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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ONE
"이 멍청한 새끼야! 그년이 가장 위험한 년이라 했잖아! 이래선
뭐야. 네놈이 시간 끌기 외에 한 게 하나도 없잖아! 아오, 진짜 콱!"
"…백작님. 그래도 말 몇 필은 구하시는 게…."
"닥쳐. 그년한테 걸리면 다 끝장이니까. 당장 출발해 새끼들아!
여길 빨리 뜨라고!!!"
고민 할 것도 없이 x같은 상황이다. 아무 데나 내팽개쳐진 나와
같은 처지의 돌멩이라도 짚어보려 했지만 등 뒤로 손목이 묶여 있
어 뻐근한 팔을 풀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혼자 낑낑거리다, 누군
가의 발걸음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릴 듣고, 바로 눈을 내리깔았
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은 채, 부스럭 소리만 맴돈다. 내 생명처럼
가느다란 실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한 남자가 아직 정신조차 들지
않은 로리즈의 머리채를 손에 말아쥔 채 위로 당기고 있었다. 고운
머리칼 다 상할라. 그래도 내 은인인데, 서러워 소리쳤다.
"야이 미친놈아! 그 앤 기절해있잖아! 그냥 안아서 옮겨도 기분
더러운 판에, 니 주제에 머리칼을 잡아? 이 …커억! …코, 콜록, 콜
록!"
배때기에 철구가 틀어박힌 느낌이다. 아무리 지 주인한테 까이고
, 연달아 계집애한테 까였다고 한들 숙녀의 배를 차다니. 못돼먹은
무서운 새퀴. 한참 숨이 제대로 안 쉬어져 계속 몸이 웅크려졌다.
갈라진 자존심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바람의 나부끼는 커튼마냥 내 보잘것없는
반항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채, 요차에 내 연
약한 몸이 실렸다. 그놈들이 우릴 요차 후미에 묶어놓았는데, 이거
출발하고 보니까 장난 아니다.
빠르게 흐르는 땅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덜컹거릴 때마다 자세를
바로잡아야 했다. 요차 바퀴가 돌에라도 걸리면 깨어 있는 나조차
어찌 될 줄 모르겠는데, 기절해 있는 로리즈는 오죽하겠는가. 최대
한 발끝에 힘을 모아 버티며 로리즈에게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댔
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정신은 이미 오래전에 차리고 있었어효."
눈을 한 번 깜박인 것처럼 그녀의 눈이 편하게 떠졌다. 하지만 눈
살과 입꼬리는 전혀 편해 보이질 않는다. 이런 상황인 주제에 여러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지만,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입을 붙였다. 로
리즈는 이번엔 눈을 감지 않고, 오히려 빠릿빠릿하게 자신의 머리
칼을 휘어잡았던 그놈을 째렸다.
"역시 깨어 있었군."
이 녀석 알고 있었다. 정말 기분 나쁜 놈. 그 녀석을 따라온 또 다
른 남자가 활시위를 당겨 로리즈를 가리켰다. 봉해두었던 항아리
뚜껑이 완전히 날아갔다.
"이 자식, 지금 뭐하는 거야? 그거 안 치울래?!"
"그 꼬맹이 어딨어? 마나홀 말이야."
"무슨 헛소리야? 잘못짚어도, 한참이나 잘못짚은 거 같은데, 마
나홀은 무슨 마나홀이야?! 우린 관계없거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로리즈의 어깨를 발로 차, 요차 뒤로 떨어뜨
리는 남자. 요차 후미와 그녀 손목에 묶여 있던 밧줄이 길게 풀어
졌지만 끊어지진 않았다. 그 순간이 꼭 꿈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깨지 않는 꿈이다. 그 것을 직시하는 내 시야 뒤에
서 화살 하나가 날아가 정확히 로리즈의 목을 관통했다. 만개한 미
소를 지은 남자가 요차 후미에 연결된 로리즈의 줄을 끊었다. 로리
즈와 함께 손 달 수 없는 저기 어딘가로 날아가는 내 정신에 남자
의 음성이란 쇠고랑이 채워졌다.
