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정착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북한 출신인 장모님이 해주시는 북한 음식은 여전히 입맛을 돋운다. 어릴 때부터 입에 맞는 음식은 아직도 새삼스럽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들을 먹어도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공백은 늘 남아있는데 북한 음식이 그것을 채워준다.
북한 인권 문제 등으로 해외 여행을 꽤 많이 하는 편이지만 현지 음식에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외에 나간 지 하루가 지나면 어김없이 한국 음식이나 동양 음식을 찾게 된다. 그래서 해외 출장을 마치고 우리나라 공항에 들어서면 바로 찾는 곳이 북한 냉면과 유일하게 옥수수국수를 하는 중국 음식 양꼬치 가게다. 어떤 때는 냉면보다 옥수수국수가 더 속을 편하게 해준다. 그래서 냉면보다 더 싼 옥수수국수를 먹기 위해 양꼬치 집을 찾는다. 양꼬치는 중국으로 탈출했을 때 처음 먹어봤다. 그때는 옥수수국수가 아닌 중국 전통 냉면을 먹어봤다. 한국에 있는 양꼬치 식당 대부분은 후식으로 옥수수국수를 제공한다.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 마을은 북한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벼농사가 쉽지 않아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면서 옥수수 음식이 중국 동북 지역에 전수되었고, 그 가운데 북한 주민이 가장 흔하게 먹는 옥수수국수가 조선족 사회에도 알려졌다. 옥수수국수를 북한에서는 ‘강냉이국수’라고 부른다. 내가 옥수수국수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77년 8월이었다. 할아버지가 정치범으로 숙청되면서 요덕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면서부터다. 평양에서 상류생활을 했던 나는 평양 옥류관 냉면을 주로 찾았고 냉면은 당연히 옥류관 냉면이라 생각했다. 옥류관 냉면은 메밀을 주 원료로 쓰기 때문에 일반인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리고 평양에 거주한다고 해서 냉면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다. 내가 옥류관 냉면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조부가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부가 숙청된 이후 우리 가족은 북한에서 가장 오지 중 하나인 함남 요덕군에 위치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 하루아침에 우리 가족의 주식은 백미(입쌀)에서 옥수수로 바뀌었다.
평양에서 옥수수는 채 여물기 전 간식으로 먹던 달달한 맛이 별미였다. 그래서 옥수수밥도 비슷한 맛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옥수수는 흡수력이 떨어져 옥수수만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영양실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옥수수밥은 일단 처음 먹는 사람들은 소화가 되지 않아 두 달 이상 배앓이를 한다. 주로 설사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 과정에서 영양보충이 안 되면 바로 영양실조 단계로 넘어간다. 이른바 ‘펠라그라’로 불리는 영양실조인데 이게 심화되면 죽거나 폐인이 된다.
수용소 생활 3개월간 옥수수를 소화시키지 못하다가 겨우 적응되기 시작했을 무렵 옥수수도 없어서 못 먹는 상황이 된다. 부족한 단백질은 개구리, 쥐, 뱀을 잡아먹거나 각종 벌레로 보충해야 했다. 죽도록 강제노역을 하고 나면 옥수수밥도 단맛이 날 정도로 맛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은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넘기기가 힘든 것이 옥수수밥이다. 하루는 요덕수용소 구읍지구에서 동고동락했던 친구의 누나가 사망했는데 그 시체를 묻는 일에 호출됐다. 나이 든 사람들은 힘이 없어 관을 들지도 못해 수용소 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친구들이 장례식에 동원된다. 친구의 누나는 참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와서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던 처녀였다. 그가 영양실조에 걸려 사망에 이르자 온 마을이 슬픔에 잠겼다. 추운 겨울 깊이 얼어버린 땅을 하루 종일 곡괭이로 파서 그 누나를 묻고 돌아오자 수용소 작업반에서 장례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옥수수국수를 제공했다.
나는 그때 장례식에 동원되면 옥수수국수가 나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왜 사람들이 너도나도 사람 파묻는 데 가겠다고 경쟁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옥수수밥만 먹다가 처음으로 옥수수국수를 먹게 됐는데 그 맛이 평양에서 먹던 옥류관 냉면처럼 얼마나 맛있던지. 단무지와 김치 쪼가리가 전부인 옥수수국수였지만 별미였고, 그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수용소에서 옥수수국수는 이런 특별한 날에 제공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옥수수국수를 먹으려 험하고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생명이 위험한 금광 채굴장이나 석회석 광산에는 옥수수국수가 간식으로 공급되기도 해 죄수들은 그것을 먹으려 목숨 걸고 자원하기도 한다.
10년 만에 수용소에서 풀려나와 요덕군 소재지에 배치받고 옥수수국수를 난생처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옥수수가 주식인 함경도 지역에서 옥수수국수는 평양의 냉면처럼 주민들이 꿩 대신 닭처럼 냉면 대용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수용소에서는 옥수수국수 한 그릇이 천금같이 귀했지만 수용소 밖에서 옥수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어서 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옥수수국수는 나의 관심 밖에서 사라져 갔다. 한국 사회에 정착한 지 15년이 지났을까. 친구가 소개한 서울 대림동의 조선족 식당에서 양꼬치구이와 함께 후식으로 나오는 옥수수국수를 접했을 때 맛본 진한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 힘들었던 시절, 친구의 누나를 땅에 파묻고 포상으로 먹었던 옥수수국수가 아닌가. 전혀 예상치 못한 한국에서 맛본 옥수수국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옥수수국수는 아직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다이어트 음식으로는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옥수수는 체내 흡수율이 떨어져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옥수수국수 다섯 그릇 이상을 먹어도 그것 때문에 비만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3개월 만에 사람을 ‘날씬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음식이 옥수수국수다. 옥수수국수에 담긴 쓸쓸한 추억은 아직도 나를 아련한 기억 속으로 인도한다.
이제는 속이 더부룩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옥수수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나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추억의 음식이 어느새 치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옥수수국수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는 다수의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옥수수국수만큼은 거의 남기지 않고 먹는다.
/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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