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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최초의 선교사 최관흘 / 정호상
I. 서 론
최관흘 선교사는 190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일본으로 보낸 한석진 목사와 함께 파송된 한국 교회 최초의 선교사이다.
한국 교회는 총회도 조직하기 전인 1907년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보내 선교를 시작하여
1909년 제2회 한국 목사가 배출되자마자 러시아와 일본에 선교사를 각각 파송한다.
이 글은 그 중의 한 분 최관흘 목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 교회에서 최관흘은 배교자 혹은 실패한 선교사로 알려져 왔고, 최초의 선교사로서 실패했기에 한국 교회에서 그를 바라볼 때 부정적인 시각과 함께 그의 업적이나 사역이 평가절하되었다. 특히 1912년 12월 30일 러시아 정교회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배신자로 낙인을 찍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이후 러시아에서의 그의 행적이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어서 한국 교회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다가 1989년 러시아가 개방되어 한국 선교사가 러시아로 나가면서 점점 그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필자 또한 러시아 선교사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최관흘이 어디에서 어떻게 사역한 것도 모르고 지내다가 1998년 러시아가 선교사들을 규제할 목적으로 모든 종교 법인을 재등록하게 했고, 재등록 요건으로 15년 이상된 증명을 요구하였다. 15년 이상 존재 증명을 할 길이 없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던 중 1909년 러시아로 보낸 최관흘 목사의 행적을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연해주의 모든 선교사들이 사회(종교) 법인 재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이런 고문서를 발굴하고 찾아가면서 그가 참으로 놀랄 만한 활동을 한 것이 드러났고, 그의 이런 뛰어난 업적이 한국 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깨닫고 최관흘의 활동과 선교 사역을 소개한 것이 필자의 논문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 논문을 참고하길 바라면서 여기서는 논문 이후에 알게 된 사실과 오늘을 사는 한국 교회와 후학들에게 그의 선교 사역이 주는 의미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II. 선교사가 되기까지
최관흘 선교사는 1877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친구 때문이었다. 1899년 의형제를 맺고 지내던 세 사람(김선필, 최관흘, 홍정익) 중 김선필 씨가 예수를 믿으면서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다.1) 믿게 된 경위를 보면 김선필 씨가 병이 들어 평양에 있는 기홀병원에서 여의사 홀의 전도를 받고 지금까지의 모든 허랑방탕한 삶을 접고 예수만 따라 살기로 작정하면서 큰 결심을 하고,2) 그 결심대로 새로운 삶을 살며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함께 술 마시며 즐기던 친구가 갑자기 변하자 그의 친구 되었던 최관흘도 예수를 믿기로 하고 그 해 1899년에 창설된 정주군 곽산읍교회에서 1906년 초대 장로가 되었다.3)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최관흘에게도 어려움이 많았다. 가족에 의한 박해에 대해 그의 친구의 딸로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사역을 한 김덕영 권사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관흘 씨도 나의 아버지의 의형제로서 같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은 아들이 조상에 제사도 지내지 아니하니 욕하고 때리고 하다가 그래도 듣지 아니하니까, '너 같은 자식은 차라리 죽여 없애야지 살아서 쓸데없어.' 하면서 숯불이 가득히 피어 있는 화로를 들어 아들의 머리에 던졌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빨리 몸을 피했기 때문에 화로는 한편 귀만 스치고 저만큼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도망해서 우리 집으로 와서 밤낮으로 성경만 읽다가 나중에 평양신학교에 가서 제2회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에서 '해삼위'에 선교사로 파송받게 되었다."4)
그는 이런 어려움을 뚫고 신앙을 다지다가, 평안 공의회의 추천5)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평양신학교를 제2회로 졸업하였고, 1909년 9월 6일 제3회 대한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III. 외국으로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 최관흘
최관흘은 한국 교회 총회(1913년 창립)가 생기기 전 1909년 구한말 국가의 미래가 참담한 때 평양신학교를 제2회로 졸업하면서 러시아에 유리하는 한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9월 노회에서 받고 선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를 선교사로 파송하던 당시의 형편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는 한국 교회의 형편이다. 1883년 솔내교회를 시작으로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 한 세대도 되기 전의 일이다.6) 아직도 한국에서는 예수에 대한 복음보다는 서양 종교라는 의식이 강했고, 제사를 중히 여기던 유교의 전통이 매우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어서, 기독교로 회심하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핍박을 가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매우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지만 여전히 사역자는 턱없이 모자랐다. 특히 1907년에 오래 기다리던 신학교 졸업생을 7명 배출하였지만 2회 졸업생은 학생이 없어 한 해를 쉬고서야 졸업을 시킬 정도였다. 1회 졸업생 7명은 그 당시 조선 팔도에 한 명씩도 배당할 수 없는 적은 수였지만 한국 교회는 그 중에서 한 명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보내기로 하였다. 1909년 2회 졸업생이 8명 배출되자 다시 한석진 목사와 2회 졸업생 최관흘을 선택하여 일본 동경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선교사를 보낸다.
