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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6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루카 11,29-32
성체를 바라볼 자격: 역행자 되기
오늘 복음은 믿기 위해 표징만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에 대한 질타가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표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는 인간을 믿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피 흘리심입니다.
그런데 이 표징을 이해하게 만드는 힘은 ‘말씀’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체성사 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죽으면 성사를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꾸 표징만을 요구한다면 이는 악한 세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개신교는 세례성사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성사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에만 집중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개신교는 주일 예배 참석률이 80%가 넘었습니다.
천주교는 주일 미사 참례율이 20%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은 더 낮아졌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저는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믿기 쉬운 이유는 성사보다 말씀에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물론 더 큰 이유는 시스템의 차이에 있습니다. 개신교는 소외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누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단체에 들지 않았다면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소속감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스템적인 문제가 가장 큽니다.
그다음이 말씀보다 성사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남방 여왕의 예를 드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남방 여왕은 에티오피아 여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먼 곳에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지혜를 배우러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만약 지혜를 배우려는 노력이 부족하면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눈이 열려 성사에서 표징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표징만 찾는 이들은 악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또 이런 예도 말씀하십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말씀 설교를 통해 얻는 지혜는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회개 먼저 하고 성사로 나아와야 합니다.
말씀이 죽으면 성체도 죽습니다.
그래서 성체를 왜 영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 사실 성사보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사가 보이고 냉담하거나 신자들이 성체성사가 없는 타 종교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혜를 얻어 회개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싶지 않으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책이나 영화, 연설 등은 다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있다면 자청(일명 ‘자수성가한 청년’)의 『역행자』입니다.
젊은 청년 자청은 엄청난 인플루언서입니다.
그가 유튜브에 책 소개만 하면 안 팔리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절판된 책이 다시 서점에 꽂힙니다.
학교에서는 맨날 꼴찌만 하고 게임만 즐기며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청년이 어떻게 10년간 월 몇억씩 벌어들이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을까요?
사람을 알기 위해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이 책에 7단계로 썼습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단계: 자의식 해체 – 내 안에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동물적 생존본능인 자의식을 믿지 않게 됨;
이는 우리로서 ‘회개’에 해당하고 이를 위해 이미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책을 읽는 과정이 필수적임.
2단계: 정체성 만들기 –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음; 이는 ‘세례’와 같음.
3단계: 유전자 오작동 극복 – 정체성을 방해하는 자아의 방해와 싸워야 함; 이는 ‘견진’과 같음.
4단계: 뇌 자동화 –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견진 과정의 연속으로 예를 들면 “2년간 2시간씩 읽고 글쓰기 하라” 등의 규칙을 세움; 이는 영혼의 성 2궁방에 해당하듯,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정하는 것과 같음.
5단계: 역행자의 지식 –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 이를 위해 타이탄의 도구들을 모으라 조언함; 이는 견진에서 자기를 이기는 과정을 위해 ‘묵상기도’를 하라는 것과 같음.
6단계: 경제적 자유를 얻는 구체적 루트 – 자기와 싸워 고생하는 이유는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함.
의미 없는 싸움은 의미 없음; 자기와의 싸움이 결국 이웃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과 같음.
7단계: 역행자의 쳇바퀴 – 자기를 극복하고 실력을 키워 이웃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 우리로서는 ‘회개-세례-견진-성체’의 과정을 계속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과 같음.
세상이 말하는 대부분의 지혜가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웃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기 위해 성사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을 얻으려면 자의식, 곧 자아를 해체해야만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미워할 줄 알게 되었다면 이미 회개를 한 것이고 그만이 표징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한 발’이란 삽화가 있습니다. 엄마 늑대가 수십 발의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며
한 발을 맞고 쓰러져 있는 새끼 늑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그림입니다.
만약 새끼 늑대가 자기 아픈 것만을 생각한다면 자기를 보호해주기 위해 맞은 엄마의 수십 발의
화살의 아픔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를 위해 흘린 피의 의미, 곧 표징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 표징을 알아볼 수 없다면 나도 엄마와 같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잊고 버리는 것으로부터 표징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얻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표징만 요구하니 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체를 이해하기 위해 말씀이 지혜로 충만해져야 성체에서 떠나지 않는 신자들이 더 많이 탄생하게 되고 그러면 냉담하는 신자가 줄어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6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루카 11,29-32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공생활 기간 동안 드러난 예수님의 언행은 그야말로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고 망연자실 슬퍼하는 과부의 모습에 예수님의 손은 저절로 들썩이는
과부의 어깨를 어루만집니다.
아들의 관을 쓰다듬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울지 마라. 내가 살려주겠다.”
어리디어린 나이에 절명한 회당장 딸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오랜 나병으로 온몸이 종기투성이인 나병 환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인 나병 환자를 마주한 예수님 눈에서 자동으로 연민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상처와 진물이 흐르는 그의 환부에 손을 대시며 속삭이십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을 향해서는 더없이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셨지만, 반대로 상대가 위선적으로 이중적일 때, 완고하고 사악할 때,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태도는 돌변하십니다.
던지시는 말씀이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날이 서 있습니다.
강력한 경고 말씀이요, 강력한 철퇴 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매료된 군중의 수효는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구름 군중이 몰려온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그 모습에 기분이 우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몰려온 군중에게 감사의 표현을 먼저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먼길 마다하지 않은 여러분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꺼이 여기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웬걸, 말씀이 날카로운 가시 같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이면에는 당신을 향한 믿음이나 신앙 고백은 조금도 없이 그저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과 치유 활동에만 연연해하는 군중의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기적의 도구로 전락시킨 군중의 초보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이스라엘 군중과도 같은 호기심의 대상, 사주 관상을 잘 보는 무속인으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강론>
(2023. 10. 16. 월)(루카 11,29-32)
<표징>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여기서 ‘악한 세대’ 라는 말은,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표징 같은 것이나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오늘날의 안 믿는 사람들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청하는 것과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판관 기드온의 이야기는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청한 일의 좋은 예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하여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기드온이 또 말하였다.
‘참으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판관 6,16-17)”
주님께서는 기드온이 청한 대로 그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판관 6,20-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5-18).”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기드온의 경우는, “표징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제자들의 경우는, “표징이란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일을 확증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카나의 혼인 잔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라는 말은, 안 믿고 있던 제자들이 기적을 본 다음에 비로소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기적(표징)을 보게 되면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 저자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알고 있었던 일꾼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믿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고 그 기적이 표징이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 라고 꾸짖으신 사람들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표징을 보여 주어도 그것이 표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은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짜 메시아로 생각한 자들이고,
가짜 메시아이기 때문에 표징을 보여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표징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해 보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유대인들은 바로 그렇게 요구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 15,31-32).”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또다시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표징은 없다.” 라는 말씀이고, 동시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표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믿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표징이 될 뿐입니다.
부활 자체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표징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이 세대 사람들은 유죄” 라고 증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요나보다 더 큰 이” 라는 말은, 예수님은 솔로몬이나 요나 같은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위대하신 분’, 즉 ‘메시아’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으로서(요한 14,6), 당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님의 복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요나는 멸망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한 예언자였을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