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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묵상글(강론글)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1차(260517. 22:42)
18일 묵상글, 17일 22시 42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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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8일 월요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16,29-33)
제1독서<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사도19,1-8)
1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2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4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7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8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복음<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29-33)
29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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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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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6,29–33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제는 분명히 말씀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니
우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아직 시련을 통과한 믿음은 아님을 아십니다.
곧 제자들은 흩어질 것이고
예수님을 혼자 남겨 둘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약함을 단죄하기보다
미리 말씀하시며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환난 없는 안전지대가 아님을 솔직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난이 마지막 말은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상은 위협할 수 있으나
결코 궁극적 승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의 말씀을 읽을 때
겉으로 드러난 사건 뒤에 있는 영적 의미를 깊이 보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세상”은 단지 외적인 환경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두려움,
자기 보존만을 붙드는 마음,
진리보다 안정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질서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씀은
정치적 승리나 외적 우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과 두려움,
죄와 죽음의 권세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생명과 진리의 승리를 뜻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약함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이제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곧 흩어집니다.
이 장면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결심하지만 흔들리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두려워하며,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시련 앞에서는 쉽게 흩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약함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의 단단함이 아니라
흩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은총임을 알려 주십니다.
문화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문화가 단지 편안한 표현의 공간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와 상징,
어떤 언어와 기억을 품고 사느냐는
환난을 대하는 방식까지 바꿉니다.
세상의 문화는 종종
강한 자의 승리와 즉각적인 성공,
불편함을 피하는 삶을 이상처럼 제시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환난 가운데서도 평화를,
고난 가운데서도 용기를,
패배처럼 보이는 자리에서도
주님의 승리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도피의 문화가 아니라
희망의 문화입니다.
오리게네스는
말씀이 단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 안에 자리 잡아
사람을 새롭게 빚는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거룩한 독서의 날에
이 말씀은 더욱 중요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짧은 말씀 하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 안에서
새로운 문화, 곧 신뢰와 인내와 희망의 문화를 세울 수 있습니다.
문화는 거창한 제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반복해 새겨지는 말씀 하나가
삶의 결을 바꾸고
공동체의 분위기를 바꿉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가?
내 안의 두려움은 무엇인가?
나는 세상의 기준이 주는 불안을 더 크게 듣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승리의 말씀을 더 깊이 듣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환난을 외면하지 않으시면서
그 한가운데서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이미 이겼다.
주님,
환난 속에서도 당신의 말씀을 잊지 않게 하시고
흩어지는 마음을 다시 모아 주소서.
세상이 주는 불안을 절대화하지 않게 하시며
당신의 승리 안에서
평화와 용기를 배우게 하소서.
제 약함까지 아시는 당신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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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함부로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근에 이 말의 의미를 실감한 일이 있습니다. 작년에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후배 신부님이 오랜 고민 끝에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후배 신부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어르신들도 1년 정도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고 시간을 주었습니다. 지난 부활 팔일 축제 중에 후배 신부님이 연락했습니다. 1년간 고민하면서 다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했다고 합니다. 다시 주어진 소명에 몸과 마음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후배 신부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26살에 국가에 반역하는 글을 썼다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사형집행 직전에 황제가 ‘사면’한다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4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신약성서였습니다. 4년 동안 수천 번 신약성서를 읽은 도스토옙스키는 성서의 말씀을 토대로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에서 ‘하느님의 침묵과 예수님의 침묵’을 이야기합니다. 이 작품에는 세 아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사랑도 강하고, 분노도 강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했고, 결국 아버지의 죽음에 연루됩니다. 법적으로는 죄가 없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고통의 길을 선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한 모습을 봅니다. 신앙은 단순히 법적인 무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양심 앞에서 책임을 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 이반은 이성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고통받는 세상이라면 나는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도 던지는 질문입니다. 왜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지,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이반은 이성의 끝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신앙은 이성으로 시작될 수는 있지만, 이성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셋째 아들 알료샤는 스승의 모습을 봅니다. 그의 스승 조시마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이 있다.”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모습입니다. 신앙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 주는 것이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 주는 것입니다. 또 작품에는 ‘대심문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늙은 추기경은 다시 오신 예수님께 묻습니다. “왜 또 오셨습니까? 사람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긴 이야기 앞에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안아 주십니다. 신앙은 논쟁이 아니라, 침묵 속의 사랑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들어주는 침묵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단단해진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던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죽음도, 권세도, 천신도, 악신도 사도들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면서 21세기에 우리들의 사도행전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더욱 단단해진 모습으로 후배 신부님도 새롭게 사도행전을 만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였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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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과 스승 유의태의 아들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병든 이들을 만납니다.