"마나홀 어딨어."
그 순간 날 지배한 감각은 오직 충격뿐이었다. 걱정이고 뭐고 간
에 내리 무섭다. 목에 칼이 닿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완전
딴 곳에 묶여있다. 멍하니 소름이 끼친다.
…언니 나 너무 무서워. 도와줘, …언니.
말을 타고 요차를 추적한 지 얼마 안 돼, 나는 급하게 고삐를 당
겨 멈춰 섰다. 바로 말에서 내려 바위로 향하는 나를 따라 다엔도
옆에 섰다. 바위를 업은 이, 로리즈였다.
"…죄송해효, 대장님."
목에 그어진 상처를 시작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몸. 무슨 말
도 필요 없다. 당장 달려가 안아주고 보듬어주었다. 그때만큼은,
그렇게 달리던 마음도 잠시 기다려주었다. 칠칠하지 못한 로리즈
의 눈물을 닦아내는 손을 지나쳐 그녀의 손도 내 눈가에 닿았다.
이상한 녀석. 나는 울지 않는데, 자기만 닦기는 게 쑥스럽나 보다
. 조심스럽게 부축해 일으켰다곤 하지만, 그런 몸을 하고서도 아프
단 소리 하나 없이 내게 몸을 맡겨온다.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자랐
을까.
어느 정도 들어 올려주자, 로리즈 스스로 말에 발을 걸어 올라탔
다. 그때만큼은 미안스런 신음이 로리즈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걱정하지 말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다엔. 이번에도 이 소녀의 도
움을 절실하게 받았다. 로리즈를 태운 다엔이 왔던 길을 다시 밟으
며 돌아갔다.
말에 타면서 다시 마음이 헐떡여온다. 지금까지 잔잔했던 빚을
갚으라는 듯 전속력으로 뜀박질한다. 로리즈 목에 스친 상처. 그건
독화살의 흔적일 것이다. 추격자를 늦추는 뻔한 수법. 인질을 짐짝
취급시켜 천천히 죽어가게 한 후, 길에 버린다.
따라오는 추적자로선 아주 분통 터지는 일임과 동시에 난감한 일
일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이를 그냥 둘 수도 없을뿐더러 돌보자니
, 시간을 태우게 돼 목표물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아주 더러운 수
법이다. 버려진 이와의 유대감이 깊으면 깊을수록.
독이 발린 화살촉을 피해 턱과 어깨로 화살대를 잡아 챈 상처가
바로 로리즈의 상처다. 하나는 성공하고 하나는 실패한 그들. 로리
즈를 맞추는 건 실패했지만, 나를 미치게 하는 덴 성공 하셨다, 들.
그래서 그들이 더욱이나 운이 없다. 니들 다 죽었다.
너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얼마나 말을 몰았는지 감각도 무뎌
졌다. 하지만, 잠잘 때 이불의 무게만 한 살기라도 놓칠 수가 없고,
또한 놓쳐서도 안 된다. 멀찌감치 말에서 뛰어올라 허리의 화요도
를 꺼내 들었다.
짖은 갈색의 방패만을 든 남자. 경갑을 착용했으나, 관절부위에
는 비교적 부드러운 재질을 댄 것으로 보아, 유연한 전투변화에 유
의해야겠다. 든 방패만큼이나 강직한 눈썹과 최후를 위해 충분히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눈매. 능숙한 시선이다.
아무리 살펴도 방패 이외엔 별다른 무기가 없다. 결국엔 가드 암
즈라는 건데. 크게 정리하자면 가드 스피어냐, 가드 건이냐, 아니
면 가드 캐넌이냐. 다른 암기일 확률이 줄어드는 게, 저 방패를 든
자세, 저번에 한 번 경험했던 가드 암즈랑 너무 닮은 긴장감을 내
뿜는다.
