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송아지 우상을 만듬
출 32:1-6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 32:1-6 / [금송아지]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 오지 않자 답답해하며 아론에게 몰려와 아우성을 쳤다 `자, 어서 우리가 진군하는 데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애굽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모세는 어찌되었는지 정말 깜깜소식이 아니오.' 2) 그러자 아론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 아내와 너희 아들딸의 귀에 걸려 있는 금귀고리를 떼어서 모두 나에게로 가져오너라.' 3) 그러자 온 무리가 하나같이 자기 귀에 걸려 있는 금귀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4) 아론은 그 금귀고리를 모두 모아서 녹인 다음 거푸집에 넣어 수송아지 신상을 만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신상을 보고 소리쳤다 `이스라엘아, 보아라. 이 신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낸 우리의 신이 아니냐?' 5) 아론은 사람들이 이러는 모습을 보고 그 신상 앞에다 제단을 만들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내일 우리 모두가 여호와 앞에서 잔치를 벌이자.' 6) 이튿날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고 나서 먹고 마신 뒤 일어나 뛰놀았다.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가 40일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24:18),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대신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죄에 빠집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1)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후 40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이스라엘 민족은 근심과 불안에 빠집니다. 영적 지도자의 장기간의 부재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적인 방법이 아닌 불신앙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는 모세를 향한 호칭, "이 모세"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점차적으로 쌓여 있던 불안과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안과 불만, 그리고 오해에서 이어지는 문제해결의 방안이 큰 죄로 발전합니다. 이것이 죄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모세가 중보자의 역할을 하지만 그의 부재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인도할 신에 대한 요구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셋째,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지켜야 할 말씀을 주셨지만(20:1-17),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어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의 조건은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24:3, 7). 진정한 믿음은 고비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서 확인됩니다. 이스라엘이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모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모세를 우상으로 숭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2-6) 아론은 이스라엘의 잘못된 요구를 지적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아론이 이와 같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사람들의 위협과 그의 내적 불안 때문일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사람들이 가져온 금 고리를 이용하여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아론의 잘못된 행동은 점점 발전하여 우상 숭배를 위해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위한 절기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 일어나 그 금송아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즐거워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겉모습은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지만,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로부터 출발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초조함과 불안 때문에 참고 견디지 못하고 성급한 행동을 한 경우는 없습니까? 이런 때에 무엇을 더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일에 대한 명확하고 상세한 간구이며 기대입니다.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고 상세하고 명확하면 하나님은 들으신 그대로 정확하게 채워주십니다. 진정한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믿음은 절대적인 순종에 필수적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자랍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은 기도하는 중에 번성합니다.
< 설 교 >
금송아지에 관해서
출 32:1-29 / 정용섭 목사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 남긴 최대 업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출애굽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이다. 출애굽은 정치 사건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한다면, 율법은 종교 사건으로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 두 사건을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한 묶음으로 다루어야 한다. 다른 고대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고대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가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세의 활동 시기는 왕정이 시작하기 훨씬 전, 판관시대보다 훨씬 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출애굽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이며, 율법도 역시 종교적이면 동시에 정치적이라는 말이다. 어쨌든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끌어간 두 축은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성서는 출애굽과 율법 사이에 시간적으로 긴 공백을 두지 않는다. 피를 말리는 듯한 파라오와의 기세 싸움에서 승리한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출애굽의 환희는 한 순간으로 끝나고 그들 앞에는 광야의 혹독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애굽 후 석 달 만에 그들은 시내 산 아래 도착했는데, 그곳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명령을 받은, 일명 호렙 산이기도 하다. 처음 소명을 받은 산을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다. 모세는 이 산에 다시 올라갔다. 그는 여기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출 20장)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삶과 일상까지 규정하는 법전(출 21,31장)을 부여받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난 출애굽과 율법수여 이야기는 모두 광야생활과 연관된다. 출애굽은 고대 최고 문명사회에서 광야로 진입한 것이며, 율법수여는 바로 그 광야의 한 복판에서 앞으로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탈출이며 동시에 가나안 문명으로의 진입이라는 점에서 광야는 일종의 세례 사건인 셈이다. 이 광야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고향이다. 예언자들은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이스라엘의 왕조, 귀족, 제사장,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을 향한 광야의 목소리를 내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 광야를 기억하라고 외쳤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회상하라는 것이다. 거기서 이스라엘 조상들은 하나님을 경험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과 율법은 동일하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 경험이다. 출애굽은 하나님을 향한 열광적 경험이라고 한다면, 율법은 일상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열광적 경험이 일상에 내재화하지 않으면 역사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출애굽보다도 율법 사건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노의 하나님
성서기자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으로 이 율법수여의 마지막 순간에 아주 불길한 사건을 보도한다. 시내 산에서 율법 수여가 종결될 그 순간에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서 데려 내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저들이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부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려 내온 우리의 신이다.’ 하고 떠드는구나!”(출 32:7,8) 그리고 이어서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10절)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순간에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쓸어버린다면 출애굽 사건도 무의미하며, 율법도 아무 소용이 없다. 도대체 시내 산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성서기자는 야훼 하나님을 분노하는 신으로 묘사하는 것일까?
본문 1-6절이 이를 간략하게 보도한다. 시내 산 아래 평지에 모세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기색이 전혀 없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세가 정확한 날짜를 말하지 않고 올라갔기 때문인지, 날짜를 정했지만 그 날짜가 지난 것인지, 그 속사정을 우리는 모른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니 한시가 급한 백성들이 초조했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간다. 그들은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출 32:1) 백성들의 이 요구를 듣고 아론은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그는 모세의 형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모세가 없는 사이에 일시적으로 책임을 맡았을 뿐이 아론이 백성들의 강력한 요구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고민의 구체적인 흔적이 성서에는 없지만 모세가 그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추궁하면서도 그에게 실질적인 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렇게 짐작할 수는 있다. 모세가 아론의 정상을 참작한 게 아니냐, 하는 말이다. 물론 아론의 책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성서기자도 그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론이 백성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해서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했다고 말이다.(출 32:25)
아론의 입장에서 이 사태를 바라본다면 그의 입장을 나름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하다. 만약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를 외면했다면 그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고,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출애굽 이후 세 달이 지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출애굽이라는 열광적 사건을 경험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현실은 광야에서 겪어야 할 생존의 위기였다. 그들 앞에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모세는 행방이 묘연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 아닌가. 결국 아론은, 흡사 IMF 초기에 금모으기 운동을 벌였던 우리처럼, 백성들의 금귀거리를 기증받아서 수송아지 상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상(像)을 보고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온 우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그 앞에 제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뛰놀았다고 한다.
이런 모습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신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한 말씀을 하셨겠는가, 하고 이해가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당혹스럽다. 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심판하시는가? 버릇을 고쳐놓으려고 교육적인 차원에서 따끔하게 벌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민족 전체를 멸하겠다는 말은 인간을 창조한 자신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관용을 그 속성으로 하는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은, 특히 오늘 본문이 묘사하듯이 한 민족을 싹쓸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성서는 이 대목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6장 이하에는 그 유명한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야훼 하나님은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고 사람 만드신 일을 후회하면서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창 6:7)고 다짐하셨다. 창세기 기자의 설명을 따르면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결심을 그대로 실행하셨다. 그 당시 사람들이 아무리 악하다고 하더라도 노아 가족 이외에 모든 인류를 멸절시켰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멸절된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 막 태어났거나 정지 지체장애로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까지 모두 죽이는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그 말을 성서기자들은 쏟아내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
이런 성서의 보도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는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심판에 대한 성서의 진술을 실증적인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아홍수에 관한 성서의 모든 보도를 사실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그들은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죄와 심판이라는 구도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구도를 모든 상황에 적용시키는 것은 성서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 인해서 벌어지는 오류이다. 이런 논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죄한 자의 고난은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신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결코 인과응보의 원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논리는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다. 건강하고 출세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삶이 파괴된 사람은 벌을 받은 것처럼 생각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행 5:1-11)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역설하기도 한다. 헌금에 관련된 사건인 탓인지 목회자와 신자들에게 아주 예민하게 다가가는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래도 그들은 죽지 않는다. 오해는 마시라. 이런 성서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문제는 성서텍스트가 말하려는 근원적인 세계를 해석하지 않고 그 보도를 사실 그대로 오늘의 신앙에 적용한다는 데에 있다.
바벨론의 홍수설화나 이집트의 홍수설화와 연관해서 역사 비평적으로 다루어야 할 노아 홍수 이야기를 오늘 이 자리에서 짚을 생각이 없다. 이런 심판에 관한 성서의 전승은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잔인한 심판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라가려면 그들이 인간의 악과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는지를 조목조목 살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서의 구원역사가 전체 인류의 보편적 역사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 근본적인 작업을 소홀히 한 채 모든 심판 보도를 실증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인다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죄 없는 사람까지 죽인다는 딜레마를 헤쳐나오기 힘들다.
