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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묵상글(강론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28,20)
1차(260516. 21:35), 2차(05:10), 3차(16:05)
17일 묵상글, 16일 21시 3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을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 곳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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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7일 일요일
[주님 승천 대축일]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28,20)
제1독서<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사도1,1-11)
1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제2독서<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1,17-23)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복음<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28,16-20)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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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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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8,16–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교회의 사명 전체를 짧고도 깊게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단지
자기들끼리 부활의 기쁨을 간직하는 사람들로 남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보내집니다.
기쁨은 사적인 위로로 닫히지 않고
복음은 파견의 형태를 띱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결국 주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 예로니모는
말씀을 사랑한 교부답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복음은 단지 머리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지켜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 전체가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바뀌도록 돕는 일입니다.
신앙은 교실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또 이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권위와 겸손한 동행을 함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내가 받았다”고 선언하시지만
그 권한은 지배의 권위가 아니라
구원의 파견을 위한 권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눌러 다스리기보다
그들을 보내시고
끝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참된 권위는
다른 이를 살리고 세우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문화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복음이 문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모든 민족들”은
곧 다양한 언어와 전통,
기억과 표현,
삶의 방식들을 뜻합니다.
복음은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정화하고 살리며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문화 주간의 영성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어떻게 인간의 말과 예술, 관계와 일상 안에서
살아 있는 형태를 취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파견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큰 위로입니다.
주님은 보내시기만 하고 떠나는 분이 아니라
보내신 그 길 위에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증언은
혼자 애써 버티는 일이 아니라
함께 계신 주님 안에서 사는 일입니다.
문화도, 선교도, 일상의 증언도
결국 이 동행 안에서 가능해집니다.
오늘은 성체의 날입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는
파견하시는 주님을 모십니다.
주님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세상 안으로 흘러가게 하는 일입니다.
성체는 머무름과 파견을 함께 지닙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에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고,
세상으로 나아가기에
더 깊이 주님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복음을 지식처럼만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삶의 길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주일의 은총을
월요일까지 이어 가는 사람인가?
나는 문화와 일상을
복음이 살아 숨 쉬는 자리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함께하겠다.
주님,
제가 복음을 말로만 알지 않게 하시고
삶으로 지키게 하소서.
성체 안에서 받은 당신 생명을
세상 속 문화와 관계와 일상 안에 흘려보내게 하시고
당신이 함께하신다는 약속 안에서
담대히 파견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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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살면서 억울한 일을 겪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믿어주지 않는 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게 묻게 됩니다. “정말 하느님은 계시는가? 정의는 있는가?” 저 역시 사목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어떤 분은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오해받아 힘들어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과거의 일 때문에 지금도 평가받는 것 같아 마음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신부님, 저는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합니다. 억울함은 사람을 작게 만듭니다. 말하기를 두렵게 하고, 관계를 피하게 하고, 결국은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승천을 이해하려면 먼저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고발당하셨습니다. 거짓 증언이 있었고, 왜곡된 판단이 있었고, 군중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불완전한 정의입니다. 때로는 진실이 지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부활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판단이 마지막이 아니다. 내가 판단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십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냐?”
이 말은 꾸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이제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라.”라는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의 일상입니다. 물고기를 잡던 자리, 실패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처음 부르셨던 자리입니다. 승천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가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억울함을 만나면 자꾸 하늘만 바라보게 됩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언제 해결해 주십니까?”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다시 갈릴래아로 가라.” 억울함이 사라진 다음에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해결된 다음에 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 자리에서, 그 상태로, 다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던 한 교우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오해 때문에 공동체를 떠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더 이상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시 성당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그분은 자신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갈릴래아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사제로서 저도 배웁니다. 억울함을 없애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자리로 다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필귀정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기보다 살아야 합니다. 증명하기보다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길은 분명합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그리고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시 갈릴래아입니다. 다시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억울함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다시 걸어갈 것인가. “주님, 억울함 속에서도 멈추지 않게 하소서. 하늘만 바라보지 않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소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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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누구나 한 번쯤 새들처럼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답답한 일상, 풀리지 않는 걱정거리, 관계의 무게, 미래에 대한 불안,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짓누를 때,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어집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오르시어 아버지께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늘을 바라보시며 사셨습니다. 명성과 권력을 쥐실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쫓으시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품으셨습니다.
