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후반 무렵. 그때 여섯 살이 채 안 된 북한 소녀는 쿠바에 있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푸른 하늘을 보았고 아바나의 푸른 바다를 보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쿠바의 그 하늘과 바다는 그의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다. 행복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쿠바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소녀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꿈많은 학창 시절을 보낸 소녀는 어느새 평양 외국어대에 진학한 숙녀가 됐다. 그것이 소녀 개인과 그 가족에게 끔찍한 아픔을 주게 되는 출발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가족과의 생이별의 출발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평양 외대 재학 중 공작원으로 선발된 그는 마카오 등지 등을 다니며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만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87년 11월 29일 그는 주범 공작원 김승일과 함께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115명이 타고 있었던 KAL 858기를 폭파한 폭파범이 됐고 체포된 그는 한국으로 압송됐다. 체포 과정에서 주범 김승일은 자살했고 그는 자살에 실패했다. 그는 혼자서 한국으로 압송됐다. 암담했다.
압송된 후 그는 대한민국 법정에서 1심, 2심, 3심을 거치며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년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쿠바의 푸른 하늘과 바다였을까. 아니었다. 가족이었다. 2012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원통한 것도 있었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인간인지라 ‘사형’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끝이구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맥이 탁 풀렸어요.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이 났어요. 특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나를 예쁘게 키워주셨는데 딸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씨. 그때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사면을 받았다. 사면을 받은 후 한국에서 산 30년 동안 그는 행복했을까. 과거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했던 기사를 찾아봤다.
다음은 《월간조선》 2009년 6월호 〈김현희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 제하 기사 앞부분이다.
〈…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며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김현희씨의 얼굴은 사진으로 봤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무렵이었던 2003년 11월, MBC 취재진에 자신의 집이 노출된 다음날 새벽 그곳을 떠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좌파 정권하에서 그녀는 “‘KAL 858기 폭파 사건’은 조작됐고, 김정일의 공작 지시는 없었다”는 대답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받았다.
그녀는 그 배후 중의 하나가 좌파 정권하의 국정원이었다고 주장하며 국정원의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이 자신을 가짜로 모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인 MBC 출연을 요구했고, 국정원 간부로부터는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좌파 정권하의 ‘싸늘했던 시대’가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살벌한 시대’는 그녀를 투사로 만들었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야윈 얼굴’이었다.…〉
다음은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사건 25주기 맞는 KAL 858기 폭파범 金賢姬/“국정원은 내가 수녀 되기를 원했다”〉 제하 기사 앞부분이다.
〈… 그녀는 남한에 온 지 10년 만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외피만을 놓고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북한의 테러를 입증하는 증거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그 증거를 없애버리고 싶은 세력이나 가짜로 만들어 북한을 이롭게 하고 싶은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려 왔고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좌파 정권과 좌파적 언론의 ‘가짜 만들기’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2003년 11월 젖먹이 아이 등 가족과 함께 집을 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혼생활 중 절반 이상의 세월을 바깥을 떠돌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내년 이맘때면 집 나온 지 10주년 기념식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최근에도 일부 좌파 언론은 김현희씨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지는 않고 TV조선 프로에만 출연한다고, 사실과 다른 공격을 하고 있다. 김현희씨는 국감에 출석해 ‘김현희 가짜 만들기’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국회는 그녀에게 출석을 통보하지 않았다.
김현희씨와는 상대적 입장을 가진 김만복(金萬福) 전 국정원장만 증인으로 출석시켰을 뿐이다. 좌파 언론은 주소 불명을 이유로 김현희씨에게 출석 통보를 하지 않은 국회의 직무유기를 지적했어야 옳았다. 김현희씨와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을 국회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김현희씨는 사건 발생 25주기를 맞아 가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도 “국회가 부르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가짜’가 아니라는 증거가 넘쳐남에도
두 기사를 인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고단한 삶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집을 나와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세력의 ‘김현희 가짜몰이’ 후 이명박, 박근혜 두 보수 정권이 출현했지만 바뀐 상황은 아무것도 없다. 사건 30주기를 맞아 11월 7일 있었던 그와의 인터뷰는 이런 우울함으로 시작했다.