둘째, 성서가 말하는 심판은 단지 교훈적인 뿐이지 실제적인 의미는 없다는 해석이다. 이것도 역시 오류이다. 성서보도를 실증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차원해서 해석되어야 할 역사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이 ‘심판’ 사상 자체가 빠지면 성서의 가르침은 와해된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전제한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심판자로 나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조는 곧 심판을 통한 완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심판한다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관점에서도 이 심판은 빼놓을 수 없다. 예수님은 모든 진리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준거이다. 가라지와 알곡이 언제까지나 함께 뒤섞여 있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새롭게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진리를 가로막는 모든 세력이 제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서는 종말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심판받는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심판의 그렇게 엄격하다는 뜻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진리의 실체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심판이 오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여전히 가라지가 남아있을 것이며,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가야한다.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마 지금 현실의 역사에서도 그 심판이 유효한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성서는 물론 그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바로 위에서 심판이 구원의 역사라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 현실의 심판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최후의 심판을 미리 내다보는 예증(例症)들이다. 예컨대 생태계의 파괴는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심판을 미래 내다보게 한다. 극한의 생존경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신자유주의도 역시 마지막 심판의 한 전조(前兆)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여전히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결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재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종말의 미래로 유보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오늘 우리는 최선으로 시시비비를 따져야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잘못된 것을 배척하는 그 결단을 회피할 수 없다. 최후의 심판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아니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라도 오늘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을 파괴하는 악과 투쟁해야 할 역사적 책임감을 손쉽게 벗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역사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짐이다. 이런 짐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며,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심판과 사랑
성서기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역사적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살았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한가, 인간이 왜 이렇게 잔인하고 이기적인가,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내버려두시지, 그들은 이런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는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더 지속되도록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끔찍한 심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심판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조와 출애굽의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근동의 물신 신앙의 대상인 바알과 금송아지로 아주 손쉽게 돌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찌 더 두고 볼 수 있는가. 그걸 방관한다면 그 신은 참된 신이 아니며, 사랑의 신도 아니다. 참된 사랑은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파괴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출애굽기 기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출애굽기 전승에 참여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싹쓸이할 수도 있는 신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말들이 전승되어 오늘 출애굽기에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심판을 함께 묶어서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어떻게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몇몇 속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다. 그런 속성은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최소한의 개념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직 사랑도 완전하게는 모르고 정의로운 심판도 완전하게는 모른다. 더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그의 세상 통치방식을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먹이사슬의 끔찍한 현상에 대해서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다. 말벌 한 마리가 수천, 수만 마리의 꿀벌을 죽이는 일이나 사자 무리들이 병든 물소나 어린 물소를 잡아먹는 장면은 자연세계에서 흔하다.(하늘이 선하지 않다는 도덕경의 경구가 바로 이런 뜻인가?) 그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지를 생물학적 구도에 의해서만 해명할 수는 없다. 진화론은 드러난 생명현상에 한정되는 설명일 뿐이지 그 근원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현현상과 인류의 역사에는 우리가 합리적인 논리로 모두 해명해낼 수 없는 ‘어두운 차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어두운 자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도 이런 통치방식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다른 건 접어두고 하나님의 심판이 사랑과 대립한다는 생각이 옳지 않다는 사실만 짚고 넘어가자. 아주 쉬운 예로, 어머니가 아이의 종아리를 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그 아이는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그 순간에는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가 어머니의 깊은 생각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 훗날 이 아이가 철이 들면 어머니의 회초리는 어머니의 심판이지만 동시에 사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한 표현이다.
물론 우리가 읽은 본문의 상황을 사랑의 회초리로 비유하는 건 너무 나이브한 생각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면, 궁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전제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다. 이스라엘은 피조자들이고 선민으로 선택을 받았다. 창조와 선택에는 분명히 뜻이 있다. 그 뜻이 훼손되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그 창조와 선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다. 토기장이의 배타적 주권을 강조하는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유추해낼 수 있다.
서로 대립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심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전제할 때 타당한 개념이다. 뼈를 깎는 수고로 만든 작품에 약간의 흠집이 있거나, 예상했던 수준에 오르지 못했을 경우에 아낌없이 없애버리는 도예가들의 행동을 그 손에서 빚어지는 자기(磁器)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을 아직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더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와 선택의 배타성이라는 관점에서 인류의 구원 역사에서 필수적인 하나님의 정당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통치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물을 바친 뒤 먹고 마시면서 정신없이 뛰논 것이 과연 죽어야만 할 죄인가? 그 당시 근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종교행위는 대개 이런 방식이었다. 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고 그것을 경배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신과의 매개로 삼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조형물 앞에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는 말은 성적인 방종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 자체만으로 한 민족이 몰살당해도 좋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오랜 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살아온 타민족은 내버려둔 채 일시적으로 금송아지에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죽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정당한 판단이 아니다. 이건 곧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역차별 아닌가.
이 대답은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부터 하나님과 깊은 계약관계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곧 그들이 감당해야 할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뜻이다. 그 사명은 곧 야훼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으로써 이 세상에 야훼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런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다. 이제 이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별한 훈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서 율법을 준비시켰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즉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방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없이 뛰놀았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계약은 근본적으로 허물어진 것이다. 사랑을 많이 베푼 대상에게서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실망이 더 큰 법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아니, 성서기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거라고 판단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특별한 계약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생각한 성서기자들은 그것이 한쪽의 잘못으로 깨졌을 때 계약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묻지 않아도 될 더 심각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금송아지와 여로보암
금송아지 사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 텍스트가 어떤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본문이 보도하는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이후 즉시 일어난 것인데, 이와 비슷한 사건이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 남북분열 왕조의 초기에 다시 일어난다.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의 장군으로 솔로몬의 명을 거역하여 이집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여로보암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여로보암이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대적하고 북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된 데에는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복잡한 사연이 담겨 있겠지만, 그중의 가장 큰 책임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에게 있다. 어쨌든지 이제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은 남유다에 비해서 다섯 배 정도나 컸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솔로몬 성전이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여로보암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한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상 둘을 만들어서 하나는 베델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예루살렘으로 제사하러 올라가기란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신이 여기에 있다.”(왕상 12:28)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들 중에서 자기 마음대로 산당의 제사장을 뽑아 임명했다. 성서기자는 여로보암이 이런 일로 죄를 얻어 지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증언한다.(왕상 13:34)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왕조 역사에서 가장 악랄한 왕으로 묘사된다. 몇몇을 제외하고 모든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앞선 사람은 바로 여로보암이었다. 그에게 정치적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는 성공한 왕이었다. 왕들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판단 기준은 경제, 군사적인 능력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였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말은 그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린다는 뜻이 포함된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오직 정략적인 목적으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으니 야훼 하나님 보기에 어떠했을지는 불문가지이다.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 그의 왕권은 끊기고 말았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사건과 시내 산 밑에서의 금송아지 사건은 깊이 연관된다고 한다. 금송아지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서기자는 시내 산 전승 이야기를 통해서 실제로는 여로보암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중이다. 아마 당시에도 북 이스라엘의 두 지역에 제단을 만든 여로보암의 이 조치가 정당하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남북 분단과 마찬가지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리어 경쟁하고 있는 마당에 자기 백성들이 적대국 수도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것은 그냥 묵과할 정치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비록 편법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서 그냥 넘어가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반대로 원칙대로 단호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적당한 비교가 될지 모르지만 요즘 삼성 비자금 문제로 불거진 삼성 특검법 발의에 대해서 서로 입장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성서기자는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금송아지 제조와 그것을 섬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켜 민족이 멸절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범죄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종결에 해당되는 35절 말씀은 이미 여로보암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암시하고 있다. “그 뒤에 야훼께서는 백성이 아론을 시켜 수송아지를 만든 데 대한 벌을 내리셨다.”
시내 광야의 금송아지 사건은 단순히 그 당시에 겪었던 신앙적 위기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적 위기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 신앙에 끊임없이 유혹을 받았다. 바알과 아세라는 금송아지 상이 의미하는 풍요, 요즘 식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악순환에 의지하는 삶의 태도를 유발했다. 구약성서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나치리만큼 가나안 문명과 단절시키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가나안 원주님들과 결혼하지 말아야 하고, 거래하지 말아야 한다. 아예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성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별나 보일 정도로 성별해내는 이유는 신앙적 혼합주의를 떨쳐버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출세하는 방식의 삶이 일종의 혼합주의이다. 어느 정도의 삶이 혼합주의적인 삶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지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끊어낼 수는 없지만, 우선권이 어디 있는가는 분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다가 우연하게 찾아온 넉넉한 생활형편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으로 양쪽을 함께 추구한다면 그건 바알숭배로 일컬어지는 혼합주의이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에 해당된다. 어쨌든지 이스라엘은 이런 금송아지 상으로 대표되는 물질숭배와 신성의 사물화를 민족멸절의 위기로 보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집단살해 당한 삼천 명
이런 상황 앞에서 모세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아든 바로 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리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나? 다급해진 그는 피의자를 변호하는 변호사처럼 세 가지 논리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 첫째,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처벌을 받는다면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무효가 되고 만다. 둘째, 이 일로 인해서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인들의 비웃음을 받게 된다. 셋째, 야훼 하나님이 맹세를 주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주셔야 한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이 말을 듣고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겠다.” 하시던 재앙을 거두셨다고 보도한다.(출 32:11-14)
어떻게 야훼의 마음이 바뀔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일단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의 변론에 감동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형에 처해질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변호사가 변론을 잘해서 판사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만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듯이 말이다. 어린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의 용서를 구하면 혼내기로 했던 생각을 바꾸듯이 하나님도 모세의 요청으로 생각을 바꾸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세의 논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지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모든 걸 완벽하게 알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처럼 생각을 바꾼다는 주장은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사람에게 설득당하는 신이라고 한다면 그 절대성이 허물어지는 게 아닐는지. 그런데 성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손상이 가는 걸 감수하고 생각을 바꾸신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다. 소돔 성을 멸망시키려고 결정했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설득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다. 소돔 성의 멸망을 유예시킬 수 있는 의인의 숫자가 50명에서 시작해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왔다. 이런 대목만 본다면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마음을 바꾸려고 했다.(창 18:16-33) 야훼가 설득 당한다는 것은 그가 절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이 땅의 상황에 의존적인 분이라는 뜻이다.
성서가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바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사실에 대한 진술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하나님이 모세의 간청에 마음을 바꿨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것은 모세와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대였다. 죽어야만 할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그건 하나님이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간청한 사람의 노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인식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실증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범주화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의 구도로 왜곡시킬 염려도 없지 않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논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꿨다는 성서의 진술이 명시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본문의 중심이 아니라 죽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성서기자는 모세의 설득에 의해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꾼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을 신화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신화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신과 인간이 직접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글쓰기의 방식을 가리킨다.
어쨌든 하나님은 분명히 마음을 바꾸셨다. 민족 멸절의 위기가 지나갔다.(pass over) 그런데 이제 문제는 모세이다. 그는 레위 후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지파에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이렇게 전달했다. “형제든 친구든 이웃이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라.”(출 32:27) 그날 삼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끔찍한 사건이다. 종족살해다. 내전도 이런 내전이 없다.
