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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도진창(暗渡陳倉)
몰래 진창을 건넌다는 뜻으로, 정면에서 공격하는 척하다 우회한 뒤 적의 배후를 치는 계책이다.
暗:어두울 암(日/9)
渡:건널 도(氵/9)
陳:펼칠 진(阝/8)
倉:창고 창(人/8)
출전 : 36계(三十六計) 적전계(敵戰計)
밤에 진창을 건너다는 뜻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것처럼 위장하여 적이 병력을 그쪽으로 집결시키도록 한 뒤에 방비가 허술한 후방을 공격하는 계책이다.
이성어는 한(漢)나라의 장군 한신(韓信)이 초(楚)나라와 싸울 때 사용한 계책으로, 36계 가운데 제 8계이다.
第八計 暗渡陳倉
示之以動, 利其靜而有主, 益動而巽.
(按語)
奇出於正, 無正不能出奇. 不明修棧道, 則不能暗渡陳倉. 昔鄧艾屯白水之北; 姜維遙廖化屯白水之南, 而結營焉. 艾謂諸將日 : 維令卒還, 吾軍少, 法當來渡, 而不作橋, 此維使化持我, 令不得還. 必自東襲取洮城矣. 艾即夜潛軍, 徑到洮城. 維果來渡. 而艾先至, 據城, 得以不破. 此則是姜維不善用暗渡陳倉之計; 而鄧艾察知其聲東擊西之謀也.
(三十六計/敵戰計)
진(秦)나라가 멸망한 기원전 206년,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을 파촉(巴蜀)의 한중왕(漢中王)에 봉했다. 열세였던 유방은 항우의 거점인 관중(關中)으로 진군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야 했다.
친링(秦嶺)산맥의 바오허(褒河) 강가의 깎아지른 절벽에 놓인 목조다리 잔도(棧道)를 불태우며 한중으로 들어갔다.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유방에게 한신(韓信)은 동쪽으로 진격할 계책을 내놨다.
먼저 번쾌(樊?)에게 군사 1만을 주고 잔도를 3개월 안에 보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른바 '낮에 잔도를 수리하다'라는 명수잔도(明修棧道)다.
유방의 움직임을 포착한 항우의 부하 옹왕(雍王) 장한(章邯)이 현장을 살폈다. 1만의 군사로는 3년이 걸려도 복원이 불가능해 보였다.
장한은 마음을 놓았다. 한신의 노림수였다. 병사를 이끌고 친링산맥을 우회해 전략적 요충지인 진창(陳倉)을 기습해 점령했다.
중국 병법의 교과서 격인 36계의 여덟 번째 계책인 '밤에 진창을 건너다'라는 암도진창(暗渡陳倉)의 고사다. 보통 명수잔도와 함께 쓰인다.
36계 원문은 암도진창을 '움직임을 적에게 보여줄 때에도 조용히 하면서 주체적인 것이 있어야 이롭다.(示之以動 利其靜而有主) 이익은 움직임에 겸손해야 한다.(益動而巽/익동이손)'고 풀이했다.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이 무기 수출의 길을 열었다. 지난 1일 방위장 비이전 3원칙을 의결하면서 적극적 평화론을 내세웠다.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의 반대 시위도 시작됐다. 중국은 일본의 논리를 암도진창이라 논평했다.
갑오년 봄 동북아 군사 지도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형세다. 미·중, 중·일, 남과 북 대치가 매한가지다.
1999년 5월 유고슬라비아의 중국 대사관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에 오폭 당했다.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암살자의 철퇴를 뜻하는 살수간(殺手?) 프로젝트를 명령했다.
비대칭 전략미사일 개발을 우려한 미국이 파악에 나섰지만 실체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한국의 이웃은 우경화 행보를 보이는 일본과 비대칭 전력을 강화하는 중국과 북한이다. 군사적 억지력이 없던 나라의 망국 스토리는 역사의 흔한 레퍼토리다. 한국도 살수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오는 걸까.
암도진창(暗渡陳倉)
暗渡陳倉 示之以動, 利其靜而有主, 益動而巽.
몰래 진창을 건넌다는 뜻으로 정면에서 공격하는 척하다 우회한 뒤 적의 배후를 치는 계책이다.