미움과 원망이 쌓일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바람 결에 훌훌 털어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주셨을 때조차 절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활주로 삼아 두 팔을 하늘로 벌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우러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욕심과 걱정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품게 하시고 위로 올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아버지께 올라가시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주님 승천 대축일에서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구 일 동안을 성령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여기고 구 일 기도를 바칩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 마음을 비우고, 성령의 바람을 맞을 준비를 합시다. 하느님을 향하여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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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곧 아벨의 의로운 피로도,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으로도, 모세의 열성으로도, 예언자들의 충성으로도, 결코 그 누구도 열수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닫힌 ‘하늘의 문’을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날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 빛 와 닿으면 //
스러지는 이슬과 더불어 /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과 함께 단 둘이서 / 기슭 에서 놀다가 / 구름 손짓 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사실,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구약성경>에도 몇 군데 소개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의 6대 후손인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는데(5,24), 이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5). 또 <열왕기 하권>에는 예언자 엘리야를 하느님께서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올라갔다(2,11)고 전합니다. 그리고 <토비트서>에서는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20).
그렇다면, ‘주님의 승천’, 곧 사도신경에서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사도 1,11).
이는 예수님의 ‘떠나가심’(승천)이 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여전이 함께 하심’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그분의 삶은 단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현양되신 주님께서는 이제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편에 앉히심을 알려줍니다. 곧 ‘떠나가심’(승천)은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함께 하심’임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하늘”이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 “승천”도 물리적인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어느 한 장소에 있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어느 공간에서나 같이 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심’을 의미합니다. 곧 “승천”을 통해서 육신의 모습은 사라지셨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신 것’을 말합니다.
교리적으로는 인성을 띠고 오신 예수님께서 ‘본래의 당신의 신성의 모습으로 돌아가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도 당신의 그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시킴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우리의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의해 살아가지 않고 ‘하늘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을, 곧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의 생명, 하느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근원에 뿌리를 박고 살아갑니다. 그곳으로부터 양분을, 생명의 양식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늘에 뿌리를 박는 일’,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고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계십니다.”(콜로 3,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다.”(마태 28,18)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을 당신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곧 제자들을 ‘스승’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로 삼아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 곧 교회의 시대가 예고됩니다. 제자들은 교회를 건설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홍보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20).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는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어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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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구경꾼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춤은 이제까지 흔히 보던 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놀라움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어이없어하며 이 남자의 춤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남자가 나와서 이 사람의 춤을 따라 추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며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이제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처음의 춤꾼 한 명을 지도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첫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당시 모습은 미친 짓이라고 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죄인과 먹고 마셨으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안식일 법도 어기곤 했습니다.
만약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따름’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기만을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따름’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금이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 곁을 떠나 저 멀리 우주 공간으로 사라지신 주님의 부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성령을 통해 세상 어디서나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더욱 깊고 충만하게 머무르십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현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현존이 우리의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나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깁니다. 이는 완벽하게 준비된 성인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모이고 모여 주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너무나 부족한 우리인데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엄청난 사명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나 사명만 던져주고 떠나시는 방관자 같은 주님이 아니십니다. 실패와 박해,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파견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이렇게 주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우리입니다. 이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고, 또 부족한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도 들겠지만, 어떻게든 따르려는 우리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나다워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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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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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7 05:07
- 앞서가심과 뒤따름과 희망
늘 그렇듯 이번에도 예수 승천 대축일이 내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릴 떠나 하늘로 오르신 것이 내게 무슨 의미냐는 말입니다.
사실 우릴 떠나시고 마는 것이라면 그것도 당신이 좋아서 떠나시고
우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떠나시고 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분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성탄과 부활을 우리가 기뻐하고 대축일로 경축함이
그분께서 우릴 위해 오시고 부활하셨기에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처럼
주님 승천도 우릴 위한 것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이지요.