우리는 궁금하다. 하나님은 마음을 돌리셔서 용서하셨는데, 모세는 왜 삼천 명이나 죽였을까?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질을 부린 건 아닐까? 그는 하나님이 동족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신 것처럼 레위 사람들에 다시 명령을 내렸다. 성서기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는 밝히지 않는다. 물론 민족 전체를 몰살시켜야겠다는 하나님의 처음 생각을 감안한다면 이 명령도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내리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긴 하지만, 성서기자가 침묵하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여리고 성 공격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셨지 그 성의 모든 사람을 살해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명령을 내렸다. 이번의 경우에도 이 살해 명령은 모세의 정치적 판단인 게 분명하다. 우리는 성서기자들의 진술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댄 영웅들의 모든 진술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면 안 된다. 모세는 자신의 판단으로 종족 살해를 명했다. 일종의 자위권 발동인가?
문제는 오늘 우리가 모세의 행동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모세를 무조건 두둔할 수도 없고,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동족을 죽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 길이며,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의 긴 역사를 앞에 놓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을 다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모세의 생각을 우리가 모르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더 끌고 갈 수는 없지만, 단 하루에 삼천 명 살해라는 이 엄청난 참상의 책임은 모세에게 돌아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최후의 심판에서 모세가 칭찬을 받을는지, 아니면 삼천 명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는지, 그것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몫이다. 그 마지막이 오기 이전인 역사의 중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모세의 행위를 하나님의 전체 구원 역사에 근거해서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사족 같지만,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자행하면서도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꺼림칙하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반석을 너무 강하게 두드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렇게 동족의 피를 손에 묻혔기 때문은 아닐는지. 피를 손에 많이 묻힌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듯이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라고 하더라도 잔인한 행동은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는지.
단 하루에 삼천 명이 살해당한 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 사건의 실체를 우리가 무슨 수로 속속들이 밝혀낼 수 있단 말인가. 다만 한 가지 가능성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출애굽 공동체는 단일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살고 있던 여러 소수 민족의 연합이며, 또한 미디안 광야 인근에 살고 있는 유목민 및 나그네들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다른 이름인 ‘히브리’는 고대 근동의 하층 계급을 통칭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공동체는 박해받았던 다양한 인종의 결합체인 셈이다. 그들은 일단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과정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었다. 일종의 무정부 상태라 할 수 있는 광야로 나온 이들 사이에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는 심각한 갈등의 골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모세는 이제 결단해야만 한다. 야훼 신앙에 동참하지 못하는 그들을 안고 가는지, 아니면 그들을 제거해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바로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인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모세는 자신의 말을 따르는 친위부대인 레위 사람들을 시켜 순식간에 삼천 명을 죽였다. 무력을 통한 정적 제거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모세의 살해행위도 이런 정적 제거의 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하나의 가능성이지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은폐된 역사를 오늘 우리는 완전하게 복원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 따라서 무모한 해석을 시도한 이유는 이런 방식이 아니면 삼천 명의 동족을 살해했다는 이 성서의 보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훼 신앙의 정체는?
삼천 명을 살해한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오늘 너희가 자기 아들과 동기마저 희생시켜 가며 야훼께 충성을 다하였으니, 오늘 너희 위에 복이 내릴 것이다.”(출 32:29) 우리는 이 모세의 말이 옳은지, 또한 옳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1980년 6월 광주 민주화 항쟁에 나선 이들을 폭도로 몰아 수백 명이나 살해한 신군부가 자신들의 행위를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한 것처럼 모세의 삼천 명 살해 사건도 무조건 미화되면 곤란하다. 가족과 동족을 떼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와 야훼 하나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행위가 도대체 어떻게 일치한다는 말인가?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 또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와 내세에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9:27-30, 막 10:28-31, 눅 18:28-30) 강도가 더 심한 말씀도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 마 10:37 참조) 하나님 신앙이 주변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배척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들이다. 복음서에 한정해서만 본다면, 이 말씀은 가까운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킬 수 있다는 경고이지 모든 가족관계와 인간적 친밀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모세의 상황이다. 삼천 명을 살해하면서까지 야훼께 충성한다는 말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질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정에 관해서 오늘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건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의 뜻을 추종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당신들은 왜 그렇게 잔인해, 하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삼천 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야훼께 충성한 그들에게 야훼는 복을 내리셨을까? 무엇이 이스라엘에게 복이었는지를 먼저 논의하지 않으면 이런 질문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지난한 역사를 보면 복이 과연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들의 모든 신앙 행태는 전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해명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오늘 그 이야기를 읽은 우리는 그들의 신앙형태를 반복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그런 삶의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께 충성을 바쳤지만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야훼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반면에 오늘 신약시대에는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듯이 우리는 긴 역사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야훼 하나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부분에 해당된다. 예컨대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경제체제였다.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삼천 명을 살해하면서 야훼께 충성하려 했던 모세와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행태를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신앙행태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무엇이 오늘에도 유효한지는 신학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여전히 보수해야 할 형태도 있고, 폐기해야 할 행태도 있고, 개량해야 할 형태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앙의 본질은 곧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이런 생명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모세 시대에는 금송아지에 연루된 이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우리 공동체와 우리 후손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 신구약 전체와 역사 안에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적인 질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생명의 본질을 망각함으로 결국 생명으로부터 소외하게 만드는 오늘의 금송아지는 무엇인가?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라
출애굽기 32:1-6 / 윤영택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3개월이 되었을 때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따로 불러 시내산으로 올라오라 하셨고 모세는 거기서 40일 밤낮을 지내며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산에 올라간 모세의 하산이 늦어지자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모세의 형 아론에게 몰려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는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세를 의지했었는데 모세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종교와 의식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깨끗한 물을 떠놓고 촛불을 켜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심 산속에 들어가 특이하게 생긴 바위와 고목 앞에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형상이나 동물, 식물의 모양을 만들어 모셔두고 거기 절하며 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신으로 모시며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개신교인 1천명을 대상으로 2012 한국인의 종교의식과 생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은 대답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38.8%)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이 ‘구원을 얻기 위해’(36.1%)이고 ‘건강, 재물, 성공 등 축복을 얻기 위해서’(18.5%)가 세번째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함’이라는 대답만 두고 본다면 기독교 신앙 역시 미신과 토속신앙이나 유불선교 등 다른 종교의 신앙과 다름이 없습니다. 시내 광야에서 송아지 신을 만든 사람들도 그런 동기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내라고 한 것을 보면 종교 혹은 신은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심리적 작용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 맞는 듯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 히브리 노예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신 여호와 하나님도 사람들이 필요하여 만들어 낸 신에 불과합니까?
애굽에서 400여년을 살았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앙의 정체성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민 2세에 이르면 모국어도 잊고 모국의 역사도 모른채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 자녀들이 많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신앙적인 정체성이 희미해진 상태였습니다. 애굽의 종살이 기간에 보고 들은 것은 온통 애굽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그들의 종교행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금붙이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우리의 신이라고 선언한 것은 그동안 애굽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모방한 행동이었습니다. 조상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신앙교육을 받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애굽인들의 종교와 신앙의 영향으로 정체성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이 책의 첫번째 독자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창세기의 첫 머리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고 하나님의 천지창조 역사를 기술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 주관하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늘의 일월성신은 사람들이 신으로 받들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섬겨야 할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바로에게서 빼내실 때 거역하는 바로와 그 백성에게 차례대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린 재앙은 다름이 아니라 애굽인들이 신으로 섬기던 나일강, 개구리, 곤충들, 가축, 하늘의 태양 등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신이라는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며 어떻게 무너지는가 온 천하가 알도록 보여주신 것이 열가지 재앙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그렇게 확실한 실물교육을 받은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을 위해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애굽인들이 황소를(Ra) 신으로 섬기던 것을 모방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며 그 생각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도 본래 메소포다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하늘의 달을 신으로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대상을 혼동하고 살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신앙의 참된 대상이 누구신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아브라함을 구별하여 불러내신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후손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신앙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 역시 사람이 만든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는 땅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하나님만 믿고 따라야 할 백성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그 능력을 알리기 위해 창세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지하고 연약하며 항상 거역하기만 하는 피조물 인간의 현주소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교훈하기 위해 창세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와 신, 신앙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여호와 신앙과 그 근본부터 다릅니다. 불안한 인간의 심리에서 출발한 종교와 신앙은 말 그대로 나의 위로자와 보호자를 찾기 위해 사색과 명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사람에게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입니다. 내가 그분을 부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에게 찾아오시고 나를 부르시며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범죄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찾아오심의 결과입니다.
세상의 어떤 신들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가요? 세상의 어떤 신들이 사람들이 부르기 전에 먼저 찾아와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고 알아주며 어루만지고 고쳐주던가요? 사람들이 신의 눈치를 살피며 애걸복걸하고 자기 몸을 상하고 자식들을 불에 던져 제물로 바치면서 복을 달라 빌고 있지 않던가요? 성경에서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까? 성경이 증언하는 여호와 신앙과 세상의 모든 종교의 신앙을 동일한 것이라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산하여 백성이 저지른 일들을 보고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출32:31) 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이 하던 것처럼 자기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게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신앙입니다.
나를 지켜주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줄 존재, 전쟁과 재해와 사고와 질병으로부터 나의 생명을 지켜 줄 존재를 찾음으로부터 신들이 만들어졌고 그 신들을 예배하는 것으로부터 종교가 나왔다구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절대자를 의지하며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벌레 형상으로 바꿔버리고 (롬1:21-23) 그것들을 예배하는 행위가 거짓 종교의 시작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관리할 특권을 주신 청지기의 사명을 망각한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나온 범죄행위일 뿐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배우고 약속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대소요리문답> 맨 처음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고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으로 하여금 기쁨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위해 하나님을 믿거나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를 바로 해야 바른 신앙고백이 되고 바른 신앙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사는 제일된 목적이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지 나의 영광이 우선이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 역시 나를 위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순서를 혼동하여 나를 먼저 앞세우고 있었다면 바른 신앙으로 돌아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을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을 때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계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명 중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은 자기들의 필요를 위해, 자기들의 방식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 우상 앞에 제단을 쌓고 애굽 사람들이 하던 식으로 제사를 드리며 먹고 마시고 뛰놀았습니다. 스스로 만든 신 앞에서 위로를 받고 있으니 그 송아지 우상이 진정 하나님입니까?