두 번째는 한국과 주변 국가 정세다. 더구나 1909년은 이미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 나라였고, 그 다음 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이미 일본은 여러 방법으로 식민지 기반을 다졌고, 대한 제국의 우국 지사들은 자결을 하거나 독립 운동을 위해 무장 봉기를 하고, 또 좀더 자유로운 독립군 조직을 위해 외국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로 나간 상태였다. 참으로 어수선하고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던 때인데도 한국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 번째는 선교사를 강대국(러시아와 일본)으로 보냈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면서 그들을 세계 강대국에 보냈다. 물론 그들의 생활비를 충분하게 주고 보낸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한국 사람들이 고생하며 근근이 살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후원하면서도 선교사를 보냈다. 그러므로 어려운 국제 정세와 교회의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보낸 한국 교회도 우수하지만 이에 헌신한 선교사들은 더욱 귀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가야 하는 먼 여정이었고, 또 현지어를 배울 수 있는 여유(시간 혹은 경비)도 없이 사역을 해야 했으니, 한민족에게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동일 문화권에 선교한 것이니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처음 선교 여행을 할 때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들이 계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반대하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역시 한국 선교사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어떤 형편이던지 한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점점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였다.7)
네 번째는 선교 받은 세계 여러 나라 중에 처음으로 외국으로 선교사를 보냈다. 유럽의 기독교는 수 세기에 걸쳐 제국주의와 함께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선교사를 보냈다. 그러나 20세기가 다 되도록 복음을 받은 제3 세계 교회가 다른 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한 예는 극히 드문 경우다. 그런데 유독 한국 교회는 복음을 받은 지 불과 30년이 되기 전에 이미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하였고, IMC 1차 대회(1910년)에는 선교사 파송국의 일원으로 예루살렘 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 인도 대표도 참석하였는데 그들은 오직 인도 남부에서 북부로 선교사를 파송한 데 비해 한국 교회는 국내로 파송한 것은 물론이고 당시 국제적으로 강대국이었던 일본과 러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교회의 당연한 임무라고 여긴 것 같다.
다섯 번째는 선교사의 임무와 헌신이다. 이 때 한국 교회가 비록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했으나 사역의 대상은 한민족에게 국한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로 파송된 그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였다. 최관흘은 9월에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고 바로 11월 이전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기찻길로 간다면 평양에서 출발하여 중국 만주를 거쳐 하얼빈에서 기차를 갈아 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먼 여정이었다. 채 두달이 되기 전에 평양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블라디보스톡까지 간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명령에 거침없이 순종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생활은 극히 어려웠다. 최관흘은 월세 낼 돈이 넉넉지 않아 술집 이층에서 살아야 했고, 술집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2층 방에 살았다. 그리고 중국으로 간 선교사들은 땅을 한 자나 파고 지은 토굴 같은 집에서 살아야 했고, 현지어를 공부할 경비가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열정으로 기꺼이 선교사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IV. 최관흘 선교사의 러시아 선교 활동
최관흘 선교사는 1909년 조국을 떠나 선교사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11월 이전에 도착한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먼저 러시아 당국에다 장로교 목사로서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이미 장로교 교인들의 모임을 장로교회로 조직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그 답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쉽게 굴복하지 않고 기다린 결과 모스크바에서 제한적인 선교를 허락받았다. 이런 답장을 받고 최관흘은 열심히 선교하여 한인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갔었다. 그러므로 1년 동안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800킬로 이상 떨어진 하바롭스크, 중국 만주 지역인 하얼빈까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400명의 결신자를 얻었고, 또 블라디보스톡에 삼일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적인 선교는 정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선교 2년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는 최관흘과 개신교 선교를 방해하고 압제를 행사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1910년이 한일 합방이었다면, 1911년은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한인들을 시가 확장됨에 따라 시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신한촌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 또 블라디보스톡 삼일교회가 불에 전소되었다. 정교회의 악의적인 소문과 함께 신한촌으로 한인들을 강제 이주한 것은 최관흘의 선교에도 지대한 걸림돌이 되었다. 그럼에도 1911년 총회에 보고된 선교의 결과는 또한 놀라웠는데 "예배당이 2곳, 예배 처소는 13곳, 교인이 764명, 연보가 902원 29전"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블라디보스톡을 감리교 구역으로 넘기자는 청원을 하였고, 또 재정이 부족하고 선교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편지했다.8) 이 편지에 대해 선교부는 즉시 최관흘은 철수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상황이 바뀌어 많이 호전됐다는 전갈만 보내 왔을 뿐 철수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는 선교부의 허락 없이 쌍뜨뻬쩨르부르그를 다녀온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로 총회는 먼저 단호하게 선교 구역을 감리교로 넘길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선교부의 지휘를 받지 않는 것을 이유로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이 시찰단이 러시아에 간다는 정보가 러시아 정부에 흘러들어가고 서울 주재 총영사 소모프는 블라디보스톡 정교회에 서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정교회는 이 사실을 빌미로 연해주에 있는 모든 외국인(주로 한국인 선교사) 종교 지도자들을 축출하였다. 사실 정교회에서는 장로교회 교인인 사람에게는 러시아 시민권을 주지 말자는 제안을 했으나 경찰 당국은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대신 외국인 설교자가 설교하는 현장을 알려 준다면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추방할 수 있다고 했고, 1911년 11월에 이미 최관흘 선교사와 두 명의 매서인들이 투옥되고 추방 명령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된 손정도 목사가 추방되었다.
