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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첫 중보기도
출 32:7-14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 32:7-14 / [분노하시는 여호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모세야,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네 백성이 지금 제정신들이 아니구나. 8)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저희 손으로 거푸집에 부어 만든 수송아지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고 제물까지 바치는구나.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스라엘아, 보아라. 이 신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낸 우리의 신이 아니냐?' 하고 떠들어대는구나.' 9)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빌다]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 백성이 얼마나 고집 센 백성인지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0) 이 백성이 그토록 제 고집만 부리고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좋다. 나도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나를 붙잡지 말아라. 내가 이 백성에게 엄청난 진노를 쏟아부어 이 땅에서 그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 그러나 내가 너만은 살려두어 너의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리라.' 11)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여호와께 화를 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애원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는 그토록 강한 팔을 휘두르시고 놀라운 힘을 드러내시어 이 백성을 애굽 땅에서 밖으로 끌어내 주셨습니다. 이 백성을 아끼시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 백성에게 그토록 화를 내십니까? 12) 애굽 녀석들 입에서 `여호와가 그 백성을 데리고 나가 산에서 죽이고 땅 위에서 싹쓸어 버렸다.'는 말이 나올까 두렵습니다. 주님, 제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소서. 제발 분노를 그치시고 내리시던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13) 주님, 일찍이 주님을 진실하게 섬겼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기억해 주소서. 주께서는 그 종들에게 주님의 명예를 걸고 `너희 자손이 저 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이나 엄청나게 불어나도록 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너희 자손이 들어갈 수 있도록 `내가 너희 자손에게 영원히 약속한 땅을 그 자손이 차지하고 살게 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14) 모세가 이렇게 애원하자 하나님은 그 백성을 한없이 측은하게 여기시고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셨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우상 숭배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고, 이는 이스라엘의 진멸을 불러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의 진멸을 막기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7-1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세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에서 네 백성으로 표현하시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부패의 모습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우상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들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뻣뻣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도 어렵지만, 쉽게 진리를 왜곡시키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이 먼저 어겼기 때문에 이들은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그에 대한 진노의 표현으로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모세에게 하나의 제안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진멸하신 후에 그들을 대신하여 모세를 큰 민족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제안이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있는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11-14) 하나님이 모세를 통한 새로운 민족을 세우시겠다는 뜻을 보이셨지만, 모세의 관심은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것과는 달리 모세는 이스라엘을 여전히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강조합니다. 모세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예와 관계된 것으로, 만일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시게 될 경우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을 비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것으로, 이 약속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밝힙니다. 모세의 기도는 이스라엘을 위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명예를 근거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하며,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과 중보기도자의 중요성을 알게 합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시겠다는 뜻을 돌이키십니다.
적용: 누구나 크든 작든 중보자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역할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 가운데 내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내일의 은혜나 내일의 양식을 구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현재에 사는 이들이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습니다. 매일마다 그날의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기도도 날마다 필요합니다. 내일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이가 기도를 가장 잘하는 사람입니다.
< 설 교 >
돌판을 깨뜨릴지언정 뜻은 되돌리지 않으신다
출 32장 7-20 / 김영준 목사
돌판을 깨뜨릴지언정 뜻은 되돌리지 않으신다
출32장 7-20
하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내려가라. 내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내 백성이 부패 하였도다.“남의 백성이 부패했다고 하시지 않고, 네 백성이 부패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이시더라도 당신의 백성이 부패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십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결과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될 수 없고, 인형이나 인공지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네 백성이 부패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한 것이고, 의로운 진노입니다. 만일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덤덤하셨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고, 인간의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뜻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말은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남의 집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죠. 관심이 없습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부패하였도다.”이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에요. 그 때도 하나님의 백성이 부패할 수 있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부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느냐? 구약 시대의 백성과 신약 시대의 백성은 다르지 않느냐? 다른 부분이 있죠. 그 시대에는 백성 속에 성령이 없었고, 그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지 않으셨지만 지금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셨고, 믿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이러한 면은 그 때와 지금과의 다른 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든, 신약 시대든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에요.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부패할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러한 존재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고 뛰노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부패한 당신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첫 반응은,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첫 반응이었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께 간청을 합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중보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뭐라고 간청을 하냐면 12절에,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하게 하였다 하시나이까.“그 말의 뜻은 하나님이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는데 도중에 죄를 지었다고 멸해버리면 그걸 보는 이방인들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기만 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마치지 못하더라.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간청을 하고.
