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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7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루카 11,37-41
위선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행위가 하나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안 좋은 생각을
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율법이라기보다는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나쁜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지는 방법도 제시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세 범주로 나뉩니다.
모든 행위는 ‘욕구’에 의해 발동됩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는 ‘생존 욕구’입니다.
곧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세지려는 욕망입니다.
아기들의 모든 행동은 이 생존 욕구에 기인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행위가 첫 번째 범주입니다.
두 번째 범주는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오는 방어기제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곧 손과 접시를 깨끗이 씻는 행위입니다.
이것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깨끗함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는 속이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위선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범주입니다.
두 번째 범주의 행동은 첫 번째보다 더 안 좋습니다.
본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요 본인들도 속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들은 남들보다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아질 기회를 잃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행동은 첫 번째에 속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으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위선적 행동으로 깨끗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범주는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교회에서는 그 방법으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하라고 권합니다.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하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모두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어떻게 인간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를 몸소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단식을 제외하고 ‘자선’만을 강조하실까요?
사실 기도와 단식은 위선적인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행위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기도는 오래 하고 단식하며 힘든 얼굴을 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자선만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욕망의 가장 근저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십일조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자선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에서 재산에 줄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중 어떤 누구도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매일 단식할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매일 자선을 베풀어 성인들처럼 가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재물이 욕망의 근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바치는 것,
곧 십일조를 바치는 것, 제때 소출의 일부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황시의 아이들’(The Children of Huang Shi)은 1930년대 중국의 진실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1937년 중국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침략 중에 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중심인물은 영국 기자 조지 호그는 특종을 잡을 욕심에 일본군의 무자비한 난징 학살 현장을
취재하던 종군기자입니다.
그는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잭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지만 부상으로 돌아갈 처지가 못 된 그는 안전한 ‘황시’로 몸을 피합니다.
황시에는 고아원이 하나 있었는데 60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조지는 처음에는 고아들을 위해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이들과 가족 같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700마일을 걸어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 중에 그는 아이들을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교육도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조지는 단순히 기자에서 아이들의 보호자, 교사, 그리고 친구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 여정을 통해 조지는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며, 고아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진정한 사랑, 희망, 헌신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내면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은 사랑할 때 사라집니다.
자선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사랑’에 가장 근접해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와 단식도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악한 욕망의 반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사랑에 근접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악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쉰들러는 돈만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쓰다가
결국 재산을 다 잃고 맙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자기 차를 팔지 못한 것,
금 배치를 팔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았더라면 몇 명은 더 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욕망은 재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재물로 얻은 기쁨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사라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그만큼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데 강력한 무기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7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루카 11,37-41
손을 잘 씻고 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 위생 관념이 철저했습니다.
손이건 발이건, 그릇이건 제구건, 틈나는 대로 씻고 또 씻었습니다.
아마도 전염병이나 피부병 앞에 취약하던 당시, 걸리면 죽음이었으니 나름 최선의 예방책으로
그렇게 씻어댄 것 같습니다.
제 어린 시절 돌아보면 씻는 것과 관련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씻는 것은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 동네 목욕탕 가서 빡빡 씻는 것뿐이었고, 여름이 오면 동네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며 겨우 몸에 물을 대는 정도였습니다.
팬데믹 이후 전국민적인 손 씻기 열풍이 불어 저도 이제 수시로 손을 씻는 편입니다.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몸에 밴 습관처럼 뽀드득뽀드득 손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저와 같이 볼일을 보신 영감님들 칠팔 명이 단 한 명도 손을 안 씻고 우르르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제 입에서는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처럼,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사실 손을 자주 씻는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시대 손 씻기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식사 전후, 외출 전후, 작업 전후 손 씻기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질타하시는 것은 오로지 손 씻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이 숨이 넘어가든 말든, 손 씻는 관습에만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과 형식 율법에만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각자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억압이나 부자연스러운 제도나 관습, 대상들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 공동의 유익과 선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른바 규정이요 메뉴얼, 더 나아가서 법규요 헌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이고 법적인 요소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의 유익과 선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법적인 요소들이 강조되면서 웃기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보다 인간다운 삶,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법이나 규정들이 점점 강화되고 경직되면서,
나중에는 마치 부메랑처럼 인간을 힘들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 규정들, 특히 안식일 규정, 정결례 규정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혹시라도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 직장 공동체 안에서 그런 위험 요소들은 없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성원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해주기 위해 제정된 룰이 오히려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살펴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강론>
(2023. 10. 17. 화)(루카 11,37-41)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이 거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여기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라는 말은,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은 많이 복잡한 예식이었는데(마르 7,3-4), 율법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만의 규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규정은 레위기에 있는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라는 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었습니다.
즉 정결예식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깨끗하다.’는 ‘거룩하다.’와 뜻이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의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가 놀랐다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랍비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와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한 것.>
정결예식과 관련해서 바리사이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두 가지인데, 몸만(겉만) 깨끗하게 씻으면 거룩해진다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고, 자기들은 이미 ‘거룩함’에 도달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도 잘못입니다.
<몸만 씻으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자기들은 이미 ‘거룩함’에 도달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마음대로 자처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겉만 거룩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잔과 접시’는 눈에 보이는 몸,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 모습과 말과 행동 등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들’로 보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님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5-7).”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거룩하게 보이는 옷차림을 했고, 말과 행동도 그렇게 품위 있고 경건하게, 즉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겉모습만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거룩한 분들이라고 생각했고, 항상 윗자리에 모셨고, 장터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인사했습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너희의 내면은 ‘거룩함’의 반대쪽에 있는 ‘부정함’과 ‘악함’으로 가득 차 있다.” 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말과 행동을 점잖고 품위 있고 경건하게 한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영혼과 정신과 삶 전체가 거룩해야 거룩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라는 말씀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바리사이들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속에 담긴 것”은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물”입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은, 단순히 불우이웃 돕기를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리코의 자캐오가 했던 것과 같은 실천을 하라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이 말은 사실상 전 재산을 내놓겠다는 뜻입니다.
재산의 반은 사랑 실천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반은
보속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정말로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는지, 했다면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재물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자선은 탐욕과 사악을 씻어내서 속을 깨끗하게 한다.”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하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을 실천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더, “속이 거룩하면(깨끗하면) 겉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이 거룩해야(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의 속은 깨끗하고 거룩하다.” 라고 큰소리치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고, 아무렇게나 옷을 입는 것은, 대단히 예의 없는
짓이고, 그것도 또한 어리석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사실 속이(영혼과 정신이) 정말로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도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