그 의미를 오늘 본기도도 그렇지만 감사송은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해줍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릴 떠나시고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희망을 두고 뒤따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은
‘앞서가심’과 ‘뒤따름’ 두 단어이고 그리고 그사이에
희망이 있어야 하니 세 단어를 우린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먼저 앞서가심이라고 우리는 알아야 하고 그렇게 의미를 둬야 합니다.
앞서가시지 않고 두고 가시거나 버려두고 가시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앞서가셔야지만 구원이고 사랑인데 문제는 그것을 알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주님 승천이 사랑이 되고 의미가 발생하는데
그런 줄 모르면 홀로 가심이 될 것이고 우리의 뒤따름이 없겠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가 뒤따르지 않는 것은 모르기 때문도 있지만
하늘에 희망을 두지 않기 때문이고 하늘에 희망을 두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욕망을 두거나 이 세상이 너무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고 제 얘기입니다.
저는 주님 승천이 앞서가심이라고 알고 있고 우리가 뒤따라야 함도 알곤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그리 욕망을 두지 않지만 요즘 세상살이가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그제는 하루 내내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수확하고 다듬는데 그것을 김치 담가
여기저기 나눠줄 것을 생각하니 힘들지 않고 즐겁고 행복했으며
그것들이 너무 쇄서 다 버리게 되었는데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어느 본당에서 피정을 왔는데 즐겁게 강의하였더니
그분들이 재미있게 들어서 보람이 있었고 그래서 제가 행복했습니다.
이러니 제가 하늘에 오르고 싶고 거기에 희망을 두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사도행전의 천사가 제게 너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하늘 좀 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행복 곧 사랑의 행복을 앞당겨 사는 것도 좋지만
저의 경우는 앞당겨 사는 것보다 뒤따라가서 제대로 살 것에 희망을 둬야 하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이 뒤따라가는 것을 갈망하고 재촉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올해 저는 죄송하지만 이런 지향만 두고
주님께서 그 은총을 차차 주실 것이라고 믿고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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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 05:30 추가.
마태오 복음 1장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마태오 복음 저자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가리켜 줍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복음 맨 마지막에서 임마누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요!
하느님의 이 약속은 마태오 복음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의 우리와 함께하심은 물리적인 세상에서의 함께함과 다른 종류의 함께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떻게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우리는 꼭 새기고 또 새겨야 합니다.
어제 CAC 매일 묵상에 인용된 노리치 율리안나 [신적 계시]에 나오는 말씀을 다시 한번 함께 묵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은 바다 깊은 곳으로 잠겨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작은 조약돌로 덮인 듯한 초록빛 언덕과 계곡을 보았고, 해초와 이끼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라도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해도 여전히 하느님을 뵐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실 뿐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해로움에서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뵐 때, 이 세상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그분을 뵙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 뵈어지기를 원하시며, 찾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갈망하고 그분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우리와 함께하심을 우리가 마음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의 사랑의 언어와 더불어 그 함께하심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요한 17,11)라고요. 그러나 몇 구절 뒤에는 "저는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세상 안에 계시면서도 이미 멀리 떠나 계신 듯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이의 시간"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따뜻하면서도 신비로 가득 차 있어 혼동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상호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제자들이 이 하느님의 신적 신비 안에 들어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신비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사랑의 언어뿐입니다.
"아버지는 제 안에 계시고", "저는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제가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등이 그렇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분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확신했지만, 이 말씀은 그들의 잘못된 확실성을 거두어 버립니다. 잘못된 확실성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확실성은 진리를 대신하는 허상이요 우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숲을 힘겹게 지나가다가 첫 번째 빈터를 만나면 그것이 목적지라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이성과 정신에는 어두운 것 같지만, 마음에서는 빛이 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잘못된 확실성은 무언가를 단단히 붙잡으려 하지만, 더 깊이, 그리고 더 멀리 추구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대개 통제하려는 우리 에고의 표현입니다. "나는 정확히 내 위치를 알아야 해. 그래야 내 마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확실성이나 성급한 확실성은 진리의 큰 원수입니다. 그것은 진리처럼 보이지만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의 신비는 언뜻 보기에 혼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확실성은 평생 작은 울타리 안을 맴돌게 만듭니다. 우리의 정신, 특히 에고와 결탁해 있는 정신은 울타리를 세우고 끊임없이 고치려 하지만, 마음, 특히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마음은 그 울타리를 넘어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니 이 주님의 승천 사건이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는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한히 새로워지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 속으로 들어설 채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분께서 이끄시는 이 사랑의 신비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승천은 부활의 완성이며 주님의 우리와 함께하심을 영원히 지속되게 해 주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10-11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사도행전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의 승천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가시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분께서 우리 곁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가까움으로 함께 계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주려는 것입니다.