― 혹시 올해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태영호 공사 인터뷰 보셨습니까.
“네, 봤어요.”
기자는 《월간조선》 2월호에서 태영호 공사를 인터뷰했다. 기사 제목은 〈북한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들 - ‘김현희 가짜설’을 반박하는 결정적 증언/“김현희 체류했던 오스트리아 정부 KAL 858기 폭파 사건 직후 북한 당국에 공식 항의”〉였다. 당시 태영호 공사는 북한 외무성 유럽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관련 질의응답이다.
〈— 나이도 같은데 학교 다닐 때 혹시 평양에서 김현희씨를 보지 못했나요.
“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김현희는 북한에서 대남 공작대로 갔거든요. 그 이후에 KAL기 사건이 났고 김현희의 부모나 가족들은 다 사라졌죠.”
— 혹시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까.
“못 들어봤어요.”
— 그럼 김현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KAL 858기 폭파 사건 후에 알게 됐군요.
“그렇죠. 제가 그 사건 당시 외무성 유럽국에 있었거든요. 김현희가 KAL기 폭파하기 전에 유럽을 거쳐서 갔는데 그때 오스트리아를 경유했죠. 그때 오스트리아 정부 당국이 김현희가 언제 오스트리아에 들어왔다가 언제 어떻게 해서 나갔다는 구체적인 정보와 자료를 입수해가지고 북한에 공식 항의했습니다.”
— 어떤 항의였습니까.
“‘왜 오스트리아를 북한 간첩 양성(養成)기지로 이용하느냐,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 때는 외교적인 조치를 가하겠다’고 오스트리아 당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에 항의했죠. 물론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 김현희씨가 가짜라고 믿는 사람들한테는 태 공사의 증언이 아픈 증언이네요.
“김현희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거는 인터폴에 그 자료가 다 있습니다. 인터폴에서 KAL기 사건 있은 다음에 자료를 조사해가지고, 김현희가 들어왔다 나갔다 한 나라들에서는 공식적으로 북한에다 항의하고 물밑에서는 상당한 그 외교적인 분쟁이 있었습니다. 제가 유럽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알죠.”〉
― 이렇게 김현희씨가 가짜가 아니라는 증거가 수없이 드러나는 데도 아직도 가짜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올해가 30주년인데요, 30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북한은 사건 자체를 인정도 사과도 안 하고 있죠. 저에게는 우여곡절이 많은 30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2003년 노무현 정권 때 본격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저에 대한 ‘가짜몰이’를 했어요. 이거는 그냥 사건이 아니고 안보 문제거든요. 안보 문제인데 이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가서 정치적으로 이용, 활용하려고 했고, 그것을 정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그런 세력(김현희씨가 가짜라는)이 있는 거죠. 저는 지금도 당시 KAL기 희생자 유족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그런데 가짜가 아닌 저를 자꾸 가짜라고 하니 답답하죠. 그럼 정말 진짜는 어디에 있나요?”
문서 아닌 구두(口頭) 사과
― 2008년 “나는 법원의 3심, 국정원의 4심을 거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5심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탄원서, 항의서, 호소문을 관계 요로에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뒤로 국정원의 사과 등 커다란 변화는 없었던 거죠.
“그때 제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고 국정원에서 내부 조사팀을 만들었습니다. 당장 언론에 나오고 하니까 그래가지고 조사한다 하고, 2009년 3월 말에 저희를 직접 검사랑 조사팀이 찾아와서 이렇게 인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노무현 정권 때 국정원, 경찰, MBC, KBS, SBS, 정의구현사제단, 대책위, 시민단체 등 여럿이 다 연합해가지고 가짜 만들기 공작을 했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 구두 시인이죠.
“네, 문서가 아니고 구두 시인하고 이거를 검찰에 넘겨서 처리하겠다고 하고는 계속 질질 끌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나 질질 끌다가 국정원은 잘못을 그렇게 인정하고도 자기네는 잘못이 없다고 살짝 빠졌어요. 자기들은 무혐의로 검찰에 넘겼나 봐요. 그러니깐 검찰에서는 수사도 안 했습니다. 그냥 내사로 무혐의 종결시켜 놨습니다. 완전 흐지부지해 놓은 거죠. 인정하고도 처리 안 하고 흐지부지해 놨습니다.”
