 인생역전을 이루어 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비교적 인기 없는 인물이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예순이 넘은 나이에 정권을 장악했는데, 현대에서 '인내의 리더십'으로 칭송받는 그의 처세술은 에도 시대에는 음흉하고 교활하게 여겨져 '살쾡이 영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미카와국 오카자키 성주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미카와국은 동쪽으로 이마가와씨와 서쪽으로 오다씨 사이에 끼어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이에야스는 여섯 살에 이마가와씨의 인질로 가던 도중 오다씨에게 사로잡혀 오다 노부히데의 집에서 인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암살되고 이마가와씨와 오다씨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면서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가와씨에게 오다 노부히로가 납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야스는 노부히로와 맞교환할 인질로서 이마가와씨의 슨푸성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그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양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열아홉 살 때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오다 노부나가 사이에 벌어진 오케하자마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사망하면서 그는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마가와 가문에도, 노부나가 측에도 서지 않고 정세를 관망했다.
2년 후 이에야스는 기요스 성에서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라 이마가와 편에 섰던 가신들이 모조리 제거되고 처가도 멸문당했다. 아내와 장자 노부야스만이 인질 교환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얼마 후 노부나가의 장녀 도쿠히메를 맏며느리로 맞이하여 혼인 동맹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는 훗날 또 다른 시련이 되었다. 도쿠히메는 이마가와 일족이던 시어머니와 대립했고, 노부야스와의 금실도 좋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시어머니가 노부나가와 적대 관계에 있던 다케다 신겐 측과 내통한다고 밀고했고, 이에야스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아들과 부인에게 자진 명을 내렸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은 후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씨의 잔당을 미카와에서 추방하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를 격퇴하고 슨푸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는 노부나가 아래에서 스루가, 가이, 시나노, 미카와의 지배권을 손에 넣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에야스는 전국 시대 가신들이 주군을 수시로 바꾸던 것과 달리 20여 년이나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노부나가가 습격을 받아 죽은 것이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다이묘들은 크게 동요했다. 당시 이즈미에 있던 이에야스는 서둘러 미카와로 돌아가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오다 노부카쓰와 손을 잡고 히데요시와 대립했다. 그러나 얼마 후 노부카쓰가 그와 의논도 하지 않고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으면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누이동생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고,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로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이 관계는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15년간 이어진다.
히데요시에게 이에야스는 필요악이었다.
그가 전국을 통일하고, 각지의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가장 위협적이던 이에야스를 끌어들여야 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도 위험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중앙 정계에서 배척하고, 후호조씨가 멸망하자 그를 오다와라로 전봉시켰다. 간토로 이동한 이에야스는 본거지인 오다와라 성이 아니라 에도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곳은 훗날 에도 막부가 개창되면서 일본의 중앙 정치 무대로 탈바꿈했는데, 바로 오늘날의 도쿄이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간토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나가시노 전투※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유력 다이묘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에야스를 비롯해 소 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 등 모든 가신이 만류했으나 히데요시는 전쟁을 강행했다. 이에야스는 풍토병과 황무지 개간, 영지의 치안 문제 등 온갖 변명을 들어 발을 뺐다. 그럼으로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다른 유력 다이묘들이 군사를 잃고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는 동안 군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영지를 더욱 안정시켰다. 이에야스는 간토 전역을 손에 넣고 에도를 도시로 탈바꿈시키면서 재정적·군사적 기반을 다졌다.