짐짓 아군의 의도를 모르는 척 내보이며 적으로 하여금 엉뚱한 곳을 지키게 만든 뒤 그 틈을 노려 은밀히 적의 배후로 다가가 습격한다.
이는 “밑에서 활발히 움직이자 마치 바람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날마다 커지듯이 크게 진척된다”는 뜻을 지닌 익괘(益卦)의 익동이손(益動而巽) 단사와 취지를 같이한다.
시지이동(示之以動)은 고의로 아군의 움직임을 적의 눈앞에 노출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병을 활용하려는 속셈이다. 관건은 정면에서 공격하는 척하며 우회한 뒤 적의 배후를 치는 데 있다.
암도진창은 사기 고조본기의 일화에서 나왔다. 해당 대목이다.
기원전 206년 4월, 한왕(漢王) 유방이 떠나자 항우가 병사 3만 명을 풀어 그 뒤를 따르게 했다. 한왕이 관중(關中)을 떠나 한중(漢中)으로 들어갈 때 장량의 권고를 따라 잔도(棧道)를 불태웠다.
제후들이 은밀히 군사를 움직여 습격하는 것에 대비하고, 또 항우로 하여금 유방이 동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해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좇아 옛날 초나라로 가는 길을 통해 옹왕(雍王) 장함(章邯)을 급습했다.
장함은 진창(陳倉)에서 한나라 군사를 맞이해 공격했으나 패주했다. 호치(好畤)에서 재차 싸웠지만 다시 패해 도주했다.
여기에는 암도진창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고 진창에서 한나라 군사와 장함의 군사가 싸웠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암도진창은 원나라 무명씨의 잡극인 암도진창이 출전이다. 여기에는 이같이 묘사되어 있다.
번쾌로 하여금 대낮에 잔도를 수리하도록 하고, 나는 몰래 옛길을 따라 건너갈 것이다. 초나라 병사들은 이런 지략을 알지 못하고 분명 잔도 위에서 수비할 것이다. 나는 진창의 옛 길을 통해 초나라로 돌아가 공략하면 그들은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당할 것이다.
암도진창의 제2절 제목이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이다. 명(明)은 적을 속이기 위해 짐짓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에 나무로 가설해놓은 다리를 지칭한다.
한중에서 세력을 형성한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동쪽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한신은 군사들을 시켜 불타버린 잔도를 수리하는 척했다. 관중을 지키던 옹왕 장함은 군사들을 잔도로 집결시켰다.
장함이 잔도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우회하여 진창을 점령하고 관중을 함락시킴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여기서 정면으로 공격할 것처럼 행동을 취하여 적의 주의를 끈 뒤에 방비가 허술해진 후방을 공격하는 계책을 비유하는 암도진창 성어가 나왔다.
적에게 거짓된 정보를 흘려 역으로 이용하거나, 남녀 간의 부정한 행위를 비유할 때도 사용한다.
여러 면에서 성동격서와 닮았다. 적을 미혹시켜 은밀히 공격하는 것이 그렇다. 다만 성동격서는 적으로 하여금 아군의 공격지점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인데 반해 암도진창은 공격 방향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삼국시대 말기 위나라의 등애(鄧艾)가 음평(陰平)을 몰래 빠져나가 촉한(蜀漢)을 제압할 때도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사천으로 들어가는 검각(劍閣)을 촉한의 장수 강유(姜維)가 굳게 지켰다. 등애가 아들 등충(鄧忠)에게 정병 5,000명을 준 뒤 각기 도끼와 정 등의 연장을 가지고 높고 위험한 곳을 만나면 산을 뚫어 길을 내도록 했다.
또 군사 3만 명을 뽑아 각기 마른 양식과 새끼 따위를 들고 진군하면서 100여 리마다 영채를 세우고 3,000명씩 주둔하게 했다. 음평을 출발한 지 20여 일 만에 깊은 산속을 뚫고 700여 리를 전진했다.
마지막으로 단 2,000명만이 남았을 때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등애가 높은 곳에 올라가보니 길을 내기 위해 먼저 출발한 등충의 병사들이 모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등애가 다가가 곡절을 묻자 등충이 대답했다. “이 영마루의 서쪽은 모두 험한 절벽이어서 더 이상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된 듯하여 우는 것입니다.”