― 이명박 정부였는데요.
“네, 이명박 정부는 안보 면에서는 그전 정부와 확연히 다를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검찰은 정말 수사 의지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북한이 저지른 항공기 테러 사건을 뒤집고, 공작원인 저를 가짜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뉴스로 알려진다면, 노무현 정부든 이명박 정부든 박근혜 정부든 국정원은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살아남기 힘들 것이 자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정원은 그냥 흐지부지 덮으려고만 했지 처리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처리를 안 하니깐 오늘날까지 그런 얘기(가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저를 가짜라며 시위하고 다니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가 정부가 바뀌니깐 요 며칠 전부터 저를 ‘17세 이전 탈북자’로 확신한다며 다시 의혹 제기를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에는 KAL기 사건은 전두환의 조작이고, 저는 안기부 공작원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습니다.”
― 공개적으로요.
“네, ‘통일뉴스’라는 인터넷 매체에다 제가 가짜라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뭐 적폐청산 한다고 야단이지만 사실 이 사건은 돈 몇 푼 받은 적폐가 아니잖아요. 이 문제는 나라의 운명과 관련되는 안보 문제거든요.
6·25전쟁 이후에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항공기 테러 사건 아닙니까. 이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저를 가짜로 만들고 북한이 저지른 테러라는 엄연한 사실을 뒤집으려 한 음모들은 정말 세계적으로 수치스러운 범죄거든요. 이전 정부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 안 했기 때문에 다시 그런 자들이 고개를 쳐든다고 생각합니다.”
― “김현희는 가짜다, 아니다”를 아주 간단히 증명할 수 있는 게 가짜라면 김현희씨가 남한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이 나타났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죠.
“네, 그런 일은 전혀 없었죠. 전혀 없었고 6·25전쟁 전에 어머니가 개성 분이니까 개성에 같이 계셨던 남한에 온 먼 친척들이 몇 분 계십니다. 그분들한테 어머니 어렸을 때 사진 받은 적은 있거든요. 그러니깐 제가 북한 사람이라는 게 사진도 나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 MBC가 2013년 1월 15일 2003년 방송에서 ‘김현희 가짜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서 간접사과를 했는데 다른 방송사에서도 그런 제안들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MBC는 그렇게 특별 대담 프로를 마련해 주었고, 사과한다는 말도 했죠. 그런데 MBC 대담 프로에서는 사과를 했지만, 정작 저를 가짜로 몰아간 그 〈PD수첩〉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사과를 안 했습니다. 그리고 KBS, SBS 등 다른 방송사들의 사과 제안은 없었습니다.”
― 그럼 MBC의 2013년 방송을 사과로 받아들인 겁니까.
“자기네들이 국정원이 우리 집을 가르쳐줘서 습격을 하고 방송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을 비판하는 자체 대담 프로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사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마유미의 삶-김현희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대담 프로가 진행되었습니다.”
‘가짜몰이’ 책임 반드시 물어야 한다
― 지금 문재인 정부는 과거의 문제들에 대한 적폐청산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노무현 정부에서 ‘김현희 가짜몰이’를 한 것도 적폐청산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당연히 그렇지요. 근데 노무현 정권 때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자신들이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노무현 정권 때는 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활용했고 제가 진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걸 했습니다. 그때도 그런 세력들이 얘기하는 게 저보고 안기부 공작원이니깐 나와서 얘기하라고, 양심 선언하라고 계속 플래카드 들고 전국을 다니면서 데모를 했어요. 보수 정권으로 바뀌고 나서 제가 언론에 나와서 얘기를 하니깐 그때는 ‘왜 가만히 있을 것이지 밖으로 나오느냐’ 이랬습니다.”
―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이네요.
