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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묵상글(강론글) 하나가 되게 (요한17,11)
1차(260519. 23:00), 2차(05:15), 3차(06:30)
** 집안 일로 지방에 체류 중이기에 3차분을 한 신부님의 글이 아직이지만 공유합니다. 17:10. 3차분 1편 추가.
20일 묵상글, 19일 23시 0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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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0일 수요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하나가 되게 (요한17,11)
제1독서<나는 하느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사도20,28-38)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복음<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11ㄷ-19)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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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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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7,11ㄷ–1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당신 이름으로 지켜 주십시오.
그래서 저희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어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단지 가르치고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을 아버지께 맡기시며
끝까지 보호와 거룩함과 일치를 청하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말할 때
하느님의 생명은 분열이 아니라 친교이며,
참된 거룩함은 고립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기도는
제자들을 단지 안전하게 보호해 달라는 청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 안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저희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라는 말씀은
교회의 일치가 인간적 합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친교를 닮아 가는 은총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 살되
세상의 거짓과 폭력,
교만과 분열의 방식에 완전히 물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다른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중심은
권력이 아니라 진리이고,
지배가 아니라 사랑이며,
자기보존이 아니라 파견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거룩함은
현실을 떠난 특별한 분위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말과 행동과 관계가 진실 안에서 정돈되는 것,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도
거룩함을 단지 외적 경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에 참여하는 삶으로 보았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차갑게 만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하느님께 맞추어 가게 하는 빛입니다.
문화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문화가 무엇을 중심으로 하나 됨을 이루는지 묻습니다.
세상은 종종
공통의 적, 공통의 욕망, 공통의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과 진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선동과 자극의 문화가 아니라
진리와 거룩함,
보호와 친교의 문화입니다.
무엇을 함께 소비하느냐보다
무엇 안에서 함께 거룩해져 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일치가 안으로만 모이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보내지는 사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참된 일치는 닫힌 울타리가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도 함께 진리를 증언하는 친교입니다.
교회가 하나여야 하는 이유는
그 하나 됨이 세상 속 파견의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무엇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는가?
편안함인가, 내 편의식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이름과 진리인가?
나는 거룩함을 외적인 경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정말 주님의 중심으로 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하나 됨과 거룩함의 길로 이끄십니다.
주님,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저를 지켜 주소서.
분열보다 친교를,
거짓보다 진리를,
세속적 두려움보다 거룩한 용기를 선택하게 하시고
당신의 기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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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 헤어짐을 교회에서는 ‘선종(善終)’이라고 말합니다. '착하게 살고 복되게 생을 마친다'라는 뜻을 가진 선생복종(善生福終)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헤어짐보다는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하며 지금의 삶을 바로 사는 것이 먼저라고 가르쳤고, 한편 고타마 붓다는 집마다 죽음을 겪지 않은 곳이 없음을 깨닫게 하며 죽음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현실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시며 죽음을 단순히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는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35년 사제 생활 하면서 헤어짐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헤어짐은 늘 아쉬움과 서운함이고, 만남은 늘 긴장과 설렘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순간에 충실한 것입니다.
저는 해바라기의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도’라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그저 뒷모습이 보였을 뿐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아무런 약속은 없어도 서로가 기다려지겠지요./ 행여 소식이 들려올까, 마음이 묶이겠지요. / 어쩌면 영원히 못 만날까./ 한 번쯤 절망도 하겠지만/ 화초를 키우듯 설레이며 그날을 기다리겠죠/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모든 것 그대로 간직해줘요. 다시 우리가 만나는 날엔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 회자정리가 삶의 이치라면 이자정회(離者定會)도 삶의 이치입니다.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이,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도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열심한 사람에 대한 질투와 모함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는 먼지가 쌓이듯이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악의 유혹이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당부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제자들에게 닥쳐올 박해와 시련을 예견하셨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도 예견하셨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조직화 되면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예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두 가지 청원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셨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청하셨습니다. 그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과 아픔을 만나게 됩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듯이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기쁨도 찾아오고, 슬픔도 찾아오고, 즐거움과 분노도 찾아옵니다. 모든 갈등과 아픔을 벗어나서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과 아픔을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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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5-16).
세상 속에 있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제가 신학생일 때의 일입니다. 술에 취한 선배를 방까지 데려다주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부제님이 꾀를 냈습니다. “후배가 술에 취하였으니 선배가 방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러자 선배는 저를 부축하려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선배는 자신이 저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였겠지만, 실제로는 제가 선배를 부축하며 방까지 갔습니다.
