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환절기를 걷다 / 김경태
1.
벚꽃은 흩날리고 떠나는 너의 뒷모습은 출항하는 바다에 비친 등불을 닮았다 괜찮다, 거짓말하며 돌아서는 발걸음
2.
도망치고 싶었다, 장마철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편지 속 글귀들이 책갈피 단풍잎처럼 말없이 부스러진다
3.
여민 옷깃을 풀고 달빛에 기대어 본다 푸른 입맞춤으로 타들어 가는 눈물을 지나는 이 계절 끝에 남겨 둔다, 바람이 차다
김경태 : 1982년 부산 출생. 단국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평택시청 근무
[심사평] - 정수자 시조시인
자연스러운 시상, 율격의 갈무리 돋보여
위반도 즐기는 현대예술에서 정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말을 다시 꺼내는 것은 정형시의 전제 때문이다. 그만큼 시조에서는 형식과 내용의 조화로운 완결미가 중요하다. 정형 구조의 운용 능력이 확연히 드러나는 종장 처리도 중요한 평가 요소다. 어떤 놀라운 발견이나 발상도 정형 속에 녹여 담지 못하면 시조의 위의(威儀)를 놓치는 것이다. 그런 특성을 앞에 두고 김경태·황혜리·조우리·이용규·김나경씨의 작품을 거듭 읽었다. 각기 삶에 육박하는 진정성과 개성적인 발성으로 나름의 시적 개진을 보였다.
당선작 '환절기를 걷다'는 자연스러운 시상과 율격의 갈무리가 돋보이는 가편(佳篇)이다. 정형 속의 자유를 구가하듯 음절 수를 넘나드는 음보율로 구(句)도 부드럽게 타넘고 있다. 각 환절기에 담긴 '사이'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펼치고 거두는 구조 운용과 종장의 낙차로 빚어내는 여운이 참하다. '푸른 입맞춤으로 타들어가는 눈물'의 힘을 집어올린 만큼, 정형의 영역을 더 뜨겁게 갱신해가길 주문한다. 눈물을 여미고 다시 설 응모자들께 위로와 기대를 전한다. 김경태씨 당선을 축하하며, 당찬 비약을 바란다.
---------------------------------------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스몸비 / 김수형
김수형 : 목포문학상 시 부문 본상 수상.
--------------------------------------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선잠 터는 도시 / 정인숙
1.
선잠 털고 끌려나온 온기 꼭 끌안는다 자라목 길게 빼고 순서 하냥 기다려도 저만큼 동살은 홀로 제 발걸음 재우치고
나뭇잎 다비 따라 꽁꽁 언 발을 녹여 종종거릴 필요 없는 안개 숲 걸어갈 때 여전히 나를 따르는 그림자에 위안 받고
2.
정원 초과 미니버스 안전 턱을 넘어간다 목울대에 걸린 울화 쑥물 켜듯 꾹! 넘기고 몸피만 부풀린 도시, 신발 끈을 동여맨다
정인숙 : 1963년 서울 출생, 수산물 거래 개인사업
[심사평] - 이근배, 이우걸
최종까지 심사위원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한 작품은 ‘물의 어머니’ ‘이정표로 뜨는 달빛’ ‘모죽’ 그리고 ‘선잠 터는 도시’였다. ‘물의 어머니’는 수사가 근사하고 터치가 시원시원해 모던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작가의 ‘명자꽃’도 탄력성 있는 언어가 비눗방울이 되어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런 장점에 비해 울림이 부족했다. ‘이정표로 뜨는 달빛’도 표현능력은 무난해 보였으나 내용면에서 너무 단순했다. 그 작품 셋째 수에는 지루할 만큼 눈에 익은 가난 얘기가 나온다. 당선에 값할 만한 내용의 세목이 부족해 보였다. ‘모죽’의 경우 작품 완성도나 내용의 깊이에선 단연 돋보였다. 그래서 여러 번 읽고 토론했지만 어휘 사용면에서나 소재면에서 신선하지 않다는 결점이 눈에 띄었다. 결국 올해의 영광은 ‘선잠 터는 도시’를 쓴 정인숙씨에게 돌아갔다. 시인은 우울한 오늘의 도시를 심도 있게 그렸다. 연필화처럼 희미한 선으로 그린 애잔한 풍경은 경제적 어려움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한 우리의 현실을 상상하게 하는 여운을 머금고 있다. 구성 면에서 의도적으로 ‘1’과 ‘2’로 나눈 것도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1부의 경우 인력시장의 가혹한 풍경을 그려놓고 2부는 인력시장 밖의 그늘을 그려놓고 있다. 그리고 2부 종장의 ‘몸피만 부풀린 도시/신발 끈을 동여맨다’는 이 시조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외화내빈의 카오스 속에서도 그 생활에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하는 소시민의 의지가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부디 삶에 뿌리내린 건강한 시정신으로 한국 시조문학사의 내일을 갱신하는 일꾼이 되길 바라며 대성을 빈다.