“네, 완전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했죠. 요새 적폐청산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 본격적으로 적폐청산 하려면 자신들이 잘못한 것, 가짜몰이 한 것부터 사과하고 그리고 관련자 처벌도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렇게 정리를 해야만 지금 하고 있는 적폐청산 작업이 진짜 진정성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기네가 잘못한 적폐를 청산 안 하면 요즘 말하는 정치보복이 될 수 있죠. 사실 그 당시 노무현 정권 때 지금 문재인 대통령께서 비서실장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께서도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정부에서 정말 이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데 대해서는 사과를 하고 제대로 정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 지금도 국정원에 대해서 당시 ‘가짜몰이’에 참여했던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계속 요구하는 중입니까.
“네,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제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편지가 공개됐고 그 후에 기회될 때마다 방송에 나와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보수 정권에서도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처리가 안 됐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본격적으로 적폐청산 한다고 하고 있는데 이 문제도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 정부는 과거 노무현 정권과 성향이 비슷합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김현희 가짜 만들기가 가장 심했는데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런 일이 다시 시작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나 불안은 없습니까.
“그 당시에는 당연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겠죠. 하나는 저에 대해 가짜 만들기를 해서 국내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대 세력에게 타격을 주고 그로 인한 내부적인 결속과 효과를 기대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북한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이것을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이 KAL기 사건으로 인해서 북한은 테러지원국으로 지정이 됐고 그 당시 북한도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제재를 받으면서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동안 미국에다 KAL기 사건 이후에는 자신들이 테러를 한 적이 없으니깐 제발 해지해 달라고 애걸복걸했고 또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직접 미국에 가서 도와달라고 얘기를 했죠. 결국 20년8개월여 만인 2008년 10월에 북한은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가짜라면, 북한 입장에서는 테러지원국이 된 것이 얼마나 부당합니까.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20년 동안 참고 있었겠습니까.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었을 때 북한은 이를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간접적으로 KAL기 테러를 인정한 셈이죠.
그런데도 의혹 제기자들은 이러한 북한의 태도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냥 힘없는 저 개인만 무참하게 삶을 짓밟아 놓고 가짜몰이를 하니 얼마나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도 제가 증언을 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잖습니까. 제가 가짜라면 일본인이 북한에 납치된 사실들을 어떻게 낱낱이 열거할 수 있었을까요.”
가족 소식은 탈북자 등을 통해서 들어
― 지금도 혹시 2003년 공중파 3사의 의혹 제기가 본격화했을 때 느꼈던 신변의 위협을 느낍니까.
“그 당시 정부가 가짜몰이 할 때는 초기에 조직적으로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몇몇 출판사에서 제가 가짜라는 책들이 나오고 심지어 저를 가짜로 몬 일본 조총련하고 관련된 노다 미네오라는 사람이 쓴 책까지 출간됐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기자회견하고 데모하면서 저를 가짜라고 재조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저를 29만원에 수배하는 KAL기 진상규명대책위 명의의 수배 전단이 나돌기까지 했습니다.
국정원은 자꾸 이민 가라고 하고, 경찰은 경찰대로 타 지역으로 이사 가라고 종용했습니다. 저를 보호해야 할 국가 기관들이 앞장서서 그러더라고요. 그런 혼란스런 와중에 국정원에서는 MBC 방송에 출연하라고 자꾸 강요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결혼 이후 일체의 외부 활동을 끊고, 가정 생활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국정원 담당자는 ‘이미 지휘부의 결정이 난 사항이다. 출연하라’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정보기관에서의 지시 사항을 거부하면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미 민간인 신분인데도 저를 용서하지 않더군요. 그 이후부터 저에 대한 신변 위협은 노골화되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 국정원은 남편을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경기도 분당으로 불러냈었죠.
“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의 남편은 국정원으로부터 분당의 한 식당으로 호출을 당했고, 그날 야밤에 저희 집에는 카메라를 멘 MBC 〈PD수첩〉 제작진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저로서는 애들을 데리고 야간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제가 사는 곳을 국정원이 가르쳐줬더군요. 그렇게 해서 국정원이 결국 저를 쫓아낸 겁니다.
그렇게 쫓아낸 상태에서 MBC 방송에 출연할 것을 계속 요구했어요. 그런 행위는 국정원이 저를 지켜주는 기관이 아니라 우리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사는 집과 그 주변을 촬영하고 노출시켜 버렸습니다.
