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4편
이런 대비마마의 압력과 일부 조정 대신들의 폐비 사사(賜死) 여론이 일어났지만, 성종은 원자(元子)의 생모임을 들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연산군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면서 성종은 훗날 폐비 윤씨로 인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였다. 성종은 곧이어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臺諫)들을 불러 폐비윤씨의 처분에 대해 논하였고, 결국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왕명을 봉행한 사람은 좌승지 이세좌와 이극균이었다. 이에 따라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윤씨의 나이 28살 이었고, 세자 융의 나이는 7살 때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연산군이 폭정으로 치달아 폐위되는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윤씨는 처음에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성종은 1488년(성종19년)경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고, 묘비명도 없었다. 그로부터 7년 뒤 세자의 앞날을 염려한 성종은 ‘윤씨지묘(尹氏之墓)’라는 묘비명을 쓰게 하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은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1495년(연산군1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그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숙의·정소용을 궁중 뜰에서 살해하고 그들의 아들인 안양군 항과 봉안군 봉도 귀양 보낸 후 죽였다. 성종의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도 무시되었다. 1504년 3월 25일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憲王后)’로 추존되었으며, 묘호(廟號)도 회릉이라고 했다. 이 묘호는 선왕이자 부왕(父王)인 성종이 윤씨의 묘를 ‘폐비지묘(廢妃之墓)’로 안장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그리움을 뜻하는 한자인 회(懷: 그리울 회, 품을 회)를 따서 ‘회릉(懷陵)’으로 고쳐서 격상시켰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교동도로 귀양을 가게 됨에 따라, 중종은 연산군의 행적을 지우거나 고치기 위한 일원으로 윤씨는 다시 폐비로 복귀되었고, ‘회릉’ 역시 묘(墓)로 격하하여 ‘회묘’로 고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윤씨의 묘가 ‘회릉’으로 바뀌자 이 지역의 이름은 회릉동(懷陵洞)이었고, 이후 ‘회묘’로 격하되면서 회묘동(懷墓洞)으로 바뀌었다. 훗날 회(懷)라는 글자가 어렵다 하여 회(回)로 바꾸고, 묘(墓)라는 글자가 좋지 않은 글자라 하여 기(基)자로 바꾸어 오늘날의 회기(回基)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회묘’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의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지금은 왕비(王妃)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