--------------------------------------
[2020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가방 / 오정순
끼워 넣을 내가 많아 어제보다 무거워요 하루가 흔들리며 어깨를 짓누르는데 거품만 빼면 될까요 나, 라는 무게에서
한쪽으로 쏠리는 기울기를 읽지 못해 때로 실밥 터지고 걸음 뒤뚱거려도 넣지도 빼지도 못해요 나, 라는 이력서
비구름 몰려 있는 귀퉁이 우산 한 개 바닥을 탈탈 털어 잿빛 날들 고백할까요 마음껏 펼치고 싶어요 나, 라는 햇살 목록
■오정순(필명 오서윤) ▲1958년 대구 출생 ▲국민대 가정관리과 졸업 ▲2011년 천강문학상 수상 ▲2013년 평화신문,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14년 10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2017년 1월 차하 [심사평] - 이근배, 이송희 시조시인
청춘들의 고단함 형상화… 시조의 현대성 구현해 주기를 ---------------------------------------
[2020 농민신문 신춘문예-시조 당선작]
일인 방송국 / 나동광
인터넷 풀밭 속에 풀빛이 짙어간다
열린 듯 닫힌 틈새 노랗게 핀 민들레
바람에 날린 씨앗은 어디쯤 가 앉을까
미세먼지 경보가 뜬 가택 연금의 나날
해제될 기미도 없이 창틀은 내려앉고
뒤늦게 면회 온 봄비 말더듬이 시늉이다
나동광 :1957년 충남 서천 출생, 문학치유 상담전문가, 오지여행가
[심사평] 시조시인 이정환, 이달균
시절가조란 시조 고유 특성 부합…1인 미디어 시대 포착 참신
신춘문예는 화려한 등용문이다. 특히 농민신문사 신춘문예는 역사와 전통이 남다르고, 그동안 시조부문을 통해 배출된 시인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양과 질 모두 풍성한 응모작들을 면밀히 살폈다. 엄정한 정형의 기율 안에서 얼마나 자신의 내면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신인은 ‘새로운 목소리’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 우리는 ‘일인 방송국’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함께 보내온 네편의 작품도 신뢰를 주었다. 오랜 적공의 힘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일인 방송국’은 시절가조라는 시조 고유의 특성에 잘 부합된다. 유튜브를 비롯한 1인 미디어 시대를 포착한 점이 참신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라는 첨단문명을 소재로 했지만 ‘풀밭·씨앗·봄비’와 같은 시어를 통해 서정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좋았다. 화자는 미세먼지로 인해 가택 연금을 당하지만, 일인 방송의 메시지는 자유로운 씨앗처럼 날려 누군가에게는 꿈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설레는 자양분이 되어 새순을 틔울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즉 생물이 아닌 현대문명이지만 쌍방 소통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되는 정보화 시대의 특성을 시조에 잘 녹여낸 것이다. 최종에서 세사람이 남아 겨루었다. 먼저 ‘말 굽는 밤’ 외 네편을 응모한 이의 작품에 눈길이 갔는데, 나름대로 참신한 감각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꼬이고 꼬인 걸까’나 종장에서 ‘그렇게 그렇게 섞여’라고 마무리한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밀도 높은 완결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차탁마한다면 한사람의 좋은 시조시인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로 ‘야생 사과’ 외 4편을 주목했다. 다섯편 모두 세련된 수사와 이채로운 이미지 구현 및 언어감각이 돋보였다. 그렇지만 작품마다 특이한 시어를 배치해서 시적 효과와는 별개로 돌출되는 점이 흠결이었고, 사유의 깊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울림이 미흡했다. 하지만 개성적인 작품을 쓸 수 있는 기량을 갖췄다고 보았다. 당선자는 당선의 영광에 값하는 가일층의 노력으로 시조문단을 융성케 하는 일에 일조하기를 바란다. 아깝게 골인 직전에서 못 미친 이들의 분발도 빈다.
