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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묵상글(강론글). 영원한 생명이란 (요한 17,3)
1차(260518. 20:45), 2차(05:50), 3차(00:00 05:45 ~ 05:59, 16:45 ~17:05)
19일 묵상글, 18일 20시 4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 지방에 일이 있어 2차분은 핸폰으로 내려 가면서 일부를 올리고
16시30분이후 시간이 되여서 노트북으로 다시 정리를 하고 2 ~ 3차분을 함께 추가로 올리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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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9일 화요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영원한 생명이란 (요한17,3)
제1독서<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사도20,17-27)
17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18 그들이 자기에게 오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9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20 그리고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회중 앞에서 또 개인 집에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
21 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22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5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26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27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17,1-11ㄴ)
예수님께서는 1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11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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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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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7,1–11ㄴ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도록
아들을 영광스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어
영원한 생명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가 단지 개인의 간구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일치와
구원의 신비 전체를 드러내는 기도임을 보여 줍니다.
대 바실리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분리된 힘들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생명과 영광의 친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은
두 분 사이에 경쟁이나 거리감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신적 생명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따로 떨어진 영광을 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오신 생명과 진리를
세상 안에 완전히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의 양을 뜻하지 않습니다.
대 바실리오의 시선으로 보면
이 앎은 생명에 참여하는 앎입니다.
곧 하느님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앎입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의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맡겨 주신 일을 완수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영광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나 힘의 과시가 아니라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끝까지 살아낸 충실함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도
그 길을 실패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이루는 사랑의 길로 보십니다.
대 바실리오는 바로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영광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보다
진리와 사랑의 충실함 속에서 더 빛난다고 보았습니다.
문화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문화가 무엇을 영광이라 부르는지를 다시 묻게 합니다.
세상은
높이 드러남, 빠른 성공, 강한 영향력을 영광처럼 말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일을 끝까지 살아내는 충실함을 영광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자기를 과시하는 문화가 아니라
맡겨진 것을 진실하게 살아내는 문화입니다.
기억과 언어와 예술, 관계와 일상 안에서
무엇이 참으로 빛나는가를 다시 묻는 문화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 남아 있지만
이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이 장면은 깊은 위로를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맡기십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흔들리고 불안해질 때에도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성시간의 영성은 바로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나를 품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화요일 성령의 날에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영광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가?
사람들의 인정인가,
내 성취인가,
아니면 하느님께 받은 삶을 끝까지 충실히 사는 것인가?
나는 하느님을 아는 것을
정보처럼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아버지를 향해 눈을 드시며
우리도 그 같은 방향 안에서 살도록 이끄십니다.
주님,
제가 영광을 잘못 찾지 않게 하시고
하느님을 아는 참된 생명 안에 머물게 하소서.
겉으로 드러난 성공보다
맡겨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하시며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더 깊이 아는 은총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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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작은 어머님께서 ‘사브레 과자’를 사 주셨습니다. 둥근 통을 열면 고소한 향이 퍼졌고, 하나씩 꺼내 먹으면 입에서 사르르 녹았습니다.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먹던 제게는 참으로 특별한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쯤 먹고 나면 이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곧 다 먹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남은 과자를 아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걱정 속에서 과자를 먹고 있는 저를 보게 됩니다. 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와 비슷한 마음을 자주 경험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아직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미 이별을 슬퍼합니다. 옛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득선수실(未得先愁失), 당환이작비(當歡已作悲)” 아직 얻지도 않았는데 잃을 것을 먼저 걱정하고, 기뻐해야 할 순간에 이미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2024년 2월에 이곳 달라스에 왔고, 임기가 5년이니 이제 3년 정도가 남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직 3년이나 남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분은 “이제 3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같은 시간을 두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느낍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시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고 감도, 만남과 이별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잃을까 걱정합니다. 그 마음 자체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걱정이 지금의 기쁨까지 빼앗아 버린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꽃은 언젠가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금 피어 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음악도 끝이 있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지금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다가올 이별을 두려움으로 채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함께 걷고, 함께 식사하시고, 함께 기도하시며 지금의 사랑을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영원한 생명을 시간의 연장으로 생각합니다. 끝없이 오래 사는 것, 늙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과거에 대한 후회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삶은 생명이 아니라 묶여 있는 삶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걱정하며 사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불안한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지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알고,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삶을 보여 줍니다. 그는 앞으로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영원한 생명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을 흘려보낼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며 사랑을 완성할 것입니까? 이 시간은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함께 있다는 것, 지금 웃을 수 있다는 것, 지금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미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사제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기에 맡겨 드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맡겨 드리며, 오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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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요한 복음서에 거듭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고 영광스럽게 한다.’는 표현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보이는 지점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최고점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백인대장입니다.