우리는 이런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위해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예배하며 위로를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나를 인도하고 위로하며 나의 안전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돈이라 믿고 살지는 않습니까? 학력과 가문 배경, 든든한 직장과 지위가 나와 내 가정을 지켜주고 있다는 금송아지 신앙으로 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들, 내 손에 쥐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을 의지하며 그런 것들이 내 곁에 늘 함께 있어 나를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송아지 우상일 뿐입니다. 그런 것을 위해 열심을 내어 예배를 드리며 종교활동에 참여한다면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내 열심이나 선함이나 능력과 보람이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나를 위해 드리는 자기숭배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창12:7, 8; 13:18). 똑같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려도 이렇게 차원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이지 ‘나에게 복을 주세요’가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까 하여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예배는 나의 소원과 목적을 이루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의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나를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존재하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렇게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바로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임을 깨닫고 엎드리는 것이 우리의 예배이며 신앙입니다.
성찬식의 떡과 잔을 받는 여러분,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기독교의 참 신앙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함에 있습니다. 그 죽으심의 이유와 은혜를 깨닫고 내 삶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을 본받아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주께서 주신 힘으로 죄와 맞싸워 세상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열매입니다. 성찬식에 동참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연합하여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애굽이라는 죄악의 도성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참 신앙입니다.
네 백셩과 주의 백성
출 32:1-14 / 이동휘 목사
1. 구약의 욥은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거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유도 알 수 없는 엄청난 재난과 환난을 당해 하루아침에 몰락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아니하고 갑자기 부는 강풍에 집이 무너져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한 자리에서 몰사당하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고름이 흐르고 있었는데 길바닥에 나 앉아 그릇 조각으로 그 고름을 긁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던 아내가 참다못해 “(욥2:9) 당신이 그래도 믿음을 여전히 지킬 셈이오? 하나님이나 저주하고 죽으라.” 며 저주를 퍼붓고 뛰쳐나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욥2:10)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앞서 모든 재산이 몰락했을 때는, “(욥1:21-22)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었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노라.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렇게 처절한 상황 가운데 위로한다고 찾아온 친구들은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을 공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환난을 당하게 된 것은 남이 모르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신 것이라며 인과응보론(因果應報論)을 내세워 욥을 공박한 것이었습니다. 욥은 그러한 친구들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과 친구들로부터 소외된 영적 고독감을 느끼며, 하나님께서 나타나 자신을 변호해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갈망하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내 발은 오직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만 성실하게 걸으며,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건만!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계명을 어긴 일이 없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건만!>(욥23:1-12) “내가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욥의 이러한 고백처럼 인간은 어디를 가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아시고 계시지만 죄인된 인간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 도마가 예수께 “(요14:8)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며 하나님을 보여주시라고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9-11입니다.
(요14:9-11)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오신 예수 안에 계신 것을 믿고, 그의 행하신 일과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1:1-3입니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보고, 그 말씀 가운데 사는 자는 바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누구든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탄식 중에 드리는 고백에서,환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항상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항상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항상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았었노라는 고백입니다. 욥은 하나님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살았습니다. 죽어서 그 가죽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반드시 보리라고 소망했습니다. 욥기19:25-27을 보겠습니다.
(욥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이렇게 하나님 보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욥이 기도와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통해 마침내 욥의 영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을 체험하므로 하나님을 보리라는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욥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경험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42:5입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다윗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더니 그 언약, 곧 말씀을 보이셨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육안으로는 보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눈을 들어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 분의 말씀 가운데 거할 때에 악인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25:14-15입니다.
(시25:14-15)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예수께서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은 또한 하나님은 성령과 동일하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예수께서 ‘진리의 영’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진리’, 곧 ‘말씀’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고 하셨습니다.(요1:14)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은 다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이를 두고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0:30, 14:16-17을 보겠습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 보혜사 성령이 항상 함께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함께 계시게 됩니다. 예수 믿고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게 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심을 깨달았습니다. 히브리서11:1-3입니다.
(히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통해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 되던 때, 시내 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신 것은 모세와의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인도해낼 지도자로 세우실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3:12입니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 “산”은 시내 산을 말합니다. 장차 모세가 십계명을 받게 될 ‘시내 산’을 두고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광야 길을 거쳐 ‘시내 산’으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그 ‘시내 산’으로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19:4-6입니다.
(출19:4-6)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제 십계명,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며, 하나님 앞에 모든 나라 백성들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해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출19:8)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 꼭대기로 부르시고 ‘십계명’(출20:1-17)을 돌판에 새겨 주시며(출31:18), 지켜야 할 절기들, 성막 건축과 제반 규례(출21-31장)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오른 지 40일이 다 되어가는 즈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 아론에게 몰려가서 말합니다. ‘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낸 이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소식이 없소.’(출32:1) 모세가 40일이 다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신변에 무슨 사고가 난 줄로 생각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실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모세를 절대적인 지도자로 알고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던 백성들에게는 40일이 상당히 오랜 날로 여겨져 모세의 생존을 의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릴 수 없다며 모세의 형 아론을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신 신’(출32:4)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새로운 지도자로 여긴 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부재중 지도자로 아론을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출24:14) 이제 새로운 지도자로 세워진 아론에게 모세를 대신할 ‘신’(神)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모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세는 자신들이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바로 그가 자신들을 인도해 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세를 눈에 보이는 신으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15:8-21;창17:7)에 따라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셨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부르시어 그를 지도자로 세우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3:6-8,16-17 입니다.
(출3:6-8)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3:16-17)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에게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모세를 대신할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분명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지도자,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로 세움받은 하나님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눈이 보이는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인 모세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이 바르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 역시 견고히 서있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한 것은 오랜 기간 애굽 생활을 통해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인 우상들만을 접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으로 보고서야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이 되게 하여 자신을 구원하시고, 애굽 사람은 그 홍해에 수장시키신 ‘큰 일’을 보고서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종 모세를 믿었었습니다.
(출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서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모세가 보이지 않자 여전히 ‘보이는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믿음이 ‘보지 않고도 믿는 자’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요4:2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이 숭배했던 ‘눈에 보이는 형상들’을 떠올리고 ‘눈에 보이는 신들’을 만들자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모세를 대신할만한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아론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 집단 폭력을 휘둘러 아론을 죽일 듯이 포악한 분위기에서 ‘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결국 아론은 그 포악한 폭력집단의 요구에 굴복해서 금 패물들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이 금 패물들은 하나님께서 장차 광야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들 때 사용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창세기15:13-14입니다.
(창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언약에 따라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여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출3: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 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출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거룩한 성막을 만드시고자 주신 금(물질)을 오히려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복을 이처럼 엉뚱한 데 오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가져온 금으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형상을 주조하는 기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배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조각술과 공예술, 그리고 주조술 등이 매우 뛰어났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황소 형상의 아피스(Apis)를 비롯, 인간의 모습을 가진 프타(Ptah)와 오시리스(Osiris), 재칼의 머리 형상을 가진 아누비스(Anubis), 악어의 머리 형상을 가진 소베크(Sobek), 매의 형상을 가진 호루스(Horus)와 라(Ra), 따오기 머리 형상을 가진 토트(Thoth), 인간이 형상이나 숫양의 머리 형상을 가진 아문(Amun) 등을 주요 신으로 섬겼고 이외에도 태양과 나일 강 등 자연도 숭배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 형상은 애굽의 우상 아피스(Apis)를 본뜬 것이 분명한데, 그들은 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출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형상화하여 금송아지를 하나님처럼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끌어내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그 재앙들을 통해 애굽의 모든 우상들이 철저히, 그리고 무참하게 깨뜨려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서도, 다시금 ‘금송아지 신’을 만들어 진실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들은 우상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 또한 범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출32:5-6)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아론은 지도자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폭력적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라고 요구했을지라도 그 부당성과 하나님 앞에 분명한 죄악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아론이었기에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조차도 막아설 엄두도 못내고 이렇게 공포합니다.
(출32: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아론이 말한 ‘여호와의 절일’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유월절이나 무교절, 그리고 초막절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눈에 보이는 신, 금송아지에 대한 축제의 날을 뜻합니다. 금송아지를 가리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여호와의 절일’은 그 금송아지 숭배를 위한 절기로 말한 것입니다. 고대 이방 종교의 축제는 음주, 가무(歌舞) 및 부도덕한 성행위로 이루어졌습니다. 애굽 생활에서 이런 것들을 익히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절일’ 이라는 말을 그러한 이방인들의 축제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나 ‘(출32:6)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는 것은 이방 종교 축제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방 종교의 우상숭배에는 필수적으로 난잡한 성행위가 따르게 됩니다. ‘뛰놀았다’고 하는 것은 ‘흥겹게 놀았다.’는 뜻인데 이는 곧 육체적 환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당시 이방 우상 숭배 종교에서 황소 신, 아피스(Apis)는 ‘힘’과 ‘생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형상 앞에서 ‘뛰노는 것’은 곧 성적으로 타락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3.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10:6입니다.
