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상 그리고 자기를 보는 눈
로마 11,29-36; 루카 14,12-14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2023.11.6.; 이기우 신부
사람은 오관을 통해 외부 사물을 인식합니다. 시각을 비롯해서 미각, 후각, 청각 그리고 촉각이 오관인데, 가장 많은 정보를 입수하는 감각이 시각이기 때문에 두뇌 세포의 70%가 시각으로 얻은 정보를 해석하는 데 쓰인다고 합니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신체의 오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정신활동으로 얻어지는 영적인 감각을 통해서도 인식을 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통상 “보는 눈이 있다.”든지 혹은 “안목이 있다.”는 말은 이 여섯 번째 감각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독서인 로마서 11장에서 사도 바오로가 쓴 편지의 내용은 그의 역사적 안목을 드러낸 것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역사적 실수를 저질렀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실수가 끝이 아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역사적으로 이루신 선택은 실패할 수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 안에 담긴 은사와 소명 역시 철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은사와 소명의 첫 번째 효력은 이스라엘의 실수 덕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방인들이 입은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효력은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돌아올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사도 바오로의 역사적 안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인심이라는 것이 다 주고 받는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보답을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일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만 희망을 둘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하느님으로부터 보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당신을 초대한 주인에게 감사의 뜻으로 하시기에 적합한 덕담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바리사이들의 평소 행태에 대한 따끔한 지적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베푸는 호의가 나에게 보답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 직접 보답을 받을 기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패를 넘어서는 사도 바오로의 역사적 안목이나, 보답 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라는 예수님의 사회적 안목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자기자신을 보는 눈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눈이 보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수 있듯이 인간의 정신이나 인생도 자기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안목대로 전개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보는 눈이 어떠한 지가 중요합니다. 대개는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듯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해 주는 데 따라서 자기를 봅니다. 그런데 남들은 과거에 입은 내 마음 속의 어두운 상처나 미래에 내가 지니고 있는 밝은 꿈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나 자신에 대해서 보는 눈은 뚜렷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몰래 지니고 있는 마음의 상처나 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느님 앞에서 이미 쌓은 공로나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시는 눈을 의식해야 제대로 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자기 자신을 보는 안목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차가운 율법주의적 잣대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볼 것이 아니고, 외적인 조건으로 평가하기 마련인 남들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통교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우리 인간에게 보내셨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존재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과 통공 할 수 있는지를 삶의 길로도 보여 주셨고 가르침의 진리로도 보여 주셨으며 그 길과 진리가 이 세상에서는 삶의 질을 한껏 높일 수 있고 죽은 후에는 영원한 생명으로까지 높여질 수 있는 아주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위령성월은 이 통공의 진리를 집중적으로 묵상하도록 정해진 전례력입니다. 그래서 첫 날에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냈고, 둘째 날에 ‘위령의 날’을 지낸 것입니다. 통공의 진리를 은총으로 맞이하여 깨달음을 얻자면, 역사를 보는 눈과 세상을 보는 눈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정확해야 합니다. 뿌옇게 흐린 시야에서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듯이, 역사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보는 안목이 막연하면 인생을 제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몸의 건강이 천냥이라면 눈의 건강은 9백냥이랍니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과 자기 정체성이 올바라야 우리네 영혼도 건강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