그런데 최관흘 목사가 감옥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전도 상황이 어려울 때, 그리고 아직 정교회로 넘어가지도 않은 때 우리 총회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톡) 전도를 포기하고 최 선교사의 시무도 정지시킨다.
최 선교사가 선교사 일을 그만둘 때 총회가 최 선교사에게 몇 개월 치에 해당하는 거금 삼백원을 주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해삼위 교회는 전과 같이 예배한다는 것과, 최 선교사가 한국으로 추방되지 않은 것과 함께 "민족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정교회로 간다."는 그의 말을 종합해 생각해 본다면, 연해주에서 조국을 떠나 유리하는 한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최 선교사와 그의 사역을 그만두게 하자는 정교회와 선교 상황이 어려우니 그만 포기하자는 한국 교회 총회의 전도국이 대립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러시아 선교를 포기한 것은 러시아 영토 내에서 전도가 실제로 불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최관흘은 1911년 12월에 러시아 관원에게 잡혔고, 그 다음 해 1912년 9월부터는 한국 장로교 총회가 러시아 선교를 중지함으로 총회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만다. 마침내 1912년 12월 30일 최관흘은 러시아 정교회로 넘어가게 되었다.10)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의 핍박으로 인해 선교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의논하거나, 선교사를 지지하지 못하고 선교사보다 총회가 먼저 선교를 포기하고 만다. 장로교 선교사 최관흘이 자신의 직임을 버리고 정교회로 간 것이 아니라, 선교를 계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정교회로 넘어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V.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 최관흘의 선교 활동
A. 러시아 정교회로 넘어감
최관흘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 총회와의 인연이 끊어지고 난 뒤 1912년 12월 30일 정교회로 넘어간다. 이 사실을 보도한 정교회 블라디보스톡 관구 소식지 1913년 1월 15일자 기사를 보자.
12월 30일 주일 주교(이르히빠스틔리)는 빠끄롭스키교회(신한촌과 가장 가까운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예배 전에 이 지역에 사는 한국인 중 장로교 수장인, 인노껜찌라 개명을 한 최씨가 정교회에 가입했다. 미국 장로교회 장로(목사)인 최씨는 미국 장로교회의 대단한 사역자인데, 한국에서 우리 주(연해주)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사이에서 장로교 교리를 전하기 위해 여기에 왔었다. 그의 설교의 결과로 주에는 많은 장로교 단체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최씨는 젊고 활동적인 정교회 요리 문답가이며 현재 선교사 성직자인 오가이 봐실리11)를 만났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최 장로는 종교적인 관점을 완전히 바꾸었고, 성 부활절에 정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큰 감화를 받아 정교회로 넘어왔고 자신의 모든 지난 활동들과 관계를 끊기로 하였다. 정교회 가입 예식은 지극히 거룩하신 주교 빠벨이 집례했다. 주교는 그에게 질문을 하고, 최씨는 러시아 말을 거의 할 수 없어 소정의 기도를 한국말로 하게 했다.12)
이 기사는 몇 가지 사실을 전해 준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을 가려 뽑는다면, 최관흘을 인노껜찌라고 정교회에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러시아 측 자료에서는 계속 최 인노껜찌, 혹은 최 인노껜찌 봐실리비치라고 불리게 된다.13) 또 하나는 미국 교회 목사14)라고 소개한다는 사실이며, 정교회가 최관흘을 장로교회의 대단한 사역자로 수장으로 보았다는 사실,15) 종교적인 관점을 바꾸었다 혹은 정교회로 넘어왔다는 표현, 자신의 지난 활동과 관계를 끊기로 하였다는 말, 그리고 러시아어를 전혀 할 수 없었다16)라고 기록하고 있다.
