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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列國誌] 439
■ 2부 장강의 영웅들 (95)
제7권 영웅의 후예들
제 12장 극극(郤克)의 분노 (4)
동방의 대국답게 제(齊)나라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탁월했다.
극극(郤克) 일행이 다녀간 뒤 속속 그와 연관되는 일들이 임치성(臨淄城)으로 전해졌다.
- 노(魯)나라는 군주가 친히 단도 회맹에 참석키로 했답니다.
- 위(衛)나라와 조(曹)나라 군주도 단도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고고(高固)는 눈꼬리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노, 위, 조나라가 단도 회맹에 참석한다는 것은 곧 임치(臨淄)에서 일어났던
이번 사태에 대해 대단히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을 형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강성(絳城)은 어떠할까?'
이윽고 이번 사태의 핵심국인 진(晉)나라 소식이 들어왔다.
- 극극(郤克)이 중군 원수 사회(士會)에게 제나라를 치자고 청원했으나, 사회가 거절했답니다.
고고(高固)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나라가 움직이지 않으면 노나라나 위나라쯤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회라는 인물이 우리 제나라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군.'
고고(高固)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 제경공에게 이 같은 사실들을 보고했다.
그런데 제경공의 반응은 약간 달랐다."역시 진(晉)나라는 이빨 빠진 호랑이로군."
사회가 극극의 청을 거절한 사항을 제나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이었다.
고고(高固)는 기가 막혔다.'암군(暗君)인가?'
순간적으로 이런 의심이 들었다. 본래 그가 강성 소식을 보고한 의도는 다름이 아니었다.
- 사회(士會)는 우리 제나라에 우호적입니다. 이럴 때 친히 회맹에 참석하시어
진나라와 교의(交誼)를 맺으십시오.이런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제경공(齊景公)은 오히려 더 의기양양해 있지 않은가.
고고가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는 중에 제경공으로부터 느닷없는 명이 떨어졌다.
"이번 회맹에는 그대가 참석하시오."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라는 느낌이었다.
아울러 자신에 대한 제경공의 야유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그렇게 생각한다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 아무 일 없을 것이니 그대가 직접 가라.
고고(高固)는 고개를 들어 제경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음흉함이나
비웃음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무심의 눈빛이다.고고(高固)는 혼란을 느꼈다.
'저의가 무엇인가?'국좌(國佐)가 말한 대로 진나라와 교의를 맺되,
종속 관계를 허락할 수 없는 대국 군주로서의 각오와 자긍심일 뿐인가.
궁정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 고고의 낯빛은 밝으려야 밝을 수가 없었다.
문득 고고(高固)의 뇌리로 한 얼굴이 스쳐갔다.'그렇군. 이 사람이라면 한번 의논할 만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외쳤다."수레를 채비하라. 안약(晏弱)의 집을 방문하리라."
안약(晏弱)은 대부 반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임 관료였다.
그러나 젊은 나이 답지 않게 의례(儀禮)에 밝아 고고가 타국으로 나갈 때나
타국 사신을 접견할 때 자주 보좌관으로 대동했다.더욱이 안약(晏弱)은 사람됨이 신중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데다가 독실함과 후덕한 인품까지 갖추고 있어
고고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맞춤한 조력자였다.
안약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고고(高固)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층계까지 내려와 맞이하는 표정에서 이미 자신의 방문 목적을 꿰뚫어보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소."
자리에 앉자마자 고고는 대뜸 말을 꺼냈다.제(齊)나라에는 예부터 두 명문가가 있었다.
바로 고씨와 국씨 일족이었다. 두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았으므로
공실에 대한 지분도 만만치 않았다.이 무렵, 제나라에서는 귀족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높아져
과거 공족에게만 배분되었던 군대의 지휘권까지 확보해놓고 있었다.
즉 3군 중 1군은 공실의 주인인 군주가 지휘했지만, 다른 1군은 고씨가, 나머지 1군은
국씨가 지휘했던 것이다.이를테면 제경공(齊景公)과 고고(高固)와 국좌(國佐)가 대등한 지분을 갖고
제나라 권력을 삼분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제(齊)나라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진(晉)나라에서는
조씨, 극씨, 사씨, 순씨 등의 세력이 크게 강해져 군주를 중심으로 연합하는 형태를 보여주었고,
송(宋)나라에서는 화씨가 국정을 장악함으로써 군주의 권한을 그만큼 약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권력 이양 현상은 춘추시대 중기 여러 제후국에게서 전반적으로 드러난
정치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런데 문제는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각 가문의 암투다.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보다 강화하려는 싸움을 벌여대기 시작한 것이다.
고고와 국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고고(高固)는 늘 국좌보다 강한 권력을 거머쥐려 하였고,
국좌(國佐)는 국좌대로 고고의 세력을 약화시켜 자신이 우위에 서고 싶어했다.