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거점을 정하고 막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에도는 향후 250년간 평화를 구가하며 사회적· 경제적·문화적으로 큰 번영을 이루었다)
정유재란의 와중이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사망했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앞두고 유력 가신들을 5대로(五大老)와 5봉행(五奉行)에 임명해 자신의 사후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하게 했다. 히데요시 정권은 수년 전부터 무력파와 문치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정책 결정시 이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한 것이다. 5대로로는 이에야스를 비롯해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무장들이 선출되었고, 집행 기관인 5봉행으로는 문관파인 이시다 미쓰나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 마에다 겐이(野間玄以), 나쓰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마시다 나가모리(増田長盛)가 선출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의 복종적인 태도를 완전히 벗어 버렸다. 그는 히데요리를 옹립하기는 했으나 다른 다이묘들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활발히 교류하면서 세력 확대에 몰두했다. 곧바로 다른 대로들이 이에야스의 독자적인 행동을 비난하고 나섰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무력파 다이묘들을 회유하여 무력파와 문치파 사이에 다툼을 유도해 반대파들이 통일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그 틈을 타 단번에 패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5대로의 한 사람으로 반 이에야스파였던 우에스기 가케카쓰가 무단으로 자신의 영지인 아이즈로 돌아가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그는 먼저 가케카쓰에게 진상을 해명하고, 상경할 것을 촉구했다. 가케카쓰는 답변을 거부했고, 이에야스는 그를 히데요시 정권에 대한 모반자로 간주하고 아이즈 정벌에 나섰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이시다 미쓰나리가 반 이에야스파를 모아 거병했다. 거병 자체는 이에야스의 계획대로였지만, 8만 대군이라는 숫자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미쓰나리 군은 이에야스가 없는 틈을 타 그의 근거지인 후시미 성을 함락시키고 미노를 점령했다. 이에야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중심으로 다이묘들을 규합해 나갔다. 그는 50일간 에도에 틀어박혀 자신 아래로 모여든 다이묘들의 결합을 돈독히 하고, 적군의 배반을 유도하기 위해 82명의 다이묘들에게 180통 이상의 서찰을 보냈다.
마침내 두 군대는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했다. 그러나 그동안 이에야스의 이간책으로 결속력이 약해진 미쓰나리 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못했고, 결국 이에야스에게 설득된 군 내부의 다이묘들이 이에야스를 지원하면서 하루 만에 궤멸되었다. 이 싸움으로 이에야스는 사실상 천하를 손에 넣게 되었다.
1603년 이에야스는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쇼군)에 임명되면서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개창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포함해 도요토미 가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쌓은 지위가 훗날 히데요리에게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에 천하가 도쿠가와에게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셋째 아들 히데타다에게 서둘러 쇼군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슨푸로 들어가 '오고쇼(大御所, 은거하여 천하를 은밀히 다스리는 사람)'라고 칭하면서 정치를 해 나갔다.
이에야스는 이후 죽을 때까지 9년간 새로운 통치 기구와 제도 들을 만들며 중앙 집권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기존 가신들을 모두 은퇴시키고 새로운 인물들로 막부를 채웠다. 신참 다이묘, 행정 전문가, 승려, 유학자, 경제 전문가, 거상 등을 등용하여 상업, 경제, 행정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물론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을 외교와 무역 고문으로 삼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과 교섭을 시도했다. 임진왜란 이래 단절된 조선과의 국교도 회복하고, 동래에 왜관을 설치해 무역을 정상화시켰다.
이에야스는 정적을 교묘하고 교활하게 제거해 나간 끝에 1615년 마침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씨를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도쿠가와 막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듬해 그는 태정대신에 임명되었고, 4월에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이에야스가 죽은 날 밤, 가신들은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를 비밀리에 장사지내고, 이에야스를 신격화하기 위해 불교의 산왕일실신도(山王一実神道)에 따라 '곤겐(権現) '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1년 후 유해는 닛코로 옮겨졌으며, 천황은 그에게 '도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닛코의 도쇼궁(東照宮) 에는 그의 유훈이라고 알려진 글이 남아 있다. 인내와 끈기로 최후의 승자가 된 이에야스의 일생을 대변하기에 이만큼 적절한 것이 없을 듯하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 없다. 부자유를 친구로 삼으면 부족할 것이 없다.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걱정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다.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그 피해는 너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스스로를 탓하고 남을 탓하지 말라. 모자람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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