등애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우리 군사는 여기까지 이미 700리를 왔고 이제 여기만 지나면 곧 강유(江油)인데 어찌 도로 물러간단 말인가!”
그러고는 모든 군사를 불러놓고 이같이 호령했다.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범의 새끼를 잡겠는가?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곳에 왔으므로 만약 공을 이루기만 하면 함께 부귀를 누릴 것이다.”
“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등애는 먼저 병기들을 절벽 밑으로 굴려 내리게 하고 다음에는 담요로 자기의 몸을 싸고 솔선해서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부장 가운데 담요가 있는 자는 그것으로 몸을 싸서 굴러 내려가고 담요가 없는 장병은 서로 밧줄로 허리를 매어 연결한 후 나무 위로 올라가 절벽을 넘어가는 방법을 썼다.
등애는 이런 방법을 통해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강유성을 향해 진격할 수 있었다.
당시 강유성을 지키고 있던 촉한의 장수 마막(馬邈)은 한중이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는 있었으나 큰길만 방비했다. 내심 강유가 주력군을 이끌고 검각을 지키고 있으리라 믿었다.
이때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위나라 장수 등애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군사 2,000여 명을 이끌고 성안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마막이 크게 놀라 항복했다. 등애가 곧 마막을 안내자로 삼아 음평의 소로에 주둔시켜 놓았던 모든 군사를 강유성으로 불러 모았다. 이 사실을 접한 성도의 유선이 황급히 백관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결국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대장으로 선출했다. 제갈첨은 제갈량이 47세 되던 촉한의 건흥 5년(227)에 출생했다. 당시 제갈량은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온갖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제갈첨을 돌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전투 현장에 있으면서 늘 바쁜 와중에도 계자서(戒子書) 등의 책을 써 보냈다. 자식이 훌륭히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제갈첨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민했으며 특히 기억력이 좋았다. 커서는 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출정하기에 앞서 형 제갈근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었다. “제갈첨은 벌써 8세가 되었고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그가 조숙하여 중요한 인재가 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제갈량은 불행히도 제갈첨이 겨우 8세일 때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더구나 그의 모친 황씨도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그를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사람이 없었다. 이로 인해 제갈첨은 학식이 부족했다. 정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군사를 통솔해 전쟁을 수행해본 경험도 전혀 없었던 까닭에 부친의 뒤를 잇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살아생전 황씨는 제갈첨이 어렸을 때부터 그의 총명을 오히려 크게 우려했다. 체계적인 학식을 익히지 못한 총명은 오히려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임종 때 오직 충효에 힘쓰라는 말만 유언으로 남겼다.
제갈첨은 부친 덕에 양친을 모두 여의었음에도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17세 때 유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부마도위가 되고, 뒤에 무향후(武鄕侯)의 작위까지 이어받게 되었다.
우림중랑장에 임명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사성교위, 시중, 상서복야가 되었고 마침내는 군사장군(軍師將軍)의 직함을 더하게 되었다. 촉한의 백성은 모두 제갈량을 사모한 까닭에 그에게 특별히 호감을 갖고 있었다.
조정에서 좋은 법규와 정책이 나오게 되면 설령 제갈첨이 주도해 만든 것이 아닐지라도 백성은 서로 입을 모아 이같이 말하곤 했다. “이번 일도 갈후(葛侯)가 만든 것이라고 하네!”
그에게는 늘 아름다운 명성이 넘쳐났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었다. 유선이 성도와 후방에 있는 모든 군사를 그러모아 제갈첨에게 주고 곧바로 등애의 진공을 저지하게 했다. 패배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제갈첨이 패사하자 유선은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해 백관들과 함께 성을 나와 항복했다. 촉한은 이로써 패망하고 말았다. 등애의 암도진창 결단이 촉한 정벌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셈이다.
적전계(敵戰計) 암도진창(暗渡陳倉)
병법(兵法) 삼십육계(三十六計)는 승전계(勝戰計), 적전계(敵戰計), 공전계(攻戰計), 혼전계(混戰計), 병전계(倂戰計), 패전계(敗戰計) 등 여섯 전략으로 되어 있다.