외짝 교우 가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쪽은 자신이 배우자의 신앙생활을 허락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배우자의 신앙이 그 가정을 지탱하는 힘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하기에,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이 세상을 떠받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세상을 지탱하는 사명을 지녔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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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곧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고, 그들이 하나 되고 거룩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6절),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26절)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느님보다 그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실체에 관한 모든 것, 그분의 존재와 본성, 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사랑, 그분의 능력과 보호와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기도는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가장 처음 언급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 4장에서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곧 아담의 셋째 아들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4,26). 또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도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하신 분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요한 17,11.12)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이처럼,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일치에 ‘하나’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곧 제자들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나 됨’은 그리스도란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재로 하나 됨을 이루었음을 <사도행전>에서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사도 4,32)라고 전해줍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고, 성령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의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이 더욱 자라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진리이신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저희들이 당신 안에서 하나 되고, 당신의 이름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주님!
깨끗하기보다 진실 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기보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며
단지 함께 있기보다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되 행동하게 하소서.
또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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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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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0 05:10
- 세상의 악과 싸울 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둘 다 떠나면서 남기는 말 곧 유언입니다.
그러나 독서가 사도 바오로의 고별사 형태라면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독서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말씀과
복음의 “악에서 지켜 주십사”라고 비는 말씀 중에 어떤 말씀을
가지고 나눌까 망설이다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를 택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란 어떤 것이고,
악이란 무엇이며 악에서 구해주신다는 것은 무엇인지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세상이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란 세속과 다르다는 말이겠지요.
세속이란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세상이고 그래서 악이지만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그래서 본래는 선합니다.
그렇지만 악도 선 곁에 항상 붙어 있습니다.
밀밭에 인간이 뿌려놓은 가라지인 셈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죄악이라고 하는데
하느님의 선을 인간이 소유하려다가 지은 죄로 인한 악이며
하느님께서 만드신 악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악은 두 가지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발생한 악이 하나이고 유한성에서 비롯된 악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할 때,
특히 모든 악에서 보호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 뜻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주의 기도를 바친 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라고 기도합니다.
이때 죄의 악에서 보호하시고 구해주시기를 우리가 청해야 함은 맞습니다.
그러나 나의 유한성 그러니까 인간의 유한성에서 비롯된 시련이나 악은
보호해주시기는 청하되 구해달라고 청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시련이나 악은 겪지 않도록 해달라는 뜻이라면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어 악마의 혹독한 유혹을 받으심으로써
시련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맞서 싸워 이겨내셨고 단련을 받으셨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기도라는 시의 내용도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 오늘도 제가 가는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그 험한 고갯길을 올라갈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예수님! 오늘도 제가 가는 길에서 부딪치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길 원치 않아요.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예수님! 오늘도 제가 가는 길에서 넓고 평편한 그런 길들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좁은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믿음 주소서.”
오늘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세상에 악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듯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고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시어 악령을 물리치시고 우리를 구해주셨고,
그런 당신처럼 제자들인 우리도 이 세상에서 빼내시는 것이 아니라
외려 세상 구원을 위해 한가운데로 파견하시는데 다만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세상의 악과 싸울 때 홀로 싸우지 말고 성령의 인도로 성령과 함께
주님께서 싸우셨듯 우리도 그렇게 하나가 되어 싸우라 하시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을 본받아
우리가 일치하고 그 일치된 힘으로 모든 악과 시련에서 승리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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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17-19)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것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거룩함은 세상에서 멀리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얻는 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를 붙잡고 있던 거짓된 중심을 무너뜨리고,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다시 서게 하는 빛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 생각, 내 판단, 내 상처, 내 욕망을 진리처럼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거짓 평화와 자기중심적인 확신을 조용히 흔들어 깨웁니다.
말씀은 우리를 꾸짖기보다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 사랑 안에서 파견된 존재, 관계 안에서 선을 흘려보내야 할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진 사람입니다. 가정으로, 공동체로, 일터로, 상처 입은 관계와 불편한 자리로 조용히 파견된 사람입니다. 거룩함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를 부드럽게 고르는 순간, 누군가를 쉽게 단정하지 않는 순간, 내 이익보다 관계의 생명을 먼저 살피는 순간, 작고 낮은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봉헌입니다. 당신을 따로 떼어 높이 세우는 거룩함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거룩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말씀이 내 안에서 살이 되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 길이 되고,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힘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보냅니다. 다만 예전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보내십니다.