먼저 최관흘이 지난 활동과 관계를 끊기로 했다는 것을 논의해 보자. 이 말의 의미는 지금까지의 활동, 즉 한국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끊자는 말인데, 이미 최관흘에게는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이미 그해 9월 총회에서 러시아 선교를 그만둔다는 공식적인 결의가 있었고, 그보다 앞서 전도국에서 해삼위에 와서 선교사 사무를 그만두자고 하면서 반 년치 생활비를 건네 주고 간 터라, 더 이상 한국 교회와 관계를 계속할 수도 없었다. 단지 그가 한국 교회와 관계를 가지려면 러시아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만 그에게 남아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곳 러시아 연해주에 사는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곳에 있어야 한다면, 이미 한국 장로교회와는 그 관계가 끊어진 것이 분명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정교회로 넘어갔기에 장로교회와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 장로교회와 관계가 이미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기에,17) 정교회로 간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종교적인 관점을 바꾸고 정교회로 넘어갔다는 것을 논의해 보자. 이 부분이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이를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표현했다. 이런 관점, 즉 최관흘이 정교회를 나와 다시 장로교회 목사로 노회에서 안수식을 하기 전 서약 문답을 할 때 주고받은 말이 함북노회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18) 최관흘이 정교회로 간 것을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정교회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회의 중요한 한 분파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한 기독교 안에서 장로교회라는 분파에서 정교회로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믿는 여러 종파 중에서 다른 종파로 옮긴 것이다. 최관흘이 정교회로 간 것을 하나님을 배반한 행동이라든지, 다른 종교로 개종한 것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최관흘 자신의 말과 정교회 기관지에서 기록한 대로 '정교회로 넘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B. 정교회로 넘어가는 이유
그가 정교회로 넘어가는 이유19)는 대개 세 가지로 정리되는데, 경제적인 이유, 정교회와 경찰의 압박과 회유, 효과적으로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정교회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최관흘이 정교회로 넘어가는 이유를 경제적인 이유라고 할 때, 한국 교회가 그에게 선교비를 적게 주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래서 한 번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한국 장로교회에서 그에게 지불하던 선교비를 완전히 중단한 뒤 정교회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또 경찰이나 정교회의 압박만을 그 이유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경찰에 체포된 뒤 일 년 넘게 정교회로 넘어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정교회로 넘어가는 가장 합당한 이유는 한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장로교 교단을 포기하고 정교회의 옷을 갈아입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방법 외에는 그가 선택할 다른 것이 없었다.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연해주의 10만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든지, 정교회의 옷을 입고라도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1년의 고민 끝에 정교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정교회로 넘어간 것을 하나님을 배반한 것으로 보든지, 개종이라 여겨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삶에서 보여 주듯이 러시아에 흩어진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고 그의 사명이었다.
C. 정교회에서 활동
이제 최관흘이 최 인노껜찌가 되어 정교회로 들어가서 한 일들을 살펴보자.
1. 교리 문답사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교리 문답사가 되어 새로 정교회로 개종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기독교회를 소개하는 일을 맡았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정교회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교리 문답사가 어떤 위치에 있는 직위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아야 하지만, 분명하게 알려진 것은 아직 없고, 몇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최관흘을 정교회로 인도한 오 봐실리 신부가 신부 서품을 받기 전에 교리 문답사로 있었던 것을 보면 신부보다 낮은 직위였다. 또 교회 공식적인 직위에는 신부 밑에 성서 봉독자, 성가 인도자 등이 있어 이들은 정교회 기관지에 임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교리 문답사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어 이들보다 낮은 직위이거나 선교부의 특별한 직무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된다. 교리 문답사는 선교부 특수 조직의 일원으로 장로교회의 설교자와 같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정교회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다른 종교로부터 정교회를 수호하려는 직분으로 보인다.
2. 부흥회 인도
최관흘은 해마다 한인들을 찾아 각 마을을 돌며 전도하고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14년 4월 15일자 정교회 기관지를 보면 그의 선교 여행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작년과 같이 매우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곳에서 5번의 집회를 했다."20)고 했다. 즉 그가 정교회로 들어간 것이 1912년 12월 30일이었으니, 정교회로 넘어간 바로 그 때 1913년부터 한인들의 마을을 돌며 전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보통 한 마을에서 5-8번의 집회를 밤늦게까지 인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집회에 참여하였고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쉴 시간도 주지 않을 정도였다.