36계는 마지막 패전계 가운데서도 최후의 계로, 주위상(走爲上), 즉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곳이다. 해볼 것 다 해본 후의 도망은 최고의 병가(兵家)도 엄연한 용병법의 한 분야로 인정했다.
병법 삼십육계는 만들어진 시기가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5세기까지의 고사(故事)를 17세기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에 수집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941년, 산시성 빈현에서 재발견되어 시류를 타고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적전계(敵戰計)
제7계 무중생유(無中生有)
지혜로운 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여라.
제8계 암도진창(暗渡陳倉)
기습과 정면공격을 함께 구사한다. 허위정보를 누설하여 역으로 이용하라.
제9계 격안관화(隔岸觀火)
적의 위기는 강 건너 불 보듯한다. 상대에 내분이 일어나면 관망하라.
제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날이 숨어 있다. 비장의 무기는 웃음으로 감추어라.
제11계 이대도강(李代桃僵)
오얏나무가 복숭아를 대신해 죽다. 작은 손실로 결정적인 승리를 유도하라.
제12계 순수견양(順手牽羊)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간다. 아무리 작은 이득이라도 묵과하지 말라.
당나라 때인 756년 영주(營州) 유성(柳城) 호(胡) 사람으로 돌궐계의 잡호(雜胡) 출신인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켰다. 본래 성은 강(康)씨고, 초명은 알락산(軋犖山) 또는 아락산(阿犖山)이다. 일설에는 알렉산더의 중국어 이름이라고도 한다.
젊어서 아버지를 잃고 돌궐(突厥) 안연언(安延偃)에게 시집간 어머니를 따라 성이 안씨가 되었고, 이름도 녹산으로 고쳤다.
성장하여 총명하고 지혜가 많아 육번(六蕃)의 말에 능통하여 호시랑(互市郞)이 되었다.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가 남다르게 여겨 편장(偏將)에 발탁하고 양자로 삼았다.
전공을 세워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총애를 받아 평로(平盧)와 범양(范陽), 하동(河東)의 세 절도사(節度使)를 겸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까지 올랐다.
재상 양국충(楊國忠; 양귀비의 오빠)과 반목하여 755년 겨울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후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함락했다.
다음 해 나라 이름을 대연(大燕)이라 하고 자칭 웅무황제(雄武皇帝)라 부르면서 성무(聖武)란 연호를 썼다.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되었는데, 나이 50여 살이었습니다.
난을 일으켰을 때 옹구(雍丘) 현령 영호조(令狐潮)는 반군에 투항했다. 진원현(眞源顯)의 현령 장순(張巡)은 1천여 장사들을 모집하여 옹구성을 탈환했다.
영호조는 4만의 반군을 거느리고 옹구성을 공격했다. 장순(張巡)은 2천밖에 안 되는 군사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반란군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많은 화살을 사용하여 결국 화살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즉시 허수아비 천 개를 만들어 검은 옷을 입힌 다음, 새벽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허수아비를 성벽에 매달았다. 반란군은 장순의 군대가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와 기습하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은 허수아비 몸에 고슴도치처럼 꽂혔다. 장순의 군대는 이렇게 해서 많은 화살을 벌어들였다.
이어, 장순은 새벽에 진짜 병사들을 내려 보냈습니다. 또 허수아비로 화살을 빼앗으려는 것으로 착각한 영호조의 군대는 화살을 쏘지 않았다. 그 사이 500여 명의 정예부대가 순식간에 성벽을 내려와 반란군을 기습했다.
이처럼 허상을 만들어 적을 미혹시키는 계책을 무중생유(無中生有)라 한다.
암도진창(暗渡陳倉)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오는데, 공공연히 잔도를 보수하고 몰래 진창을 통해 관중 땅으로 나갔다(明修棧道, 暗渡陳倉)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후, 도처에서 진(秦)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초(楚)나라 귀족 출신인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도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 회왕(懷王)의 손자를 찾아 회왕으로 옹립하고 초나라를 재건했다.
변방의 하급 관리인 정장亭長에 불과했던 유방(劉邦)도 소규모의 반란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항량에게 가담했다. 얼마 후 항량은 진나라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항우(項羽)가 실세로 부상했다.