(고전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으로 보고서야 믿는 믿음, 다시 말해 뿌리가 없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자기들 눈에 보여야만 믿는 얄팍한 신앙이 ‘눈이 보이는 우상’을 만들게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딤을 보고, 모세가 그들 중에 없다는 사실이 마치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그래서 아론에게 “모세 대신에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요청하고 나섰던 것입니다.?‘모세’라는 한 인간을 ‘자기네들을 인도하는 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순전히 모세에게만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모세가 일일이 지도해 주고 모세가 손잡고 인도해 주어야만 간신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뿌리박은 신앙이 아니라 모세라는 사람에게만 의존한 신앙이었습니다.?그러니 그처럼 기초부터가 잘못되어 있는 신앙은 그 모세가 그들 곁에 없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리는 성도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부모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고, 자식이 주일마다 교회에 모시고 나오니까 그럭저럭 참석하는 예배로 끝나서는 안됩니다.?좋은 친구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목장의 목자들이 강권하는 손에 이끌려 겨우 지탱되는 교회 출석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혹 ‘목사님이 좋아서’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이 그처럼 사람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신앙으로 끝나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그것은 아무 기본 뼈대조차 갖추어지지 못한 신앙으로서, 우상의 미혹에 아주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허약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곁에 있는 성도나 교역자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그 출발 단계에서는 도와 줄 수 있고 또한 먼저 믿는 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하지만 그렇게 교회에 인도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 말씀 위에 자기 신앙의 기초를 세우면서 자립하지 못하고 계속 그처럼 다른 사람에게 끌려만 다니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쉽게 시험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의존하던 사람이 사라지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시 하나님을 자기네들 편리한대로 정의하고 판단하면서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불렀고, 또 아론도 그 금송아지를 두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선포했습니다.?더 나아가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즉 그들은 새로운 신을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믿어 왔던 하나님을 이제 그 금송아지를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으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금송아지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서 정의해서 만들어낸 신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자기 편리한대로 섬기는 것, 바로 이것이 ‘금송아지’ 종교이며 하나님을 극단적으로 모욕하는 최악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울삼아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 굳건하고 건강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이방인들의 축제를 벌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32:7-10입니다.
(출32:7-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네가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지, 모세 아니라 그 누구 앞에서도 ‘네 백성’이라고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그런 하나님께서 여기에 와서는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네 백성”이라고, ‘이 백성은 이제 내 백성이 아니고 모세 너의 백성이다.’라고 아주 쌀쌀하게 말씀하고 계실 정도로 크게 진노하고 계십니다.?즉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백성은 이미 자신의 백성이 아니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결코 부르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백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그 “목이 곧은” 즉 걸핏하면 하나님께 고집스럽고 교만스럽게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예 다 진멸하여 없애버리고, 그 대신에 모세 한 사람의 자손을 통하여 완전히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을 아예 새로이 만들어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모두 없애버리시고, 믿음의 자손을 다시 모세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진노하셨는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듣고 모세는 어떤 기도를 올렸습니까??출애굽기32:11-14입니다.
(출32:11-14)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무엇보다 모세는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자기 백성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으신,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모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간절하게 호소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주의 백성”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의도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조금 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그들이 결코 ‘자기의 백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님 당신의 백성’이라고 자기편에서 고쳐서 아뢰고 있습니다.?즉 아무리 진노하셨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원래 ‘자기 백성’된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변치 못할 사랑과 자비의 성품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하시도록 가만히 두면 훨씬 더 편할 일이었습니다.?걸핏하면 불평 원망하고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서도, 며칠 지나지 않으면 또 다시 믿음 없는 행위들을 반복하는, 그 골차 아픈 백성들은 이 기회에 깨끗이 싹 처리해 버리고, 아예 완전히 순수한 씨만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나간다면, 그보다 더 편하고 이상적인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하지만 놀랍게도 모세는 아무 문제없는 완벽한 사람들만 모인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문제 많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완벽한 백성으로 만들어 나가는 쪽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을 여기서 다 진멸시키시면 애굽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탄원했습니다.?그러면서 한번 구원해 주신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호소하면서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기를” 간청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이어서, 그 이스라엘 백성을 번성시키고 축복해 주시겠다고 이전의 선조들에게 내려주신 ‘언약’을 따라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이러한 모세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그대로 일치하는 기도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바로 이것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서 그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입니다.?예수께서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며 용서를 간곡하게 구하는 모세의 기도,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따라 드린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는 뜻을 돌이키시고 형벌을 내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출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만약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즉결 심판하신다면 그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나님께서 만일 이 세상에서 모든 죄인들을 다 깨끗이 진멸하시고 의인 한 사람만 남겨서 그 자손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세워나가고자 작정하셨더라면, 저와 여러분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오늘까지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해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미 스스로 의로운 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주가 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러서 그들을 회개케 하시고 용서해 주셔서 의인을 만들어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바로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으신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 그리고 죄를 벌하시는 공의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오히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지극히 선하신 성품,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비록 한때에는 금송아지 숭배와 같은 최악의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조차도 베풀어질 수 있는, 실로 무한한 인자와 선하심으로써 오늘도 죄인을 찾아와 주시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신 사랑과 자비가 항상 여러분에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복된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 내리는 신앙생활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포퓰리즘을 의식하여 우상을 만든 아론
출 32:1-6 / 이훈구 목사
서 론
많은 사람들이 포퓰리즘을 의식하여 양심을 속이고 정의와 진리를 떠나 잘못 된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소개 된 인물 중 최초로 포퓰리즘을 의식하여 우상을 섬기고 백성들을 징계 받게 한 지도자가 아론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포퓰리즘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포퓰리즘의 의미
포퓰리즘은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행태로 “대중주의”라고도 말하고, “인기영합주의”, 혹은 “대중영합주의”라고도 합니다.
포퓰리즘은 일반대중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고 동원시켜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체제를 말합니다.
포퓰리즘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파퓰리스트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파퓰리스트당은 그 당시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해서 농민들과 노조의 지지를 목표로 경제적 합리성을 도외시한 과격한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포퓰리즘의 근본요소는 개혁을 내세우는 정치적 편의주의 나 기회주의입니다.
예를 든다면 정치인들이 선거를 치를 때 유권자들에게 경제논리에 어긋나는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는 일이 전형적이라고 하겠습니다.(무료급식, 대학 반값등록금, 과도한 선심성 복지정책, 고교평준화, 무료버스 등등)
포퓰리즘을 이끌어가는 정치 지도자들은 지지를 얻으려고 겉모양만 보기 좋은 개혁을 내세우지만 민중이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나친 인기 영합주의나 집권세력의 권력유지에 악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들, 좌파세력, 종북 주의자들, 수많은 각종 연대, 전교조, 강경 노조 등이 자기들의 이권을 위하여 세를 결집하여 사실도 아닌 것을 사실처럼 왜곡 선전하고 선동하며 현실성이 전혀 없는 정책이나 주장들을 포퓰리즘화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광우병소고기 촛불 시위, 천안함 피격부정 , 화물연대 파업, 철도파업, 유병헌 자살을 소설이라고 함, 세월호 특별별, 차별제한 법 등등)
어리석은 사람들은 대중의 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모든 것을 대중의 수로 결정을 하지만 대중의 수가 절대적이거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아무리 많은 대중의 뜻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따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모세는 어떤 경우에도 포퓰리즘에 휘말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였기 때문에 40년간 이스라엘 민족을 안전하게 지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민13-14장 12명의 정탐군 중 10명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거짓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 포퓰리즘에 휘말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포퓰리즘에 휘말린 자들 중 20세 이상이 다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포퓰리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여야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포퓰리즘에 휘말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가 많은 백성들을 희생시키고 말았습니다.
2. 포퓰리즘을 의식하고 우상을 만든 아론
1)출24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홀로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계시 받았습니다.(율법, 규례, 제도, 성막 설계 등)
2)본문1절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빨리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3)본문2-4에 보면, 아론은 대중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금고리를 가져오게 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3)본문4하-6절에 보면, 아론은 제단을 쌓고 공포하여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그 금송아지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먹고 마시고 뛰놀게 하였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포퓰리즘을 의식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섬기지 말라는 제 2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포퓰리즘을 더 의식하고 진리를 외면한 채 포퓰리즘을 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3. 아론의 우상 섬김 때문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
출32:7-10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1)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7)
2)그 백성들이 내가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에게 예배하며 제물을 드리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말하고 있다.(8)
3)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므로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9-10)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소나 말이 농부의 말을 듣지 않을 때 표현하던 말인데 성경에서는 고집이 세고 악한 상태를 가리키는 관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트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철회하고 모세와 새롭게 계약을 맺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의 계약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의로워져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새 계약을 맺을 경우에는 율법을 지켜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율법의 후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제안에 거부를 하고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출32:25-29에 보면,
1)모세가 백성을 보니 방자하고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25)
방자 하다는 말은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다” 는 의미가 있지만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광란의 축제를 지낸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원수는 애굽 사람들인데 이들이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겠다고 출애굽 하더니 광야에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금송아지를 섬기니 애굽인들이 조롱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2)모세가 레위 자손을 시켜 이스라엘 민족 3,000명을 죽이게 하였습니다.(26-29)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선수를 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을 전멸하시기 전에 레위사람들을 통하여 우상숭배 주모자들을 쳐서 죽이게 하였습니다.
4.모세의 중보기도
출32:11-14에 보면,
1)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를 하십니까?(11)
2)하나님께서 진노를 하시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하셨다는 오해의 빌미를 주시게 됩니다(12)
3)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십시오.(12)
4)아브라함, 이삭에게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 영원히 기업이 되게 하리라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옵소서(13)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사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14)
출32:30-35에 보면,
1)모세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는데 내가 너희를 위해서 하나님께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30)
2)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참회기도를 하였습니다.(31)
3)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지 않으시려면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32)
4)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내게 범죄 하면 그를 지워버리고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33-34)
5)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어 섬긴 그 백성을 치셨습니다.(35)
학자들은 레위인들의 사형집행 과는 별도로 역병으로 백성을 치신 것 같다고 합니다.
결 론
다수의 소리가 정의이거나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만 진리이므로
신자들은 포퓰리즘에 귀를 기울이거나 동요되지 말고 언제든지 영원한 정의의 기준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아론처럼 포퓰리즘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식하고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겠습니다.
