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하다
- 3년간의 한진해운 밴쿠버 지점장 (1994년-1997년) 을 역임하고 본사로 돌아와 보니 정부의 기능은 국가부도 상태였으며 신임 김대중 대통령은 IMF구제금융을 받기로 하고 각종 조치를 시행 중 이었다. 대기업, 중소기업 등 모든 업종이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한진해운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상대책본부를 만들어 비용 절감 측면에서 인원 축소를 꾀하고 있었는데 그 1차 대상이 50세 이상 고령자들 이었다.
- 필자도 이미 여기에 해당되었으나 다행히 비상대책본부를 운영하느라 필수 인력으로 간주되어 그 무서운 자진명퇴명단에서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더 이상 충원도 없고 진급도 없는 이상한 형태로 운영되며 이러한 상태가 몇 년을 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 1998년을 넘기면서 사태는 점점 더 악화 되는듯 했다. 국내의 모든 기업에서 해고된 중견인력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신입사원을 뽑지 않으니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갈 곳을 몰라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 때 유행하던 백수 ( 실업자 ) 이야기가 생각난다. 백수 중에 높고 낮음이 있겠나만은 그래도 억지 ( 자조적으로 ) 로 급을 만들어 본 모양이었다.
- 이 때의 백수 1급은 단연 화백 ( 화려한 백수 ) . 비록 백수지만 애인과 저녁식사도 하고 골프도 즐길 수 있는 족속.
백수 2급. 반 화백 ( 반 만의 화려한 백수 ). 애인이나 골프 둘 모두는 안되고 둘 중 어느 하나만 즐길 수 있는 족속.
백수 3급. 불백. ( 불러 줘야 나가는 백수 ). 돈이 없어 나가 다니지는 못하고 집에 있다 누가 부르면 좋다고 나가 밥을 얻어 먹는 사람. 그래도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백수 4급. 가백. ( 가택연금 백수 ).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그저 집안에 꼭 쳐박혀 마나님 외출 하시면 “잘 다녀 오십시오” 하며 인사하는 사람,
백수 5급. 마포불백.( 마누라도 포기한 정말 불쌍한 백수).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 필자는 자금 문제로 자금운영부서와 자주 마찰을 빚고 특히 이 기회에 우수한 인력 충원을 해 두자는 의견을 제시하자 인력운영부서는 필자를 약간 맛이 간 사람으로 보는듯 했다.
- 한진해운은 막대한 선박 건조자금을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으로부터 조달하였기에 산업은행에 많은 부채를 지고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달러부채이며 IMF사태로 환률이 이미 두배 이상 뛴 상태라 상환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운전자금은 그럭저럭 조달 할 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매출의 60프로 정도가 해외에서 발생하는 수입구조를 가진 글로벌 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내수 위주의 기업은 갑작스런 내수축소에다 외채상환금은 2배나 뛰어,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지 않는 한, 기업은 도산을 막기위해 구조조정과 부동산 매각 ( 정부 주도로 ) 등의 방법으로 이 위기를 타개 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한편 달러벌이를 하는 수출위주의 기업이나 한진해운같은 글로벌기업은 형편이 그보다 한결 나은편 이었다.
-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당분간 종전의 상환금액 ( 환율이 오르기 전 ) 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기만 하면 도산의 염려는 없었다. 차액은 후에 형편이 나아지면 추징하기로 하고.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의 정부나 은행이 이런 사정은 깡그리 무시한채 모든 국내기업에 일률적인 관리 위주의 지시를 내리고 이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 회사 건물까지 팔아서 정부의 구조조정 지시에 즉각 부응해야 한다는 자금부서와 그렇게 헐값에 매각하면 수년도 못돼 크게 후회할 것이라는 필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으나 결국 재벌 2세 사장의 최종 결정으로 당시 미국의 최대기업인 IBM이 원래 한진해운 매입가의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 한진해운 본사 건물을 인수 했다.
- 부동산 매물들이 넘쳐나니 수많은 외국계 자본이 장래 가치가 보장된 (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건물과 같은 ) 한국의 부동산 매물들을 마음대로 골라가며 싸게 인수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이들은 이렇게 사들인 부동산들을 3-5년 후에 되팔아 엄청난 차익을 남기기도 한다.