----------------------------------------
[2020 매일신춘문예]시조 당선작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 / 여운(본명 나동광)
스치는 손길에도 부끄럼을 타는 비누 낯선 뱃길 따라 외따로 건너가서 여윈 섬 가슴에 묻고 마흔 해를 씻었다
병든 사슴 곁에 사슴이 와서 앉듯 파도가 일 적마다 파도를 움켜쥐고 비누는 제 몸을 풀어 흰 포말을 재웠다
마디 굵은 사투리에 향기는 시들어도 맨 처음 온 그대로 닳지도 않은 비누 거품은 섬을 안았다 옹이진 발 감춘다
여운(본명 나동광) :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입선. 구제활동가
[심사평] 시조시인 박기섭
문제는 새로움이다. 늘 처음이면서 또 다른 처음을 꿈꾸는 시! 요컨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다. 낯선 비유, 삐딱한 시각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시조는 선험의 형식을 따르는 이 땅 유일의 정형시다. 그렇다고 그 형식에 갇히거나 끌려 다녀서는 낭패다. 형식을 부리되, 작위나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움의 미학에 닿아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전제로 응모작들을 읽어갔다. 전국을 망라한 응모자의 지역 분포는 예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가파른 인구 고령화 탓인지 노년층의 응모 비율이 부쩍 높아졌다. 응모작 전반의 수준은 상향 평준화 추세가 뚜렷했다. 그러면서 사회현실에 직핍한 서정, 자연과 인간의 결속, 역사의식의 표출 같은 퍽 다양한 미학의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정독과 숙고의 과정에서 '팔분음표 일어선다'·'꽃총포 쏘아 올린다'·'독거 혹은 풍장'·'슴베를 뽑다'·'폐철선을 들다'·'장사리 서신'·'모란이 오는 저녁' 등이 눈길을 끌었다. '도예'·'거짓말'은 20대의 감각이 신선했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메가시티 동굴'·'덧니, 날아가다'·'욱', 그리고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 앞뒤를 가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차피 언어의 건축인 시의 완성도 측면에서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당선작으로 낙점했다. 당선작은 얼개와 짜임이 견고한 데다 맞춤한 비유와 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누"에 비유된 두 수녀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들이 물 설고 낯선 땅, 그것도 편견과 비탄의 섬 소록도에 온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스치는 손길에도 부끄럼을 타는" 20대에 와서, "마흔 해"가 넘도록 "제 몸을 풀어"낸 것인가? 그 답은 이 작품의 행간에 오롯하다. "낯선 뱃길" 끝의 "여윈 섬"을 안고, 그 섬의 "병든 사슴 곁에"서 가없는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산 것이다. "파도가 일 적마다 파도를 움켜쥐고" "마디 굵은 사투리에" 끊임없이 사랑의 "향기"를 베푼 것이다. "맨 처음 온 그대로 닳지도 않은 비누"가 한결 같은 그들의 정신을 표상한다. 실존 인물의 삶을 좇는 따뜻한 긍정의 시각을 높이 산다. 영예의 당선을 축하하며, 생을 건 역주를 기대한다.
---------------------------------------
[2020 부산일보신춘문예-시조 당선작]
진 헤어살롱 / 장남숙
스팸메일 지우듯 싹둑싹둑 잘라내도 낮 불 밝은 살롱은 루머(rumor)가 크는 온실 엉터리 가짜뉴스가 물들이며 치장이다
오랜 날 기다린 듯 끈 풀린 수다들이 해가 긴 오후만큼 끝없이 늘어지고 미용사 장갑 낀 손만 귀 닫고 한창이다
친친 감는 머리카락 뜬 소문 리플레이 들통 난 통화내용 진짜라도 어쩔 건지 까맣게 염색한 세상 알고 보면 새치다
정남숙 : 1964년 출생. 부산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졸업. 선암초등학교 교장.