3. 행정 기관의 도움을 얻어 전도함
장로교회 목사로 선교를 감당할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행정 기관은 항상 정교회의 입장을 대변했고, 정교회는 항상 행정 기관의 고급 관리처럼 행세하여, 장로교회를 이교로 취급하고 배격하였으며 갖은 방법으로 장로교회 선교를 방해했었다. 1911년 최관흘을 체포하기 직전에 정교회 대주교는 쁘리 아무르 군무 지사(군인으로서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아무르주 지역을 포함한 매우 강대한 영역을 책임지고 있는 행정 책임자)에게 편지하기를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장로교회의 선교를 막아 달라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장로교는 자라고 있고 든든히 서 가는데, 오래 되면 될수록 이들과 전쟁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저로 하여금 각하께 간절한 청원을 하게 하오니, 장로교가 퍼지지 못하도록 가능한 모든 방책을 강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이미 정교회를 받아들인 한국인이나 아직까지 이방인인 한국인을 장로교 선전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장로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절대로 러시아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한국인에게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1)
이 편지 이후에 바로 최관흘이 체포되었음은 이들 정교회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정교회의 반대는 곧 지방 관리들의 반대와 박해로 이어졌고, 그 곳에 살고 있는 한인들조차 러시아 정교회 사제를 지방 관리보다 더 높은 중앙 정부 고위 관리인 것으로 여겼고, 그들의 말을 행정부 명령으로 생각할 정도였다.22) 그러므로 최관흘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장로교 목사로 선교한다는 것은 한국의 샤머니즘,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장벽을 넘어야 했고,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 어려운 사역이었다. 그러나 정교회의 옷으로 바꿔 입은 지금, 이러한 큰 장벽이 우군으로 바뀌어 러시아에 사는 한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게 된 것이다. 그의 사역을 동행하여 정교회 기관지에 기록한 데서도 이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뿌칠로프까 마을에서는 마을 행정 기관의 도움을 받아 집회를 했다."23)
4. 설교의 주제
그의 설교의 주제는 우상 숭배, 회개, 성찬 예식, 비참한 운명, 십자가의 표적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설교 주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강조하는 것들과 사뭇 달랐는데, 러시아 정교회는 성상(이콘, 성자들의 얼굴이나 신체를 그린 것으로 성삼위의 형상과 함께 성모 마리아, 12사도, 러시아의 여러 성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축일(거의 매일 축일이 있어 이를 기념하는 예배와 일과가 항상 있다.), 결혼, 장례, 세례(특히 유아 세례) 등의 각종 예식이 주를 이루고 있어 성경의 주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그런데 최관흘은 구원에 관한 주제와 성경에 관심을 집중시켜 그의 설교를 행한 것이다. 이로 보건대 최관흘은 정교회의 사제로서 혹은 장로교 목사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한인들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교단을 초월하여 한인에게 복음을 전할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 최관흘의 사역이 정교회에 끼친 영향
최관흘은 정교회에서 사역한 결과 정교회의 신임을 받았다.
"장로교회 성직자인 장로교인으로 정교회로 온 인노껜찌 봐실리비취 최씨는 엄격한 시험과 준비 후에 교리 문답사가 되어 요청하는 여러 교회를 방문 출장하여 여러 교회 성직자나 선교사를 도왔고, 전도자로서의 실력을 보였고 성도들을 인도하는 능력을 보였다."24)
이 글은 러시아 정교회 블라디보스톡 관구의 2차 선교 대회에서 최관흘을 선임 교리 문답사로 임명하고 그의 급여를 인상할 때 기록된 일지인데, 이 곳에서 최 인노껜찌 봐실리비취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장로교회 성직자로 정교회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정교회에서 그가 장로교회 목사로서 당당하게 활동한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장로교회 목사로서, 정교회 교리 문답사로 일하는 최관흘은 정교회에서 그 전도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이 일 전후로 정교회에서 여러 변화가 감지된다.
먼저, 정교회의 선교 목표가 개종에서 회심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간다. 최관흘이 오기 전까지 정교회의 이방인의 선교는 복음에 대한 감화가 없이 오직 세례를 주는 것(개종)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톡의 한인촌을 도시 확장으로 인해 철거하고 신한촌(개척리)으로 강제 이주하는 시기에 정교회 신부는 정교회 교인이 되지 않으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한반도로 추방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많은 사람이 정교회 세례를 받게 한 일도 있었다. 이는 복음을 듣고 감화를 받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약자들에게 거짓으로 불안감을 조성하여 정교회로 개종하게 한 것이다. 또 정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은 여전히 한인들이 하던 이방인(러시아인이 아닌)의 습관을 좇아 관혼상제를 하는 것을 보고 정교회는 스스로도 자신의 선교에 깊은 회의를 가졌었다. 그런데 최관흘이 정교회로 온 이후에 "어떤 어른이나 심지어 7세 이상의 어린이라 할지라도, 중환자를 제외하고는 자기 능력에 따라 미리 필요한 기도와 거룩한 정교회의 신앙의 진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25)고 정교회 기관지에 발표하여, 세례를 준비하는 과정을 두고 기도와 함께 신앙의 진리를 공부하게 한 것이다.