일단 내 스타일대로 부딪쳐보기로 방향을 잡으며, 일직선으로 달
려가 왼쪽에서 방패를 맞추고 아래로 훑어내려 와, 허리를 노리려
했다. 하지만, 앞쪽에 걸려 검을 내리지 못했다. 밋밋했던 방패 정
중앙으로 튀어나온 스피어 때문이었다.
그대로 밀어붙이는 방패 옆면에 오히려 내 허리를 내주게 되었다
. 최근에 마나를 줄줄 흘리고 다녔던 나지만, 그 탓이 아니다. 마나
가 오래달리는 능력이라면, 무술은 빨리 달리는 능력. 싸움이란 어
떤 종목이 선정될 줄 모르는 시합.
오래 달릴 수 있다면 유리하겠지만, 그렇다고 항상 이기는 건 아
니다. 아니, 빨리 달리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오히려 불
리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도 나에게 유리한 장기전을 할 상황이 못 되는 지금. 주어
진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남자, 너무 빠르다.
세 걸음 물러서고 대각선 앞으로 반걸음, 다시 뒤로 한 걸음 옮기
며 크진 않았던 허리의 충격을 덜어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거리
에서 방패로 쳐 밀었다곤 생각할 수 없는 묵직함이다. 무식한 방법
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어쩔 수 없다.
다음은 생각하지 않고 마나를 불태워 올렸다. 이 녀석들의 작전
이 날 이런 식의 전투방식으로 이끌어 천천히 잘근잘근 짓이기려
는 속셈 같은 데,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한 번 멈추면 나는 끝이
다. 배로 당겨진 남자의 방패를 왼쪽에서 오른쪽 위로 치고 그대로
옆면을 타고 올라가 장도를 하늘로 들었다.
반걸음 뒤로 옮기자, 한 걸음 따라붙는 남자. 지금 이 순간을 물
어뜯기 위해 굶주렸을 가드 스피어가 정확히 내 가슴을 노려 뻗쳐
왔다. 위쪽에 두었던 내 검은 완전히 무시한 행동, 그만큼 먼저 날
뚫어버릴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라면 내 위치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하지만. 그의 무술이 내 마나에 미치려면 아직 멀었다. 오늘 모든
걸 쏟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질 수 없다. 마스터가 보면 비효
율적인 전투라고 한껏 욕으로 바가질 쓰겠지. 뭐, 싫어도 조만간
마주하겠군. 그 조우의 시간을 예고하는 듯, 이 남자의 스피어가
내 가슴을 뻥 뚫었다.
아까운 옷이 다 찢어발겨 져, 내 속살이 들어났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야수의 이빨은 눈으로, 발톱은 가슴으로 받아내
었고, 살기는 기세로 덮어씌웠다.
"연연[延延] 조암화우[稠巖火雨] ……"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버텨내었다. 그때서야 이 무뚝뚝한 남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한다. 숫처녀의 가슴골을 봤으면 값을 치러야
지. 미안하지만 쵸큼 비쌀 수도 있다고요, 아자씨.
"쾌도[快刀] 탐광[眈光]!"
냄새를 맡았는지, 스피어를 방패로 되돌리는 남자의 목 부위. 아
담의 사과를 칼등으로 빗겨 치고 천천히 흘려 허리로 검을 회수했
다. 하릴없이 땅에 안기는 남자를 뒤에 두고 다시 말에 올랐다. 마
나가 10급까지 내려갔다. 기본적으로 피부에 쳐놓는 마나도 모두
물리고 말의 허리를 박찼다. 아직도 멀었다.
떨어지는 나뭇잎. 예전엔 사람 목숨쯤 떨어지는 나뭇잎 정도로
여겼었다. 뿐만 아니라, 직접 나무를 찾아다니며 몸을 부딪쳤다.
우스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밟아가며 일어
섰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이용하기 위해선 그 어떤 말도 해주
었고, 숨을 쉴 때마다 거짓된 행동을 일삼았다.