진노를 거두시는 하나님
출 32장 1-14 / 이재훈 목사
‘작심삼일’은 사람의 결심이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를 설명해주는 고사성어입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삼초’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부패하고, 연약한 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만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해서 아론에게 자신들을 이끌어 줄 신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은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금송아지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끔찍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기적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존해 왔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겠다고 여러 번 서약까지 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인도할 신이라고 숭배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한 명령을 그토록 빨리 저버리고 스스로 송아지 모양의 틀에 우상을 부어 만들고는 경배하고 제물을 바치면서 ‘이스라엘아, 이것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신이다’라고 했다”(8절).
아담이 창조되고 난 뒤에 얼마나 빨리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노아가 방주에서 건짐을 받고 나서 얼마나 빨리 죄를 범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얼마나 빨리 우상을 섬겼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얼마나 빨리 세상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 익숙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습니까. 모세의 부재가 그 시작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40일 동안 시내산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머물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율법을 주시고, 성막의 청사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면 며칠이면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머물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모세와 친밀함을 나누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검증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자신들을 이끌어줄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줄 신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 본성이 표출된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마음속에 숨어있는 종교적 본성이 살아납니다. 위기에 처하고,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 놓이면 초월적인 존재를 의지하는 심성이 발동합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죽음 앞에 서면 기도를 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본성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오자 불안해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인내하기보다 자신들의 때에 맞춰 움직였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이 신을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을 만들어 순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때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올바르게 인도해야 할 책임이 아론에게 있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자, 모세와 함께 백성들을 이끌던 리더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하나님보다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요구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에 맞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한다고 훈계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대중들의 어리석은 요구를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백성들보다 더 큰 책임이 아론에게 있습니다, 나중에 모세가 내려와 호통을 칩니다. 그런데 아론의 대답이 가관입니다.
“아론은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 백성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얼마나 쉽게 악을 행하는지 말입니다. 그들이 내게 ‘우리 앞서서 갈 신을 만들어 내어라.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그 사람 모세가 어떻게 됐는지 알 게 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말했지요. ‘금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다 빼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내게 금을 가져왔고 내가 그것을 불 속에 던져 넣었더니 이 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22~24절).
아론의 대답이 기막힙니다. 자기반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 일이 백성들이 악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 줄 아냐고 말합니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금을 가져왔고 그것을 불 속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설명을 해도 어떻게 이렇게 설명합니까. 불 속에 금을 던지면 송아지가 튀어나옵니까. 당황한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무책임한지 모릅니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변명과 도피, 회피로 가득한 지도자입니다, 가끔 뉴스에서 이런 비슷한 말을 듣습니다. 금을 불 속에 넣었더니 금송아지가 튀어 나왔다고 하는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해명들이 참 많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진노하시고, 백성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들을 보니 참으로 목이 곧은 백성들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 나를 두고 가거라. 저들 때문에 내 진노가 부글부글 끓는구나. 내가 저들을 진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다’”(9~10절).
이 사건은 하나님이 백성들을 진멸하실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계명을 어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송아지를 형상화했습니다. 이것은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2계명도 어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어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는 마치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세와 아론과 그 지도자들이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모습 그대로 금송아지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비슷하게 드리고, 사이비 유사종교를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1,2계명을 어겼다는 것은 나머지 8계명도 당연히 어긴다는 것입니다. 도미노현상처럼 발생합니다. 1계명이 무너지면 2계명은 금방 무너집니다. 2계명이 무너지면 나머지 계명도 무너집니다. 그 일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막의 청사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의 청사진을 받고 있는 동안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막과 인간들이 만든 금송아지가 대조를 이룹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집이고, 금송아지는 사람을 위해 만든 우상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금송아지는 인간들의 작품입니다. 성막은 여러 재료를 가지고 세심한 기술과 공정을 통해서 만드는데, 금송아지는 금이라는 재료 한 가지로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만듭니다. 성막은 자발적으로 드린 예물로 만들지만, 금송아지는 아론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낸 재물로 만들었습니다.
은혜의 문을 발견한 모세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멸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여기서 진멸해 버리고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듯이 모세를 통해서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기지만, 모세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골치 아픈 백성들을 멸하고, 모세를 아브라함의 위치에 두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이미 형성된 민족을 이끄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가 지도력을 인정받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런 모세가 아브라함과 같이 혈통의 조상이 된다는 것은 분명 기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하나님 여호와께 빌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왜 주의 백성들 때문에 노여워하십니까? 그들은 주께서 큰 능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사람들이 아닙니까?’ 왜 이집트 사람들이 ‘그가 그들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쓸어버릴 생각으로 끌고 나갔구나’하게 하시겠습니까? 주의 무서운 진노를 돌이키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께서 친히 주를 두고 그들에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니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11~13절).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놀라운 기도입니다. 모세의 태도는 불순종처럼 보이지만 순종입니다. 여러분, 순종처럼 보이는 불순종이 있고, 불순종처럼 보이는 순종이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세 가지 근거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큰 능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사람들이 아닙니까?”(11절).
모세는 하나님의 강한 결단 속에도 은혜의 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신데 은혜의 문을 어디서 찾아야합니까. 가만히 본문을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와 의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너로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계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으니 진멸하면 되는데 모세와 의논을 했다는 것은 그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계획을 말씀하시고, 생각을 물어보시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서 은혜의 문을 열려 있다는 가능성을 봤을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찾아와서 크게 화를 냈다면 변할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모세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실행하면 됩니다. 모세는 여기서 은혜의 문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너는 이제 나를 두고 가거라 했습니다”(10절).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말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흥분하면 말리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려달라는 것입니다. 말리면 안 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앞문은 막으셨는데 뒷문은 열어 두신 것 같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내가 하는 대로 두라”는 말씀을 중보기도에 대한 초대라고 해석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이라도 그 속에 작은 틈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과 대화하셨다는 것, 의견을 구하셨다는 것, 흥분하셨고, 진노하셨지만 ‘나를 두고 가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중보기도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한 것은 불충실이 아니라 진정한 충성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함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것이 중보기도의 힘
둘째,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에 호소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운명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더 초점을 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서 진멸되면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보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기도제목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주기도문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이유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운명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
셋째, 하나님의 약속에 호소했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에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호소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려는 하나님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의 신실함을 붙잡고 호소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던 마음을 접으셨습니다”(14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킨 것은 모세의 말을 듣고 뉘우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개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획한대로 진멸하셔도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하나님의 사람 의견을 존중해서 문제를 풀어가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미래를 열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진노를 거두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진노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중보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운명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한반도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대화하면서, 마음을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중보기도의 특권을 누리고, 활용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중보기도를 통해 역사를 바꾸고, 민족의 미래를 바꾸고, 열방의 미래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마땅히 내려 할 하나님의 진노가 거둬지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모세의 기도
출 32:1-14 / 박덕기 목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데는 6일이 걸렸지만, 성막에 관한 계시를 하신 데는 40일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오른 지 40여일이 가까워지도록 내려오지 않자, 지도자가 없는 상황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낙담하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낀 나머지 모세의 형 아론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요청하기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갈 때 있었던 엄청난 천둥과 불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거나,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더불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도 자신들을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서가 우상을 만들어서라도 자신들과 함께하는 신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던 데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력한 요청을 받은 아론은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신의 형상을 만들자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격앙된 어투로 그들이 아끼는 장신구를 몸에서 빼어 가져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아끼는 물건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불편한 감정까지 섞어서 이 같은 명령을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때 모세와 더불어 애굽의 막강한 바로와 술사들을 상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냈던 지도자 아론은, 이스라엘 백서의 잘못된 요청을 결단력 있게 막아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처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고 마는 무기력한 신앙의 일면을 드러낸 것입니다.
아론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로부터 많은 귀금속들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할 때에 애굽인들로부터 각종 보석들을 받아 나왔기 때문에, 광야 생활 중에도 많은 귀금속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가져온 많은 금붙이를 받아서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많은 동물들이 숭배되었고, 심지어는 나일 강과 같은 자연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멤피스라는 지방에선 ‘프타’라는 신을 섬겼는데 이는 황소였습니다. 테베스에선 ‘아몬’이라는 신을 섬겼는데, 이는 암소였습니다. 하늘의 신이라고 하는 ‘호러스’는 매였고, 태양의 신이라는 ‘라’ 역시 매였습니다. 죽음의 신 ‘오시리스’는 염소였고, 그 아내 ‘이시스’는 암소였습니다. 지혜의 신 ‘도드’는 원숭이였고, 그 아내 ‘헤카’라는 여신은 개구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에 이같이 악한 우상 숭배를 배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협박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그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2 계명을 어긴 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 3계명까지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린 열 가지 재앙들을 통해서 애굽 우상들의 무력함을 목격한 바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지도자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이에 이렇게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범죄는 그들이 비록 하나님과 언약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없고, 소와 같은 짐승들을 숭배했던 애굽의 우상 숭배의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나타낸 것으로서,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랜 연단이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1.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인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을 찾아가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산으로 올라간 후에 사십 일 동안 산에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십 일을 기다리지 못하여 우상 숭배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사십 일이 걸릴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그 기간을 알려주었더라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산에 머무는 기간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세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경거망동함으로 범죄케 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으로 인내하지 못하여 범죄케 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즉 그는 불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선지자겸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이 더디 오자 조급한 마음에 인내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믿음이 부족하여 인내하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는 그 응답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응답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뜻을 이루려고 하다가, 하나님 앞에 불신앙의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의 부족함에서 생기는 조급함으로 인내하지 못하여 범죄하는 경우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신앙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과 인내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도 않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약속의 성취와 기도의 응답을 받아 누리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다 믿음을 근거로 한 인내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마침내는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요구는 그 자체가 상식적으로 볼 때 논리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인도할 수가 있습니까? 이는 마치 하나님께 피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보호하고 인도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로, 상식을 벗어난 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애굽 사람들의 우상 숭배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만들어 자신들의 인도자로 삼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일들은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에도 인생들은 사람들이 돌이나 금속 등으로 만든 우상 앞에 가서 절을 하고, 자신들의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해 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돌이나 금속 등을 깎거나 부어서 만든 우상이 어떻게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만든 우상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인생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고 그 길을 인도할 수 있는 참 신이,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다른 존재를 의지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참 신은 스스로 존재해야 하며, 그러한 존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기 때문에, 사람은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만을 섬김으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세상의 모든 우상을 배격하고,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만을 섬김으로, 그분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헛된 것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와서 그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금들은, 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하는 대로 온갖 보화를 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보화를 주신 것은, 장차 여호와의 성막을 짓는 데 필요한 것들을 위하여 헌물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재물로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도록 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죄를 짓는 데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로 베푸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와 햇빛을 내리심으로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차별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심과 같이, 모든 재물은 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소유로서 인간은 재물을 그것의 본 주인이자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사용함으로 하나님께 배은망덕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더욱 음란한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때에, 성적으로 문란하여져서 많은 젊은이들이 성병으로 죽어가면서 망하게 되었던 것처럼, 어느 사회나 물질적 풍요는 인간의 죄악성을 더욱 극심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의 풍요로 인한 배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보화로 우상을 만드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세상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교회와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육 간에 더욱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그 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해 버리며 동물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는 행위야 말로 진정 죽어 마땅할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행한 죄악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곧 남편과 아내가 결혼 서약을 파기한 것과 같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해버리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를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은 크게 분노하셨고, 단숨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하셨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11절에 보면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만류한 근거는, 이스라엘백성의 의로움이나 공의를 무시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심판을 거두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즉 모세는 만일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면, 애굽 사람들이 그 백성을 진멸하기위해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조롱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진멸 계획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간구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여 이스라엘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구하는 기도의 근거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교훈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이 사업에서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기도의 근거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자이므로, 세상 사람들에 비하여 무엇이든지 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들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하여 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모세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코자 하는 자신의 뜻을 거두셨듯이, 우리의 기도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기도였습니다.
