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커지게 하는 놀라운 방법!!
노아, 순종의 DNA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를 덮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보신다. 그렇다면 내가 은혜 입은 자인 줄 어떻게 아는가. 노아처럼 하나님의 경고가 두렵게 들리고 그 약속이 믿어지기 시작했다면, 세상의 틀을 거슬러 순종하고 싶은 소원이 일어났다면, 그것이 가장 강력한 증거다. 이 은혜는 어떻게 불가능해 보이는 오랜 순종을 만들었는가.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니다. 그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구원의 언약을 함께 주셨다. 하나님은 심판의 계획과 방주를 짓는 순종의 과업, 구원의 언약을 한꺼번에 선포하셨다. 노아는 “내가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성 속에서 망치를 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미 구원하시기로 하셨구나” 하는 확실한 언약을 붙들고 들었다. 그 언약이 곧 은혜였다. 노아의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었다. 이 은혜가 노아에게 ‘보는 눈’을 선물했다. 그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심판과 구원을 보게 되었다. 노아가 믿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은혜가 그것을 빚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믿음과 경외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실재를 보게 된 자는 필연적으로 그 거룩하심 앞에 떤다. 지옥이 무서워 떠는 공포가 아니다. 이 경외함에는 두 겹의 마음이 있다. 경외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심판의 엄중함 앞에 드리는 충성스러운 두려움과, 내 판단과 지혜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자기 불신이 하나로 합쳐진 마음이다. 노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계획을 불신했기에 하나님의 설계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었다. 은혜가 믿음을 낳고, 믿음이 경외를 낳고, 경외가 불가능해 보이는 순종을 가능케 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의 노동을 견디도록 그가 매일 짓는 방주 안에 복음의 비밀을 심어두셨다. 방주는 속죄의 모형이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 안팎에 역청을 칠하라고 명하셨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 창세기 6:14 여기에는 주목할 만한 언어적 울림이 있다. 창세기 6장 14절에서 역청을 바른다는 동사 ‘카파르’와 역청을 뜻하는 ‘코페르’, 그리고 후대 레위기에서 “속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킵페르’는 모두 같은 세 자음 k-p-r을 공유한다. 이 단어들의 직접적인 어원 관계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뉜다. 하지만 일부 전통적 해석은 방주를 덮어 심판의 물을 막아낸 역청에서 속죄의 신학적 그림을 발견해왔다. 그 어근의 본래 뜻은 ‘덮는다’(to cover)이다. 역청이 방주의 틈을 덮어 심판의 물을 막듯, 속죄는 죄인의 허물을 덮어 진노를 막는다. 발음이 닮은 것이 아니라 덮음이라는 같은 그림 위에 함께 서 있다. 이후 제사 제도 전체가 이 ‘덮음의 신학’ 위에 세워진다. 하나님은 제물의 피로 죄를 덮으셨고, 언약궤의 뚜껑인 속죄소 위에 그 피를 뿌리게 하셨다. 노아는 수십 년, 길게는 백 년 동안 망치질을 하고 역청을 칠할 때마다 한 가지 진리를 묵상했을 것이다. ‘이 역청이 틈을 메워 심판의 물을 막아내듯, 장차 오실 누군가의 속죄가 나를 진노로부터 덮어주는구나.’ 그는 역청을 칠하며 덮어주시는 복음을 묵상하고 있었으리라. 매일의 그 묵상이 오랜 순종을 완수할 힘이 되었다.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은 결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매일 반복된 역청 칠하기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매일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이어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매일의 덮으심을 경험하는 자만이 오랜 순종을 감당한다. 더 나아가 방주는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다. 이것이 노아의 끈질긴 순종을 버티게 한 힘이다. 심판의 날,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 창세기 7:1 한글 성경을 비롯한 많은 현대 성경은 “방주로 들어가라”(Go)로 옮긴다. 문자적으로 옳다. 그런데 흠정역(KJV)은 “오라”(Come)고 옮긴다. 히브리어 원어가 ‘가다’와 ‘오다’를 모두 품고 있어 가능한 번역이지만, 이는 어법의 선택을 넘어선다. “가라”는 명령하는 분이 밖에 서 계신다는 뜻이지만, “오라”는 그분이 이미 방주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청교도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는 이 한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두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방주로 가라(Go)고 명하지 않으시고, 오라(Come)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가시고, 그를 방주 안으로 인도하시며, 그 안에서 동행하시고, 마침내 정한 때에 그를 안전하게 밖으로 이끌어내실 것임을 암시한다. 바로 이 하나님의 임재가 감옥과도 같았던 노아의 방주를, 그에게 단순한 피난처가 아닌 궁전(palace)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이미 임재해 계신 그 구원의 처소로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오라”고 초청하신 것이다. 노아는 심판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갔다. 훗날 예수님이 “내게로 와서 내 안에 거하라” 하신 그 음성과 같은 결의 초대다. 그러므로 노아의 오랜 순종의 기간은 구원을 얻으려는 노동이 아니었다. “오라”고 부르신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한 기쁨의 노동이었다. 그렇게 그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망치질 실력이나 역청을 바르는 끈기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방주를 짓기 이전에,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언약에 달려 있다. 노아의 방주가 심판의 물결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지켜냈듯, 우리의 유일한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수없이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주 안에 있는 한 결코 그분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것을 믿는다면 두려워 말고 망치와 톱을 들라. - 믿음의 DNA, 김다위
믿음의 DNA의지하고 가까이 나아가고 행동하라
김다위
† 말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창세기 6:8 † 기도
주님 오늘의 삶 가운데 애씀은 주님과 동행하기 위한 기쁨의 노동이 되게 하시고, 나의 실력을 믿고 행하기 보다 내게 주신 언약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 적용과 결단
나의 실력을 의지하기 보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하루 되길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