회왕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지역인 관중(關中) 땅을 먼저 정복하는 사람을 그곳의 왕으로 삼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함양에 맨 먼저 당도하여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 낸 사람은 유방이었다.
뒤늦게 당도한 항우가 유방을 치려고 하자, 유방은 살아남기 위해 관중 땅을 항우에게 바쳤다. 관중을 접수함으로써 천하를 쟁패하게 된 항우는 기원전 206년 서초(西楚)를 건국하고,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지 16년 만에 완전히 막을 내렸고, 천하는 항우의 손아귀로 떨어진 듯 보였다.
초패왕 항우는 모사 범증(范增)의 계책에 따라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옹립하고 18명의 제후왕을 봉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범증의 계책에 따라 위험인물인 유방을 중원에서 영원히 쫓아내기 위해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고,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해당하는 한중 땅으로 보냈다.
항우는 또한 유방이 한중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길목에 해당하는 관중 땅을 나누어 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인 장한(章邯)을 옹왕(雍王), 사마흔(司馬欣)을 색왕(塞王), 동예(董翳)를 책왕(翟王)으로 각각 봉하고 주둔시킨 다음, 유방을 감시하고 그의 진출을 막으라는 임무를 주었다.
힘이 약한 유방은 항우와 관중에 주둔해 있는 세 왕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중 땅과 중원 땅의 유일한 통로로 알려진 잔도(棧道)를 불태워 중원으로 다시 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물론 이는 모두 장량(張良)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잔도를 불태워 버리면 관중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걱정하는 유방에게 장량은 말했다. '관중에 들어가는 길은 잔도 말고도 옛길인 진창이 있습니다.'
잔도란 잔각(棧閣) 또는 각도(閣道)라고도 하는데, 섬서성, 감숙성, 사천성, 운남성 등 산간 오지의 절벽에 구멍을 뚫어 나무로 다리를 놓아 만든 일종의 도로로서, 당시 서남 지역의 중요 교통로였다.
한중에 들어간 유방은 한신(韓信)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병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여 힘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수년의 준비 끝에 군사가 강해지자 유방은 중원 정벌을 결정하고, 한신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한신이 말했다. '천하를 얻으려면 관중으로 다시 들어가 동쪽을 정벌하여 초나라와 한나라가 양립하는 형세를 이루어야 합니다.'
한신의 계책은 공공연히 잔도를 보수하여 감시의 눈길을 잔도로 집중시킨 뒤, 실제로는 진창을 통해 나가는 것이었다.
유방은 번쾌(樊噲)와 주발(周勃)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석 달 내로 다리를 보수토록 했다. 물론 다리를 놓는 일은 큰 공사였기 때문에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작전을 변경하여 은밀히 번쾌와 주발을 불러들이고 다른 사람을 감독으로 파견했다. 잔도 보수 공사가 계속되자 관중에 주둔하고 있던 장한 등은 몹시 긴장하여 군사를 잔도 쪽에 집중시켰다.
유방과 한신은 번쾌, 주발 등과 수만 명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옛길인 진창을 통해 진격하여 순식간에 관중 땅을 점령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항우의 휘하 제후들을 정벌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최종적으로는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다.