마치 그분의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이 순간을 오해하지 마라. 지금 너희에게 주어지는 은총, 그중에서도 너희 한 사람 한 사람과 완전히 일치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놓치지 말거라."
승천 대축일은 주님의 부재가 아니라,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승천은 그분의 떠나심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보장되고 약속된 하느님 현존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신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그리스도께는 이제 여러분의 몸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는 이 땅에서 여러분의 손과 발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눈으로 이 세상을 자비로이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발로 선을 행하시며 걸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손으로 온 세상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 존재 바깥에서 주님을 만나려 하지 맙시다. 그분은 이미 우리 각자의 존재 안에 일치되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어둠을 이기는 빛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온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미 그분과 더불어 어둠을 이겼습니다. 어둠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걱정하기를 바랍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내'게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것도 '내'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빛을 우리가 확신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빛을 통해 어떤 어둠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에 빠져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기보다는 시시각각 우리 안의 빛을 의식하고 확신하는 수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과 더불어 말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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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하느님 사랑의 바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율리안나는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보호받고 있음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노리치의 율리안나: 보편적 신비주의자
하느님 사랑의 바다!
2026년 5월 16일 토요일
『신비주의자들에게 주의를 돌리기』(Turning to the Mystics) 여섯 번째 여정에서 제임스 핀리는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전한 하느님의 가르침을 묵상합니다. 지금 인용되는 대목은 미라바이 스타에 의해 번역된 율리안나의 『신적 계시』 제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은 바다 깊은 곳으로 잠겨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작은 조약돌로 덮인 듯한 초록빛 언덕과 계곡을 보았고, 해초와 이끼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라도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해도 여전히 하느님을 뵐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실 뿐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해로움에서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뵐 때, 이 세상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그분을 뵙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 뵈어지기를 원하시며, 찾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갈망하고 그분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1]
핀리는 다음과 같이 성찰합니다:
우리는 바람이 물결 위를 스쳐 지나가며 파도가 오르내리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일상은 마치 물 위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아, 의식의 조건적 상태와 날마다 변하는 삶의 형편 속에서 흔들립니다. 그러나 내적이고 관상적인 삶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물결의 표면 아래로 잠수하여 더 깊고 고요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봉사와 일상은 여전히 계속되지만, 일어나는 일은 그대로 일어나게 두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깊은 뿌리 안에 우리를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를 지탱하시며, 모든 일 속에서 우리와 하나 되어 계십니다.
율리안나는 말합니다. 우리가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 해도(이는 낙원의 상징입니다), 이미 무한히 안전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이미 "사랑받는 이"이며, 사랑받는 이로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때문에 어떤 위협이나 손상도 넘어선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신비적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2]
References
[1] Julian of Norwich, The Showings: Uncovering the Face of the Feminine in Revelations of Divine Love, trans. Mirabai Starr (Hampton Roads, 2022), 26. Selection from chap. 10.
[2] Adapted from James Finley and Kirsten Oates, cohosts, Turning to the Mystics, podcast, season 6, ep. 1 “Julian of Norwich: Session One,” September 5, 2022.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yuhei Inoue, untitled (detail), 2020,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고요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담아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힘으로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은 평화로운 때든 위기의 순간이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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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서 참으로 마음 든든한 격려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언제나 지극히 제한적이고, 매사가 찰나같은 인간만사이기에, 늘 아쉽고 허전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남기신 유언(遺言)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것인지 모릅니다.
지상 생활을 마치고 떠나시는 분들이 자녀들이나 남은 사람들에게 남기는 유언들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아쉽고 덧없기만 합니다.