[시조 심사평] 시조시인 전연희
시어 다루는 솜씨·시조 가락 수련 흔적 읽혀
‘모래시계 화석’ ‘객’ ‘호두의 집’ ‘설렁탕의 아침’ ‘차광목 속 성지’ ‘진 헤어살롱’을 두고 고심하다 최종적으로 ‘차광목 속 성지’ ‘진 헤어살롱’으로 압축했다. 두 편의 개성은 확연히 달랐다. 그 다른 점이 심사의 어려움이었다. ‘차광목 속 성지’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러나 도발적이고 생경한 단어 선택이 신춘문예의 특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어가 생쌀처럼 씹혀 끝내 내려놓게 되었다. 비유에 치우치다 보니 그래서라는 문제가 남는다. ‘진 헤어살롱’은 ‘미용실’이 아닌 ‘헤어살롱’이라는 시어로써 작품 전체에 진짜와 가짜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세태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점이 시선을 잡았다. ‘진’은 마지막 종장의 ‘염색’한 ‘새치’를 대조적으로 강하게 받쳐 주어 주제를 향한 시어들의 집중력을 읽을 수 있었다. 시어를 다루는 솜씨나 주제를 이끌어 가는 힘, 그리고 시조가락에 대해 수련을 한 흔적으로 읽힌다. 당선을 축하하며 시조단의 새 힘이 될 것을 기대한다.
---------------------------------------
[2020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고요한 함성 /윤애라
바람도 숨 고르며 앉아 쉬는 파장 무렵 청각 장애 부부가 하루를 결산한다 손목에 감긴 말들이 좌판 위에 떨어지고
하루 종일 졸고 있던 파 한 단에 이천 원 쪽파의 매운 인생 손톱 밑은 아려와도 숨었던 말문이 활짝, 꽃으로 피어난다
입으로 다진 기약 소리로나 묶던 다짐 저 고요한 소란에 싹둑 싹둑 잘려 나간다 반듯한 말들은 어디, 숨을 데를 찾고 있고
달콤한 고백인가 아내 얼굴이 환해진다 젖은 어깨 부딪치며 손으로 가는 먼 길 초승달 온몸을 기울여 남은 달빛 쏟고 있다
윤애라 : 약력=1963년 부산 출생. 2004년 자유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1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18년 백수문학신인상. 백수 시조아카데미 회원. 김천 문인협회 회원. 현재 논술 교사로 활동 중.
[심사평] 시조시인 염창권, 박권숙
인물들 능숙한 비유 통한 형상화 돋보여
예년과 마찬가지로 응모작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성했다. 시조의 국제화를 바라는 마음에 기대어 동봉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와 내용 면에서 우리 시대의 삶을 구체화하는가에 주목해 응모작을 선별했다. 5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이은영의 ‘맷돌’과 윤애라의 ‘고요한 함성’이었다. 먼저 ‘맷돌’은 안팎이 혼재된 세계를 자아 내부에 끌어들여, 다독이고 숙성시키다가 마침내 환하게 펼쳐내는 발상이 돋보였다. 이에 비해 ‘고요한 함성’은 노점상을 하는 청각 장애 부부가 몸으로 말꽃을 피워내는 모습을 능숙한 비유를 통해 형상화했다. 이를테면, “숨었던 말문이 활짝, 꽃으로 피”는 생명력이나 “초승달 온몸을 기울여 남은 달빛 쏟고 있다”와 같은 우주적 감성은 대상 세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작가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불어 다른 작품에서도 당선작에 버금가는 기량을 확인 할 수 있어, 이견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위로의 말과 함께 내년에 더 좋은 결실로 만날 수 있기를 부탁드린다.
--------------------------------------
[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백화점 / 김종순
Ⅰ.
성곽을 지키고 있는 제복 입은 기사들 목각 인형처럼 고개를 숙이지만 방향을 가리킬 때면 날렵한 선이 된다
Ⅱ.
층층마다 진열된 욕망의 소비재들 냉정한 핸드백들이 제 아무리 다짐해도 결국엔 모래성처럼 지폐들은 빠져나간다
Ⅲ.
첫 출근 했다는 신입사원 AI로봇 눈부신 조명만큼 상냥한 매너로 상품을 판독하면서 앞장서 걸어간다
김종순 : 1964년 함안 출생, 창원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경남대 교육대학원 졸업
[심사평] - 이우걸, 하순희 시조시인
섬세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적 소재 포착
예년에 비해 응모자와 응모 작품 수가 많이 늘었다. 직품 수준도 높아졌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품 경향도 다양해졌다. 전통 서정의 경향에서 실험적인 작품까지 여러 모습이고 소재도 한층 다양했다. 전반적으로 시조의 형식을 잘 살리면서 사물을 새롭게 표현하는 능력이 느껴졌다. 충분히 읽고 의논한 결과 우선 ‘미모사’ ‘우포늪’ ‘두번, 겨울 산행’ ‘결승전’ ‘백화점’ 5편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여러 번 읽고 소감을 나누었다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지만 시대적 울림이 부족한 작품, 무난해 보이지만 특별한 개성이 없는 작품. 수준이 고르지 않고 압축미가 부족한 작품, 비유가 신선하지만 서정성이 부족한 작품을 골라내고 나니 백화점이 남았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가장 현실적인 소재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제나 소재가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이다. 현대시조가 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섬세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문명을 노래하는데 적절한 문장이다. 백화점은 오늘의 자본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요와 공급의 현장이다, 그 현장을 시조로 포작해내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일을 이 작자가 해내고 있다. 다른 작품들도 수준급이다. 우리 시조의 내일을 열어 갈 의심 없는 재능이라 믿으며 대성을 빈다.