푸르스레한 달빛. 오랜 세월이 지나 푸르스레한 달빛 한 조각을
찾았다. 날 뼛속부터 완전히 변화시킨 광명. 그때부터 모든 게 변
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그에 따라 새로운 마음가짐도 이뤄졌
다. 임무 때에도 목표물 외에는 베지 않게 되었고, 나의 부대원이
떨어뜨린 나뭇잎에도 자꾸만 눈이 갔으며, 나와 같은 아이들을 진
심으로 보듬을 줄 알게 되었다.
또 그들의 푸르스레한 달빛 조각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
다.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 내 동생과 관련된 임무를 처음 발견 했
을 땐, 당목에 맞은 종처럼 온몸에 전율이 울려 퍼졌다. 다시없을
기회이며, 다시없을 행복이란 생각에 전날의 피로도 잊고 바로 그
의뢰서를 따왔다. 그날 밤부터 운명의 밤이 내리기까지 잔잔한 여
운이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휘날리는 머리칼. 내 생에 가장 빠르고 어지럽게 휘날려 지나간
이번 6일. 오늘이 지나면 벌써 일주일이다. 짧디짧은 행복이었지만
, 그전까지의 내가 겪었던 말도 안 되는 슬픔과 고통, 울분, 억울함
, 배신, 그리고 절망. 또, …… 형용할 길이 없는 모든 모난 조각들.
그것들의 값을 치러 바꾼 달콤함이라 해도 전혀 손해 본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고 아깝지 않은 하루하루였다.
오직 나에게만은.
스치는 바람. 그 소중하기만 한 추억들이 서럽게, 또는 시리게 스
쳐간다. 몸을 숙여 말에 바짝 붙어봐도 서늘하기만 하다. 이 모든
추위는 내가 달렸기 때문. 너만을 생각하고, 너만을 위하고, 너만
을 바라보며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모두 나만의 생각이었다.
저 지나는 늪지보다 깊고 진흙보다 더럽다. 그리고 허리를 흐르
는 피보다 잔혹하다.
멀리서 장작 타는 냄새가 내 속눈썹에 닿았다. 눈꺼풀을 내려 향
수병을 깨뜨리고 말을 나무에 묶었다. 그리곤 천천히 발걸음을 죽
이고 다가서는데, 장작불이 가까워질수록 내 감각 타는 냄새로 범
벅이다. 이건, 감각이 무뎌지는 교란향이다. 시야를 좁혀보니, 장
작불 주위엔 미끼용 요차 한 대 뿐이었다. 함정이다.
지속적으로 사람을 안 남긴 이유가 이거였다니. 나는 내 존재가
발각되지 않은 줄로만 생각했다. 너무 얕게 생각했다.
짧은 거리를 두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워낙 단거리라, 그들
끼리도 피해방지를 위해 나무를 등지고들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맞는 핸디캡은 공격 직후 시야 확보의 불가능. 곧, 나의 이점이다.
무조건 한쪽으로만 치고 들어갔다. 원래라면 화살을 몸으로 받아
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마나 한 톨도 아껴야 하기에, 속도가 줄
더라도 숙여서 피했다. 그래서 일까. 궁수에게 닿지 못한 채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무사들의 검을 막아야 했다.
무사의 기습에 썩은 사과 부서지듯 기분이 팍 상한 나는, 녀석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허리를 베어 쓰러뜨렸다. 시간을 번 궁수들이
난잡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보여도, 아까의 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다시 날 중앙에 가뒀다. 나무에서 내려온 무사들에게 바짝 붙
어 궁수들의 화살을 봉인했지만, 이번엔 검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버렸다.
그래, 이게 차라리 편하다. 모두 하나같이 노말소드를 든 무사들.
거리 계산이 쉬웠다. 나에게 들이댄 검을 쳐내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녀석들만 베어 지나갔다. 자신의 공격범위에 날 가둔 무사들
은 항상 일정했지만, 그 뒤쪽의 숫자는 수시로 줄여주었다. 그리고
주변의 검들을 최대한 단순화시키기 위해 발을 부지런히 옮겨놓았
다.