“그간 고마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디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십시오. 제가 못다 이룬 꿈을 여러분이 계속해주십시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남기신 유언은 전혀 차원이 다른 말씀입니다. 참으로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
보십시오! 3년이나 5년 정도, 10년이나 20년간이 아닙니다. ‘세상 끝 날까지!’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주시겠다는 주님 말씀에 큰 감사의 정이 솟구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힘겨워 눈물 흘릴 때 옆에서 함께 눈물 흘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도 우리와 삶을 공유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매일의 구체적인 우리의 일상사 안에서 주님께서 함께 동고동락하시겠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계속될 예수님의 격려와 위로의 말씀 역시 감동적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요리조리 피해갈까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지상 순례 여정을 걷는 동안 고난은 기본임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임을 주님께서 강조하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주님 나라, 영원한 생명의 왕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다양한 고초와 실패, 좌절과 슬픔 앞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운명이요 엄연한 현실입니다.
때 이른 사별(死別)이 우리를 가슴 찢게 만듭니다. 난데없이 날아온 돌맹이 하나가 평화로웠던 우리 삶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고 갑니다. 믿었던 사랑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울부짖습니다. 어쩔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발버둥 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진리 한 가지! 주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의 가시밭길을 걷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거칠고 황량한 인생 여정을 걸어가는 내내, 주님께서는 때로 우리 앞에서, 때로 우리와 나란히,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보니,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이 땅에 탄생하신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노년기를 살아가시는 분들, 남은 날들이 외적으로 볼 때는 조금은 우울하고 슬플 것입니다. 여기저기 탈이 나고, 점점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한명 한명 떠나가고, 우리네 삶은 회색빛일 것입니다.
그럴수록 꼭 기억해야 할 대상이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꽃다운 이팔청춘 내 인생에도 함께하셨지만, 쪼그라든 노년기의 삶에도 굳건히 함께하십니다. 힘겨운 병고의 순간, 우리 인생을 총정리하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임마누엘 주님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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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길 여정 “주님 승천의 축복”
“환호소리 나는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나팔 소리 나는 중에 주님 올라가시도다”(시편47,6)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 시편이 그대로 우리의 기쁨을 대변합니다. 주님 승천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승리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은 예전 하늘이 아닙니다. 주님 승천으로 하늘길은, 하늘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명실공히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하늘길이 하늘문이 되었습니다. 하늘 향한 우리 인간의 근원적 갈망이 해소되었습니다. 하늘 향한 갈망을 노래한, “나뭇잎은 날개였구나!”란 옛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뭇잎들
헤아릴 수 없이 하늘 가득 채운 무수한 날개들
하늘 향한 그리움에 무수히 돋아나는 나뭇잎 날개들
비록 땅에 뿌리내려 하늘 날지 못해도
하늘 날고 싶은 간절한 열망
하늘 담아 하늘 닮아 더욱 짙어져가는 푸른 잎 나뭇잎 날개들
하늘 바람에 날개 치는 나무의 그리움, 나무의 아우성
아, 나뭇잎은 날개였구나!
그리움의 날개 이제야 오는 깨달음
당신은 하늘 나는 나무
하늘과 나무의 숙명 둘이자 하나
끊임없이 솟아나는 외로움, 그리움
하늘 안에 살면서도 늘 하늘이 그리운 나무들
당신 안에 살면서도 늘 당신이 그리운 나”<1999.8.8.>
무려 27년이 지난 지금도 나무의 열망은 여전합니다. 이런 누구나의 하늘 향한 갈망을 일거에 해결해 준 주님 승천 대축일이요, 주님 승천의 은총으로 샘솟는 희망과 기쁨 중에 하늘길 여정에 오르게 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그대로 하늘길 여정이 되었습니다. 바오로가 승천하신 주님이 우리의 궁극의 승리이자 희망이요 기쁨임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주님 승천의 축복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그대로 주님 승천의 축복 그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의 기도는 그대로 실현되어 우리 모두 참으로 영적풍요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영광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그분 예수님을 깊이 알게 하시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우리가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십니다. 또 우리가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하시고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하십니다.
