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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광화문 전통춤 페스타 "달보고 춤추고"
일정 : 2025.10.06 (당일)
시간 : 오후 5시
장소 : 광화문광장 놀이마당(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
주최: (사)한국전통춤연구회 / 주관: 선운 임이조춤보존회
가격 : 무료
소요시간 : 180분
문의처 : 02-3210-0048
광화문전통춤페스타는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 예술의 풍요로움과 찬란함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다양한 공연과 체험을 통해 추석 명절의 광화문광장은 해마다 빛나는 전통춤의 무대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전통예술의 멋과 흥을 시민들과 나누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전통춤의 아름다움과 흥을 함께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공연 내용
1부: 전통춤의 미학
춤으로 하나되기 – ‘흥춤’
궁중 연례(宴禮) – ‘처용무’
전통의 향연 – ‘화무, 통영검무’
2부: 전통춤과의 조화
가야금병창X전통춤 – ‘사랑가’
달풀이 경복궁타령 – ‘교방무, 허튼춤’
천상의 춤 – ‘비천무’
3부: 전통춤 나들이
한순서류 오북춤 – ‘오북의 향연’
춤과 함께 보는 – ‘한복 패션쇼’
서울 시민과 함께 하는 – ‘판굿, 달맞이 강강술래’
부대행사 : 2025 선운 전국무용경연대회 결선
선운 임이조 명무 魂 계승하는, ‘2025 선운 전국무용경연대회’ 열린다
헤럴드경제 기사 입력 2025-02-21 19:38:36
(사)한국전통춤연구회가 주최하고 선운임이조춤보존회, (사)한국전통문화예술원이 주관하는 2025 선운 전국무용경연대회가 열린다. 오는 3월 15일 예선과 본선을 은평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결선은 10월 6일 오후 5시부터 광화문광장 놀이마당(광화문전통페스타)에서 개최된다. 이번 대회는 한국무용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선운 임이조 명무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승과 창조의 토대를 마련하고, 한국무용 전공자와 신인 무용인들에게 다양한 무대 경험과 표현의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2025 선운 무용 경연대회는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허물고 한국무용 전 장르가 참여할 수 있는 무대로 특히 올해부터는 해외에서 한국무용을 전승하는 예술가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국제부를 신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무용인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한다.
경연은 8개 부문으로 학생부(초·중·고등부), 국제학생부, 신인부(비전공자), 국제일반부, 일반부, 명무부로 나뉘며, 한국무용의 전통과 창작을 중심으로 개인과 단체(2인 이상)로 참가할 수 있다. 대회 참가요강 및 신청서류는 선운 전국무용경연대회 공식 블로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국제부는 영상심사도 가능하며, 현장 경연자와 차등 심사할 예정이다.
한편 본 대회는 한국무용(전통, 창작)의 다양한 색채를 선보이는 무대로, 참가자들은 춤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펼치게 된다. 특히, 명무부에서는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중견 무용수들이 경연을 펼치며, 수준 높은 경연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대회 주최 측은 “2025 선운 전국무용경연대회를 통해 한국무용의 저변을 확대하고 무용 예술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한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대회를 통해 한국무용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의 종합대상 수상자에게는 “선운 임이조상”과 함께 상금 500만원이 수여되며, 명무부 대상 수상자에게는 서울특별시장상, 일반부 대상 수상자에게는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상 등이 수여될 예정이다.
절제된 화려함과 교태미의 진수, 무용가 임이조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조교이자 제97호 살풀이 이수자인 임이조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발레, 신무용, 전통무용 등을 바탕으로 창작 작품을 만들어 대중에게 다가갔다. 난해하게 느껴지는 예술이 아닌 대중이 좋아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추구하였고, 관객과의 교감을 중요시한 무용가였다.