미움 속에 사랑으로, 분열 속에 화해로, 두려움 속에 신뢰로, 상처 속에 자비로, 굳어진 관계 속에 다시 흐르는 선의 물길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오늘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고 거룩해진 우리는 다시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는 작은 거처가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나와 도구적 존재로 내어 맡긴 이들의 내면의 빈 공간으로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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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안에서....
요한 복음에서는 "그의 이름을 믿었다."(요한 2,23)라는 표현과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표현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등장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도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저들을 지켜 주십시오."라는 표현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름은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인데, 우리의 신앙이 단어 몇 개를 믿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우리가 주일이나 대축일에 신경을 외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데, 이는 단지 말 몇 마디로 우리의 신앙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게다가 과연 누가 단어 몇 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의 행위는 표현 자체가 아니라 그 실재를 향한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신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믿는 대상은 이런 우리의 고백 행위나 몇 마디의 말 혹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 안에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행복의 근원이 들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시는 겁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요....
유다인들의 전통에서나 성경의 언어에서 "이름"은 곧 그 인격, 그 현존을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그분의 이름"이라고 부른 전통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을 가리킬 때에도 이어졌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였다."(사도행전 5,41).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저는 그들을 당신 현존 안에서 지켜 주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그들을 당신 현존 안에 지켜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호를 그을 때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안에서. 아멘."
우리가 기도의 시작과 끝에 성호를 긋는 것은 사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며 끊임없이 일하신다는 확신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원천이요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늘 의식해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부여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의 여정을 계속해 갈 수 이유도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곁을 지켜 주시기 때문 아닐까요?! 이 핵심적인 사실을 의식하고 확신 있게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성호를 그으면서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식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며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다며 보면 하느님 현존이나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은 안중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절대 없는데도 말입니다!
오늘은 복음 묵상을 마치면서 예전에 함께 나누었던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이: 아담]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 하나를 다시 한번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얼마나 많은 성과를 올렸는지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데, 아담이 나에게 이렇게 일러주는 것입니다. '있는 것이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내가 강의에서 말한 것이나 저술한 것에 대해 내 생각이 사로잡혀 있는 동안, 아담은 나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칭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준 것입니다. 내가 내 개인의 성취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아담은 '함께 뭔가를 하는 것이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 것입니다. 아담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성과를 낼 수 없었고, 자랑할 만한 구석도 없었으며, 상장이나 트로피 등에 대해 허풍을 떨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 자체로 우리가 만나고 겪게 되는 우리 삶의 진리를 가장 근본적으로 증거해주는 사람입니다.
... 우리의 성공에 있어 상당한 의미를 지는 부분, 즉 돈 버는 일, 건강, 우리 서로간의 관계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거의 혹은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사건들이나 환경들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착각하는지도 모르고 계속하고 그 상태에 있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우리 삶의 과정을 결정지어 줍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시련의 시간 동안 우리를 지지해 주고, 또 우리의 사명이 성취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사랑해 주고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아담이고, 그의 수용하는 정이 최종적인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철저한 요청이고, 우리가 강할 때에는 우리 사랑을 나누어주고 우리가 약할 때에는 다른 이들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요청입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차분함과 관대함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중요하다고 여기며 정신을 쏟고 있는 것이 때로는 정작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관계성 그리고 우리 서로간의 사랑의 중요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내일 죽을 것이라면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할 것인가?'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질문에 보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살아내는 것이지 내 에고가 욕구하는 바를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식별하게끔 해 주는 가장 엄연한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우리에게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은 우리 삶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그 안에서 삶을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살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늘 의식함으로써,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잡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을 더 진실하게 살도록 이끄는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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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하느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리십시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랑의 은은한 움직임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려 하느님께 봉헌하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
하느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리십시오.