주님 승천의 축복이 차고 넘칩니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주님 승천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는 갈릴래아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는 그대로 우리를 향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선언이 놀랍고 반갑고 고무적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선포의 사명 부여와 더불어 늘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펼쳐지는 복음 선포의 꽃자리 하늘나라 천국이요,. 아주 오래전 민들레꽃 자작시가 반가이 떠오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 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이제부터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하늘은 땅이 되었고,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게 된 우리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수도원 하늘길 걸을 때 마다 즐겨 외우는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늘님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늘길
하늘 향해 쭉쭉 뻗은
‘하늘의 사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사열 받으며
하늘보고 하늘기운 숨쉬며
하늘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되어
하늘길 하늘님 예수님 따라
가슴 펴고 힘차게
나는 듯 걷는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내 이름은 이 기쁨, 이 행복”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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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시간이 말해 주는 진실
시간이 말해 주는 진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억울한 일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억울함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기대합니다.
“누군가가 솔로몬의 지혜로 진실을 바로 밝혀 주기를…”
하지만 현실의 법정과 세상은 안타깝게도 단순히 ‘억울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오해를 받고, 억울한 사람이 오히려 더 불리해 보이기도 합니다. 마치 먼저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결백까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듯한 현실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묻게 됩니다.
“과연 이 억울함을 누가 알아줄까?”
그러나 신앙 안에서 우리가 끝내 붙들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판단은 순간에 머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시선은 시간 넘어까지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시편 1,6
세상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말과 논리로 스스로를 포장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이 더 크게 들리고, 진실은 오히려 조용히 묻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삶의 열매가 드러나고, 말보다 살아온 흔적이 결국 진실을 증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급하게 모든 것을 당장 인정받으려 하기보다, 끝까지 바르게 살아가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판단은 늦을 수 있어도, 진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때로 늦게 드러나지만, 끝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가장 깊이 알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The Truth That Time Reveals
As we go through life, there are times when we experience deep unfairness.
And in those moments, people often hope for this:
“That someone, with the wisdom of Solomon, will reveal the truth clearly.”
Yet the reality of courts and the world does not move simply because something seems unfair.
More often, the issue is not only what is true, but how that truth can be proven.
As a result, those who struggle to explain themselves may be misunderstood, and the wounded person may appear to be at a disadvantage. At times, it even feels as though the one who was hurt must personally prove their innocence.
In such moments, we ask:
“Who will truly understand this injustice?”
But within faith, what we must ultimately hold onto is the belief that God already knows.
Human judgment may remain bound to the moment, but God sees beyond time itself.
“The Lord watches over the way of the righteous,
but the way of the wicked leads to ruin.”
— Psalm 1:6
In this world, anyone can dress themselves in convincing words and logic.
Sometimes falsehood speaks louder, while truth quietly fades into the background.
Yet as time passes, the fruits of one’s life are revealed, and a person’s lived path eventually speaks louder than words.
Therefore, rather than desperately seeking immediate recognition, we must not lose the courage to continue living rightly.
Human judgment may be delayed, but truth itself does not disappear.
Truth may reveal itself slowly, but it is never truly lost.
And the One who knows that truth most deeply is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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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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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내어 줌의 승리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
구름이 이미 주님을 가렸는데도 사도들의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들도 주님과 함께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맡기신 사명을 다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희망을 품고 그 희망 안에서 살아가며, 그 희망을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전능한 능력”, 곧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시고 하늘 높은 곳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어, 만물을 그리스도 아래 굴복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예수님의 승천은 영광스러운 승리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시고, 모든 인류를 그 나라 안으로 초대하시어 영원한 생명과 기쁨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행복에 참여하도록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제자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곧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버리심으로써 승리하신 예수님
세상의 이치는 차지하고 높아지기 위해 승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고 낮추심으로써 참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으신 분이시면서도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세상은 명예와 재물을 추구하지만,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낮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셨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버리지만, 주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자신을 내어 맡기셨기에,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들어 올리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배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사랑의 나라입니다. 섬김을 받기 위한 나라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생명과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하는 나라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욕망과 경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다른 사람 위에 서려 합니다. 그래서 갈등과 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주님의 명령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도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우고,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길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나누며 형제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늘 세상에 가장 필요한 희망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승천하신 주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눈앞의 현실과 걱정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2.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고 낮추심으로써 승리하셨듯이, 내가 내려놓아야 할 욕심·교만·집착은 무엇입니까?