임이조는 1950년 6월 2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 무용가였던 임이조의 어머니는 임이조를 데리고 공연을 보러 다녔는데, 네 살 무렵부터 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런 그를 송범 국립무용단장에게 데려갔고, 이것을 계기로 발레를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한다. 첫 스승인 송범을 거쳐, 은방초에게는 신무용을, 김숙자에게는 무속무용을 배우며 무용 세계를 다졌다. 임이조는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과에 다니던 시절, 이매방의 승무 공연을 보고 한국무용의 절제미에 반해 이매방의 제자가 된다. 이후 이매방(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및 제97호 살풀이춤 기능보유자)으로부터 호남류 춤사위를 사사, 고유의 춤 맛과 전통성을 되살리는 노력을 했다. 그는 이매방 선생의 문하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조교이자 제97호 살풀이 이수자까지 오르며 더욱 한국무용가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발레 ‘백조의 호수’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올리면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전통춤을 전승하면서도 임이조류 한량무, 교방살풀이춤, 화선무 등 자신만의 무용을 창작하고 공연을 이어왔다. 임이조의 ‘교방살풀이춤’은 한의 정서를 풀어내는 기존의 살풀이춤과는 달리 교태미를 표현하는 섬세함과 정교한 발디딤이 특징이다. 부채를 들고 추는 춤인 ‘화선무’는 1978년 초연된 창작 전통춤으로 꽃 그림이 그려진 작은 부채를 사용하여 과하지 않은 화려함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은방초 선생에게는 화려함, 무대 위 표정과 호흡, 이매방 선생에게는 절제와 겸양의 미덕 등을 배웠다고 하는 임이조는 이렇듯 여러 스승에게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무용 세계를 만들었다.
2007년부터 6년 동안 서울시립무용단 단장을 역임하면서 전통이라는 민족적 특징을 창작이라는 구도적 성향으로 예술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정통성만을 인정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무용계에서 발레를 전공했던 발레리노가 한국무용가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2013년 외국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임이조는 폐렴에 걸린 뒤 회복하지 못하고, 향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수상
2006 대한민국 문화훈장화관
2000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14회 예총예술문화상 대상
1988 진주개천예술제 무용부문 대통령상
1970 전국무용대회 문화공보부 장관상
경력
2007.09.~2012 제6대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단장
1999 남원시립 국악연수원 예술 총감독
1996 한국전통 예술진흥회 이사
한량무
한량무(이매방류)는 흥춤, 선비춤, 허튼춤, 사풍정감(士風精感)으로도 불리는 작품으로 호남교방예술의 전통적 춤사위가 내재되어 있는 춤이다. ‘한량’ 이란 벼슬에 오르지 못한 호반으로, 풍류를 알고 의기 있는 선비를 이르는 별칭이며 선비의 멋스러운 풍류 품위 있는 내면의 감성을 절제된 흥으로 풀어 낸다.
여무(女舞)는 치마, 저고리를 입고 추기도 한다.
처용무(處容舞)
처용무(處容舞)는 궁중 무용의 하나로서 오늘날에는 무대에서 공연하지만, 본디 궁중 연례(宴禮)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기원하거나 음력 섣달그믐날 악귀를 쫓는 의식인 나례(儺禮)에서 복을 구하며(求福) 춘 춤이었다.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한국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과 중앙 등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란색·검은색·붉은색·노란색의 오색 의상을 입은 5명의 남자들이 추는 춤이다.
무용수들은 팥죽색에 치아가 하얀 신인(神人) 탈을 쓰고, 납 구슬 목걸이에 주석 귀고리를 하고 검은색 사모를 쓰는데, 사모 위에는 악귀를 몰아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맞이하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뜻을 담은 모란 2송이와 복숭아 열매 7개를 꽂는다. 다양한 형식과 박자의 반주 음악, 간간이 삽입된 다채로운 서정적 노래 등을 통해 처용무는 호방하고 활기차다.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새기면 역신과 사귀(邪鬼)를 물리칠 수 있다는 민간 신앙을 포함해 처용을 둘러싼 더 광범위한 민속 신앙의 일부를 이루는 한편, 처용무는 특히 오행설(五行說)로 대표되는 유교 철학을 구현하기도 했다. 처용탈의 제작 과정 또한 전통 장인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지역 정보
궁중 무용인 처용무는 예술 공연을 위해 마련된 무대에서 공연되었으므로, 특정 지역이나 지리적 연고는 없다. 그럼에도 굳이 지리적 범위를 한정하여야 한다면, 고궁이 있는 대한민국의 서울(옛 이름은 “한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처용무란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에서 5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 궁중 무용을 일컫는다. 때문에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의 궁중 무용으로는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탈을 쓰고 춤을 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1971년 1월 8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처용무는 남자 무용수들이 연행(演行)하는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운 춤이다.