▶️ 暗(어두울 암)은 ❶형성문자로 隌(암)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날 일(日; 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音(음; 암)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音(음, 암)은 아주 옛날에는 그늘의 뜻인 陰(음)과 닮은 발음으로서 어둡다는 뜻에 관계가 있었다. 날 일(日; 해)部는 태양, 暗(암)은 해가 가리어져서 어두움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暗자는 '어둡다'나 '보이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暗자는 日(해 일)자와 音(소리 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音자는 입을 벌려 소리를 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소리'라는 뜻이 있다.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는 소리뿐이 들리지 않는다. 暗자는 그러한 의미가 반영된 글자로 '어둡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暗(암)은 ①(날이)어둡다 ②(눈에)보이지 않다 ③숨기다, 은폐(隱蔽)하다 ④어리석다 ⑤거무스름해지다 ⑥깊숙하다, 유심(幽深)하다 ⑦외우다, 암송(暗誦)하다 ⑧가만히 ⑨남몰래, 은밀히 ⑩슬며시, 넌즈시 ⑪밤(=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두울 명(冥), 어두울 혼(昏), 어두울 매(昧), 어두울 몽(蒙),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밝을 명(明)이다. 용례로는 넌지시 깨우쳐 줌을 암시(暗示), 희망이 없고 막연함을 암담(暗澹), 어둡고 답답함을 암울(暗鬱), 머릿속에 그대로 외어서 잊지 아니함을 암기(暗記),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활동함을 암약(暗躍), 남몰래 사람을 죽임을 암살(暗殺), 해면 가까이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바위를 암초(暗礁), 책을 보지 않고 글을 욈을 암송(暗誦), 캄캄함을 암흑(暗黑),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을 암우(暗愚),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히 있음을 암묵(暗默), 연필이나 주판을 쓰지 않고 마음속으로 하는 셈을 암산(暗算), 남몰래 돌아다님을 암행(暗行),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서로 적대 행위를 하는 일을 암투(暗鬪), 밝음과 어두움을 명암(明暗), 몹시 껌껌하고 어두움을 흑암(黑暗), 어두울락 말락 할 정도의 어둠을 박암(薄暗), 어리석고 못나서 일에 어두움을 혼암(昏暗),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찾는다라는 뜻으로 어림짐작으로 사물을 알아내려 함을 이르는 말을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둠 속에서 날고 뛴다는 뜻으로 남모르게 활동함을 이르는 말을 암중비약(暗中飛躍), 어둠 속에 빛이 비친다는 뜻으로 뜻밖에 일이 잘 해결됨을 이르는 말을 암중방광(暗中放光), 어두운 거리에 밝은 등불이라는 뜻으로 삶의 가르침을 주는 책을 이르는 말을 암구명촉(暗衢明燭), 비가 올 듯한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다는 뜻으로 위험한 일이나 중대 사건 따위 좋지 않은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정세를 이르는 말을 암운저미(暗雲低迷), 남몰래 일을 꾸밈 또는 그 일을 일컫는 말을 암중공작(暗中工作), 그윽한 향기가 은근히 떠돎을 일컫는 말을 암향부동(暗香浮動), 어두운 천지 또는 암담하고 비참한 사회를 일컫는 말을 암흑천지(暗黑天地),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암중순목(暗中瞬目), 백성의 뜻에 영합하여 민심을 제 편으로 끌어들임을 일컫는 말을 암요인심(暗邀人心), 그윽한 향기와 성긴 그림자라는 뜻으로 매화를 두고 일컫는 말을 암향소영(暗香疎影), 어둠을 등지고 밝은 데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잘못된 길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배암투명(背暗投明), 의심이 생기면 귀신이 생긴다는 뜻으로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서 불안해 함을 이르는 말을 의심암귀(疑心暗鬼) 등에 쓰인다.
▶️ 渡(건널 도)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건너다는 뜻을 가진 度(도)로 이루어지며, 물을 건넌다는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渡자는 ‘건너다’나 ‘지나가다’, ‘영향을 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渡자는 水(물 수)자와 度(법도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度자는 지붕 위로 돌을 던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돌을 던지는 모습을 그린 度자에 水자를 더한 渡자는 물 위로 돌을 던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渡자는 강 건너로 돌을 던지는 모습으로 그려져 ‘건너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渡(도)는 주로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명사(名詞) 어근(語根)에 붙여 나루의 뜻으로 ①(물을)건너다 ②건네다, 건너게 하다 ③건너지르다, 가설(架設)하다 ④지나가다, 널리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⑤주다, 교부(交付)하다 ⑥나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건널 섭(涉)이다. 용례로는 미국으로 건너 감을 도미(渡美), 독일로 감을 도독(渡獨), 프랑스로 건너감을 도불(渡佛), 배로 바다를 건너 감을 도항(渡航), 물을 건너 옴을 도래(渡來), 나루로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다 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을 도구(渡口), 강물을 건넘을 도하(渡河), 강물을 건넘을 도강(渡江), 나룻배로 강가나 내나 좁은 바다 목을 건너다니는 배를 도선(渡船), 세상을 건넘 곧 세상을 살아감을 도세(渡世), 권리나 이익 따위를 남에게 넘겨 줌을 양도(讓渡), 팔아 넘김을 매도(賣渡), 옮아가거나 바뀌는 도중을 과도(過渡), 물건이나 권리를 넘겨줌을 인도(引渡), 성이나 혹은 집을 비워서 남에게 넘겨 줌을 명도(明渡), 재판의 판결을 일반에게 발표함을 언도(言渡), 수행의 얕고 깊음을 토끼와 말과 코끼리가 항하를 건너는 데 비유한 말을 삼수도하(三獸渡河), 기해도하를 삼시도하라고 읽었다는 옛일에서 글자를 오독하거나 오용함을 이르는 말을 삼시도하(三豕渡河) 등에 쓰인다.