한국인의 성미 급함이 기업경영에도 여실히 나타났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우리 속담은 무시하고 모두들 바늘 허리에라도 실을 매어 바느질 하려고 허둥댔다. 비상대책본부는 자금/인사부서와 갈등 이외에도 수많은 부서와 크건 작건 문제거리를 양산했다. 이러는 사이 어느덧 필자의 나이 57세. 필자의 은퇴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 미련은 없었다. 남들은 40-50에 직장을 잃고 고된 삶을 살아가기도 하는데 당시의 정년 기준인 55세를 2년이나 넘긴 시점이니 운이 좋아도 한참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W 항공운송회사에 입사한다. 전 회사가 코끼리 였다면 이곳은 새앙쥐에 불과한 소규모 회사였다. 그곳에서의 6개월은 필자의 잡문집 1권 21쪽 “염색 안하면 안돼?” 에 실려있다.
- 요약하면 전직 시기가 너무 늦어 새 회사와 그 회사의 고객들에 적응 할 수도 없었고 또한 크게 실적을 올릴만큼 특별한 영업력도 필자에게는 없었다. 그곳을 떠나는데는 사직서도 필요 없었다. 그저 사장을 만나 오늘부로 사직 하겠다는 구두 통보가 끝이었다.
- 그러고보니 이젠 한국에서 사는것이 힘들어지겠다는 느낌이 왔다. 새롭게 직장을 얻는다는 것도 힘들거니와 설혹 운 좋게 얻는다해도 잘 적응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필자는 일생일대의 가장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바로 캐나다로의 이민이었다. 사실 이민 이야기는 필자가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본사 발령이 났을 때 그곳에서 이미 터를 닦은 한 분이 그곳에 눌러 앉아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지 않겠냐고 한 때로 거슬러 올라 간다.
- 그 때 필자는 화란은 다 좋은데 국토가 너무 좁고 산이 없어 별로 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분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며 사실은 회사에서의 나의 존재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항상 승승장구 하리라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캐나다로의 이민수속은 대강 6-8개월 정도면 끝나지 않겠나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긴 2년이 걸렸다. 그동안 항공 ( 해운 ) 화물 운송협회가 주관하는 소속사들을 위한 화물요원 양성반 교육과 기존의 그곳 종사자들을 위한 초급/중급 과정 그리고 역시 C 항공화물 전담 잡지사가 주관하는 비슷한 교육과정의 강사요원으로 용돈을 벌어가며 시간을 죽였다.
- 드디어 2002년 11월 모든 수속이 끝나고 밴쿠버행 대한항공기에 몸을 싣는다. 우리나이로 60세 때 였다. 앞으로 캐나다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아직 미정이었다. 일찍이 L.A. 교민들 사이에서는 이민자의 직업은 그 이민자를 공항에서 P/U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이 떠돌았다. 택시 운전을 하는 지인이 그를 P/U 하면 그도 택시기사가 될 확률이 높고 부동산 중개인이 P/U 하면 그도 따라서 부동산 중개인이 될 확률이 크고 보험업을 하는 지인이면 보험업자로 직업이 결정되기 쉽다는 이야기다.
- 스모크샾 ( 동네 구멍가게 )/ 그로서리 스토어 ( 소규모 식료품점 ) 등등 도 마찬가지 였는데 그만큼 이민자들이 택 할 수 있는 직업군이 극히 한정되어 있었기때문에 나온 이야기인듯 했다.
-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이곳 밴쿠버에서 동쪽으로 2800 킬로 떨어진 드라이덴 ( DRYDEN, ONTARIO 주) 이라는 곳에서 모텔을 하는 친구의 꾀임 (?) 에 빠져 그곳으로 무뎃뽀 진격을 감행한다. 모텔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그저 막연히 해외 출장시 묵던 호텔의 축소판 정도로 생각 했다. 캐나다 이민 4개월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첫댓글 드디어 변화무쌍한 정선생님의 삶이 이땅에 이민 오시므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으셨군요
그간의 숨가뿐 삶을 또 역동적인 시대의 흐름들을 재 조명 해보시는 시간들이 됐고
지금까지 건강을 지켜오셨으니 정선생님의 삶은 누구보다 더 행복하신 분입니다
이런 인생 견문록을 통해 읽는 저희도 흥미롭고 주마등같은 시대의 흐름을 다시 확인했답니다
- 이제부터는 이민생활 중 보고 듣고 느낀점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 맨땅에 헤딩(?)하듯 뛰어든 모텔 운영과 캐나다 깡촌생활 이야기입니다.
어머 , 기대댑니다 아무쪼록 건강유지하셔서 정선생님의 이곳의 느끼신바를 같이 느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