---------------------------------------
[2020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조]
미생(未生) / 김다솜
조간신문 머리말에 걸쳐진 새벽 냄새 해묵은 구두 위로 선선히 내려앉고 뜯어진 인생 한 자락 곱게 기워 접었다
품이 큰 외투 위에 위태로운 가방 한 줄 이력서 너머로는 볼 수 없던 회색 바람 지난달 경리 하나가 사직서를 써냈다
각이 진 사무실 속 구석진 나의 자리 수없이 훑어 내린 기획서 속 오타 하나 내 삶의 오점 하나가 툭 떨어진 어느 오후
김다솜 : -1996년 출생. 경기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예정
심사평-이달균
밀도 있는 詩語 운용이 몰입도 끌어올려 우리가 신춘문예를 눈여겨보는 까닭은 현재 신인들의 관심과 경향성은 어떠하며 미래 시조의 방향은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를 바라보는 척도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
[2020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야간비행* -김용균 어머니 생각 / 허창순
아득한 지평 어디 돌아오지 못할 비행(飛行) 희미한 손전등에 온몸을 의지했던 네 죄는 비정규직이다. 외주의 울에 갇힌
조종간 움켜쥐고 태풍을 건너던 너 관절이 부러지도록 날개를 저어가도 불 꺼진 관제탑에선 끝내 말이 없었다지
낙탄 속 죽지 아래 뜯지 못한 컵라면 부어오른 네 눈앞엔 거짓말들 나뒹굴고 수첩 속 빽빽했던 하루 생떼 같은 내 어린것
날개 다시 반짝 털고 하늘을 날자꾸나 사람만 있는 세상 너라는 별로 떠라 땅에서 못난 이 어미 네 법의 불을 켜마.
*생텍쥐페리 소설, 안전을 무시하고 야간비행 감행
허창순 : 1960년 전북 익산 출생, 경기대 한류문화대학원 시조창작학과 재학, 제11회 전국 가람시조백일장 장원
[심사평] - 김영란 시인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약자를 감싸 안으려는 따스함과 긍정의 힘
전국에서 정성스레 보내온 500여 편의 응모작품들을 살폈다. 정형시조의 기본에서 어긋난 작품들은 우선 제외 했다. 1차로 걸러낸 작품 중에서 너무 관념적이거나 식상한 고어 투의 작품들을 다시 내려놓았다. 김정애 문혜영 정두섭 허창순씨의 작품이 남았다. 김정애씨의 작품은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실력이 돋보이고 제목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으나 상투적인 표현이 많아 신선함이 부족했다. 문혜영씨의 경우는 사유의 깊이나 주제를 이끌어가는 힘은 있었지만 음보가 가끔씩 불안하고, 시조 가락의 자연스러움이 아쉬웠다. 정두섭씨는 전반적으로 매끄럽고 언어를 부릴 줄 아는 기교가 뛰어났다. 현대시조의 특징을 잘 살려 옷을 멋스럽게 입은 점도 매력적이고 읽을수록 말맛도 있었지만 조금 가벼운 느낌이 났다. 허창순씨의 작품은 지나친 수사적 기교도 없고 소재 펼치는 방식이나 시상 전개가 자연스럽고 마지막 수까지 이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하나하나 작품을 교차 비교하면서 한참을 고민하다 최종 허창순씨의 ‘야간비행’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약자를 감싸 안으려는 따스함과 긍정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2019년 대한민국에선 매일 평균 3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직업병까지 합한다면 하루 평균 5~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그 외 알려지지 않은 사례까지 더한다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무엇이 달라졌을까? 고故 김용균군은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참변을 당했다. 누군가 죽어야 안전해지는 나라가 아닌, 일하고 싶은 사람은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나라가 되길 희망한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인사를 보낸다. 더불어 아쉽게 탈락하신 응모자들께는 용기 잃지 마시고 재도전 하시라고 전하고 싶다.