▶️ 陳(베풀 진/묵을 진)은 ❶형성문자로 陣(진)은 통자(通字), 陈(진)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좌부변(阝=阜; 언덕)部와 木(목), 음(音)을 나타내는 申(신, 진)으로 이루어졌다. 음(音)을 빌어, 늘어놓다, 한 줄로 늘어놓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陳자는 '베풀다'나 '늘어놓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陳자는 阜(阝:언덕 부)자와 東(동녘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東자는 씨앗을 담은 보따리를 묶어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陳자는 이렇게 보따리를 그린 東자를 응용해 바닥에 짐을 풀어 늘여 놓는다는 의미에서 '베풀다'나 '늘여놓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陳(진)은 (1)중국 서주(西周)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나라로 시조(始祖)는 호공(胡公) 규만(嬀滿)이며, 순(舜)의 후손이, 주(周)의 무왕(武王)에 의해서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회양현(河南省淮陽縣)에 봉해졌음 내란이 그치지 않고 또한 강국 사이에 끼어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가 24대 644년 만에 초(楚)에게 망함 (2)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나라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 시조 진 패선(陳覇先)이 양(梁)의 후경(侯景)의 난을 평정한 뒤, 양(梁)의 정권을 잡고 557년에 양(梁)의 경제(景帝)로부터 위를 물려받아 진(陳)이라 일컬음. 573년 선제(宣帝) 때 북제(北齊), 북주(北周)와 자주 싸웠으나 무왕(武王)에게 패하여 회남(淮南) 땅을 모두 잃었으며, 수(隋)의 문제(文帝)에 의하여 5대 32년 만에 망함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②묵다 ③늘어놓다 ④늘어서다 ⑤말하다 ⑥많다 ⑦조사(調査)하다 ⑧펴다 ⑨나라의 이름 ⑩왕조(王朝)의 이름 ⑪방비(防備) ⑫진법 ⑬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진 칠 둔(屯), 베풀 장(張), 베풀 시(施), 베풀 설(設)이다. 용례로는 구두로 자세히 말함을 진술(陳述), 물건 따위를 보이기 위해 죽 벌려놓음을 진열(陳列), 사정을 아뢰어 부탁함을 진정(陳情), 새롭지 못함을 진부(陳腐), 잔치나 제사 때에 법식에 따라 음식을 상 위에 벌여 놓음을 진설(陳設), 이유를 말하고 사죄함을 진사(陳謝), 사실을 죽 이야기하여 말함을 진공(陳控), 사정을 진술하여 알림을 진달(陳達), 번거롭게 말하여 귀를 더럽힘을 진독(陳瀆), 진술하여 숨김 없이 다 털어 놓음을 진력(陳瀝), 사실을 진술하여 옳고 그름을 가림을 진변(陳卞), 하는 말이 진부하고 귀에 익음을 진숙(陳熟), 이듬해에 먹으려고 말려 둔 나물을 진채(陳菜), 축하의 뜻을 표하여 말함을 진하(陳賀), 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 죄상을 사실대로 말함을 진공(陳供), 앞에서 이미 서술함을 전진(前陳),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글이나 말로 밝히어 펼치는 것을 개진(開陳), 품평회나 상점의 창안에 물건을 진열하여 늘어놓음을 포진(布陳), 면대하여 진술함을 면진(面陳), 받들어 진열한다는 뜻으로 조공을 바침을 이르는 말을 봉진(奉陳), 사정이나 의견을 번거롭게 진술함을 독진(瀆陳), 어떤 일에 앞장서는 자나 맨 먼저 주창하는 자를 이르는 말을 진승오광(陳勝吳廣), 오래된 쌀이 겹겹이 쌓인다는 뜻으로 세상이 잘 다스려져 곡식이나 물건이 풍부함을 이르는 말을 진진상인(陳陳相因), 증인이나 피고인이 남에게서 들은 사실을 법정에서 말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전문진술(傳聞陳述),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대신 생기거나 들어서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신진대사(新陳代謝) 등에 쓰인다.
