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의 논리
1969년 7월 21일,
아폴로(Apollo) 11호가 달 착륙(月着陸)에 성공(成功)함으로써 냉전시대(冷戰時代)를 상징(象徵)하던 미소(美蘇)의 치열(治熱)한 우주개발 경쟁(宇宙開發競爭)은 미국의 승리(勝利)로 일단 막(幕)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사람을 달에 보낸 것은 인류사(人類史)에 기록(記錄)될 만한 일대 사변(一代事變)이기는 하였지만 사실 경제적(經濟的)으로나 과학적(科學的)으로 볼 때 만용(蠻勇)에 가까운 무모(無謀)한 도전(挑戰)이었습니다.
↑인류사의 위대한 성공이었으나 사실 당대 여건으로는 필요이상의 도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도 국력(國力)을 쏟아 부었을 만큼 엄청난 경제적 부담(負擔)이 있었으며 만일 우주인(宇宙人)들의 귀환(歸還)이 실패(失敗)했을 때를 가정(假定)한 대통령(大統領)의 연설문(演說文)까지 미리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성공 확률(成功確率)에 대해 스스로 반신반의(半信半疑) 하였을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순수(巡狩)하게 과학적 목적(目的)으로 달을 탐사(探査) 한다면 상대적(相對的)으로 저렴(低廉)하고 인간의 생명(生命)을 담보(擔保)로 잡지 않아도 되는 무인우주선(無人宇宙船)을 이용(利用)해도 충분히 성과(成果)를 얻었을 것입니다.
↑유인 달 탐험은 상당히 위험한 도전이었습니다 (영화 Apollo 13의 스틸 컷)
이러한 뻔히 보이는 문제점(問題點)에도 불구(不具)하고 인간을 달에 보내려던 시도(始睹)가 성사(成事)되었던 것은 바로 냉전시대의 논리(論理) 때문이었습니다.
즉 과학적 업적(業績)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인간이 달에 도착한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줌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政治的)인 효과(效果)가 컸기 때문에 인간의 달 탐험(探險)은 이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데올로기 경쟁이 과학적 성과를 앞당겼습니다
사실 달에 대한 도전에서 소련이 미국에 뒤쳐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폴로가 최초로 달에 간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처음으로 사람이 달에 간 것이고 지구상에 생명체(生命體)가 등장하여 지구외의 다른 천체(天體)에 지구에서 나온 물체(物體)를 보냈던 것은 1959년 12월 소련이 달에 보낸 탐사선 루나(Luna) 2호에 의해서입니다.
↑인류사 최초로 다른 천체에 도착한 Luna 2 호
루나 2호는 달 주변(周邊)을 탐사(探査) 후 경착륙(hard landing, 輕着陸)하여 달 표면(表面)에 충돌(衝突)함으로써 인류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裝飾)하였습니다.
그리고 1966년 1월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soft landing, 軟着陸)을 성공(成功)하여 달 표면의 생생한 모습을 지구에 전송(傳送)함으로써 달에 토끼가 살고 있지 않음을 입증(立證 ?)시켰습니다.
↑인류사 최초로 달에 연착륙한 루나 9호(上)가 전송한 월면의 생생한 모습
그리고 미국에 비해 조금 늦기는 하였지만 1970년 9월 루나 16호가 달 표면의 월석(月石)을 채취(採取)하여 지구로 귀환(歸還)함으로써 소련 또한 미국의 아폴로계획에서 얻었던 과학적(科學的)인 성과(成果)를 얻을 수 있었고 연이어 1970년 11월 쏘아 올린 루나 17호에 탑재(搭載) 된 루노호트(Lunohot) 1호라는 달 탐사차(探査車)를 이용하여 달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쾌거(快擧)를 선보여 미국을 당황(唐惶)하게 만들었습니다.
↑월석을 채취하여 지구로 귀환한 루나 16호(上)과 루나 17호에 탑재되었던 월면탐사차 루노호트 1호
하지만 소련의 이러한 실속(實速) 있고 찬란한 과학적 업적(業績)을 남긴 달 탐사가 미국의 아폴로계획에 비해 빛을 발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하나 전술(前述)한바와 같이 인간이 직접가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인 성과는 별개(別個)로 정치적(政治的)인 선전효과(宣傳效果)가 상대적(相對的)으로 작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달 탐사선 Zond 8호가 촬영한 달과 지구의 모습(달의 지평선에 지구가 걸쳐 있는 최초의 사진입니다)
↑1968 년 12 월 24 일 아폴로 8호 승무원 앤더스가 달 궤도에서 찍은 사진. ‘이제까지의 사진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출처=NASA)
그렇다고 소련의 유인(有人)우주선 능력(能力)이 미국에 뒤쳐진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한 경제력(經濟力)이 뒤졌고 미국의 새턴 Saturn 5호처럼 강력한 로켓개발에 실패(失敗)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유인 달 탐험을 제외(除外)한 다른 분야의 유인 우주개발(宇宙開發)에 있어서도 소련은 항상 미국을 앞서나갔었습니다.
결국 냉전시대의 주역(主役)인 소련은 다른 분야에서 우주의 헤게머니를 쟁취(爭取)하고자 하였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