---------------------------------------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유향나무, 탐라에 서다 / 이선호
추레한 낯꽃들이 작은 배로 몰려든다 와글대는 무리, 무리, 놉으로 팔려가고 댓바람 유향乳香을 싣고 품 넓은 옷 추스른다
서귀포항 찰진 목새 다목다리 헹궈낼 때 곱지 않은 눈길 너머 타관 땅, 타향 밥에 캐러밴 젖은 눈자위 무비자로 울고 있다
빗기(雨期)에 젖은 하늘 소름 돋는 겨울 냉기 포장박스 한뎃잠에 뼈마디 죄 욱신거리고 허옇게 버짐 핀 얼굴 몸 비비며 버팅긴다
내전으로 움츠러든 갈맷빛 잎새 하나 이에 저에 떠밀려서, 탐라까지 떠밀려서 꽃망울 만개할 봄날 오돌오돌 기다린다
이선호 : 1975년 충남 보령 출생. 한국성서대학교 졸업(신학전공, 사회복지학 석사) . 제35회 샘터상 수상, 중앙시조백일장 2회 입선. 현 아름요양보호사 교육원 전임강사
[시조 심사평] 심사위원 고성기, 홍성운
난민과 유향나무 통해 시대 아픔 공감
'호두 그리고 매미'(정경화)는 명징한 이미지와 투명한 시어가 절묘하게 결합된 가편이다. 호두와 말매미, 산돌과 호두 씨앗이 잘 엮였고, "말매미 더늠 대목", "푸른 이마 언저리쯤 두레박을 퍼 올리고"가 주는 울림이 컸다. 게다가 여름 한낮 말매미가 "공명실 한껏 조였다 단숨에 풀어낼 때", "온 우주가 익는 소리"에 이르러서 잠시 숨을 멈추게 했다. '운주사의 달'(이봉렬)에서는 시상을 자연스레 끌어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세 번째 수 종장에 이르러 "폐경기 겨울 산속에/ 확!/ 불 지른다/ 진달래가"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시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시편이 낯익다는 뜻이다. '일출'(김종순)은 새해 새 아침을 여는 작품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일출의 장면을 노트북 화면과 대비 시켜 그 효과를 세 번째 수 종장 "눈부신 절창 한 구절/ 뿌리째 뽑아 올린다"로 극대화하지만, 드문드문 의미망에 따른 음보가 다소 불안하고 긴장감이 덜했다. '유향나무, 탐라에 서다'(이선호)는 '지금·여기'에 기반을 둔 사회상을 유향나무를 통해 잘 그려냈다. 유향나무는 아라비아반도 예멘이 주산지다.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예멘 난민 사태'를 외면하지 않았다. 언뜻 거친 표현도 눈에 띄지만, 그게 작품의 현장성을 높이는 효과로 읽히기도 했다. 유향나무의 밑동이나 난민의 다목다리는 차가운 댑바람에 시리지 않을까. 무비자인 난민과 유향나무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아픔에 공감하고 평화를 희구하는 시인의 마음을 우리는 높이 샀다. '시인은 모름지기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며 이선호의 '유향나무, 탐라에 서다'에 힘껏 방점을 찍는다. 시조는 형식이라는 특수성과 시라는 보편성을 다 아울러야 한다. 건필을 기원한다.
--------------------------------------
[2020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시조 부문 당선작
키오스크(Kiosk) / 윤종영
일하다 밥 때 놓쳐 식당에 들어가니 반기는 사람 없고 무표정 기계들뿐 화면에 다양한 음식 단정하게 놓여 있다
유심히 훑어보며 빠르게 탐색한다 쉽지 않은 음식 주문, 사라지는 시장기 두 손은 공손해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안내문을 읽고서야 터치를 겨우 한다 카드로 결제하고도 두렵고 어색하다 전광판 낯선 배식구 멀거니 바라본다
윤종영 : 1969년생. 경기도 안양 거주. 한국방송통신대학 졸업. 시와길 회원 ◇시조 부문 심사평. - 이지엽 시조시인
첨단 문화현상 서정적 화폭 잡아내는 솜씨 탁월 처음으로 공모한 신춘문예에 600여 편이 넘게 응모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의 대체적인 수준은 기대 이상이었다. 중앙지(紙·誌)어느 곳과 견주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고른 수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