2026년 5월 19일 화요일
CAC 교수진 책임자 카르멘 아세베도 부처(Carmen Acevedo Butcher)는 대략 14세기에 어떤 익명의 저자에 의해 저술된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번역했는데, 이 책은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관상적 실천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주며, 그 후 우리는 다시 일상과 우리가 맡은 일로 돌아갑니다. 무지의 구름을 쓴 익명의 저자는 초심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지침으로 관상에 들어가도록 권장합니다:
사랑의 은은한 움직임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려 하느님께 봉헌하십시오. 오직 그분께만 시선을 두십시오. 그분만을 바라고, 그분이 만드신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그분만을 생각하십시오. 다른 어떤 것도 마음과 뜻을 스쳐 지나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십시오. 알고 있는 것을 잊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과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잊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생각과 감정이 어떤 대상에도 향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대로 두십시오. 잠시 동안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세상 모든 이들은 관상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그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마십시오. 이 일을 계속하여 마침내 그 기쁨을 맛보십시오. [1]
저자는 초심자 관상가들에게 이러한 기도 안에서 일어나는 "알지 못함(unknowing)"의 일시적인 체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촉구합니다:
처음 관상을 실천할 때, 여러분은 오직 어둠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의 구름"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의 뜻 안에서 단순히 하느님께 향하려는 움직임을 느낄 뿐입니다. 또한 이 어둠과 이 구름은 언제나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에 놓여 있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것들은 여러분이 지성의 빛으로 그분을 분명히 보는 것을 막고, 감정 속 사랑의 달콤함으로 그분을 느끼는 것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어둠 안에 당신의 거처를 두십시오. 가능한 오래 그곳에 머무르십시오…. 이 어둠과 이 구름 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이 땅에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입니다. [2]
(여기서 어둠과 무지의 구름은 단순한 부정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감각을 넘어서는 신비적 만남의 자리를 뜻합니다. 즉, 하느님을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직접 "알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음과 보이지 않음 속에서 그분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세베도 부처(Acevedo Butcher)에게 관상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실천으로, 삶의 도전적인 조건들을 더 큰 지혜와 자비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관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시시각각 더 붐비게 되면서, 더더욱 우리는 저가 항공의 좁은 좌석에 앉아 서로의 팔꿈치가 맞닿아야 하는 승객들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이버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새로운 광란의 속도는 사랑하는 이들과 손을 맞잡는 것을 독처럼 해칩니다. 바로 그곳에서 관상이 필요합니다. 관상은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다시 연결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영혼을 치유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후 16세기 동안, 관상 기도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환과 격변의 시대인 지금… 우리는 다시 뿌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관상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고대의 기도 방식을 실천하며, 전쟁과 극심한 정치적 분열, 전염병, 테러, 기술, 과밀, 소음, 불평등, 그리고 겸손이 결핍된 교회 속에서 평화를 찾고 있습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매일 아침 저는 고요한 시간을 즐깁니다. 책을 읽고,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립니다. 어제는 자연을 내다 보는 창문에 거미줄이 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집 발코니와 식물들, 새들, 나무들이 보이는 창이었지요. 처음에는 빗자루를 가져와 그것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기 거미들과 그 곁에 있는 어미 거미, 그리고 그들이 만든 아름답고 정교한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관상에 머무는’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과, 진정으로 보고,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Joan V.
References
[1] The Cloud of Unknowing, trans. Carmen Acevedo Butcher (Shambala, 2018), 12–13.
[2] The Cloud, 13.
[3] Carmen Acevedo Butcher, introduction to The Cloud of Unknowing, trans. Carmen Acevedo Butcher (Shambala, 2018), xxix, xxx.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trick Hendry, untitled (detail), 201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요한 밤하늘 아래, 어떤 사람이 “오직 이 순간(Just This)”에 머무는 관상을 하며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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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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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06:20 추가.
온전히 상호 내재하시고 상호 일치하시는 성삼위의 사랑!
지상 생활 내내 예수님의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던 자아 인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당신이 하나라는 인식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 안에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계시고, 당신 안에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의식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신과 아버지 사이에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상호 내재의식이 확고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데,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 삼위일체적 사랑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온전히 서로 일치하시고 사랑하시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한 마음 한뜻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 부모 둘다 자녀를 극진히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부모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서로 존중도 하지 않고, 항상 다투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준다면, 자녀 입장에서 얼마나 난감하고 불편하겠습니까?
반대로 부모 두 사람이 서로를 애지중지하고, 극진히 사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보기 좋고 효과적이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서로 온전히 일치하고 존중하고 배려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소중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언제 어디서든 상호 내재하시고, 상호 일치하시고, 상호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바라보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존재 자체로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무언의 말씀이 각별합니다.
우리 역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일치하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학교로 예를 들면 이사장, 교장, 교감이 따로국밥이 아니라 온전히 일치하고 서로 존중하며, 그 마음으로 학생들을 지극정성으로 동반해야 하겠습니다.