유의태의 아들은 시험에 늦을까 봐 그들을 외면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허준은 그들을 치료하다 늦어 시험을 보지 못합니다.
스승 유의태는 합격한 아들에게, 의사가 환자들을 외면한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며, “너는 허준에게 졌다.” 하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삶은 박해의 삶이고,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제자들도 순교하였습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완전히 실패하고 패배한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승리는 다른 이를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십자가 죽음이 패배이지만, 하느님의 논리로는 사랑과 희생을 통한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참으로 이기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구하고자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에게 부활의 승리와 구원을 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세상 속에서 이기고 성공하고자 경쟁합니다.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느님의 시각에서 참되게 이기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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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서의 <고별사>를 끝내면서,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남겨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약함’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믿음의 약함’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고백합니다. “저희는~ 믿습니다.”(요한 16,30)
아마 이 고백은 정직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고백이 확실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지를 못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무른다고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금방 예수님을 부인해버렸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데는 자신할지 모르지만, 믿음의 실제 행동인 ‘위탁’에 있어서는 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이 약해질 때를 훤히 아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의혹과 좌절과 혼동에 빠지고, 흩어져 제 갈 길을 가버릴 제자들에게 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기에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러니 ‘평화’란, 바로 그러한 처지에서도,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평화’란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도,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평화’는 믿음의 고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실제 행동인 ‘위탁’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이는 “그분 안에서” 얻어지는 평화임을 말합니다. 곧 “그분 안에 머물 때” 얻어지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입술로 하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의 행동으로 ‘그분 안에 살게 될 때’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깁니다. 그분이 주신 평화로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우리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필립 4,13)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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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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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8 05:17
- 정신 차리는 것이 성령을 모시는 시작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
어제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낸 우리는 다음 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게 되는데
그러므로 이번 주간 내내 성령 강림을 준비하며 한 주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사도행전에서 에페소 신자는 성령을 받았냐는 물음에
성령은 받지 않았지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페소 신자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부활 제6주일 독서로 읽었던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 에페소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 뿐이고 성령과 성령의 세례는 더더욱 받지 않았지요.
우리도 이들과 같은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요한의 세례든 예수님의 세례든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 못하고 그 세례도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꼭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을 받고 싶은 열망이 있기는 한가요?
이 지점에서 사도행전이 말하는 그저 세례를 받은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의 차이를 우리가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성사론도 세례 성사는 입문성사라고 하지요.
그리고 얼마 지난 다음에 견진성사를 받고요.
이 견진성사에 관해 교회법은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견진성사로 영세자들은 그리스도교 입문의 여정에서 진보하여 성령의 은혜로
충만케 되고 교회에 더욱 완전 결속되어 그리스도 신앙의 증인과 전파자가 된다고.
법적으로는 이렇게 얘기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의 은사를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은사를 충만히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관건은
살기에 앞서 받는 것이요 은사를 충만히 살기 위해서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죄와 계명 가운데 살던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살게 되고,
죄짓지 않고 사는 것에 급급하던 사람이 사랑을 충만히 살게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저는 오늘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늘 성령에 감싸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화하면 우리는 우리를 열기만 하면 되고,
우리의 오장육부와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안으로 밀고 들어오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한 채 살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걸 알아채고 깨어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곧 우리 정신을 차림으로써 성령에 둔감하지 않고 민감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도록 나를 열고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는 것이 성령을 모시는 시작임을 알고,
정신을 차리고 사는 것이 바로 영성 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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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극심한 고통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지난 겨울, 피정 센터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남도 여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지만, 이 아이들에게도 아픈 역사를 알게 하는 것도 필요한 듯해 광주 518 민주화 묘역을 찾아 참배했습니다.