둘째로 전통과 예식 중심에서 성경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정교회는 현재도 성경과 함께 교회의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데, 성경을 통해 교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성상(이콘)이라 불리는 그림을 통해 교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최관흘이 정교회에 들어간 후 역시 정교회 기관지는 한국인이 세례를 받을 때는 반드시 성경을 읽도록 했고,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요약된 성경이라도 읽도록 했다. "(세례를 받을) 모든 사람에게 전체 또는 요약이라도 신·구약성경을 읽도록 널리 알려야 한다."26)
셋째로 한국어로 된 여러 신앙 문서와 한국어로 신앙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한인들은 주로 국내 사정이 어려워 러시아로 피난을 간 것이라 러시아어를 배울 경제적인 여력도 없을 뿐더러 한인들끼리 몇 가정씩 뭉쳐서 산골에 사는 경우가 많아서, 그들이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을 숙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더구나 정교회 예배를 고대 교회 슬라브어라는 고어로 사용함으로 러시아어를 어느 정도 숙지한 사람이라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정교회가 드디어 한글로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출판된 것으로 기도문과 요리 문답, 거룩한 역사, 찬송 등이 있었다.
"이를 위해서 한국인을 위한 선교부는 기도문, 간단한 요리 문답27) 그리고 거룩한 역사를 한국어로 출판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최소한의 지식은 마지막에 요리 문답을 "세례 전에 늙은이들과 무식자들을 위한 질문과 대답"28)이란 제목으로 첨부하였다."29)
넷째로 세례를 주는 방식이 변화되었다. 정교회는 세례를 주는 것은 어린아이의 경우 부모나 할머니의 요구에 의해 상당한 정가를 지불할 경우에 세례를 베푸는데, 특이한 날을 정해서 하기보다는 수시로 세례를 한다. 그리고 세례명과 함께 십자가 목걸이를 준다. 어린아이는 장성하여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보고 세례받았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1913년 8월 1일에 정교회 기관지에 발표된 명령서는 한인들이 정교회로 개종할 때 세례 주는 방법을 자세히 말하고 있는데, 세례받기 전에 대주교의 허락을 받고 세례 준비를 통해 기도문과, 요리 문답, 성경을 숙지해야 했고, 한국말을 아는 사제가 세례 문답을 해야 했고, 농번기를 피해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세례식을 하되, 개방된 개천이나 웅덩이에서 세례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관장을 불러 세례받는 것을 축하하게 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반드시 성찬 예식에 참여하도록 했다.30) 그리고 세례일을 교회의 명절로 지키게 했다.
다섯째로 러시아 정교회가 한인 선교에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정교회가 한인에 대한 선교에 실패했다는 자성의 소리가 커져 갈 때 최관흘이 정교회에 합류했고, 그 이후로 정교회는 한인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대단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톡에 3년 과정 신학교를 세우려고 러시아 국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그 목적은 한인 선교를 더욱 효과적으로 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최관흘의 영향력도 그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정교회의 변화가 정교회 전체의 부흥이나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러시아 특히 연해주에 사는 한인들에게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1917년 공산 혁명의 영향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면서 국가의 재정으로 움직이는 정교회가 그냥 무너져 버린 것이다. 국가가 무너져 국가의 재정을 지원받을 수 없게 되자, 정교회의 거의 모든 사제는 사표를 내고, 최관흘도 이 시점 정교회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최관흘은 정교회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나 그 곳에서의 삶이 길지 못하였다.