통일신라 말기(B.C. 57년~A.D. 935년), 헌강왕(憲康王)이 행차하여 한반도 남동쪽 울산시 인근 개운포(開雲浦, 오늘날의 황성동 세죽마을)에 이르렀다. 왕이 환궁 차비를 하였을 때 짙은 운무(雲霧)가 낀 하늘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東海)의 용(龍)이 부리는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자, 먹구름이 걷히고 동해 위로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솟아올라 춤을 추었다. 그 중 ‘처용(處容)’이라는 이름의 한 아들이 헌강왕을 따라 수도인 경주로 와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관직을 얻어 머물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처용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려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처용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무릎을 꿇고 앉아 사과하였다. 이때부터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악귀를 몰아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고려 왕조 후기(918년~1392년)까지 처용무는 무용수 1인이 공연하였으나, 조선 왕조 세종(재위 1418년~1450년) 때에 이르러 무용수 5명이 춤을 추게 되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음력 섣달그믐날, 묵은해의 역신과 사귀를 쫓기 위해 행하는 나례 의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고 한다.
5명의 무용수는 각각 서쪽·동쪽·북쪽·남쪽·중앙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란색·검은색·붉은색·노란색의 의상을 입었다. 처용무에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근거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어 장엄하고 활기찬 춤사위에서 씩씩하고 호방한 기운을 엿볼 수 있다.
처용무는 수제천(壽齊天, ‘하늘만큼 영원한 생명’) 음악에 맞추어 왕을 향해 나아가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밝고 번성한 시대, 신라’)”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처용가〉의 첫 수를 ‘언락(言樂)’이라는 서정적인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무용수들은 왕을 향해 인사하고 향당교주(鄕唐交奏,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번갈아 연주)에 맞추어 무대 중앙으로 나아간다. 세영산(細靈山)의 느린 가락에 맞추어 무용수들은 정방형을 이루며 산작화무(散作花舞, ‘꽃의 형태로 흩어짐’)를 춘 후 오른쪽으로 돈다. 십자형으로 대열이 바뀌면 음악도 삼현도드리(3개 현악기로 연주하는 느린 6/4 박자 음악)로 변경된다. 수양수무(垂揚手舞, ‘팔을 들어 올려 흔들며 추는 춤’)와 무릎디피무(‘무릎을 움직여 방향을 바꾸는 춤’)을 마친 후 5인의 무용수는 대열을 원형으로 바꾸고 왼쪽으로 돈다.
다시 한 번 일렬로 대열을 바꾸고 나서 무용수들은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 ‘머나먼 산 또는 평야로’)’으로 시작하는 〈처용가〉를 다시 가곡 우편(羽編) 가락에 맞추어 부른 후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 도드리의 일종)에 맞추어 낙화유수(落花流水, ‘떨어지는 꽃잎과 흐르는 물’)를 추며 무대에서 퇴장한다.
처용 탈은 팥죽색 피부에 치아가 하얗고, 납 구슬을 단 주석 귀고리가 달려 있다. 검은색 사모에는 모란 2송이와 복숭아 열매 7개를 꽂아 장식한다. 팥죽색과 복숭아 열매는 벽사(辟邪, 잡귀를 물리침)를, 하얀 모란은 진경(進慶, 기뻐할만한 일로 나아감)을 상징한다.
통영검무
경남 통영에 전승되는 칼춤인 통영 검무는 삼도수군통제영의 의식에서 추던 승전무의 하나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됐다. 검무에서 마주 보고 대무하며 밀었다가 밀려나는 춤사위를 통해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홀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모습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교방무(敎坊舞)
이칭 : 교방춤
교방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교방 소속 기녀가 교방에서 학습하고 공연했던 모든 춤이다. 당악정재와 향악정재, 지방 교방과 권번에서 기녀들에 의해 계승된 춤을 통틀어 일컫는다. 본래 교방은 여기의 가무를 관장하던 중앙 및 지방 관아 소속의 국가 기관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 교방에서 전승한 가무악 종목은 정재류가 대부분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 제도를 거친 기녀들의 춤 종목을 기생춤이라고 불렀다. 근래에는 교방과 권번에 소속된 이들이 추었던 전통춤을 교방춤이라고 통칭한다. 교방춤은 오늘날 무용가들의 전통춤 종목으로 공연되고 있다.