안장되어 계신 분들 묘비 뒤쪽에는 이름과 생년월일과 사망일, 그리고 남은 가족들의 마지막 절규와도 같은 작별 인사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분 한 분의 생년월일을 확인하면서 참으로 송구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청춘에 희생된 분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5월만 돌아오면 언제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감정은, 시대의 깊은 아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큰 부끄러움이요 송구함입니다. 전남대학교 정문 근처에 저희 수도 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아직도 5월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불행한 정치 군인과 일당들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다들 숨죽이고 있을 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얻어 맞고, 투옥당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은 얼굴로 또 다시 스크럼을 짜고, 거대한 악이요 불의 앞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유가족들의 슬픔과 비애는 아무리 새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습니다. 든든한 기둥 같았던 남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생떼 같은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후 겪어야 했던 슬픔과 상처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당당히 일어선 분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용기와 희생정신을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위대한 행동에 찬사를 드려도 부족한데, ‘폭도’란 말로 오물을 덮어씌웠습니다. 가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죄인처럼 숨죽여 지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참혹한 대 학살의 주범 옆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던 공범자들이 아직도 고개 뻣뻣이 쳐들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청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불행한 역사가 조속히 청산되길 또한 기도합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518민주화운동의 영령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한없이 따뜻한 위로를 베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길고 긴 고별사를 마무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감동적인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 기간 동안, 사악하고 불의한 세상의 세력이 판을 칠 것임을 예견하시면서, 잘 견뎌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 오셨지만 세상은 빛보다는 어둠을 선호합니다. 따라서 세상은 빛이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세상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고통의 시간은 어떤 면에서 예쁜 아기의 출산을 기다리는 진통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극심한 고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간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기쁨 충만한 순간, 위로와 축복의 시간이 도래합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신 불완전한 시대, 미완성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일의 고통과 시련, 불완전과 부족함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 극단적 미성숙으로 인한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존재, 사건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면서, 인내롭게 기다려야겠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구원의 지평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어두침침한 고난의 길을 거쳐야만 합니다. 새 날이 오기 전에 옛날은 뿌리채 흔들릴 것이다. 마지막 눈 앞에 펼쳐지기 전에 가장 두려운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는 마지막으로 악마가 판을 치는 시간입니다. 어쩌면 그 순간은 수난과 죽음을 끝까지 잘 견뎌내고 극복하신 메시아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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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신앙이란 단순한 체계가 아니라,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계속 이어지는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는군요!" 하고 제자들이 말합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제는 이해를 더 잘 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완전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베드로가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지만, 그 고백은 너무 섣부른 것이었습니다. 참된 깨달음은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깨닫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헛된 자기 확신을 꺾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흩어짐"은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를 다른 민족들 사이에 흩어 버실 것이다."(신명 4,27).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처럼 이 산 저 산 위에 흩어져 있었습니다."(1열왕 22,17).
