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미활동과 친목(親睦) / 박창권
나는 흔히 말하는 학연 지연 등의 친목 모임에 적응이 쉽지 않는 성미를 가졌다. 가끔 분위기에 취해서 모임을 결성할 때도 있지만, 애당초 오래가긴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적잖이 반복된 경험이다. 가끔은 모임 분위기가 악화일로로 내달릴 때도 있다. 시중의 거짓 뉴스에 광분하는 사람이 큰 목소리로 분위기를 깨기도 한다. 오죽하면 가까울수록 정치이야기를 금기시할까 싶다. 이래저래 내 인생에 단순한 친목모임에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도 했다. 만남으로 기분이 상쾌해지기보다 답답한 가슴을 안고 되돌아설 때가 더 많았던 탓이다. 그러니 총무가 보내오는 모임 안내 문자는 짐이 되기 십상이다. 그 날부터 해내야 할 숙제가 하나 생긴 셈이다. 몇 차례 차일피일하다가 미안함에 떠밀려 참석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되돌아 올 때는 허망함이 반복된다. 그런데 인생사가 그리 단순하던가. 지금도 폰 달력에는 모임일지가 빼곡하다. 내가 모임을 주관하는 단체도 몇 있다.
이제는 단순 친목이 아니라 뭔가 사회적 기여를 목적에 두거나 자기 취미를 살리는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의도에 잘 부합하는 모임에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목린회(木隣會)이다. 나무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 매년 두어 차례, 목공작품을 이웃에 나누는 일을 한다. 목공은 무언가를 창작하는 활동이라 개인적으로 느끼는 성취감이 크다.
목린회 모임은 수 년 전, 어느 조손가정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설 며칠 전이었으니 어지간히 추웠다는 기억이다. 황량한 들판을 지나 산기슭, 외딴 곳에 컨테이너 하나가 보였다. 단칸방에 할머니와 초등학생 셋이서 함께 사는 집이었다. 출입문을 여니 얼마 전에 배달된 듯, 쌀 포대 하나가 발아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끼니는 굶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일행을 맞는 할머니의 무심한 시선을 마주하자 까닭모를 미안함이 밀려왔다. 삶에 지친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그랬다. 동행한 사회복지사가 부러 큰 목소리로 건넨 상냥한 인사조차도 찬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할머니의 초점이 우리가 들고 간 소소한 물건에 머물 때는 왜 그리 어색하던지…. 할머니에게 힘내시고 건강 잘 챙기시라고 억지 미소를 남기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우리의 방문으로 정이 오고 가기는커녕 형언되지 않는 이질감만 남기고온 것이 아닐까. 애써 방문한 보람은 고사하고 흔한 위로의 말조차도 성가신 상황, 이건 아니다. 이럴 바에는 택배가 낫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린 채 책을 읽던, 아이의 눈망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초등학교 이삼학년 정도 되었을까. 우리가 내민 과자뭉치에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관심거리가 없어 보이는 시선이 애처로움을 더했다. 저 아이의 무심을 반전할 방도가 없을까. 문득 오래 전에 우리 집 아이들에게 사준 책상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서랍마다 대문짝만한 이름을 써 넣으며 좋아했었다. 이 아이에게도 책상 하나가 큰 전환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이 되도록 원목을 재단해서 정성들였다. 못 하나 없이 짜 맞춤을 이어가면서 아이에 대한 주문을 새겼다. 제발 가난에 대한 원망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길 염원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 아이들끼리 책상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이제는 한 시간씩 순번을 정해서 책상 앞에 앉는다고 했다. 보조책상이나 의자라도 더 보내야 하나 생각하던 차에. 다리 뻗을 공간이 부족해졌다는 할머니의 불평을 전해 듣고는 그저 세월의 흐름을 기다리기로 했다.
목린회가 자리 잡기까지 한 부부의 특별한 공헌이 있다. 부부가 교사직에서 물러난 후, 목공에 대한 기능과 지식이 탁월한 남편은 온종일 목공소를 지킨다. 우리는 그를 사부님이라 부른다. 아내는 봉사활동에 하루가 빠듯하다. 누구든 무료로 목공을 배우고, 가정에 필요한 소품들을 직접 만들어 가면 된다. 그곳에는 오고 감이 자유롭다. 오면 반기고, 한참을 소식 없어도 그만이다. 밥 때가 되면 식사도 내놓는다. 나눔이 어색하지 않는 집이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한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잣대로 타인을 차별하거나 선별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만남을 일상의 대면 이상으로 의미 있도록 만들라는 것으로 새기고 싶다. 그 의미부여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우리 주위에 또 다른 이름의 목린회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