본당 주임 신부님, 보좌 신부님, 원장 수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일치하면서, 온전히 하나 되어 교우들을 섬기는 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어느 단체, 어느 공동체에서든 마찬가지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로 일치하고 합심해서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도 회장과 사장, 부장이 온전히 일치하며 한 마음이 되어 직원들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예수성심성월 하루 피정에 초대합니다!
일시: 6월 6일(토) 09:00~17:00
장소: 의왕 성라자로 마을 내 아론의 집 대강당(경기도 의왕시 원골로 66)
강사: 김경희 수녀, 조남구 신부, 박효철 신부, 양승국 신부
참가비: 5만원(중식 제공)
문의: 031-424-8003, 010-9803-0079(가톨릭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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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6:30 추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1ㄷ-19).”
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이지만, 내용을 보면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를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라.”, 또는 “하느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라.” 라는 당부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은, 형제애로써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고, 그것은 ‘함께’ 구원받기 위한 노력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지 않고, 또 하느님 밖에서, 하느님과 떨어져서 인간들끼리만 단합한다면, 하느님을 거슬러서 바벨탑을 쌓는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진정한 일치는 ‘사랑’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느님이 무서워서 복종하는 것일 뿐이라면, 그것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 하나가 되지 않고, 사랑도 없이, 겉으로만 함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치가 아니라 ‘위선’입니다.
진정한 일치에서 참 평화가 이루어지고, 세상의 복음화도 이루어집니다.
일치, 사랑, 평화, 복음화를 위한 노력은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초대교회 공동체를 보면, 처음에는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일치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있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 이야기’, 6장에 있는 ‘배급에 관한 갈등 이야기’,
그리고 15장에 있는 ‘율법 문제로 생긴 분쟁과
논란 이야기’ 등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치에 금이 가기 시작한 모습들을 전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 욕심, 잘못된 신념 같은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3) 17절의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는,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당부 말씀이기도 합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무슨 엄청난 수행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높은 수준의 성덕을 쌓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게 되는 일들을 하고, 하면 안 되는 일들은 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됩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이미 많은 사람이 하고 있는 생활입니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은, ‘거룩한 척 하는’ 위선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세상을 복음화 하려면 교회부터, 또 신앙인들부터 거룩해져야 합니다.
<‘나부터’ 거룩해져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의 거룩함’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거룩함’은 구원받는 일에 직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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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부활 제7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7:10. 추가.
요한 17,11ㄷ-19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세상에 홀로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뽑으신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기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함을 아시면서도, 제자들을 그 미움 받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해주시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는 게 전부이지요. 주님은 왜 일부러 세상으로부터 뽑아내신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실까요? 왜 그들을 세상에서 따로 빼내어 보살펴주시지 않고, 그들을 미워하는 세상 속으로 보내실까요?
그들을 ‘미움받이’, ‘시기받이’, ‘질투받이’가 되라고 보내시는게 아닙니다. 당신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는 것처럼 무조건 세상을 위해 희생하라고 등을 떠미시는 것도 아닙니다. 미움을 받고 시기 질투를 받더라도 세상을 위해 중요한 뭔가를 해 내라고, 그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제자들 자신에게도 큰 의미와 보람이 될 것을 알기에 그들을 보내시는 것이지요. 하느님보다 재물을 섬기고,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을 먼저 찾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미워하고, 당신이 보내신 제자들을 미워하더라도, 그들은 심판할 대상이 아니라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고 포기할 수도 없는, ‘미워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그리고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더군다나 그 사랑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하는 그런 사랑이라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눈치를 보거나 망설이지 않으며 최선을 다하는 ‘완전한 사랑’이라면 그것이 주는 기쁨과 보람 또한 크겠지요. 그러니 미움 받더라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 중에서도 최고의 사랑인 ‘복음’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세상과 주님 제자 사이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미우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자신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자신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러했듯이, 주님으로부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랑의 진리’를 몸소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 사랑이 지닌 본질입니다. 사랑을 ‘적당히’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누리는 것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으로 만족하지만, 사랑을 ‘온전히’ 하는 사람들은 주는 것에서, 내가 주는 그 사랑으로 상대방이 기쁨을 누리는 모습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법이지요. 그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자, 가장 완전한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 완전한 사랑으로 거룩해지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의 진리를 열심히 살아내어 거룩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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