이에 반하여 주님의 가장 큰 약속은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 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다시 모아들이시리라."(예레 31,10).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이사 54,7).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 의미가 뒤바뀝니다. 흩어짐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명으로 변하는 겁니다.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한 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또 베드로는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1베드 1,1)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도 어쩌면 첫 번째 "흩어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소금, 누룩, 씨앗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아 두면 쓸모가 없지만, 흩어지고 잃어버릴 때 비로소 본래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약과 신약, 즉 두 세계 사이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흩어짐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준비시키십니다. "너희가 흩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참된 평화를 충분히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러 의미에서 흩어져 있습니다. 서로 간에도,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흩어짐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우리 사회나 교회, 공동체, 그리고 가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혼란처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가 호기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분열과 단절의 위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인간성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참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활용하시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습니다!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의 말처럼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어둠마저도 우리 구원을 위해 활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국 시인 매튜 아놀드(1822–1888)는 신앙을 잃어버렸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시대가 "죽은 세계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세계 사이에서 머리 둘 곳 없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시대가 끝났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이미 북유럽 신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으며, 새로운 세계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아놀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널리 퍼져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질송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러 차례 자기 장례를 치르려 했던 자들을 묻어 버렸다." 하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아놀드는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기적에 상당한 부분 의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나의 논리적·교리적 체계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체계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나 철학적 사유만으로는 부족하고, 초자연적 사건(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본 겁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와 같은 기적들이 사실이어야만, 그리스도교 전체가 진리로서 존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따라서 아놀드의 관점에서는, 만약 기적이 신빙성을 잃거나 부정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신앙을 살아 있는 "이야기"나 "성령의 역사"로 보기보다는, 기적을 기둥으로 삼아 세워진 체계로 이해했기 때문에, 기적이 무너지면 체계도 무너진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교회는 신앙을 단순히 기적에 의존하는 체계로 보지 않고, 성령의 인도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속에서 살아 있는 믿음이 여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은 신앙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signum)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매튜 아놀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신앙이란 단순한 체계가 아니라,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계속 이어지는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안에는 예상치 못한 전환과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성령의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 추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희는 그 소리를 듣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3,8)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신앙이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이 생명을 주시기"(요한 6,63)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도권을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나 어두움이 하느님의 선과 사랑과 빛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확신해야 할 것은, 요한 복음 저자의 말처럼, "어둠은 빛을 이겨 본 적이 절대 없습니다."(요한 1,6 공동번역 참조).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지니고 사는 우리는 우리가 겪는 이런 단절과 무질서의 상황에 대해 실망하기보다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수양을 계속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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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두려움에 내몰리는 삶에서 사랑에 이끌리는 삶으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 의해 내몰리는 삶에서 사랑에 의해 이끌리는 삶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
두려움에 내몰리는 삶에서 사랑에 이끌리는 삶으로!
2026년 5월 17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자신의 책 Just This(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에서 그는 관상적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게 하고, 더 깊은 지혜와 안내를 발견하게 하는지를 성찰합니다:
관상은 넓고도 수용적인 의식입니다. 곧 어떤 상황이나 순간, 혹은 사람 안에 담긴 모든 것을 판단하거나 배제하거나 이름 붙이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순수하고 긍정적인 "바라봄"으로, 부정적인 반발(pushback)을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그 안에 깃든 고유한 존엄을 알아볼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관상은 많은 연습(수양)을 필요로 하며, 익숙한 반응들을 끊임없이 떨쳐버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관상은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관상을 통해 자신 안의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상황을 내가 통제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애초에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요. 관상은 바로 그 집착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구분하고 판단하려는 욕구에 중독된 듯합니다. 그것을 지성적인 사고라고 착각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곧 내 생각이다"라고 여기지만, 사실 우리의 생각은 거의 다 강박적이고 반복적이며 습관적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면에서 모든 것에 대한 해설을 써 내려가는데, 그 해설은 언제나 익숙한 결론으로 귀착됩니다. 그래서 모든 형태의 명상과 관상은 이 강박적으로 몰아가는, 무의식적으로 프로그램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은 이 과정을 지혜롭게 "생각을 떨쳐버림"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생각과 싸우거나, 억누르거나, 부정하거나,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벗어버릴 뿐입니다. 우리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존재이며, 이를 체험하는 길은 새로운 내용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익숙한 반응을 벗어버리는(unlearning) 과정입니다. [1]
우리가 꾸준히 관상에 정진할 때, 자율성과 개인적 중요성에 대한 집착―곧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것은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유일한 자아라고 착각하는 "제국적 나(Imperial I)"는 사실상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드러내게 됩니다.