개설
‘교방춤’은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된다. 하나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교방 소속 기녀가 교방에서 학습하고 공연했던 모든 전통춤 종목을 총괄하여 이르는 말이다. 당악정재와 향악정재 그리고 각 지방 교방과 권번에서 기녀들에 의해 계승된 춤을 통틀어 함축한 말이 ‘교방춤’이다. 한편 「교방검무」 · 「교방굿거리춤」 · 「교방승무」 · 「교방살풀이춤」 등과 같이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전통시대 기녀들이 추었던 춤들을 말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전통시대 기녀의 춤 문화를 묘사하기 위해 근래에 무대 공연 종목으로 재안무한 춤으로서 그 작품 제목을 ‘교방춤’이라고 붙인 경우이다. 두 번째는 보통 전통 입춤을 기초로 화려한 기녀의 복색 또는 가발, 작은 부채 등을 이용하여 옛 기녀의 모습을 가상하여 묘사하는 춤이다. ‘기녀가 추는 춤’이라는 뜻의 무대 공연용 안무 작품을 이른다.
연원 및 변천
교방 전승의 역사는 천년 이상을 헤아린다. 그러나 교방춤 혹은 교방무라는 말은 근래에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이다.
본래 교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여기(女妓, 기녀)의 가무를 관장하던 국가 기관이다. 교방은 중앙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의 지방 관아에 소속한 관청의 하나로, 여악(女樂)의 양성 및 관리 기관이다. 여악은 악가무(樂歌舞: 악기연주 · 노래 · 춤)를 공연하는 여자 악인을 뜻한다.
교방을 처음 설치한 국가는 중국 당나라이다. 당나라와 남북국시대의 발해 및 신라는 삼각외교 관계에 있었고, 『금사(金史)』에서 발해 교방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던 만큼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교방 관련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 초기에 처음 설치된 교방 제도는 우리 남북국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동시대의 연향 문화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중 4조에서 이미 고려 이전부터 중국 ‘동방의 국가들은 당나라 풍속을 본받아 문물과 예악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로써 남북국시대에도 이미 당 풍속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교방에 관한 실제 기록은 현종(顯宗) 즉위 년(1009)에 궁중에 소속된 ‘교방의 궁녀 100여 명을 파면하여 내보낸 것’에서 시작된다. 이 말은 이미 고려에 교방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파면할 대상도 있었음을 나타낸다. 『고려사 · 악지』에서 볼 수 있는 당악정재의 가사로 볼 때는 역시 송사(宋詞)가 유행했던 송나라 교방문화의 영향을 살필 수 있다. 고려조 가례(嘉禮)의 연향과 팔관회(八關會) · 연등회(燃燈會) 등에서 교방 여제자(女弟子)의 춤과 노래가 연행되었다.
조선시대의 여기(女妓) · 관기(官妓) · 창기(娼妓, 倡妓)는 여악(女樂)의 구성원이 되었다. 전국의 교방에 여기-여악이 있었다.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여기 즉 경기(京妓)는 대개 외방여기(지방 소속 여기) 중 재예가 뛰어난 자를 뽑아 올렸다. 외방의 여기는 중국 사신과 일본 사신 등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그들이 지나는 고을에 있었고, 여기는 주로 군사의 위로 및 지역 잔치를 위해서 존재했다.
조선조 말까지 여악은 궁중의 내연을 담당하며 존속했다. 국가에 소속된 이들을 관기(官妓)라고 했는데, 1908년 대한제국 장악과(掌樂課)에서 관할하던 기녀의 관리를 경시청(警視廳)이 맡으면서 교방문화에는 급속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기생조직인 권번의 운영방식이 국내에 이식되어 기생조합이 조직되면서 궁중 여악이나 관기 제도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일제강점기 권번제도를 거친 기녀들의 춤 종목을 통칭하여 ‘기생춤’이라고 불렀다.