VI. 공산 혁명 이후의 삶과 목사직 회복
무신론의 공산 혁명은 일반 사람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종교 생활에 치명적이었는데, 공산 정권의 헌법에도 기록된 것처럼 종교(특히 정교회를 비롯한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규정하고 정교회와 다른 종교들을 철저히 박멸하였다. 그런데 연해주는 러시아 특히 모스크바와 9,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서 공산 혁명의 직접적인 영향을 늦게 받았다. 1922년 연해주가 완전히 공산화되기 전까지는 황제 령에 의한 백군에 속하였고, 연해주 중부 지역인 쓰파쓰크 달리 부근에서 지리한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주로 한인들이 거주하던 연해주 남부 지역은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 가장 자유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공산당원들이 데모를 하고 습격을 하고 방화를 일삼았지만, 정교회나 이후 공산 정권처럼 조직적인 박해는 없었다. 이 때 장로교회 교인들도 공산 청년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교회들이 불탔으며, 많은 교인들이 만주 등지로 피난을 가서 문을 닫은 교회도 여럿 있었다.31)
그렇지만 정교회의 방해가 사라진 것은 개신교회가 도약하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1917년 공산 혁명이 일어나면서 재정 러시아의 국가 종교였던 정교회는 재정적 지원을 잃게 되었고, 국가의 지지를 잃어버린 순간 정교회의 모든 조직이 무너진다. 이 사실을 블라디보스톡 정교회 주교구 통보지가 반영하는데, 1917년까지는 매달 두 번씩 두꺼운 분량으로 출판하다가 1917년과 1918년에 단 두 번, 그것도 두세 장으로 출판되다가 그마저 1919년에는 완전히 폐간된다. 더구나 1918년 블라디보스톡 정교회 주교구 통보지는 온통 직위 해제에 관한 소식뿐이었다. 최관흘을 정교회로 인도했던 오 봐실리 신부의 직위가 해제된 이 때 일이다.32) 성가 인도자나 성서 낭독자 그리고 신부에 대한 임명과 함께 직위 해제가 이 기관지에 계속 등재되나 최관흘 임면의 기사는 찾을 수 없다. 이것은 교리 문답사라는 직위가 정교회 안에서 분명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1918년 8월 31일 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최관흘 씨의 편지가 회중에게 낭독된다. 총회는 이 편지에 대해 답장하게 했고, 그 요구하는 사정을 함남노회에 맡겨 살피고 조처하게 했다.33) 그러나 이 편지와 총회의 답장도 찾아 낼 수 없다.34) 그러나 이 편지 이후에 1919년 3.1운동과 맞물리며 전국이 매우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35) 한국 장로교회는 연해주에서 한인 선교를 활발히 시도하였다. 채필근 목사는 연해주 일대를 돌아보고 상세한 보고서를 함북노회에 제출하였고, 이 보고서에서 연해주의 종교 상황을 보고하였다. 정교회가 힘을 잃고, 인민들이 목자 잃은 양처럼 전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보고서에 따라 함북노회는 열심히 러시아 내에서 전도를 하기로 하고 선교사를 선발하고 보내기까지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만다.36) 그런데 1922년 함북노회에서 시베리아 노회가 분립을 결의할 만큼 교회는 성장되어 있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으나, 함북노회에서 최관흘을 목사로 복직시키면서 그 이유를 전도의 공로 때문이라 하였다. 본국에서 보낸 모든 사역자들이 3년 동안에 여러 명을 보냈는데, 다 실패했지만 유독 최관흘만 전도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1922년 시베리아 노회를 분립시킬 때 시베리아 노회 소속 교세는 해삼위 지방에 5개 교회에 목사 1인, 장로 4인, 영수 3인, 집사 11인, 예배당 1개 처소, 교인 533명, 외수청 지방에 5개 교회에 장로 1인, 영수 2인, 집사 7인, 예배당 1개 처소, 내수청 지방에 18개 교회에 장로 2인, 영수 4인, 집사 19인, 예배당 5개 처소, 고로지개 지방 9개 교회, 우수리 지방에 4개 교회, 하바롭스크 지방에 3개 교회, 남부 우수리 지방에 9개 교회 분중하유 영지 7개 교회가 있었다. 총 합계 목사 1명, 장로 7인, 영수 21인, 집사 67인, 교인 2970인으로, 60여 군데의 교회와 8개의 예배당이 있었다.37) 이 모든 공로를 다 최관흘에게 돌릴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가 부흥되었고 그 공로로 복직이 되었다면, 연해주 지역에서 교회 부흥을 위한 최관흘의 공은 크다고 판단된다.
1922년 8월 31일 제2회 함북노회38) 때 최관흘은 장로교 목사로 복직되었다. 시베리아 시찰 구역의 보고 중에 "최관흘 씨는 애통하며 회개하오니 해벌하여 주심을 청원하"고,39) 노회는 최관흘 씨의 해벌과 복직을 규칙부 의원에게 맡겨 그 보고를 받아 "근본 함경노회에서 면직한 바 지금 함북노회에서 관할하는 지방이오, 또한 그 지방 시찰회에서 충분히 증거하야 청원하는 일인즉, 해벌하고 복직하여 본회 회원으로 받는 것이 합당함으로"40) 신학 준시 위원에게 맡겨 다시 문답하게 하는 것으로 가결하였다.
