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장군 탄금대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1.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 설명
임진왜란 당시 가장 무능한 전투 중 원균의 칠천량 해전이 있고,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있습니다. 전투는 중반
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평야에서 벌어졌는데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에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봅니다. 임진왜란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며 일본군 예상 1만8천 정도와 조선군은 여러 의견이 있지만 기록으로
보아 8천일 확률이 높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원 차가 아닙니다. 양쪽 측 남은 기록엔 조선군이 고지에 진을 쳤다 그리고 기병들이 평지로 나가
적진에 돌격했다는 것 입니다. 신립은 일본의 좌우군은 기민하지 못하고 중앙만 신경 쓰며, 보병은 후방에 둔 채
기병대만 좁고 장애물이 많으며 논이 많아 기동에 불리한 평지로 돌격시켜 일본군을 포위하려다 조총에 쓰러졌
고,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싸우다 강가로 몰리게 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김여물 역시 따라
투신했습니다.
신립 장군은 당대 최고의 장수였으며, 북방의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기마병으로 많은 승리를 한 경험을 과신하였
는지 전쟁터 여건의 연구가 부족했고 전투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또 이일과 김여물의 만류에도 사방
이 놓인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지금의 문경 새재를 버린 점을 패배의 요인으로 봅니다.
2. 탄금대 전투 패전원인
지금도 신립의 패전원인은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신립 자체는 원균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우수한 장군이었는데
납득이 어려운 전술을 썼기에 처녀귀신에게 홀렸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이해가 안되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니
귀신에 홀려서 그랬다는 설명까지 나오는 듯 합니다.
다만 8,000 중 대부분은 농민군이었기 때문에, 2개 나누어 병진 중인 일본군을 혼자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군을
반으로 나누어야 할지 압도적 숫자로 하나씩 신속하게 처리할지를 고민한 듯 합니다. 당연히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죠 말도안되는 억지비판이나 인격까지 모독하는것만 아니라면요. 신립장군이 아쉬웠던 점은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고려없이 무시한 점 그리고 왜군을 너무 얕잡아봤던것이죠.
3. 신립 장군의 이력
이 전투로인해 조선군은 크나큰 손실을 입었던것또한 사실이죠. 하지만 무작정 패배했다고 비판만 하시는분들도
생각은 하셔야할것이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누가 감히 28만이라는 대군이나 바다를 건너올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신립장군도 나름 당대의 명장이었고 북방의 거친 여진족들에겐 공포의 대상일정도로 승전도 많이 거둔 장수였죠.
아쉬웠던 점 비판할점도 물론있으며 신립장군의 생전의 전공과 적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객관적인
군사력의 열세에서도 용감히 싸운것은 리스펙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원균과 비슷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
는데 그건 정말 잘못된 시각입니다.
당시 상황은 문경새재에서 막는다고 수비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죠 문경새재만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로 우회를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죠. 그럼 싸우지도 못하고 수도 가는 길을 열어주니 문경새재에서 수비할수
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신립의 부대는 급조한 상황이라 정예병력은 얼마 안됩니다. 신립이 북방의 병력을 끌고
내려왔다면 모르겠지만 한성에서 병력을 모아서 내려갔기 때문에 여진족과 싸울때 전투력은 나오기 힘들었죠.
이일은 일본을 무시하다 정산차린 케이스. 신립은 이일의 말과 자기 부장의 말을 무시하고 적이 자신보다 약하
다고 생각해 닥돌하다 패한 케이스. 그래도 신립과 원균 중 누가 명장이냐 말하면 신립 이라고 생각합니다.
4. 신립, 김여물의 아들들
여담으로 탄금대에서 같이 죽은 부장 김여물의 아들이 바로 인조반정의 주모자인 김류이고 인조반정의 공신 중
한 명인 신경진은 신립의 아들 입니다. 이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생사를 같이 한 셈으로 탄금대에서는 신립이 대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지만, 인조반정 때는 그 반대로 신경진이 김류를 보좌해서 인조 반정을 일으켰습니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