▶️ 倉(곳집 창)은 ❶상형문자로 仓(창)은 간자(簡字), 仺(창)은 고자(古字)이다. 쌀 창고(倉庫)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쌀 창고에는 모양이 둥근 것과 사각(四角)의 것이 있고 창(倉)은 사각쪽이라고 한다. 창(倉)은 파랑색, 서두르다의 뜻에도 쓰이므로 옛날 사람은 갓 거두어 들인 곡물(穀物)을 서둘러 치우는 곳이 창(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❷상형문자로 倉자는 '곳간'이나 '창고'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倉자는 人(사람 인)자와 戶(지게 호)자,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倉자는 人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倉자를 보면 지붕과 외닫이 문, 그리고 주춧돌이 함께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倉자는 본래 쌀이나 곡식을 보관하던 작은 창고를 그린 것이다. 그래서 倉자에 쓰인 人자는 지붕을 뜻하고 그 아래로는 외닫이 문(戶)과 주춧돌(口)이 표현됐다. 그래서 倉(창)은 (1)곳집 (2)옛날 거리에 섯던 장을 선혜청(宣惠廳)으로 옮겨셔 그 창고(倉庫)를 가겟방으로 쓰게 된 데서 생친 말이다. 서울 남대문(南大門)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곳집(곳간(庫間)으로 지은 집) ②창고(倉庫) ③옥사(獄舍) ④선창(船倉) ⑤바다 ⑥푸른색 ⑦꾀꼬리(까마귓과의 새) ⑧당황하다 ⑨푸르다 ⑩슬프다, 슬퍼하다 ⑪갑자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곳집 고(庫)이다. 용례로는 물건을 저장하거나 보관하는 건물을 창고(倉庫), 곳집에 쌓아 둔 곡식을 창곡(倉穀), 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급작스러움을 창졸(倉卒), 곳집 안에 있는 곡물을 창속(倉粟), 쌀 창고와 금고를 창탕(倉帑), 창고의 일을 보면서 행하는 간사한 짓을 창간(倉奸), 창고를 보살피며 감시하는 사람을 창감(倉監), 창고에서 부리는 노복을 창노(倉奴), 곡식을 쌓아 두는 창고의 내부를 창방(倉房), 창고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를 두루 이르는 말을 창사(倉司), 창고로 쓰는 건물을 창사(倉舍), 창고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창색(倉色), 창고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위에 둘러 쌓은 성을 창성(倉城), 창고의 곡식을 사사로이 소비하여 축내는 일을 창포(倉逋), 군대에서 규율을 어긴 자를 가두는 건물 또는 거기에 가두는 처벌을 영창(營倉), 쌀을 넣어 두는 곳집을 늠창(廩倉), 곡식이 많이 나는 곳 또는 곡식을 넣어 두는 창고를 곡창(穀倉), 배 안에 짐을 넣을 수 있도록 간간이 막아 놓은 간 또는 바닷가에 시설한 창고의 일종을 선창(船倉), 바닷물을 끓이어 소금을 만들 때에 쓰는 큰 가마를 염창(鹽倉), 쌀 창고를 유창(庾倉), 지방 각 고을에 있는 곳집을 외창(外倉), 창고의 문을 잠그고 단단히 봉함을 봉창(封倉), 산 속에 있는 창고를 산창(山倉), 각 주에 있는 창고를 주창(州倉), 어떤 사물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창씨고씨(倉氏庫氏), 미처 어찌할 수도 없는 사이를 일컫는 말을 창졸지간(倉卒之間)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