최관흘 목사를 다시 복직하는 장립 예식은 9월 3일(주일) 청진 예배당에서 오후 3시에 시작되었다. 신학 준시 위원이 문답이 잘되었다고 하고 장립하기를 가결한 후, 박창영 목사가 고전 3장 9절 말씀을 읽고 김택서 이정화 씨와 함께 최관흘 씨를 회중 앞에 세우고 목사의 서약 문답을 하였는데, "특히 최관흘 씨에게 이전에 다른 교파를 신종함으로 잘못된 것과 독일무이하신 하나님을 이제부터 영원히 신종할 것을 권면하고" 안수례를 한다.41) 그리하여 1922년 11회 총회에서 최관흘 씨가 복직이 된 사실이 보고되었고, 복직이 될 때 "전도 사업에 충성되이" 일한다는 전도국의 평가가 있었다.42) 복직이 된 최관흘 목사는 내수청 지역(지금 연해주의 빨찌산스크)에 있는 우지미 교회로 청빙되었다.43)
장로교회 제11회 총회는 함남·북노회에서 시베리아 노회를 분리시켰다. 또 시베리아 지방에서 열린 부흥회에는 러시아에 있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인과 러시아 사람들조차 큰 감동을 받고, 정교회 교인들이 개신교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44) 이렇게 조직된 시베리아 노회는 제1회 설립 노회는 모였으나 제2회 노회는 공산 정권의 반대로 더 이상 모이지 못하고 폐쇄되어 한국 노회 중 가장 단명한 노회가 되었다.
최관흘 목사는 복직되어 교회 청빙까지 받았으나, 그 이후의 행적을 찾는 데는 실패하였다. 몇 번씩 여러 노회록에 잠시 이름이 거명될 뿐 구체적인 활동은 알 수 없었다.
VII. 최관흘 선교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총회가 조직되기 전에 선교사를 보낸 한국 교회는 총회를 조직하면서 중국으로 하와이로 일본과 러시아로 선교사를 계속 파송하고 있다. 비록 본국의 파송하는 교회가 연약하고 목회자가 더욱 필요한 시점임에도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 것이다. 특히 파송된 지역이 다 당시의 한국 상황보다 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앞선 곳이어서 그들의 삶을 충분히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꺼이 선교지로 떠난 100년 전의 선교사들을 공부하면서, 선교 후원비를 저울질하거나 약소국으로 가서 황제처럼 살려는 요즘의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갖게 한다.
특히 최관흘 선교사는 자신을 보낸 장로교 교단보다 하나님의 소명을 더 귀하게 여긴 선교사였다. 그렇다고 교단을 쉽게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를 보낸 교단은 나의 어머니의 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교단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경우라면 자신의 근거지이기도 하며 신분을 보장하는 복음자리를 떠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교 현장으로 불러 주심을 더욱 귀히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최관흘 선교사의 삶을 보면서 그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교비가 중단된 상황에서도 선교를 계속하려는 그의 마음이 귀하다. 선교는 선교비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생각이다. 물론 후원 교회는 선교비를 선교사에게 후원하고 그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선교에 동참한다. 그렇지만 후원 교회가 선교의 주체일 수는 없다.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부르심에 신중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선교사의 참된 모습이다.
선교지에서 쉽게 다른 교단이나 교회와 경쟁 심리를 갖게 되는데, 그는 감리교회와 정교회 등과 연합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현재 러시아에서 선교하는 한국 선교사들도 러시아 목회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선교하는 이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최관흘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곧 우리 선교사와 현지 교회는 공동의 목표(하나님 나라 확장)를 위해 일하는 동역자이고, 우리의 대적 사단을 물리치는 데 둘도 없는 가장 필요한 우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최관흘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국 교회의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1907년의 대부흥을 그리며, 이 땅에 이러한 부흥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이 다시 오기 위해서 얼마나 더욱 열심히 선교(전도)해야 하는가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최관흘이 넉넉하지 못한 선교비를 받으면서도 러시아로, 그리고 한석진 목사가 일본으로 선교를 간 것처럼, 국내에서는 권서인과 매서인들이 한국을 다시 살리는 길이 이 길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며 처절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1907년 대부흥도 있었고, 세계 제2의 선교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우리의 얽힌 문제 속에서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주제어
한국 최초의 선교사, 최관흘, 러시아 선교사, 러시아 정교회,
하나님의 소명, 한국 선교 역사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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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ЕПАРХИАЛЬНЫЯ ВЪДОМОСТИ (블라디보스톡 주교구 통보지), 1913년 1월 15일 자 (11년 차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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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ЕПАРХИАЛЬНЫЯ ВЪДОМОСТИ (블라디보스톡 주교구 통보지), 1914년 4월 15일자 (12년 차 8호).
Влади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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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ЕПАРХИАЛЬНЫЯ ВЪДОМОСТИ (블라디보스톡 주교구 통보지), 1918년 1-2월(1-4호).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1회(1912년) 총회록.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 7회(1918년 8월 31일) 회록.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 11회(1922년 9월 15일) 회록.
함남노회 제 5회 별 노회 (1921년 9월 10일) 회록.
함북노회 제 2회(1922년 8월 31일) 회록.
출처: http://pctscwm.tistory.com/283 [pctsc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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