3. 경쟁과 갈등이 가득한 오늘의 세상 안에서, 누군가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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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예수님의 승천과 관련해서,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에게도 나타나셨다.” 라고 단순하게 기록했는데(1코린 15,8), 사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일은 ‘승천 후’의 일이고, 그가 만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3-5)”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하나니아스’ 라는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사도 9,10-11ㄱ).”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자신의 체험을 ‘환시’ 라고
표현했는데(사도 26,19),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는 모릅니다.
<눈부신 빛과 음성만으로 나타나셨는지, 아니면
사도들이 기억하는 그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하나니아스 경우에도 ‘환시 중에’ 체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하나니아스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바오로 사도와
하나니아스에게 나타나신 일을 보면, 구약시대 때에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일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주님”으로서 늘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떠나신’ 일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으로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그들을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데리고 가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지 않아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원하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도 못 들어갑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은, 들어가기를 희망하면서도 노력을 하지 않아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무임승차’가 없습니다(루카 17,34-35).
스스로 원해야 하고,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3)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히브 7,24-26).”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 4,14-16ㄱ).”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은, 우리도 승천할 수 있음을 믿고,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얻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인생은 그냥 먼지처럼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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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8,16-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닫힌 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아벨의 정성스러운 제물로도,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으로도, 하느님 뜻을 따르려는 모세의 열성으로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는 예언자들의 순명으로도 열 수 없었던, ‘천국의 문’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활짝 열어주신 날입니다. 성경에서는 승천하신 주님이 ‘구름에 감싸여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심상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랐을 때엔 구름이 산 전체를 덮어 그를 볼 수 없게 만듭니다(탈출 24,15).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이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에도 갑자기 구름이 일어 일행 전체를 감쌉니다. 그리고 이 때 공통적으로 하느님의 뜻이 전해집니다. 모세가 구름에 덮였을 때엔 하느님의 뜻인 십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구름에 덮였을 때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체험은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심오한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보다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이 주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그들을 교육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교육이 끝나자 제자들 곁을 떠나 하늘로 오르시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주님께서 아주 멀리까지 가시어 시야에서 벗어나신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권능을 상징하는 구름에 감싸여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신 것입니다. 그런 변화는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순간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오르신 ‘하늘’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니 우리가 발을 딛고 서서 바라보는 모든 곳이 하늘이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그런 하늘로 오르셨다는 건 자연스레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존재로 변화되셨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던 주님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그분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되어 아쉽고 막막한 마음에 멍하니 하늘만 바라봅니다. 주님도 안 계시는데 앞으로 힘든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그분께서 맡기신 중요한 소명을 자기들만의 힘으로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두렵고 걱정되었겠지요. 그러자 두 천사가 나타나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며 그들을 나무랍니다. 그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중요한 소명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라고, 다시 말해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광을 막연히 ‘동경’만 하라고 그들을 뽑으신 게 아니지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분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뒤 타볼산 정상에 초막을 지어 머무르려 했던 베드로처럼, 하늘에만 시선을 뺏겨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살아가신 땅, 즉 ‘세상’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을 부러움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는 종말의 날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어주셨음을 널리 전하며,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삶과 행동으로 분명하게 선포하는 ‘깨어 있는 종들’만이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점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그들에게 복음 선포라는 소명을 맡기십니다. 당신 능력이 부족해서 제자들에게 도움을 청하신 게 아니라, 그들이 말로 선포한 복음을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도록 이끌고자 하신 겁니다. 즉 복음을 통해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신 것이지요. 그 초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미사 중에만, 입으로만 ‘신앙의 신비’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속에서 삶으로 살아내지 않는 신앙은 나를 하느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신비’를 이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삶 속에서 선포해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짙게 배어져 나온다면, 나의 손과 발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작고 약한 이들 한 명 한 명에게까지 전해진다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로,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이끌릴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참된 영광과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자격을 갖추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절망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끝까지 붙들려는 나의 의지와 노력 안에 그분께서 함께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는 우리의 자비로운 마음 안에 그분께서 함께 계십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받은 