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4 : 16. 흑암에 앉은 백성(하) 4 : 17. 복음의 시작
3]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 ( 마 4: 12-16 )
하나님께서 주님께 맡겨주신 사명은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를 따라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놀라운 영광과 환희로 나타날 때도 있었으나 때로는 많은 희생과 고난과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맡아 추진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자기가 잘 되어야만 하나님의 사업도 잘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잘 되든지 못 되든지 오직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가장 좋은 전형을 우리에게 제공하였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1) 예수님은 선구자 요한의 불행을 자기 출세의 기회로 삼지 않으셨다.
400년간의 암흑기를 거쳐 마지막 에언자로 광야에 나타난 세례 요한은 확실히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후일 예수님의 증언처럼 그에게는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한 많은 군중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메시야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는 헤롯에 의해 투옥되는 급격한 몰락을 가져왔다.
40일의 금식과 마귀의 시험을 끝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세례 요한이 자기의 선구자이긴 했지만 그의 불행을 자기가 세상에 메시야로서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는 호기로 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은 이처럼 그것이 결과적으로 당연히 이루어질 일이라 할지라도 남의 불행을 자기 출세의 호기로 삼아서는 안된다.
(2) 주님은 자기의 사명을 잊지 않으셨다.
본문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 눅 4: 15 -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투옥을 계기로 메시야로서의 화려한 등장을 원치는 않으셨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사명을 잊지는 않았다.
때로는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겸손하여서 자기의 사명까지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다.
(3)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①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은 예수님도 거절하셨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가나움으로 가신 이유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눅 4: 24 -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예수님도 철저히 거절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허락하실 때에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 고후 6: 2 –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②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당시의 가버나움은 안티파스와 빌립이 다스리던 영역의 접경 도시로서 갈릴리 해변가에 있었으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예루살렘이 종교의 중심지였다면, 이곳은 생활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이곳으로 가심으로써 이곳을 전도의 전진기지로 삼으셨으며, 이로 인해 복음은 수리아 지방과 애굽으로까지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인위적인 방법이 아닌 한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지혜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세계에 전파 시키기 위해서 로마 제국을 택하여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모든 지혜와 방법을 기울여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4) 사망과 흑암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기 시작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그 빛이 비취었도다'
끝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희생을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투옥으로 직접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은 시작되었으며, 이는 인류에게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그의 사역을 계속했다면 대중들은 누가 메시야인지 많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자신의 때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알았고 예수의 때가 이른 것을 알고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는 그의 마지막 사역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희생은 많은 사람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저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흥해야 할 바로 그때 스스로 쇠하여질 수 있는 참된 사역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마 4 : 17. 복음의 시작 -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
1] 이때부터(*, 아포 토테)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 21. 26: 16) 이 용어는(눅 16: 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 눅 16: 16 -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2]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케륏세인)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 케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 없이 전하는 것이다.
말씀(*, 로고스)과 진리(*, 알레데이아)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 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세례 요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
* 요 14: 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마 7: 29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3]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요한의 선포(3: 2)와 동일하다.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 3) 자신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에(3: 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 1-2)의 성취라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
* 사 40: 3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광야에서 외쳐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며)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사 9: 1-2 – 1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다(Auto Basileia, Origen).
그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 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 지역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탄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탄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 눅 10: 17-20 –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음(사탄)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갈릴리 지방에서 그의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로써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내용은 세례 요한의 전파한 것과 같았다. 직역하면, “회개하라, 이는 천국이 가까웠음이니라.”라는 내용이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영적 죽음이요 영원한 멸망이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영적 생명이요 영원한 행복이다.
회개의 절박성은 '천국이 가까웠다.'는 데 있다. 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모든 죄인은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느냐, 아니면 회개치 않고 그를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다. ‘가까왔다.’는 말은 완료시제로서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다.
구약 다니엘서에는 메시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건설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
* 단 2: 31-35, 44 –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이 천국은 현재적이며 영적이다.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오셨다. 이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12: 28).