마지막으론 사방의 검들을 일순간 정리하고 끝의 한 놈을 들어
올려 화살방패로 삼았다. 궁수들이 도망칠 때까지 이용하려 했건
만, 옆구리 쪽을 노리고 들어오는 스피어에 손을 놓고 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하나를 쥐고는 피할 수 없는 빠르기와 힘이 실린 공
격이었다.
생김새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지만, 아까 한 번 싸웠었던 이와
너무나도 비슷한 기운을 뿜어대며 가드 스피어를 든 사내. 충분히
긴장감이 흘렀지만, 내가 유리하단 건 확실하다. 불과 몇 시간 전
비슷한 상대와 싸웠기에, 나에겐 정보와 경험이 있다. 내가 지니고
있는 핸디캡과도 쉽게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정보.
팔을 짧게 굽혀 목까지 화요도를 들어 올렸다. 속전속결. 괜히 잔
재주로 시간 질질 끌지 말고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야겠다.
우선 녀석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가벼운 위세만을 펼쳤다. 기회
는 금방 찾아왔다.
"연연[延延] 조암화우[稠巖火雨] ……"
이번엔 어깨였다. 하나의 점으로 최대한 마나를 밀집시켜 받아내
었다. 조금이라도 뚫리면 이 기술의 방어 효과는 밑 빠진 독처럼
빠져버린다. 말 그대로 점이기 때문에, 녀석의 스피어가 그 점을
지나면 순식간에 팔 하나를 내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거. 조금
씩 살을 파고들고 밀려들어 오기 시작한다.
아프진 않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어떤 것도 잃을 수 없다. 초조
한 찻잔을 들고 여유를 머금었다. 깨진 향수병에서 나오는 그 커피
향기에 심장을 깊숙이 박아넣었다. 영원히 못 쓰게 되더라도, 절대
그게 지금이어선 안 된다.
"쾌도[快刀] 탐광[眈光]!"
향기에 취해 그 어떤 느낌도 안 났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녀석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그 다음 목표는 요차다. 퀭한
마나를 억지로 깨워 잡아두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멈춰 서시지. 이 애 목 떨어지는 거 보기 싫다면 말이야.
앞으로 네년의 얼굴 한 번만 더 내 앞에 들이밀면 이 여잔 끝이야.
신중하라고. …야, 소환사. 요차 출발시켜. 어서!"
"어, 언니…. 미안…해…. 정말……."
으드득. 아직, 아직도 멀었다.
"어, 언니…. 미안…해……."
바로 앞에서 또다시 멀어진다. 내 목에 메여진 단검 따윈 안중에
도 없이 언니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으나, 아직 등 뒤로 줄이 묶인
채였기 때문에, 결국, 또 이렇게 멀어져간다. 스스로도 한심하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또 내 책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만을 위해 찾아와준 언니.
이렇게 골칫덩어리밖에 안 되는 나 만나는 게, 뭐가 그리 값진 거
라고 대뜸 모든 걸 팔았을까. 그런 언니에게 마지막 날까지도 짐짝
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는 왜 이렇게 바보 멍텅구리인지. 그것도
시도때도없이 울기만 하는. 최악이다.
그에 반해 언니는. 깊은 한숨과 함께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떨어지는 나뭇잎. 예전엔 사람 인생쯤은 떨어지는 나뭇잎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었다. 뿐만 아니라, 책 속의 많은 감동들도 나에
겐 부정적으로 부딪쳐왔다. 내 강박논리에 우스스 떨어지는 이야
기들이 차라리 재밌었다. 몇 번이고 책 속의 담긴 작가들의 음성을
찢어놓았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내용을 망쳐놓기 위해선 그
어떤 생각도 마다하지 않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거짓된 행동을 일
삼았다.
푸르스레한 달빛. 그러던 어느 날, 푸르스레한 달빛 한 조각을 찾
았다. 날 가슴속부터 뜻깊게 변화시킨 광명. 그때부터 모든 게 변
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그에 따라 새로운 마음가짐도 이뤄졌
다. 독서를 할 때에도 긍정적으로, 전에 읽었던 것도 새롭게 다가
서자, 놀라운 환희가 날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의 주
인공이 담긴 글을 읽을 때면 전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마음속에 보
듬을 줄 알게 되었다.