아픔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용기와 결단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원수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부족할지라도 어떻게든 행동으로 옮겨보는 우리의 실천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이렇듯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언제 어디서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승천’을 사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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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주님 승천 대축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땅끝까지 흐르는 사랑의 증언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사명을 부여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다시 세상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게 만드는 하느님의 숨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스승을 잃은 상실감, 실패감,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문을 닫고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리시는 순간, 닫혀 있던 문보다 더 굳게 잠겨 있던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단순한 위로의 감정이 아닙니다. 무너진 존재 안에 다시 생명의 방향을 세우시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 힘은 사람을 지배하거나 과시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순간에 용서하게 하고, 포기하고 싶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내게 하며, 상처 입은 채로도 다시 타인에게 마음을 열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권력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인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논리만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태도와 표정, 말의 온기와 행동의 깊이를 통하여 세상 안으로 스며듭니다. 어떤 이는 긴 세월 묵묵히 밥을 짓고, 누군가는 아픈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며, 누군가는 자신의 욕심보다 공동체의 평화를 먼저 선택합니다. 바로 그런 삶 안에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 표현은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닙니다. 사랑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영적 여정입니다. 예루살렘은 익숙한 자리입니다. 가족과 공동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유다는 조금 더 넓어진 삶의 자리입니다. 관계를 맺고 책임을 배우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유다인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리던 곳, 편견과 갈등의 벽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복음은 바로 그 경계를 넘어가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안전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게 하고, 미워했던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하며, 상처와 편견으로 갈라진 세상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땅끝까지.” 그 땅끝은 단순히 먼 나라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의 마음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외면해 온 내 자신의 상처일 수도 있으며, 사랑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고 포기했던 절망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바로 그 땅끝까지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다시 생명이 시작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령의 힘을 거창한 기적보다 삶의 단순함 안에서 드러냈습니다. 가난한 이를 형제로 부르고, 버려진 존재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며,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사랑의 흐름 안에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참된 증언은 큰 소리를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 삶 자체가 누군가에게 희망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 안에 조용히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는 무엇으로 세상을 살리고 있느냐.” 분노가 넘치는 세상 속에서 온유함으로 살아가는 사람,경쟁이 지배하는 자리에서 함께 살아갈 길을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땅끝까지 복음을 살아내는 성령의 증인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분의 약속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심장과도 같은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강조하시는 것은 “가르쳐라” 이전에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처음에는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지치고, 상처받으면 마음을 닫고, 실패를 경험하면 다시 움츠러듭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고, 십자가 앞에서는 침묵했고, 부활의 소식조차 쉽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준비된 사람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사람을 당신 사랑으로 준비시키십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우월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가르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먼저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의 흐름 안으로 다른 이를 초대하는 일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여기에는 경계 없는 사랑의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민족과 언어, 문화와 역사, 심지어 서로 다른 상처와 삶의 방식까지 넘어서는 보편적 사랑의 초대입니다.
복음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상처 입은 사람도, 길을 잃은 사람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를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는 단순한 종교적 절차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속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더 이상 자기 욕망과 두려움만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끊임없이 사랑을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이 세상 안에 흐르도록 이어주십니다. 세례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 삼위일체적 사랑의 흐름 안에 내 삶을 담그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소유보다 나눔을 배우고, 지배보다 섬김을 배우며, 경쟁보다 관계를 선택하는 삶. 예수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지식을 전달하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복음은 머리로 이해되는 진리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비로소 완성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배우는 것은 용서에 대한 강의를 듣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아픈 관계 안에서 다시 손을 내미는 데 있습니다. 사랑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작은 선택들이 쌓일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이 무엇인지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언제나 복음을 선포하라. 필요하다면 말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복음화는 말 이전에 존재의 향기입니다. 누군가를 존중하는 눈빛, 욕심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 가난한 이 곁에 오래 머물러 주는 인내, 그리고 상처 입고도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삶. 그 삶 자체가 이미 세상을 향한 복음의 언어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약속이야말로 모든 사명의 뿌리이며 힘입니다. 우리가 혼자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함께 걸어가시는 분의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는 작은 도구일 뿐입니다. 때로는 지치고 흔들리더라도, 사랑이 불가능해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보다 먼저 세상 속으로 들어가 계시는 그분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지금도 너와 함께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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