그러나 이 천국은 복음 사역을 통해 계속 확장되고 성장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며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천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왕이신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천국은 씨와 같이 뿌려지고 있고 누룩처럼 퍼지고 있다(마 13장). 이 천국은 전도와 영혼 구원을 통해 계속 확장되고 성장한다.
그러나 영광의 천국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린다.
* 계 22: 20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회개의 절박성은 특히 천국이 가까웠다는 데 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모든 죄인은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느냐, 아니면 회개치 않고 그를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죄를 회개해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다.
회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죽음이요 불행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생명이요 행복이다. 회개는 죄인이 그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회개해야만 한다.
4] 예수님의 전도의 제일성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신적 현시가 있을 때에도 30년의 기나긴 예수님의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다. 40일 동안의 금식과 마귀의 시험 후에도 그 침묵은 여전했다. 그 침묵은 그가 광야에서 나사렛으로,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가버나움을 전도의 전진기지로 삼으신 후에야 비로소 깨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의 전도 메시지는 놀랍게도 요한의 메시지와 다를 바 없이 꼭 같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세례 요한이 외친 메시지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메시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조명을 받아 그것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 선포를 시작으로 해서 이 메시지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 나가셨다. 이러한 면에서 본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1)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가 있다.
① 모든 말은 시기가 적절해야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좋은 말도 자주 하면 잔소리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부모·자식 간에서나 사제 간, 친구 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타이르고 야단칠 때도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모든 일을 꼬치꼬치 따지고 캐묻고 야단친다면 효과는 물론이요 오히려 자식에게 반발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한마디의 말이라도 큰 효과를 얻으려면 먼저 침묵이 있어야 한다. 침묵은 많은 말보다 따끔한 충고가 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적당한 침묵 후에 따끔한 한마디는 자식에게 매우 유효하게 들릴 것이다.
주께서 30년의 기나긴 세월을 침묵하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② 모든 언행은 하나님의 뜻과 시기에 맞추어서 한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생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셨으며, 하나님의 정하신 시기대로 움직이셨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의 부탁을 받았을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 4) 라고 대답한 말씀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내 때'는 곧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때를 아는 지혜, 이것은 곧 하늘로부터 받는 귀한 지혜다.
(2) 회개를 외치셨다.
① 회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문은 바로 회개의 문이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천하에 누구라도 하늘나라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이 회개란 180도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는 곧 세상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전제로 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롬 3: 23)고 하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매우 정당한 것이며, 그러므로 천국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
② 그러므로 회개는 기독교 메시지의 제 일 성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에 들려져야 할 기독교의 최초의 메시지나 최후의 메시지는 회개이어야 한다. 회개가 없는 참된 성도를 우리는 생각할 수 없으며, 회개가 없는 믿음과 기도 역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다면 신약과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무엇을 제일 먼저 외쳤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회개가 빠진 복음은 복음의 정수를 빠뜨린 껍데기만의 복음이요 맛을 잃은 소금이다.
(3) 천국을 전파하셨다.
① 예수님은 천국의 주인이시요 통치자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릴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로 타락하여 마음에 사악과 악독으로 가득찬 이 세상 사람들 위에서 통치하시기를 원치는 않으신다.
오직 회개의 눈물로서 자기의 마음을 청결히 닦고 주께서 친히 자기를 다스려 주시기를 원하는 자들을 주님께서도 통치하시기를 원하시며 그들 위에서 왕 노릇하시기를 원하신다.
② 천국은 우리 가까이에 활짝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이루어가야 한다.
확실히 천국은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함께 건설되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렸다. 그러나 이 말이 누구나 천국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천국이 이 땅에 확장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3년의 공생애를 이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일하셨으며, 하늘나라를 중심테마로 하여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사역은 승천과 함께 우리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천국의 개념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적용시켜 그 확장에 힘써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