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결혼과 아홉 번의 장원급제-율곡 이이(1)
열 세 살때부터 스물 아홉 살 때까지 과거시험에서 무려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한 천재, 그리하여 거리를 지나가던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며 우러러보았던 인물, 그가 바로 율곡 이이입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율곡은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경기도 파주의 율곡리로 와 생활했는데요. 여기에서 ‘율곡’이라는 호도 나왔습니다. 선조 임금에게 『시무육조』와 ‘10만 양병설’ 등 개혁안을 올리기도 했던 율곡은 한 가정 안에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우애도 깊었습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 부인이 연달아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탓에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해야 했는데요. 사실 율곡의 입장에서 이런 일이 탐탁치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율곡의 부모, 즉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아버지는 주막집 여인과 딴살림을 차린 후 신사임당이 “내가 죽은 후에도 재혼하지 말아줄 것”을 강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을 끝내 아내로 맞이하고 맙니다.
이 일로 율곡은 정신적인 번민 속에서 방황을 하게 되고, 자연히 아버지와의 사이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보다 안정된 가정을 원했을 율곡이 아내를 세 명이나 맞이해야 했던 상황이 떨떠름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