MBC에 이어서 SBS도 거주지 주변을 공개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민 가지 않은 혹독한 대가를 치른 거지요. 그리고 KBS는 2부작으로 대대적인 가짜몰이 방송을 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상파 방송 3사들의 이런 행위는 북한에다 저를 ‘어떻게 처리해 주세요’라고 주문이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한영 사건도 집이 노출돼서 그 앞에서 살해당했잖아요. 그렇게 저희는 쫓겨나갔습니다.
국정원은 제가 어린 자식이 둘이나 있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예상을 했나 봐요. 하지만 쫓겨나서 지금까지 만 14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체포되어 한국에 온 30년 중 거의 절반은 도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임시 거처에서 불안정하고 긴장되고 궁핍된 생활을 해왔습니다. 저와 저의 가족들을 추방하려는 정부와 관련 기관들의 행위는 대한민국이 정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맞는지 의심이 가게 합니다. 제게는 어떠한 인간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집에는 언제 돌아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직 해결이 안 됐으니 저도 모르겠습니다.”
― 자제분들에게는 아직 김현희가 누구다는 것을 얘기 안 했죠.
“예, 사건에 대한 것은 얘기를 아직 안 했습니다. 애들은 외가가 북한이다 정도는 알고 있지만, 엄마가 KAL기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저도 아직 애들에게 구체적인 사건 얘기는 안 했습니다. 언젠가는 얘기할 기회가 오겠지요.”
― 가족 얘기가 나온김에 여쭙겠습니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부친께서는 2004년, 모친께서는 2012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혹시 북한 가족들 소식을 따로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뭐 가족들 얘기는 탈북자 등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사건이 난 이후에 가족들이 바로 평양에서 추방돼서 고생했다더군요.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생각되고, 동생들은 북녘의 어느 하늘 아래서 당국의 감시받으면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무사히 살아 있기만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 지금도 사건 현장이라든지 30년 전 당시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릅니까.
“해마다 11월이 되면 마음이 무겁죠. 뉴스에 무슨 테러 사건이 보도되면 저도 가슴이 아프고 그 당시가 생각이 납니다. 특히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그때 상황을 재연해야만 하니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의 상황들 잊어버리고 싶지만…
― 괴롭기 때문에 그 상황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습니까.
“예, 사실은 그때 얘기를 하고 싶지 않고 저는 잊고 싶습니다만 근데 할 수 없지요. 강연이나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그때 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상기해야만 하니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많이 힘듭니다.
어쨌든 살아 있는 유일한 증인으로서 매번 증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저를 살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강연과 인터뷰 장소에서 저는 전두환 정권이 아닌 북한 정권이 KAL기를 폭파하였고, 저는 북한 공작원이었다고 틀림없이 말했습니다.”
― 담당 수사관이셨던 분과 결혼을 하셨는데 연애를 한 1년 정도 했죠.
“2년 정도 했습니다. (결혼) 승인이 안 떨어져서요.”
― 결혼 전에 국정원은 왜 수녀가 되길 권유했던 건가요.
“아, 그때는 안기부였죠. 뭐 꼭 수녀가 되라는 것보다는 안기부에서는 제가 한국 사회에서 정착 생활하는 방안을 계속 생각했나 봅니다. 그중의 하나가 수녀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수녀 생활은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는 게 좀 쉬우니까 수녀도 하나의 방안에 넣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고 또 수녀가 되는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더군요. 제가 사회의 밀알이 되는 그 길을 선택하기에는 그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도 당시 어떤 종교에 귀의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나요.
“그 당시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세직 안기부장이 저를 한번 보시더니 목사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통해서 성경 공부 했고 또 어려울 때 제가 많이 하나님에 의지했습니다.
재판받을 때도 그랬고요. 그때 많이 심적으로 힘들었거든요. 항상 기도하고 성경책 보면서 마음을 좀 다스렸습니다.”
― 지금도 교회를 다니나요.
“아닙니다. 현재 교회에 직접 나가지는 않고 방송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접합니다.”
― 집에 성경책은 있으신 거죠.
“당연히 있죠. 힘든 일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읽게 되고 위안이 됩니다.”
― 한동안 방송 활동을 많이 하면서 혹시 주변 분들이 더 많이 알아봐서 불편해진 건 없었습니까.
