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금강산에 다녀왔습니다.
금강산 찾아 가자 일만 이천 봉.
어릴 적 교과서에 실린 동요를 부르며
얼마나 아름다운 산인가 늘 그리워했지요.
신선이 산다는 곳인가?
친정아버님의 수학여행지인 금강산이 그렇게 좋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이제야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특히 의지가 있어도 갈 수 없다는 곳 은 어쩐지
더 그리움이 클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은 어떻든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구역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년 전 다녀온 동행자 한분의 사전 교육(?)과 경험담은
우리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지요.
허나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많이 완화 되었더이다.
자유스럽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지만
그로인해 청정지역이 지켜지면 얼마든지 감수 하겠습니다.
휴지조각 하나 없는 깨끗한 등산로.
자신 있게 그냥 흐르는 물을 떠먹어도 된다는
북측사람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눈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맑은 물.
혼날까봐 물에는 손대지 못했던 강박도 있었지만,
제 손을 담그면 오염 될 것만 같았습니다.
(마시는 것은 허용 되나, 절대로 손 씻으면 안 된다는
주의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하더이다)
에메랄드 , 비취, 옥 빛 등 찬사가 쏟아져 나오는
금강의 맑은 물을 힘닿는 대로 떠오고 싶었습니다만
호텔에서 무료로 주는 물병 하나만 챙겨와
가족들에게 한 모금씩 시음을 시켜 주었지요.
유람선 2척을 붙여 만들었다는 해금강호텔은
생각 보다 깨끗하고 편리했습니다.
(수상호텔은 우리나라 한곳 밖에 없답니다.
부산에 수상호텔이 있었는데 태풍에 떠내려가
이제는 북측해금강 호텔이 유일 하다네요)
엘리베이터가 고속이 아닌 것이 불편 했습니다.
유압식 변기의 소리가 천둥 치는 것 같아
가이드의 사전 설명이 없었으면 놀랄 뻔 했습니다.
호텔 팁 안 받는 곳은 아마도 북한밖에 없을 것 같네요.
어디가나 대한의 아줌마들 시간 안 지키는
몇 분은 꼭 나와 빈축을 삽니다.
28세라는 아들 벌 조장, 땀을 뻘뻘 흘리며 모자라는
머리수를 찾아 다닙니다.
(북측에서는 가이드를 조장이라 합니다)
핸드폰 반입이 금지되어 못 가져가니 참으로 불편하더이다.
손전화만 있었어도 승차안한 사람 단박에 찾을 수 있었는데.
(북측 입국 전 손전화, 망원경등 관측 장비, 각종 밧데리,
열쇠, 칼등을 비닐에 넣어 맡기고 들어갔습니다)
카메라도 줌 장치 너무(?) 좋은 것은 안 됩니다.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필요한 곳마다 노점(?)이 있어
제법 호객행위 까지 하며 손님을 멈추게 합니다.
3년 전만 해도 군인들이 특이한 걸음으로 행군하며
분위기 살벌 했다는데 목적지 반쯤 되는 장소에서
남녀 안내원이 “이제 반 왔습네다. 기운 내시라요”하며
따뜻한 격려와 미소로 대해주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저도 어릴 적 추억을 되살려 송화 가루를 노점에서 샀습니다.
처녀들이 예쁘고 고와서 팔아주고 싶었습니다.
(대졸자들이 안내와 물건을 팔고 있다는 조장 설명)
만물상 가는 길이 한계령 보다 더 심한 꼬불 길이라
멀미를 하는 분이 속출 하였습니다.
비틀거리며 조장이 열심히 안내를 하는데
걸쭉한 아주머니 한분 “걍, 노래나 한곡 햐!” 하는 바람에
당황한 조장, 그러나 아주머님들의 “강 조장! 강 조장!” 연호에
용기를 내어 “둥지”라는 남측노래를 약간 개사하여 신나게
부른 것 까지는 좋았는데 마이크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밖으로 새어 누군가 들었는지 당장 불려가 야단맞았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가이드 노래시키지 마십시오)
삼일포...
백과사전에는 신라시대에 영랑(永郞)술랑(述郞)남석랑(南石郞)안상랑(安祥郞) 등
4국선(四國仙)이 뱃놀이를 하다가 절경에 매료되어 3일 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했는데
북측 안내원의 이야기는 좀 다르더이다.
어느 왕이 관동 팔경을 유람하며 여덟곳을 하루씩 묵어
가겠다는 계획이었으나 고성의 삼일포에 이르러서는
경치에 매료되어 삼일을 묵어갔다는데서 삼일포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하네요.
남측의 경포대와 같이 원래 바다였지만 낮은곳이 융기되어
민물호수가 되었답니다.
재미있었던 이야기 하나.