그는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과 달리 예수님께서 구세주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처참히 돌아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본 백인대장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보는 최고점과 하느님께서 보시는 최고점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삶이 가장 바닥에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으로 큰 은총일 것입니다.
삶의 가장 힘든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알아보고,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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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부터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사’에 이어지는 ‘고별기도’를 듣게 됩니다.
이 기도는 앞의 ‘고별사’의 중심 주제였던 ‘사랑’과 ‘영광’이 기도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크게 세 가지 청원을 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을 위한 청원’(17,1-5)과 ‘제자들을 위한 청원’(17,6-19)과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청원’(17,20-26)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은 ‘전반부’(1-5절)인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아들의 영광을 청하는 기도만 보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포함되는 ‘뒷부분’(6-11절)은 내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여기서 보듯이,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의 때’와 ‘영광’에 대한 기도로 시작됩니다.
먼저, “때”를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복음 선포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고별사’의 시작인 13장 1절에서는 이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렇습니다. 이제 ‘구원의 결정적인 때’, 곧 ‘카이로스의 때’가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영광의 때’입니다. 사막에서 사탄이 “세상의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할 때는 거부했던 진정한 ‘당신의 때’, ‘영광의 때’, ‘당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실 때’,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드러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권한인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이에게 사랑으로 주심으로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그 영광의 실현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요, 곧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를 기도 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에게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저희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느님 앞에 감추어져 있는 저희의 참 생명을 드러내소서.
저희의 행실을 보고 세상이 저희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을 드러내시되, 굴욕 받음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굴욕을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썩는 것을 썩지 않는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하오니, 그 어떤 굴욕과 수난에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오로지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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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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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05:50.
2026.05.19 05:35
- 싫은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경지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번 주 성령 강림을 준비하면서
성령께 사로잡힌다는 것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령께 사로잡힌다는 것은 우선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에 골똘히 뭘 생각한다고 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적으로는 나쁜 뜻이 아니고,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한다는 좋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을 빼놓고 하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에서 보면 성령적 즉흥성과 무위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적 즉흥성은 성령께서 시키는 것이라면 지체치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요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임을 알았을 때
자기의 생각이나 신중함을 배제하고 곧바로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즉시 따른 것이 그것이고,
프란치스코가 마티아 사도 축일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 안에서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라고 기뻐 외치며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함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즉시 실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1첼라노 22번 참조)
성령적 무위성(無爲性)은 노자의 무위지위(無爲之爲)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입니다.
내가 뭘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성령께서 주도하시도록 나를 내려놓은 것이라는 면에서는 다릅니다.
그래서 성령에 사로잡히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사로잡히면 싫은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그런 대단한 경지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 나병환자를 그렇게 싫어했고
그래서 나병환자를 만날까 그렇게 두려워했는데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는 은총 체험을 하고 나서
나병환자뿐 아니라 온갖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도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자기에게 닥칠 일을 이런 경지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면 갈 수 없는 곳과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에 사로잡히면 갈 수 있고 할 수도 있음을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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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16:50 추가.