또 밤마다 끝난 이야기의 뒤를 이어 상상하며, 나의 미래를 꿈꾸
기 위해 노력했다.
울려 퍼지는 요차 바퀴 소리. 언니가 나타나 숙부 저택의 감옥에
서 날 구해주는 꿈을 처음 꾸었을 땐, 독수리 날개에 매단 종처럼
온몸에 전율이 울려 퍼졌다. 언니는 분명히 살아있고 참고 기다리
면 막연한 언젠가 이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그
꿈을 꾸는 날이면 그 어떤 피로도 다 태워버리고 하루 온종일이라
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휘날리는 머리칼. 내 생에 가장 빠르고 어지럽게 휘날려 지나간
이번 6일. 오늘이 지나면 벌써 일주일이다. 짧디짧은 행복이었지만
, 그전까지의 내가 겪었던 말도 안 되는 슬픔과 고통, 울분, 억울함
, 배신, 그리고 절망. 또, …… 형용할 길이 없는 모든 모난 조각들.
그것들의 값을 치러 바꾼 달콤함이라 해도 전혀 손해 본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고 아깝지 않은 하루하루였다.
오직 나에게만은.
스치는 바람. 그 소중하기만 한 추억들이 서럽게, 또는 시리게 스
쳐간다. 몸을 웅크려 바짝 붙어봐도 서늘하기만 하다. 이 모든 추
위는 내가 멈췄기 때문. 언니만을 생각하고, 언니만을 위하고, 언
니만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모두 나만의
생각이었다.
멀리서 백작 속 타는 냄새가 내 속눈썹에 닿았다. 눈꺼풀을 내려
향수병을 깨뜨렸다. 하긴, 우리 언니야가 좀 무섭긴 하다. 급한 대
로 날 방패로 삼으셨다지만, 이다음엔 정말 끝장일 것이다. 왜냐면
이번엔 쉽게 인질이 되어줄 생각이 전혀 없거든.
뒤로 묶인 손바닥에 마나를 전개시켰다. 아까는 백작의 호위 무
사들이 너무 많아 꿈도 못 꾸었지만, 지금은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나마도 우리 언니와 마주친 뒤로는 안절부절 흥분한 상태들이다
. 눈을 감아, 아무리 요차가 흔들려도 변함없을 어둠을 깔았다.
"거대 슬라임 소…꺄악!"
뺨따귀가 얼얼하다. 태어나서 손찌검당한 건 또 처음이다. 그 더
러운 숙부에게조차 한 번도 허용치 않았거늘. 천 년 묵은 나무의
송진을 씹듯이 녀석을 야린 눈으로 야려주었다. 아주 이판사판이
다. 근데, 차라리 치려면 치지 백작과 뭔가를 의논하더니, 제대로
수상쩍은 약을 하나 가져와 내 입으로 들이민다.
당연히 있는 힘껏 경기까지 부리며 거부했지만, 이 새퀴 또, 또,
또 내 가여운 배를 찼다. 우주까지 뻗친 열로 폭발하려는 내 입을
녀석이 손으로 우악스럽게 틀어막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
차하는 순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무언가. 약인가 보다.
"이, 이거 뭐야? 뭐냐구!!!"
"후후, 진정제 같은 거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으하하하!"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래도 뭐 당장 이상은 없는 거 보니, 아마
내 소환을 봉인해 두기 위한 약일 것이다. 정말 급한 건 이 상황.
마지막 비장의 카드도 깔끔하게 막혀버렸다. 백작의 성이 가까워
지긴 했나 보다. 요차가 멈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녀석을 마중
나온 사병들로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힐끗 봤는데, 수가 장난이 아니다. 용병 길드나 여러 공작단에서
끌어모았는지, 그리 질서정연해 보이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돌격 명령 하나로 내 희망이 깡그리 구겨질 것이다. 이들의 규모에
비하면 우리 언니는 가벼운 반딧불. 그냥 언니가 날 포기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쓸데없는 나 때문에 다치지 않았으면
….