관상을 꾸준히 실천할 때,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상대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관심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것을 억지로 공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고요히 사라져 가며 우리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겸손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집착하던 ‘자아’는 사실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임이 드러나고, 그 자리를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자아가 채우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깊이 들어가 무의식까지 "스며들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두려움에서 연결로 바뀝니다. 더 이상 연약하고 닫힌 자아 안에 갇혀 살지 않게 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관상 안에서 우리는 자아의식에서 영혼의 의식으로 옮겨가며, 두려움에 내몰려 사는 삶에서 사랑에 이끌리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몇 마디 말로 요약하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길을 걸어갈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나 이외의) 다른 분(Someone Else)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두려움을 없애 주시며, 참된 앎을 주시고, 우리의 깊은 갈망을 충족시켜 주실 때뿐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이 춤으로 이끌어 주시도록 맡길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활력을 지니고, 자연스러운 은총의 품위를 지니며,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참된 흐름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곧 삼위일체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춤추듯 흐르는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매일 아침 글쓰기를 통해 저는 제 마음을 중심에 두곤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부분의 아침마다 침묵 속에서 하이쿠 삼행(일본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짧은 시 형식)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오늘은 이런 시가 떠올랐습니다:
숨을 들이쉬며 / 지금 현존에 열리니 / 모든 것이 여기 있네
인내하며 기다리며 / “우리는 당신이 그리웠다”는 환영의 인사를 듣고 / 함께 숨을 쉬네
정착하고 뿌리내리며 / 어둠 속 빛을 향해 / 오직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을 실천하네.
—Bob D.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Just This (CAC Publishing, 2017), 60–61.
[2] Rohr, Just This, 66–6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trick Hendry, untitled (detail), 201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요한 밤하늘 아래, 어떤 사람이 “오직 이 순간(Just This)”에 머무는 관상을 하며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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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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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9-33)>
1)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라는 말씀은, “지금 너희는 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수난의 때가 오면 제 살 길을 찾아 모두 흩어질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르 14,5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서 모이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아니, 이미 왔다.”는, 수난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도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버려두고 흩어지겠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수난이 하느님에게서도 버림받고, 제자들에게서도 버림받은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은 당신 혼자서
겪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겪으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라고 부르짖으신 일은 어찌 된 일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그 말씀은 시편 22편의 시작 부분인데, 시편 22편을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시편 22편을 외우신 것은, 비록 끝까지 다 외우신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절망을 외치신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시편 22편에는 다음과 같은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야곱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께 영광 드려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시편 22,24-25).”
2)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상에서는’ 고난을 겪겠지만,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루카 22,28-29).”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곧 승리자이신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화’를 얻는다는 말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마라.”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이긴다.’가 아니라 ‘이겼다.’로 표현하신 것은
승리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음까지만 보면서 패배라고 생각하지만, 믿는 이들은 부활과 승천까지 모두 봅니다.
그래서 그 일은 예수님의 승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은,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는 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물길을 돌리고 댐을 건설해서 강물의 흐름을 막아도, 바다로 가는 흐름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것은 강물의 흐름에 합류하는 것인데, 그런데 모든 물이 바다에 도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강물의 흐름에 잘 합류해 있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합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나의 승리’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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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8. 부활 제7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9:10 추가.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세상에 질 때’가 참 많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기 때문입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 준다고 생각하기에, 주님 뜻을 따르기 보다 세상이 정한 규칙을 우선 따르려고 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꾸만 세상에 속한 모습으로, 세상에 이리 저리 무력하게 휘둘리다가 결국엔 지고 마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내가 혼자가 아님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굴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외로움’입니다. ‘남들도 다 그래’라는 감언이설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다른 이들과 어우러져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싶은 우리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외톨이가 되기 싫어서, 다른 이들에게 미움 받고 배척당하는 게 두려워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악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속해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뿐더러,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그렇지 않으면 뱉어낼 뿐입니다.
그 누구보다 나에 대해 잘 아시고, 이 부족하고 죄 많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결국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점을 아셨기에 기꺼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힘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길보다, 사랑과 희생으로 다른 이를 섬기는 길을, 남들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과 우리 그리고 하느님 모두가 참으로 행복해지는 결과를 맞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아직 십자가의 길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이 아직 남아있음에도, ‘내가 세상을 이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서로 동떨어진 각각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그분은 불가능을 모르는 분이기에, 그분의 일에 실패란 없습니다. 내가 먼저 지레 짐작으로 포기하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중간에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결국엔 하느님과 함께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뜻에 충실하게 살면, 우리는 항상 세상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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