숨영성 묵상글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다른 공관 복음서들과는 달리 제자들에게 남기는 예수님의 유언 말씀을 상당한 부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대사제로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는 17장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다음 바친 기도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기도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바쳐야 할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떻게 하면 세상의 어둠을 이기는 기도의 삶, 즉 사랑과 생명의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영감을 깊이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심인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곧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 안으로 들어섬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친교는 죽은 뒤에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이런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의식하며 그분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적인 다른 많은 것을 우리 삶에서 더 우선 순위에 두기 때문에 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미래로 미루려는 경향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저 먼 미래의 세상으로 밀어내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단순한 게으름일 뿐입니다. 참된 신앙의 본능은 바로 지금, 여기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훗날이 아니라 지금이고 지금으로부터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지금)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지금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지금"이고, 죽을 때도 "지금"이며, 죽은 뒤에도 "지금"입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도 지금부터 이루어지는 것이겠지요?!
"하늘에 떠 있는 파이"(pie in the sky: '허황된 꿈' 혹은 '그림의 떡')라는 영어 표현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결국 저 먼 미래의 달콤한 꿈만 붙잡게 된다는 사실을 풍자한 말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주 "오늘"이라는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루카 4,21).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우리의 생명에 대한 갈망은 음식에 대한 갈망처럼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
예수님의 죽음 이후, 낙심한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서, 저 먼 "이상적인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지금의 현실인 호숫가에서, 낯익은 한 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자, 시몬 베드로는 벗고 있던 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요한 21,7). 그 해변은 다른 세상이 아니라 바로 여기였고, 그 시간은 "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지금, 여기"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제서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언지를 제대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자신의 저서 『The Power of Now』 1장에서 깨달음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 깨달음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정신(the mind)과 생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정신과 생각을 통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오직 현재 순간에 온전히 머무름으로써 고통 없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과 집착을 통해 고통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나는 있는 나다!" 하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현존하시며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의 힘을 끊임없이 부여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신과 생각에 의해 만들어 내는 허상인 두려움과 불안은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며 "어둠과 죽음을 이기시는" 빛과 사랑과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의식하여 우리 마음에 모셔들이는 순간 우리에게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도 아니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도 아닙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사랑과 생명과 빛의 하느님을 의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 톨레는 우리가 스스로 죄와 상처를 통해 고통을 만들어내는 존재임을 일깨우고, 오직 현재 순간에 충실히 머무름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은 단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정신과 생각이 우리의 에고(거짓 자아)와 결탁하여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하게 만들었던 것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지금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게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나 그렇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정신과 생각의 집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집착이 만들어내는 허상 안에서 허덕이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현실인 양 거기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지금의 복을 마다하고 현재 있지도 않은 것에 매달리는 것이 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저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 전체에 걸쳐 지금, 이 순간 사랑과 생명의 하느님과 더불어 머무는 영적 수양을 계속해 가야 합니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변치 않는 존재의 본질, 곧 태어나고 죽는 수많은 형상을 넘어서는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 언제나 현존하는 참 생명"과 연결되는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언제나 살아 있는 우리 생명의 본질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고요.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 여정의 궁극적 목표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먼 미래에 이루어지는 요원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 마음에 모셔들이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일임을 꼭 기억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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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우리의 생각을 용서하기(우리 마음속 생각을 너그럽게 끌어안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의 첫 에너지는 ‘예’라는 응답, 곧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여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
우리의 생각을 용서하기(우리 마음속 생각을 너그럽게 끌어안기)!
2026년 5월 18일 화요일
리처드 신부가 말하듯, 참된 기도는 긍정적인 "예"에서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과 그분께서 주신 현실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는 "예"의 응답이 참된 기도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제가 1961년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을 때, 우리의 양성 과정 중 일부는 모든 산만함을 피하고, 거부하고,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빈약한 가르침이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모든 것이 "의지력"에 달려 있었습니다. 의지력으로 지켜내는 독신, 의지력으로 살아내는 가난, 의지력으로 유지하는 공동체….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의지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지를 내려놓고, 현실을 직면하며, 심지어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참된 영웅적 태도입니다.
