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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루카 24,35-48
부활의 기쁨을 위해 반드시 준비할 것:
진리(하늘의 뜻)는 은총(부활의 기쁨)을 담는 그릇
영화 ‘나이야드’(2023)는 다이애나 나이야드(Nyad)의 2015년 회고록 『길을 찾아라』를 원작으로 합니다.
이 영화는 2013년 상어 우리의 보호 없이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수영한 최초의 사람이 된 미국인 장거리 수영 선수 다이애나 냐드(Diana Nyad)의 전기 드라마입니다.
나이야드는 책에서 본 한 문장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말해봐. 단 한 번밖에 없는 이 삶을 걸어서 네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약속을 취소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게 일상이 된 다이애나는 어느새 60세에 이르렀습니다.
그녀가 이루고 싶은 것은 이제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어렸을 때의 꿈을 보게 되자
생각이 바뀝니다.
30년 전에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을 수영으로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이애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코치의 지원을 받아 30년 전에 실패한 쿠바에서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 바다 수영을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을 다시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에서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가 중요합니다.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는 ‘그리스의 물의 요정’을 뜻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지어준 그 이름을 굳게 믿고 도전에 도전을 이어가다 5번째에 성공하여 미국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나이야드가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동료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못할 도전을 꿈꿨고 그것을 위해 많은 전문가가 함께했습니다.
코치와 배와 바다 전문가가 필요했고 상어 퇴치 전문가와 독 해파리 전문가, 그리고 의료팀 등도 필요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꿈을 돕는 자에게 하늘도 돕는 자들을 보내주십니다.
도움은 은총입니다.
그 은총을 위해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방향입니다.
꿈이고 하늘의 뜻입니다.
하늘의 뜻을 들어주는 자라야 하늘이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운전도 못 하는 아이에게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은총을 주시는 분의 뜻을 따를 결심을 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사명을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제가 ‘돈쭐’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던 때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월세도 못 내고 있던 차에,
돈이 5천 원밖에 없는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은 내어줬던 치킨집 사장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형이 프랜차이즈 본사에 보낸 편지가 알려지면서 이른바 돈쭐의 주인공이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선행이 알려진 뒤 따뜻한 마음을 악용해 협박하거나 손찌검하는 사람들로 마음고생했습니다.
사장은 그 와중에도 조용한 선행을 계속 이어왔다고 합니다.
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사장이 가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하면서 오히려 내어주는 기쁨에 중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돈을 주는 이유는 단지 그 형제에게 선행을 베푼 것만 보고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도 앞으로 계속 그런 선행을 할 뜻을 보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이에게 나타나시고 은총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갈 방향, 곧 이웃 사랑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은총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자녀 앞에 그릇을 먼저 준비시키지 않고 음식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복음: 루카 24,35-48
아무것도아닌우리인간들과끝까지접촉하시고소통하시는주님!
초세기교회부활하신예수님에대한믿음여부는참으로큰관건이고,그에대한합당한교리적설명은
너무나도 큰과제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했던 특별하고 기이한 예수님 부활사건이었기에 일반대중은물론
예수님을 추종했던 사도들조차도 믿음을 지니기가 어려웠던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부활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합니다.
배신과 불신, 완고한 제자들의 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앞에 발현하실 때마다 먼저평화의인사를건네십니다.
“평화가너희와함께!”
뿐만아닙니다.
치욕과수모, 혹독한 고통의 흔적인 당신의오상, 저같았으면 절대 누구가에게 보여주고 싶지않을
손과발의 깊은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만져보라고 손과 발을 내어주십니다.
“내손과 내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나를 만져보아라.”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것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먹을것이좀있느냐?”
제자들은 우선 급한대로 자신들이 먹고남은 구운물고기 한토막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그들이 보는앞에서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또다른 존재방식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어디에나 등장하시는 분입니다.
그까짓 물고기한토막 드셔도되고 안드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부활이 참된것임을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이기위해 보잘것없는
물고기 한토막을 그들앞에서 야무지게 잡수신 것입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예수님께서, 한인간이 건네시는 구운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 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토막을 맛있게 받아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의 혹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강론>
(2024. 4. 4. 목)(루카 24,35-48)
<유령>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6-43).”
1)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 되어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실제 몸으로 살아계시는 분이셨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지만, 혹시 예수님의 유령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심에 대해서 사도들은 “우리도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는데, 그분은 유령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계시는 분이셨다.” 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은 유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것도,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상처를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토마스 사도’ 이야기에서는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는데(요한 20,24-27),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 유령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2) 사도들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보긴 했는데, 유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서워했습니다.
사도들이 무서워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유령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라는 말은, “그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해서 몹시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사도들은 왜 유령을 무서워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본능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유령은 인간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해 있고,
살아 있는 인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그 ‘다르다.’는 점 때문에 누구든지 유령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고 해도,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신 것이라면 누구든지 무서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전에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면 누구나 다 무서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존재는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3)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4,24-27)”
이 이야기에서는, 사도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무엇’을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겁에 질렸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 때문에 놀라기는 했겠지만, 겁에 질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무서워한 유령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존재,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강한 존재입니다.
<귀신보다는 사탄 쪽에 더 가까운 존재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주님이시며 스승님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4) 유령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 있는 존재’이고, ‘생명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생명력의 근원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미신을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생명력 없는 ‘죽은 존재’를 섬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면서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니면서도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을 반복하셨을까?
사람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부활 후에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방식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셨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