이상과 같이 교방과 권번의 역사를 일괄하고, 그에 소속된 기생 신분의 사람들이 추었던 전통춤에 대해 근자에는 ‘교방춤’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교방의 역사적 정통성을 우대한 용어이다.
내용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교방에서 전승한 가무악 종목은 정재(呈才)류가 대부분이었다. 고려시대로부터 내려온 「헌선도(獻仙桃)」 · 「수연장(壽延長)」 · 「오양선(五羊仙)」 · 「포구락(抛毬樂)」 · 「연화대(蓮花臺)」 · 「무고(舞鼓)」 · 「아박(牙拍)」 등 중국의 당나라나 송나라 음악과 춤을 수용한 당악정재와 고려의 고유한 음악과 춤인 향악정재가 교방 기녀들이 학습했던 전승 종목이다.
조선 초기에는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등 왕업에 관련한 음악과 춤을 창작하여 다양한 종목의 당악정재가 탄생했다. 또 향토성이 내재된 속악(俗樂)도 제작하여 공연했다. 이후 조선 순조(純祖) 연간에는 춘앵전(春鶯囀) 등 수십 종목의 정재가 창제되었다. 즉 궁중이나 지방 교방의 춤 종목은 주로 정재류가 차지했다.
한편 1902년 협률사 극장에서 연행된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 공연에는 기녀의 춤과 노래, 광대의 기예와 판소리 및 음악연주 등이 종합적으로 편성되었다. 이 공연은 민간에게도 개방되어 표를 구입하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서구식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극장의 흥행을 위해 기생이 춤추었고, 또 새로운 양식의 춤 개발이 시도되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권번은 교방의 역사를 계승한 춤 문화의 전승통로가 되었다. 광복 이후 권번은 사라졌지만 기생문화는 그들을 천시하고 경멸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도 근근이 명맥을 이어 그들 춤의 일부는 국가무형유산으로 또는 시도무형유산으로 보존 전승되고 있다.
국가무형유산에는 「승무」 · 「살풀이춤」이 있고, 시도무형유산에는 「진주교방굿거리춤」 · 「예기무」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교방장고춤」, 「입춤」, 「소고춤」 등이 기녀들에 의해 전승된 오늘날의 ‘교방춤’으로 지목되고 있다.
현황
교방의 역사와 문화를 전승한 교방춤은 기생-기녀라는 사회 신분적 제도와 무관하게 오늘날에는 무용가들의 전통춤 종목으로써 공연되고 있다. 또한 국가무형유산 혹은 시도무형유산으로서 보호 받는 종목들이 있다.
한편 춤 제목으로서의 교방춤은 해방기 활동한 신무용 세대의 안무가에 의해 기녀들의 「입춤」을 무대공연용으로 재 안무한 작품이다. 정민(鄭珉, 1928~2006)의 「교방무」와 전황(全璜, 1927~)의 「교방춤」이 무용가들의 독무 작품으로써 공연된바 있다.
비천무(飛天舞)
비천무는 한국 전통 무용 중 하나로, 그 이름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천무는 비천이라는 천상의 존재와 무라는 춤을 결합한 형태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의 전통 예술입니다. 이 글에서는 비천무의 기원, 특징, 그리고 현대 무용에서의 활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비천무의 기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무용은 불교 의식과 관련이 깊으며, 특히 불교에서 비천은 하늘에서 음악과 춤을 추며 인간 세계에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천무는 단순한 무용을 넘어, 신성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비천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우아한 동작과 화려한 의상입니다. 전통적인 비천무의 의상은 화려한 색상과 정교한 자수로 꾸며져 있으며, 이는 무용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강조합니다. 또한, 비천무의 동작은 부드럽고 유려하여 관객에게 평화로운 감정을 전달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비천무를 단순한 공연이 아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줍니다.