그보다 못한 것은 결국 헛되고 무익한 노력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에너지, 곧 "하지 마라"라는 금지에서 출발한다면 결코 멀리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로마 7,7–11 참조). 제가 받은 가르침은 결국 "하지 마라!"라는 말뿐이었고, 그것은 사실상 아무런 가르침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곧바로 자아가 반발합니다. 어떤 날은 의지력이 강해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날에는 겨우 버티는 정도에 그칩니다. [1]
우리는 다음의 낡은 관습적 표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그 코끼리는 오히려 더 강하게 마음속으로 파고듭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그것과 맞서 싸우게 만들고, 결국 그 대상에 더 많은 에너지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영적 스승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저항하는 것은 오히려 더 지속됩니다."라고요.
우리의 첫 에너지는 "예"의 에너지, 곧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여야 합니다. 그 "예"에서 우리는 움직이고, 세우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설령 반대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출발점은 긍정이어야 합니다. 곧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최소한 15초 동안 그 사랑의 긍정 안에 머무를 때, 그 긍정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깊이 새겨진다고 합니다. [2]
리처드 신부는 관상기도 중에 산만함을 마주할 때 "붙잡지도 말고, 거슬러 싸우지도 말라"고 권고합니다:
제가 수련기 때 만약 수련장 신부님께 "저는 산만함과 싸우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수련장 신부님은 아마 이렇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그럼 음욕이나 미움의 생각을 즐기겠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핵심을 놓치는 반응입니다.
진정한 배움은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할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덧없고, 지나가는 것이며, 궁극적인 실재가 아닌 환상임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내면을 드러내는 정보의 원천이 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하게 귀 기울여야 합니다. 관상기도 안에서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라도 잠시 머물러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생각은 내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왜 나는 이 부정적이고, 비난하거나 욕망에 물든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는가?"
우리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떠올랐다고 해서 스스로를 미워하거나 책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지닌 지혜를 받아들일 필요는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상처 입은 부분이나 채워지지 않은 필요가 만들어낸 불건전한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참된 자아, 곧 하느님 안에 있는 온전한 자아는 그런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그냥 우리 안을 지나가도록 허락할 수 있다면, 그것을 붙잡지도 않고, 거슬러 싸우지도 않으며—또한 완전한 성공을 기대하지도 않고—우리는 점차 더 깊고, 더 넓으며, 더 지혜로운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온전히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놀라운 배움이 됩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매일 아침 글쓰기를 통해 저는 제 마음을 중심에 두곤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부분의 아침마다 침묵 속에서 하이쿠 삼행(일본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짧은 시 형식)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오늘은 이런 시가 떠올랐습니다:
숨을 들이쉬며 / 지금 현존에 열리니 / 모든 것이 여기 있네
인내하며 기다리며 / “우리는 당신이 그리웠다”는 환영의 인사를 듣고 / 함께 숨을 쉬네
정착하고 뿌리내리며 / 어둠 속 빛을 향해 / 오직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을 실천하네.
—Bob D.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Morning Sit, June 12, 2023. Unpublished meditation.
[2] Adapted from Richard Rohr, Just This (CAC Publishing, 2017), 43, 44.
[3] Rohr, Just This, 44–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trick Hendry, untitled (detail), 201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요한 밤하늘 아래, 어떤 사람이 “오직 이 순간(Just This)”에 머무는 관상을 하며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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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17:00. 추가.
감동 깊고 비장한 고별 연설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고별 연설이,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고별 연설이 각각 소개되고 있습니다.
에페소에서의 냉대와 박해 속에 겨우 목숨을 건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로 갔습니다.
그리스에서 석 달가량 머문 뒤에 시리아로 가려 했으나,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해칠 계략을 짜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할 수 없이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갑니다.
그야말로 기약 없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필리피에서 트로아스로,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배를 타고 아쏘스로, 아쏘스에서 미틸레네로,
미텔레네에서 사모스 섬으로, 그다음 날에는 밀레토스로 넘어갔습니다.