“글쎄요. 제가 사는 임시 거처의 주변 분들은 아마 저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곳에 오래 있었으니까 알게 됐을 거고요, 2009년부터 방송에 다시 출연하면서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제법 있더군요.”
―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하진 않으셨고요.
“불편한 적이 있었지요. 제가 가짜몰이를 당하고 있을 당시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싸늘한 눈빛과 굳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곤 했어요. 그때 부정적인 미디어의 힘이 얼마나 큰지 피부로 느껴지더군요. 그러나 그 후 저의 투쟁 모습들에, 언론을 통해 제가 진짜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제게 동정과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가족들이 그리울 때
― 이런 질문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북에 계신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이 떠오를 때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야 뭐…. 저 때문에 고통을 받은 가족들을 생각하면 항상 미안하고… 걱정되고 그렇죠(눈물).”
― 죄송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특별한 계획이 있다기보다는요, 지난 정부가 가짜몰이를 하고 제집에서 쫓아낸 지 만 14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부는 언제까지 팔짱만 끼고 눈을 감고 있을 겁니까?
가짜몰이를 한 정부와 기관, 단체들은 적폐청산의 대상이 될 수 없나요? 이 일이 좀 제대로 정리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현 정부로부터 사과와 그들의 처벌을 받아내고 싶습니다.”
― 90년 4월 사면 이후부터 수필이랑 수기집을 출간한 걸로 압니다. 그게 어떤 내용이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때는 안기부에서 제가 사면을 받은 이후에 붙잡힌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정착금도 없으니까 사회 나가서 생활하기 위한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차원에서 수기를 쓰라고 해서 수기를 썼습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책 1, 2권에는 사건과 북한에서 살아온 생활을 썼고, 그다음에 쓴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는 제가 여기 와서 한 1, 2년 동안 강연 다니면서 느낀 점, 북한과 비교해서 느낀 점들을 썼어요.
다음으로는 《이은혜 그리고 다구치 야에코》를 썼죠. 제가 북한에서 일본에서 납치해 온 다구치 야에코와 같이 생활하던 때를 썼습니다. 그리고 또 일본 소설을 몇 권 번역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 작가의 소설책으로 《해안열차》 《사랑은 혜성처럼》 《이별의 시작》의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됐습니다.”
― 97년에 그 책들로 받은 인세 8억5000만원을 희생자 유족들에게 줬는데 혹시 주변의 강요 같은 게 있었던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기책이 생각 외로 잘 팔려서 인세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유족분들을 위해 뭔가 해드리고 싶은데 할 수 있던 것이 달리 없었습니다.
그냥 인세라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유족분들과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그분들은 저의 인세를 받아주셨고, 한동안 눈물을 흘리시더니 잘살라고 격려까지 해주셨습니다.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깊은 상처와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인 제게 베푼 그분들의 따뜻한 배려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 KAL기 위령탑이 양재동 시민의 숲에 설치되어 있지요. 최근에 위령탑에 다녀온 적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지난 10월 하순에 일본 모 방송국에서 KAL기 사건 30주년을 맞이하여 취재를 왔는데 그때 위령탑에 함께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돌아가신 분들의 존함이 비석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저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 TV 시청은 많이 합니까.
“많이 하는 편이죠.”
― 외부 활동을 하기 어려우니까 자연스럽게 TV 시청 시간이 많은가 봅니다.
“네.”
그가 집을 나온 14년 전이나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8년 반 전이나 지금 그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국정원의 공식 사과는 없었다. 그가 추억하는 행복한 아름다움이 유년 시절 본 아바나의 푸른 바다와 하늘이 아닌 대한민국의 바다와 산과 강과 하늘이 될 수는 없는 일일까.⊙
첫댓글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소위 "가짜 모리" 를 해서라도 정치에 이용하려는 사이비 청치 깡패들이 아직도 벌건 대낮에 횡행하며 사기를쳐도 괜찮은 나라. 이게 나라냐? 국민 소득이 올라간다고 선진국이 되는것이냐? 택도 없는소리다. 명실 공히 선진국이 되기에는 멀고도 멀었다.제발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