어느 정도 높이 까지 가면 무료위생실은 없고 유료인데
환경을 위하여 분뇨를 직접 수거하여 화학처리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큰 것은 2달러 작은 것은 1달러를 받습니다.
작은 것은 통에 받고, 큰 것은 비닐에 모았다 묶어서 가져 온다네요.
변비에 시달리는 제가 그런 곳에서는 절대로 일을 못 보니 본 것은 아니지만
리얼하게 설명을 해주는 형님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그 유명한 옥류관 랭면을 먹었습니다.
남측 냉면 보다 간이 담백 했습니다.
국수를 잘라 주지 않기에 식가위를 요구 했더니
국수가 질기지 않아 치아로 충분히 끊을 수 있다 했는데
과연 질기지 않아 자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냉면이 나오기전 지름15센티정도 되는 녹두 빈대떡을
주는데 맛이 좋았고 1달러 지불하면 더 먹을 수 있습니다.
식당에서 서비스를 원 할 때 남측에서는
언니, 아가씨 하고 부르는데 이곳의 호칭은
무어냐 하니 접대원동무라 가르쳐주었지만
낯 설은 단어라 잘 부르지도 못하고
그저 눈치로 이것저것 부탁 했습니다.
금강온천이라는 온천장은 남한 못지 않게
시설 좋고 깨끗 했습니다.
그곳에서 제공 하는 드라이기,
스킨, 로션 모두 괜찮았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 남한에서 만 든 것 인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물이 매끄럽고, 산행 후 온천을
이틀에 걸쳐 해서 그런지
피곤도 많이 풀리고 음식도 좋았습니다.
비로봉(1638m)을 바라보며 즐기는 야외온천,
40도로 용출되는 중탄산나트륨을
함유한 온천수는 신비로운 효험으로 유명 하고요.
음양의 조화를 맞춘다고
남녀 탕을 하루씩 바꿔
입욕케 하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막상 들어가 보니 남녀탕 모두 같았습니다.
평양 모란봉교예단의 서커스는
세계2위(1위는 러시아의 볼쇼이)라는
조장의 설명에 서커스관람을 대부분 취소 하려던
우리일행은 교예관람을 위하여
온천을 포기한 분이 많았습니다.
저는 안타깝지만 너무 피곤 하여
서커스를 보지 못했습니다.
교예공연을 보면 시간이 없어
온천을 포기 해야 했거든요.
호기심 보다 온천을 선택한 것을 보니
나이 탓인가 합니다.
50넘어 가며 그저 더운물이 좋아 지더이다...
우리가 방문 했을 때 면세점이 생긴지
며칠 되지 않아 기념으로
10%할인을 하고 있었는데
해외명품을 싸게 팔고 있었습니다.
며칠 되지 않아 물품은 많지 않았으나
면세점이 크고 화려해 이 또한 놀랄 일 이었지요.
면세점 바로 옆에 농협이 들어와 있어
환전도 즉석에서 바로 해 주어
쇼핑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개점이 며칠 되지 않아 그런지
남측 관광공사 직원과 조선족이
같이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면세점이 남측, 북측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원화가 유통이 안 되어 환전 하는 것이
불편 하다기 보다 같은 민족이 쓰는 통화를
같은 나라 사람끼리 쓰지 못 한다는 것이 애달팠습니다.
언젠가 얻어먹은 송 선생님의
장뇌은단이 생각나
신세를 갚을까하여 이리저리 찾아보았는데
발견을 못했습니다.
귀국(?)길에 우리 일행 한분이
관광증 제출 하라기에
꺼내 들고 짐을 옮기다 귀퉁이가 찢어 졌는데
용서를 받았다는 겁니다(벌금 10만 원정도 임).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고
조장이 강조하며 그만큼 부드러워 졌답니다.
에피소드 하나,
귀가 길에 북측 출입국 사무소를 떠나
이미 남측으로 들어 왔을 때 얼마 안 있어
어느 아주머님이 버스에서 일어나니
일행중 한 분이
“아주머니 일어서면 안 돼요!”
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아직도 북측에 있는 줄 착각했거나
북측에 들어가기 전
잔뜩 준 기압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나 봅니다.
그로인해 웃음바다가 되어
모두가 즐거워했지요.
일행의 리더인 한분이 세계에서 분단국가는
우리나라 한곳 뿐 이라고,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것은
증오 때문이라고.
그로인해 우리나라는
고통 받고 있다고.
빠른 시일 내 통일이 되어
이산가족 눈물 내는 일
없었으면 좋겠고 아름다운 북측의
문화재와 강산을
자유롭게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금강 여행 가려 떠나는 날 소중한 친구가 남편을 잃었습니다. 하여 조문을 못 한것이 못내 미안 합니다.
전화가 바뀌었는지 연락할 수가 없었어요.
금강산에 다녀온지 4년이됩니다. 그 아름다움이 다시 그려지네요. 늘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