오랜 여독과 박해와 매질로 온몸이 병든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참으로 혹독한 여행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도를 횡단하는 먼 거리를 도보로 걸은 후에는 하루 쉴만한데, 바오로 사도는 그다음 날 이른 아침 또 다시 배에 오릅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지새운 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행장을 꾸리곤 했습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64 Km나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감동 깊기로 유명한 ‘고별 연설’을 행합니다.
이 연설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신 유일한 연설입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고별 연설은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만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음성은
비장함으로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될 남아있는 제자들과 양 떼를 생각하니 깊은 슬픔과
측은함이 밀려와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립니다.
“나는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사도행전 20장 22~35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 전도 여행길에 겪었던 고초들, 남겨질 양 떼를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바오로 사도의 염려가 아무런 가감 없이 잘 소개되고 있는 명설교입니다.
고별 연설이 끝나자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에페소 교회 원로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 바오로 사도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지상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다들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바오로 사도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불찰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건강하십시오.
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고통과 시련,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여건 속에서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에 임하지 못하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선교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바오로 사도와 쥐꼬리만큼 일하고도 ‘피곤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가 입에 붙은 제 모습이 크게 대조되어 많이 서글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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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7:05. 추가.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요한 17,1ㄴ-11ㄴ).”
1)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참하느님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낸 일이고, 그래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린 일입니다.
동시에 그 일을 완수하신 예수님 자신도 메시아로서 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영광스럽게 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활동의 중심에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영광의 시작이고, 부활은 영광의 절정이고, 승천은 영광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부활과 승천을 잊어버리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반대로, 부활과 승천만 생각하고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예수님의 영광이 어떤 영광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영광을 드리게 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리시는 영광을 ‘구원받은 이들’도 함께 누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2)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일치’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라는 뜻이고,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예수님과의 일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고, 동시에 그 일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만들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만 옵니다.
그러니 하느님,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평생 어떤 수행과 수련을 해서 무슨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또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는다고 해도,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3)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생활,
또는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생명이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그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이 말은 하느님, 예수님과의 일치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하느님, 예수님과의 일치도 시작되고,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점점 더 깊어지다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9절의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바치는 기도는 특별히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그 뜻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르 16,15).
아무도, 그 어떤 죄인도 구원 사업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어도 그 길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의 길’로 가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강제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루카 15,4).
예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렇고,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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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9. 부활 제7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6:55. 추가.
요한 17,1-11ㄴ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당신이 겪으시는 모든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난게 아니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만나시는 모든 사람이 그저 ‘어쩌다’ 마주친 게 아니라 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특별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주신 일이며 사람이라는 관점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해두신 ‘사랑의 계획’ 안에서 그분 뜻에 따라 착착 진행된 것임을 알면,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피하려고 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여 그 안에 숨어있는 아버지의 뜻을 찾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만나서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 의미 없는 사람들, 그저 오가다 우연히 마주친 ‘행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끄시고 좋은 것을 주시며 깊은 깨달음을 주시어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특별히 보내주신 ‘은인’이자 ‘천사’라고 생각하면 나랑 잘 안맞는다고 밀어내거나 내 마음에 안든다고 미워하기보다,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나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아야 할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묵상하며, 그것을 내 안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를 힘이 생깁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삶과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이며, 우리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삶과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 주시고 이끌어주시라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청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삶과 사람을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바라보는 열린 눈을 지니게 되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생명’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저 머리로 아는게 아니라 사랑의 친교를 맺고 삶의 경험으로 아는 사람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그전과는 다른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를 알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며 특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살아갈 이유와 의미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닥쳐와도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이 내 안에서 샘솟지요. 그 힘이 우리를 기쁘게 살게 하고, 제대로 살게 하며, 영원히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그분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나로 하여금 어떤 고통과 시련이라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며,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굳건한 믿음, 즉각적인 순명, 순수한 사랑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맺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 안에서 그분 자녀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몸으로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과 영혼이 하느님 나라에 속하여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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