고고가,- 함정에 빠진지도 모르겠다.라고 일성을 내뱉은 데에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는 제경공과 국좌가 짜고서 자신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안약(晏弱)은 고고가 염려하는 바를 알아들었다.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경(卿)께서는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편법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단도행만을 생각하실 때입니다."
안약(晏弱)의 웃음만으로도 고고(高固)는 한결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대도 단도행을 찬성하는가?""찬성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닙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입니다.
이미 우리는 진나라와 일을 묘하게 꼬아놓았습니다
그것이 주공의 본의든 아니든 일단 단도(斷道)로 가서 풀어야겠지요."
안약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고고(高固)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진나라로 갔다가 사로잡히거나 살해당하는 일은 없을까? 극극(郤克)이 진경공이나
사회의 의사와 달리 암수를 쓸 수도 있지 않은가?"고고로서는 그것이 가장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고고(高固)는 안약에게 있어서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안약은 원래 제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안(晏)이라는 성은 제나라에는 없다. 안약은 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송(宋)나라에서 제나라로 건너왔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송나라 국록을 받은 사족(士族)이었으나 끊임없는 귀족들간의 권력 다툼에
진저리를 치고 제나라로 망명했다.그들이 제나라로 왔을 때 제나라 군주는 제혜공이었다.
제혜공(齊惠公)은 과분하게도 보잘 것없는 이웃나라 사족을 크게 대우하여 안(晏)이라는 땅을
식읍으로 내려주었다.안읍(晏邑)은 비록 임치(臨淄)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땅이었으나,
그들에게는 그것도 과분했다. 이때부터 그들은 식읍의 지명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안약(晏弱)의 능력을 발견하여 조정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제혜공 때부터의 상경인 고고였다.
고고(高固)는 유달리 안약을 총애했으며, 적극적으로 그를 후원했다.
이런 고고의 은혜에 안약(晏弱)은 고마움을 느꼈고, 고고가 자신을 보좌관으로 삼아 타국으로
나갈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수행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안약(晏弱)이 고고에게 종속되어 있는 가신(家臣)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고고의 외교 능력에 대해 몹시 감탄하고 있었다. 제나라 제일의 외교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러했다.진(晉)나라 사신 극극(郤克)의 분노로 인해 제, 진 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고고(高固)만이 그 결과의 처참함을 예상하고 있다.
주공인 제경공도, 내정 담당 재상인 국좌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안약(晏弱)이 신중을 기해 고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은 고고(高固)에 대한 개인적인 은혜 갚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바로 제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구국 차원에서라고 할 수 있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복수심이 강하지요."안약(晏弱)은 중얼거렸다. 진문공이 패공에 오른 것도
어떻게 보면 자신을 학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 심리에 기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경(卿)께서 신변 안전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십중팔구는 극극의 원한이
제나라 사신에게로 집중될 것입니다.어쩌면 이번 단도행은 제, 진 동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돌아오느냐, 그 곳에서 죽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고(高固)는 처음 안약(晏弱)을 찾았을 때의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진(晉)나라 군주나 사회(士會)는 우리 제(齊)나라 사신의
단도행을 갈망하고 있을 테니까요.드러내놓고 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극극(郤克)의 움직임만을 살펴 일신상의 안전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대가 그 일을 맡아주겠소?"마침내 고고(高固)는 안약을 찾아온 목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미 그러한 요구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안약(晏弱)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물론이지요."이런 상황에서 안약마저 주저하는 빛을 보이면 고고는 아예 단도행을 포기할 것이다.
고고(高固)는 빠르게 말했다."상황이 상황인만큼 몇 사람을 더 뽑겠소."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안약(晏弱)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을 나서는 고고(高固)의 발걸음은
이 곳을 찾을 때와 달리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440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440
■ 2부 장강의 영웅들 (96)
제7권 영웅의 후예들
제 12장 극극(郤克)의 분노 (5)
그해 5월 초, 제(齊)나라를 대표할 사신의 진용이 갖추어졌다.
- 정사 고고(高固), 부사 안약(晏弱), 수행원 채조(蔡朝), 남곽언(南郭偃).이 밖에 무장 병사 5백명이
이들을 호위하기로 했다.단도(斷道)회맹은 6월 17일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임치(臨淄)에서 단도(斷道)까지는 3천리 길이 넘는 먼 여정이다. 이제 불과 한 달밖에 기한이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겨우 기일 내에 당도할 수 있다.고고, 안약을 비롯한 사신들은
결연한 각오를 품고 임치성을 떠났다.그런데 출발부터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고고와 안약 등이 하직인사를 올리는 자리에서 제경공(齊景公)은 또 한 번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발언을 입에 담았던 것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齊)나라 위신이 깎이지 않도록!