13절에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께 일찍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만큼은 거두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변개할 수 없는 약속을 하셨음을 상기시키며, 그것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고 믿음의 기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3. 자기를 희생해서 민족을 구하려는 희생적 기도였습니다.
32절에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거룩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의 거룩한 책’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의로운 자들의 명부 곧 생명책’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소망까지도 포기할 각오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간구하였습니다. 모세 자신은 지옥에 가도 좋으니 제발 이스라엘 백성만은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도 아낌없이 포기하려는 희생적인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는 인류 대속 사역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모습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모세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 인물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희생적인 간절한 기도를 하였는데 곧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모세나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버려도 좋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불신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더디 내려오자, 금송아지를 만들어가지고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 행위에서 우리는 1)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인내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2)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시라는 것. 3)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가지고 헛된 것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라는 엄청난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해 버리고, 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는 목숨을 걸고 기도하였는데, 그의 기도는 1)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고 2)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기도였으며 3)자기를 희생해서 민족을 구하려는 희생적 기도였습니다. 우리들의 기도 역시 모세의 기도를 본받아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모습
출 32:1-14 / 서윤발 목사
Ⅰ. 서 론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을 딱 한 권 읽은 사람이라는 우스개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은 그 책에서 읽은 것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읽은 책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아예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우기지 않습니다.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저 하자는 대로 따라 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을 딱 한 권 읽은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내 주장과 고집을 절대로 꺽지 않고 내 방식대로 섬기겠다. 내 방식대로 살겠다. 고집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일 답답하게 여기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답답해서 화까지 내시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Ⅱ. 본 론
1. 십계명 돌판을 받으러 간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벗어난 뒤에 약 삼개월이 지나면서 시내산이라는 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시내산이라는 곳은 지금도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이스라엘 지역에 현존하는 산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이라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이 산은 아주 의미가 깊은 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산에서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받았을 때, 모든 백성들이 같이 받은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이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이 십계명을 말씀해 주셨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백성들이 너무 두려워서 그 말씀을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말씀해 주셨을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음성만 들린 것이 니라 엄청난 우뢰소리와 번개와 연기들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가끔씩 천둥, 번개가 심하게 칠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에 부산에 천둥, 번개가 칠 때 저는 4층 서재에 있었는데 번개가 바로 옆에서 번쩍 하는 것 같더니만 '쩍' 하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원래 천둥소리는 번개가 치고 난 뒤에 한참 있어야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쩍 소리가 같이 나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번개가 전선을 타고 흐른 것이죠. 그래서 집에 있던 TV가 코드만 꽃혀 있었는데 저절로 전원이 켜지더니 부속 하나가 타버렸습니다. 번개나 천둥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릅니다. 과거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라는 사람도 바로 이 번개 때문에 두려워서 사제가 되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연의 힘이 무서운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몇 배, 몇 십배의 우뢰와 번개와 가득한 연기를 보았을 겁니다. 그런 현상들이 얼마나 심했는지 백성들이 도저히 두려워서 견딜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탄원하기를 '제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모세에게만 말씀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모세가 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 듣겠으니 그렇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나중에는 모세와 또, 모세를 돕던 여호수아만 산 위로 올라오게 하시고 나머지 백성들은 산밑에 둘러친 울타리를 넘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산밑에 남아서 모세가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받아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계명을 받아 오면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법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게 되는 겁니다.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 교만에 찬 백성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분명히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받으려고 시내산 위로 올라갔는데, 모세가 산에 올라간지 40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때까지 인도한 사람은 모세였는데 그 모세를 그렇게 두렵고 무섭던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어떻게 하시지 않았는가? 만약에 모세가 어떻게 해서 죽어버렸다면, 그래서 오지 않는 것이라면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들도 죽이시지 않겠는가? 그것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이럴 때 여러분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시겠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해 주실 때 까지 기다리시겠지요?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은 도대체 생각을 했습니까?
본문을 보니까 이 백성들은 마냥 이렇게 모세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다. 모세가 죽었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모세가 없으면 우리가 하자.
그런데 이건 사실 이스라엘 일반백성들이 한 생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다른 지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40일 전 까지만 해도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나 두려워서 제발 우리보고는 직접 말씀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탄원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백성들이 비록 40일이 지났지만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자. 그렇게 나선 겁니다.
우리가 하자는 것은 요, 다함께 힘을 모으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도 된다.
우리 생각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의 법이 뭐 필요하냐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법을 만들자. 옛날에 애굽에 있을 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자.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너무 골치 아픈 일이었습니다. 애굽의 신들은 그저 그 앞에 제물을 놓아두고 절 몇 번하고, 그리고 나서 춤추고 놀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너무 까다롭습니다.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이것은 이렇게 하라. 저것은 저렇게 하라. 얼마나 간섭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다가 또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러니까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법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감히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모세가 죽은 것 같거든요. 그러니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기보다는 바로 이 순간에 그들이 마음속에서부터 원했던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서 이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 섬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깁니다. 물론 모세의 방법대로는 못 섬기더라도 애굽의 방식대로는 섬기겠습니다. 이들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방법이 아니라 애굽에서 배웠던 우리 방식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교만하다는 것이지요.
국어사전을 보면 '교만'이라는 것은 '젠체하고 뽐내며 방자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이란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대신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고 내 식대로 하겠다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최고의 법이 되고, 내가 최고의 권위자가 되고,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성향들이 있습니다.
내 식대로 섬기겠습니다. 내 식대로 살겠습니다.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똑똑한 일 같지요? 아닙니다. 이런 분들은 결국에는 엉뚱한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3.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과 백성들
자,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게 교만에 찬 이 백성들이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까?
백성들은 자기들 생각에 이제 자기들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선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어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만들어진 하나님의 모습 앞에서 제사도 드리고 축제도 벌이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다 뭡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배워왔던 것들입니다.
애굽에서 430년동안 조상 대대로 내려오면서 보고 배운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애굽에서는 어떤 신들을 섬기든지 신의 모습을 조각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조각 앞에서 제사를 드려왔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섬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모습을 조각해서 만들어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자'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자. 얼마나 하나님을 모르는 소리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에 대한 고정관념이었습니다. 뭔가 보여야 섬길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의 형이었고 또, 제사를 담당했던 아론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모세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이제 당신이 우리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 그렇게 요구했습니다.
물론 아론은 이런 요청을 듣고 고민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론의 신분이 뭡니까? 아론은 모세의 형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할지라도 거절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러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께 한 번 기도해 보자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론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서도 백성들의 요구 앞에 굴복했습니다.
백성들이 요구한 대로 신상을 만들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론은 백성들에게 먼저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가지고 있던 금귀고리를 빼어서 자기에게 가져오라 했습니다. 백성들이 아론의 말을 듣고 모든 금귀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아론이 그 금귀고리들을 녹여서 큰 덩어리를 만들고, 조각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낸 신이 바로 이 송아지 모습이라는 겁니다.
왜 하필 송아지입니까?
애굽에서 제일 유명한 신의 모습, 애굽에서 제일 힘있는 우상의 모습이 송아지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런 신의 모습을 만들어 준다면 든든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한 겁니다.
백성들의 요구대로 백성들의 신을 만들어 준 제사장.
인자한 제사장입니까?
겸손한 제사장입니까?
아니면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제사장입니까?
아론은 백성과 함께 엉뚱한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내 식대로 섬기겠다고 하니까, 내 식대로 살겠다고 하니까.
똑똑한 것 같은데, 지혜로운 것 같은데 결국은 이런 우상을 만들게 된 겁니다.
그래서 롬1:21-23을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내 방식대로 섬기고,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똑똑한 모습을 드러내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썩어질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겁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이게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식대로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려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신의 모습이 있습니다.
지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금부처, 흰 수염을 기르고 흰 도포를 입은 모습.
왕관을 쓰고 왕의 도포를 입은 모습. 이런 모습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이 이런 모습을 가졌으면 했던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 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모습이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기셨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어떤 모습으로든지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제일, 제 이 계명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으리라고 예측을 하고 신의 모습을 만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가증한 행위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 만 꼭 우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도 많습니다.