수많은 사병을 남기고 요차가 성문으로 향했을 땐 이젠 정말 완
전히 끝이구나 생각했다. 찢기는 대지의 비명과 함께 요차가 급정
거하기 전까진. 그 바람에 몸이 앞으로 쏠려 밧줄에 닿은 손목이
다 쓸려버렸지만, 그보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
었다.
몇 번의 정겨운 소리를 걸쳐 들리는 음성.
"여어, 공주님~"
케울이었다. 동전처럼 땡그래진 눈으로 습기가 가득 차올랐다.
그 동전으로 눈물을 사버렸다. 엄청나게 손해 보는 거래지만, 오늘
은 내 마음 속 사기꾼에게 따지지 않으련다. 날 구속하던 지겨운
밧줄이 풀렸다.
"케울 씨, 정말 고마워요."
"아니요, 뭐. 음하핫!"
"그런데…. 우리 언니는…?"
말보다 상황을 보여주려는지 케울이 밖으로 나와보라는 고갯짓
을 따라 요차에서 내렸다. 말도 마라. 아주 개 난장판이 따로 없었
다. 서로 엄청나게 얽혀서 싸우는데, 언니도 겨우 찾을 정도로 난
전이었다. 폭주단 맴버들과 그들의 무기 매직클까지 합세해서 그
런지, 우리 쪽이 그렇게 밀리는 그림 같진 않다.
분명 아군은 소수였지만, 저력 면에선 적들과 비교가 안 돼 보인
다. 얼마나 눈알을 데구루루 굴려댔을까. 케울의 폭주단원 이외에
도 드문드문 우리 쪽에서 칼을 거드는 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권총을 다루는 몸짓 하나하나가 즐겁게 느껴지는 이가 있는가 하
면, 가을이 낙엽 떨어내듯 적들을 쓸어내는 이. 엄청나게 휘어진
창으로 멀리서 봐도 다가설 엄두가 안 나게 싸우는 이와 깜박하면
시야에서 사라져가며 순식간에 동분서주하는 이.
진작에 지휘체계를 잃은 적들이 도망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순식
간에 일대가 정리되었다. …어라? 근데 저거, 저거. …화엘이랑 유
셀 아니야? 인영이 가까워질수록 어렴풋한 추측은 점점 아이러니
한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들이 맞긴 맞는데, 도대체 왜 여기….
"화엘. 유셀. …어떻게……?"
"그게 말이야. …인연이 좀 있어서 이렇게 됐네. 어디 다친 덴 없
어?"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무슨 인연인진 몰라도, 입술을 보란 듯이 삐친 척 날카롭게 내밀
며 안위를 묻는 화엘 다음으로 장난기 매끄러운 입술로 유셀이 말
을 마쳤다. 긴장이 다 풀려 웃으면서 대꾸하려던 차에, 누군가가
나를 품에 가뒀다.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우리 언니야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가슴이 쿵쾅쿵쾅.
내가 전해야 할 소리를 언니가 선수쳐버렸다. 이렇게 되면 나는
마주 안는 것으로나마 콩알 반쪽 같은 고마움 정도라도 표할 수밖
에. 나머지 산더미 같은 고마움은 언제…. 아아, 하필 이럴 때 기분
나쁜 생각이 나버린다. 오늘이 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일지도 모
른다는 것. 아니다. 절대, 절대 그렇게는 안 된다.
언니를 더욱 끌어안았다. 처음엔 그래서 그런지 알았는데, 점점
숨소리까지 거칠어지더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몸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잔잔하기만 한 언니의 숨결에도 이상하다 못해 황당하리
만큼 짜릿한 반응이 들었다. 왜 …이러지.
"…하아, 하아, 하아악."
"…라…웨르? 왜, 왜 그래? …라웨르. …라웨르!"
"이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미약을 쓴 것 같은데요? 이 기름진
새끼들. 진짜 먼지 내리게 맞아봐야 정신 차리려나.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네요. 어떡하죠, 누님. …워메. 이거 완전 급성인데요?