이 말 한마디에 모처럼 단도행을 결심했던 고고(高固)는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제경공(齊景公)은 '소신껏 행동하라'는 격려의 의미로 이 말을 했을지 모르겠으나, 듣는 고고로서는
'제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협정을 맺을 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라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상황을 어렵게 만든 것이 누군데?'
이런 반발이 고고(高固)의 마음속에서 일었다. 성공하면 본전이요, 실패하면 추락인 것이 이번 여정이었다.
혹여 진(晉)나라로 들어갔다가 해를 당하기라도 하면 고씨 가문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득을 보는 것은 주공과 국좌다.'
덫에 걸렸다, 라는 불신과 의심이 다시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안약(晏弱)은 안약대로 생각이 많았다.비록 고고에게는 염려하지 마시오, 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이번에 가면 죽을 공산이 열에 아홉이다.'사지(死地)로 들어가는 셈이다.
어떻게 하면 그 남은 하나를 취해 무사히 귀국할 것인가. 그것이 이번 자신의 임무라는 것을 생각하니
그는 침조차 삼킬 여유가 없었다.여름철 대지는 뜨거웠으나 그들의 침울한 여행은 계속되었다.
제나라 국경을 벗어났다.이제부터는 위(衛)나라 영토였다. 염우라는 땅에 들어섰다.
염우(斂盂)는 지금의 하북성 복양현 동남쪽 일대로 제나라에서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인 셈이었다.
염우에 당도하자 안약(晏弱)은 수하 병사들을 불러놓고 명령했다."동태를 살피고 오라."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지시조차 내릴 필요가 없었다. 위나라는 제나라와 친분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소동부인(蕭桐夫人)의 웃음소리 사건 이후 두 나라 관계는 급격히 냉랭해졌다.
제나라를 칠지도 모든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가 아닌가. 이제부터는 적지라고 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각기 흩어져 마을로 들어갔다.그런데 그것이 뜻밖의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그 곳 분위기는
안약이 염려했던 대로였다. 위(衛)나라 사람들은 전혀 제(齊)나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 제(齊)나라 사람들은 거만하기 짝이 없다. 어찌 우리나라 재상을 그렇게 욕 보일 수 있는가.
- 고고라는 자는 이번에 가면 반드시 살해당할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고고(高固)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날 밤, 그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고고(高固)는 마음속에 하나의 중대한 결심을 내렸다.
안약과 채조, 남곽언을 불러들여 선언하듯 말했다."나는 돌아가겠소.""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약(晏弱)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일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임치(臨淄)로 돌아가겠다고 했소이다. 덫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질 않소?"
"그렇다면 단도(斷道)행은 ..........?"
"그대가 가시오. 그대가 나 대신 정사(正使)가 되어 단도(斷道)로 가시오.
모든 권한을 전적으로 그대에게 위임하겠소.""하지만 저는 하급 대부에 불과합니다."
"극극(郤克)이란 자도 진나라 정사였소. 하지만 어떻게 행동했소? 모든 것을 난경려에게 맡기고는
홀연 귀국하지 않았소? 나 또한 극극과 똑같은 행동을 할 뿐이오."
이를테면 고고(高固)는 극극의 흉내를 냄으로써 극극에 대한 보복뿐만 아니라
제경공과 국좌가 쳐놓았을지 모르는 덫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안약(晏弱)은 고고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직감했다.땅이 꺼지는 듯한 암담함을 느낌과 동시에
지금까지 알고 있던 고고라는 인물에 대해 커다란 실망감을 가졌다.'이런 인물이었던가?'
그러나 고고(高固)는 안약의 심중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논리를 펴고 있었다.
"극극이라는 자가 노리는 것은 주공이나 재상급일 뿐이오. 하급 대부에 불과한 그대에게 해를 끼칠 리 없소.
이번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오. 그대는 내 말을 알아듣겠소?"
"하지만 경(卿)께서 가지 않으시면, 진(晉)나라는 군대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안약은 허둥대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이며 필사적으로 말했다."그렇겠지. 하지만 전쟁은
내가 가도 마찬가지요. 주공은 이미 그것을 각오했단 말이오. 나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소."
"무슨 말씀이신지?""국좌(國佐)의 해석이 옳았소. 주공은 진나라와 일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천하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오.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도(斷道)에
우리를 참석시키려는 것은 군대를 정돈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였던 것이오.
나와 그대는 그 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맡은 것에 불과하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는 것도 충(忠)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반문하는 안약의 말에는, 그러나 힘이 빠져 있었다."충(忠)?"
고고는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안약은 알지 못했다.
"진정한 충은 진(晉)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오. 나는 임치(臨淄)로 돌아가 군대를 정돈할
작정이오. 아시겠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충(忠)이오."억지다, 라고 안약(晏弱)은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의 입장을 밝힐 차례였다.
"경의 뜻을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경께서는 임치(臨淄)로 돌아가십시오.
제가 경 대신 정사(正使)가 되어 단도(斷道)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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