우리도 때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기 보다는 나에게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었으면 하고 자기만의 하나님상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하나님 상을 섬길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만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 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겁니다.
그리고 또 때로는 아무리 기도하자 해도,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예배드린다고 제대로 살 수 있습니까? 말씀을 본다고 됩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실은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도 않아 놓고서 말입니다.
여러분, 내 식대로를 버리시고 하나님식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보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전해 주시면서 이런 백성들의 모습을 이미 아시고 진노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아예 전부 다 진멸하고 모세 한 사람만을 택하여 새롭게 큰 나라를 세워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세상의 많은 민족들을 버려두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못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셨습니까? 이 연약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셔서 이 땅위에 하나님의 새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정의가 흐르고 공의가 세워지고 사랑이 충만한 그런 나라를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까지 애굽이라는 죄악의 나라에서 배우고 익혔던 그 모든 옛 습성들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법을 따라 익히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그런 옛 습성들을 버리기는커녕 그것을 자기들의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노하우라고 생각하고 그것 가지고 법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것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나라가 세워지겠습니까? 아무리 잘 세워봐야 애굽 같은 나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한심한 백성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들의 그 가진 것을 버리지 않고 고집하는 백성들을 차라리 하나님께서 버려야겠다. 결심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잘 버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내 죄악의 습성들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내 옛 가치관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내 고집을 버릴 줄 아는 사람.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사람입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고집하면 하나님께서 차라리 우리를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를 버리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이 그렇다는 겁니다.
EX) 저는 결혼을 좀 늦게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전임전도사로 일하면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얼마나 우는지 대책이 없었다. 안아줘도 울고, 업어줘도 울고, 할 수 없어서 마침 그 때 교회에서 내준 승용차가 있어서 차에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차안에서는 잔다. 차가 멈추면 또 울고 차가 달리면 잔다. 30분 이상 달리다가 잠들면 집에 들어와서 차 문도 살짝 닫고 대문도 살짝 닫고 딱 눞히면 잉하고 또 운다. 그럴 때는 이걸 그냥 갖다 버리고 싶기도 하고 산 속에 데리고 가서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고 싶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러나 버릴 수 있는가? 없다. 그러나 마음은 버리고 싶다. 아이가 커가면서도 때때로 말을 안 들으면 또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식이 아니라 원수다 원수. 그러나 절대로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보고 그러시겠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아이구 저걸 그냥 내다 버리고 새 민족을 만들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드시면서도 버리실 수 없었던 그 심정처럼 나보고도 저걸 그냥 버려? 그러시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하시는 그럴 때가 얼마나 많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내다 버리고 싶다는 심정이 일게 하지말고 우리가 먼저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려야 할 자기들의 생각과 고집과 옛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도리대로 따라갔더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생전에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나라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도리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가지셨던 멋진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법들을 배워서 내 생각을 바꾸고, 내 가치관을 바꾸고, 내 습관을 바꾸어 하나님이 주실 멋진 열매들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Ⅲ. 결 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두려워서 떨며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 식대로 섬기겠다, 내 식대로 살겠다. 고집하며 하나님의 법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똑똑하게 내 길을 가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상, 자기 나름대로의 우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상을 가지고 자기식대로 살아가려 할때 때로는 그 택하신 자녀를 버리고 싶은 심정을 가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죄악가운데로 달려가던 사람이었고 멸망가운데로 달려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사람들입니다.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또 다시 엉뚱한 길로 갈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또 다시 버리고 싶다고 갈등하시는 자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사랑스러워서 어쩔줄 모르는 자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사용하실 수 밖에 없는 그런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주님 안에서 강건한 인생을 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송아지 우상
출 32:1-6 / 손상률 목사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가 주도한 광야교회는 가나안 입국이라는 대명제 하에 목적의식이 분명한 교회였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의 싸인에 따라 일정기간 장막생활을 하기도 하고, 때가 되면 어디로든지 행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연 환경이나 여러 가지 악조건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과 초자연적인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광야교회의 역사는 세상이라고 하는 거친 토양 위에서 오직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야하는 지상교회의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 성경에는 시내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40일 간이나 산 위에서 율법을 계시 받고 있을 때 진중에서는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을 하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광야교회는 후세 사람들에게 사표가 될 만한 이적과 큰 권능이 행사되었지만, 다른 한편 그들이 저지른 과오로 인하여 징벌을 받은 불행한 일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은 광야 교회의 역사를 조명하므로써 그 감격스럽고 은혜로웠던 일을 계승하는 한편 그들이 자행한 범죄와 징벌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I. 불신앙으로 빚어진 행위입니다.
본문 말씀 3-4절에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저희 손에 있는 금붙이를 가지고 우상을 만들고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경배하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조형물을 두고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주권자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이사야 40:18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거나 인정받아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은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입니다.
여기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든 무리들은 자기들 손으로 고안하여 만든 물체를 하나님이라 불렀고, 그것이 저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23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언약에 대한 불신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애굽에서 저희를 인도하여 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왕과 그 신하들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행하게 하고, 유월절의 피 뿌리는 절기를 정하며,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오게 하신 하나님을 저들은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가나안 땅으로 가야 되는 일련의 과정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운동과 가나안 입국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2:24에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3) 자의적인 신앙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지키게 될 율법을 반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1-3에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불문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경우에도 이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의 삶을 영위하여야만 됩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나 명분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아말렉 전쟁에서 거둔 전리품을 모두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살찐 소와 양과 짐승들을 살려 두었습니다. 그 일로 사무엘에게 책망을 받게 되자 그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하여 살려 두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이 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하였습니다(삼상 15:22-23).
Ⅱ.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계시나 율법을 반포하실 때 먼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정립하게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님은 주권자요 자기 백성은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파동은 그들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행태로 빚어진 산물입니다.
(1) 배금(拜金)주의입니다.
1절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백성은 조급한 나머지 아론에게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하고 재촉하였습니다. 이에 아론은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2절).
백성들은 지금까지 저희를 인도하여 나온 신이 없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앞으로 인도해 줄 신을 저희 손으로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덩달아 아론도 부녀자들이 가지고 있는 귀금속을 모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모아온 금고리들을 불에 녹여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금을 물질적 부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재물이 부요하면 최고의 영광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적 발상을 가진 사람은 종교의 본질도 물질에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곧 재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인 것입니다.
(2) 공명(功名)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행위는 목적도 방법도 결과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위가 말씀에 근거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지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곤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신앙적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말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옛날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땅에다 성을 건설하고 하늘에 닿을만한 탑을 세우면서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창 11:4).
본문 말씀 4절에 보면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황금을 소재로 하여 송아지 형상의 예술품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머리를 써서 당시 이방인 사회에서 유행하는 종교적인 성향과 하나님 제일 주의적 유일 신앙에 실증을 느끼는 이스라엘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여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웃을 일이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예술과 문화로 이름을 들어내고자 하는 자들의 발상이 그런 것입니다.
(3) 집합(集合)주의입니다.
다수주의의 대중 심리에 영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광야여행 기간에는 여러 차례 진중반란을 일으키며 가나안 운동을 저지하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였습니다(출 14:11-12).
민수기 11:4-6에 보면 출애굽한 사람 중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고 백성을 선동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반항하게 하였습니다. 민수기 14:1-4에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 중에 열 명이 그 땅을 악평하며 백성을 충동하여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 때 성난 군중들은 돌을 들어 모세를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민 14:10).
민수기 16:1-2에 보면 레위 지파 사람 고라가 중심이 되어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짓고 250명의 족장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와해시키려는 목적과 또 절대 다수의 군중을 업고 나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리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은 다수주의에 영합할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군중을 선동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소수보다 다수를 존중하되 그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게 됩니다.
Ⅲ.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행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반역행위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 때까지 그 험한 시내산 암벽사이에서 하나님과 마주대하며 십계명의 율법을 받고 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정의 일단을 내비치셨습니다. 출애굽기 32:7-9에 보면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저희 신이라고 하는 소리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9-10절에 보면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 은혜를 배반한 자에게 징벌 하였습니다.
본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단정 하였습니다(9절). 이는 고집이 세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완고한 백성이라는 뜻이거나 구제불능의 희망이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실 때나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 나타나실 때는 항상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하였습니다(출 20:2). 신명기 7:8에는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기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송아지에게 절하며 희생을 드렸고, 또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고 하였습니다(8절).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이름을 모독하고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할까봐 경계하면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출 20:5).
(2) 무책임한 선동자를 징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2:28에 보면 모세의 명령에 따라 레위 사람들이 금송아지 우상의 주동자들 사천 명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소수의 불순세력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덩달아서 행동하고 그 결과 불행한 일에까지 얽혀들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에도 섞여 사는 무리 중 불만을 품은 자들이 백성을 선동하고 집단 반란을 일으키게 작용 하였습니다. 민수기 11:4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하며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춰주었습니다.
민수기 16:1에 나오는 고라의 무리들도 몇 사람이 당을 짓고 족장들 중 이백 오십 명을 내세워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게 하였습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백성과 격리시키고 땅이 갈라지게 하여 그 선동한 무리들과 이백 오십 명을 응징하였습니다(민 16:31-35).
어느 때나 고라의 무리들처럼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백성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를 감춘 채 겉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백성을 위하는 것 같은 언동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우를 두고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 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1:14).
(3) 하나님 나라 역사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고린도전서 10:11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불신앙적인 소수에 의하여 말없는 다수가 무고한 피해를 당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묵과 하지 아니하시고 징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빚어진 불행은 모든 백성이 다 치러야 했습니다. 우선 가나안 행진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그 기간 또한 엄청나게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온 사람들 중 열 명의 정탐꾼이 반기를 들고 선동했을 때 백성들이 덩달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광야에서 사십 년이나 맴돌고 말았습니다. 민수기 14:34에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뿐 아니라 선민의 역사에 후퇴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도자 모세로 하여금 또 다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면서 고된 시련을 겪게 하였습니다(출 34:8). 이스라엘의 광야교회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