현대에 들어 비천무는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무용의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공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천무를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 무용가들은 비천무의 전통적인 동작을 현대적인 음악과 결합하여 새로운 무대 예술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천무는 한국의 문화유산으로서 보호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비천무 공연을 관람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 독특한 매력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 문화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문화 교류의 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비천무를 감상하는 것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한국의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비천무는 단순한 예술이 아닌,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따라서 비천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통 무용의 기초를 배우고, 비천무의 동작을 익히는 것은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비천무는 한국 전통 무용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그 역사적 의미와 아름다움이 결합된 예술입니다. 비천무를 통해 우리는 전통의 가치와 현대의 조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문화의 깊이를 더욱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비천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그 매력이 널리 퍼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북춤
다섯 명의 북재비가 원무(圓舞)를 하거나 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추는 춤. 경상남도 밀양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백중놀이에 나온다.
살풀이춤
민속춤의 하나로 살을 푼다는 의미의 춤.
국가무형유산(1990년 10월 10일 지정)
교방에서 기생들이 추었던 여성홀춤이기도 하다.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액을 풀기 위해 굿판을 벌이고 살을 푸는 춤을 추었었다. 무당들은 신격자로서 신무(神舞)를 추고 사람들은 오신(娛神, 무당이 굿을 할 때에, 타령이나 노랫가락 따위로 신을 찬양하여 즐겁게 하는 일)하거나 살을 풀기 위해 춤추고 신명(神明)에 도달함으로써 삶에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살풀이춤의 시원은 이러한 굿판의 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살풀이춤이라는 용어를 조선 후기까지 기록에는 찾을 수 없다.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기생의 기예로 ‘남중속무(南中俗舞, 살푸리츔)’가 나온다. 남부 지방의 민속춤이라는 뜻인데, 살풀이는 전라도 시나위권의 무악의 가락이름이고, 애원성 짙은 가락이다.
살풀이춤은 살풀이가락에 맞추어 추는 춤이라 하겠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의 한성준(韓成俊)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 프로그램에 살풀이춤이라는 용어가 나오면서 일반화되었다. 20세기 초반에 무대에 맞게 양식화되기 시작한 전통춤이며, 춤꾼에 따라 구성이 모두 다르다.
구성 및 형식
음악은 기본적으로 굿거리(풍물놀이에 쓰이는 느린 4박자의 장단. 일반적인 굿거리장단과 남도 굿거리장단이 있으며, 보통 행진곡과 춤의 반주에 쓴다. ⇒규범 표기는 ‘굿거리장단’이다.), 잦은몰이(판소리나 산조 장단의 하나. 휘모리장단보다 좀 느리고 중중모리장단보다 빠른 속도로, 섬세하면서도 명랑하고 차분하면서 상쾌하다. ⇒규범 표기는 ‘자진모리장단’이다.), 동살풀이(전라남도의 무악(巫樂)에 쓰이는 4분의4 박자 장단) 가락을 쓰며, 의상은 흰 치마저고리에 쪽을 지고, 흰 수건을 들고 춘다. 수건의 길이는 지방에 따라 춤꾼에 따라 차이가 있다. 수건으로 무수한 선을 그리는 것은 원초적으로 살을 풀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왔다고 하며, 기방예술로서 수건놀음은 여인의 한풀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 전통춤의 움직임의 특징인 정(精) · 중(中) · 동(動)의 형식과 내용이 잘 표현되어 있고, 한국춤의 미적 요소인 멋, 흥, 한, 태를 고루 갖춘 대표적 전통춤이다.
현황
현재는 살을 풀기 위한 종교적 춤보다는 살풀이가락에 맞추어 추는 무대화된 전통춤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이매방류는 동작이 섬세하고 교태미를 강조하는데, 2024년 5월에 작고한 국가무형유산 정명숙(전통춤연구보존회 이사장)이 그 주요 전승자이며, 이밖에 김정녀 · 김명자 등이 전승하고 있다.
한영숙류는 품위가 있고 단아하다. 한성준에게 배웠으며, 이애주(1996년 지정, 2021년 해제), 정재만(2000년 지정, 2014년 해제) 등이 서울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된 바 있다.
김숙자류는 도살풀이춤이라 하는데 경기 도당굿의 굿장단에 맞추어 추며 매우 긴 수건을 양 손에 들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김운선, 양길순, 이정희 등이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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