"
이어지는 갖가지 걱정 어린 음성 중에서도, 케울의 이 말만이 내
머릿속 뿌리까지 박혀 들어와 정신을 양분 삼아 빨아간다. 아무렴.
여러 소설 속에서도 진짜 변태들만이 먹인다던 그 약이 실제로 내
몸속 안에 있다는데야, 증오스러움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백작과 똘마니 이너마들. 진정제라더니…, 확 지금 가서 잘근잘
근 밟아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우선 이 점점 오묘한 기
분에 취해버리는 몸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다. 갈팡질팡. 하지만,
애당초 그 방법이 문제다. 정말 어떡…한담.
그때였다. 언니가 날 안아 들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약기
운 때문인지, 누군가의 체온이 내 몸에 닿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온몸에 힘이 다, 풀벌레 소리 같은 나른함에 동조 된다. 이 기분을
…잃고 싶지가 않다.
천천히 풀숲 사이로 내려지는 내 몸뚱이. 부드럽게 대해주는 언
니가 좋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서로의 고동소리.
“어, 언니 잠깐! 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언니 맘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정말,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도, 자꾸만 가까워지는 언니의 입술. 아악, 큰일이다. 매혹적이라
고 생각해버렸어. 자, 자, 잠깐만!!! 그래도, 그래도! 암만, 그래도!
향긋한 언니의 머리칼에 내 모든 게…
윙윙윙.
“헉헉헉, 누님~! 어딜 그렇게 서둘러 가시는 거에요? 여기 해독
제 찾……. 제가 방해를 했군요. 그럼 이만.”
“당. 장. 돌. 아. 와~~~!!!!!!!”
“언니, 좀 더 일루 붙어봐~. 오늘은 아침부터 정말 엄청났지?”
“…미안해.”
“미안하단 말 들으려고 꺼낸 얘기 아니거든요~”
“그래도. …마지막 밤에 야숙이라니, 역시 이 언니의 마음이 무겁
구나.”
“마지막이란 말 하~지마~”
“끄…! 아, 알았어, 알았어. 가, 간지러워~!”
“….”
“….”
“…별 봐?”
“…응.”
“…….”
“…….”
“우와~! 저기 봐봐. 잔뜩이다, 잔…뜩.”
“…그…러게.”
“…….”
“…….”
“언니 부대원 중에, 그 델렌이란 남자애 귀엽게 생겼더라.”
“….”
“로리즈 언니도 무사히 길드로 돌아가서 다행이고.”
“….”
“아참. 언니, 어깨는 좀 괜찮아졌어?”
“…델렌이 귀엽다고?”
“…응?”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어서. 아니다, 아니야~”
“뭐야, 뭐야~. 왜 그러는데?”
“그건 그렇고. 네가 베고 있는 그 악어인형도 징하다, 징해. 설마
목욕탕에서의 물을 지금까지 머금고 있었다니. 봐봐, 머리칼이 아
직도 축축하다.”
“큭큭.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설마 머리로 베자마자 물이 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너…. 아직도 들뜬 목소리다~?”
“통쾌…가 아니라. 큼큼, 후련이라고나…”
“라~~~웨르~~~!!!”
“꺄아악! 언니, 미안해에에~!”
“복수닷~”
“허, 허억. 이, 이제 그만. 으~, 차가워. 언니 머리칼이 닿았자너.
”
“물귀신 공격이닷~”
“워메. 그런 식으로 나오시겄다아?”
“자, 잠깐.”
“푸하하하. 언니. 간지럼이 그렇게 무서워? 아주 그냥 후딱 제자
리로 돌아가시네요~? 손이 근질근질 거리는데~. 언니 허리로 긁
어보실까나~?”
“돼, 됐거든.”
“….”
“….”
“언니….”
“응…?”
“언니, 좀 더 일루 붙어봐~. 오늘은 아침부터 정말 엄청났지?”
“……그랬던 것 같긴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