그리고 또 모세가 뭐라고 간청을 하냐면,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기를.“하면서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약속을 기억하소서. 여기서 “기억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기억이 짧아서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이것은 언약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으니 비록 백성이 부패하였을지라도 그 언약을 잊지 마시고 이루어주십쇼.“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구약“이라고 부르는 말은 “옛날의 언약”이란 말이에요. 신약이란 말은 “새로운 언약”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그냥 교훈, 교양, 정보가 아니고 언약의 말씀이에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피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그 언약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우리의 모든 믿음은 우리의 감정에 근거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어떤 선하신 하나님이시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에 근거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에 근거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이들을 진멸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세는 뭐라고 간청하냐면, “그냥 용서하시죠. 한 번만 봐주시죠.”라고 한 게 아니에요. 주의 종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소서. 언약. 하나님이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비록 이들이 부패하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연약함보다 우선이요, 더 오래 가고, 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선한 부분에 호소하려는 그런 경향이 많죠. 내가 애써 호소하면, 내가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정적인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나 성경적인 기도는 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약속의 징표로 이런 이런 징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 약속을 의지하여 내가 간구하오니 약속하신대로 응답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언약에 기초한 기도에요. 대한민국 사회는 법 위에 정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정, 감정이에요. 언약 위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만일 정대로 했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 그들을 진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당신의 감정을 언약 위에 둘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기 때문에 화가 나지만, 언짢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그 피가 하나님에게 증거가 되고, 우리가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간에 아주 중요한 원리를 몇 가지 발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중도에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에요.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시작하셨다면 이루십니다. 시작한 것을 도중에 중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도중에 우리가 넘어지든, 자빠지든, 부패하든, 실수할지라도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 내가 이루는 게 아니에요. 내 의로움으로 이루는 게 아닙니다.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이루시리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저가 또한 이루시리라.”부르기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에요. 부르기만 하고 멈추는 게 아니에요. 불렀다면 또한 이루십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의 은사, 부르심,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면 번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취소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중간에 없던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하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도중에 그들이 부패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내 죄를 사하신 것만이 은혜가 아니에요. 나를 본향에 인도해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부패했어요. 하나님이 그를 버려야 될 것 같은데 버리지 않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칼빈이 말한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 또 성도의 견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는 그렇다고 하나님이 언짢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십니까? 진노하셨다. 내가 보니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게 하는 일을 하게 하라. 내버려두라는 말이에요.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원히 그 진노를 품지 않으시고,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진노를 긍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30편 5절에,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노하실 때가 있지만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 회개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회개는 괴로운 일입니다. 회개. 눈물로 회개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 괴로움을 평강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원칙은, 하나님은 중보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누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했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했어요. “중보”라는 말은 누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한다는 말이에요. 중보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냐?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누가 기도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요한 1서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대언자(代言者)”라고 했어요. Advocate. “변호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에요.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가 중보했지만 모세보다도 더 위대한 중보자가 계시니 그 분이 예수님이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간구하는 중보를 들으십니다. 들으십니다. 모세의 중보를 들으셔서 진멸하려고 했던 이스라엘을 살려줬다면 예수님의 중보는 더 효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부패할 때 그것이 가벼운 일이다, 별 거 아니다, 라는 뜻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를 한 후에 하나님이 새기신 십계명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내려와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뛰노는 것을 보고, 이제는 모세가 화가 나서 그 돌판을 아래에 던져가지고 깨뜨려버렸다고 했어요. 모세도 한 성질 있는 사람이에요.
사십일 동안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있었는데 얼마나 은혜를 받았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40일 동안.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로.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걸 보고 화가 나서 그 십계명 돌판을 깨뜨려버렸으니 거룩한 사람이라고 성질이 없는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40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성질이 안 나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화가 나면 돌판을 깨뜨려버렸겠습니까? 이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에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개도 하기 전에 깨뜨려버렸다는 말은 율법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모세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계셨다는 얘기입니다. 백성에게 보여주기도 전에 깨뜨려버렸어요.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에요. 돌판에 새긴 율법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고, 모세도 알고 있었는데 그럼 왜 율법을 주셨느냐?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임시 방편. 임시 방편.
오늘날, 기독교인의 부패, 교회의 모순에 대해서 실망하는 사람들은 모세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모세처럼 실망할 수 있어요. 돌판을 깨뜨리고 싶을 정도로. 사람은 화가 나면 뭐를 깨뜨리는 사람이 있죠. 그래서 화나는 사람 주변에는 깨질 만한 것을 놓아두면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에 대신 뭐라도 깨뜨리려는 마음이 있어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부패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거에요. 모세. 모세가 얼마나 실망하고 화가 났으면 돌판을 깨뜨렸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모세도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 됩니다. 본인이 아무리 화가 나고 실망이 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기로 하셨기 때문에 모세도 자기의 성질대로 하면 안 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거기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한다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긍휼 베풀어주시는 자를 내가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데 내가 성질을 부린다면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가 혼자 오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판을 깨뜨리실지라도 사람을 깨뜨리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당신의 뜻을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돌판을 깨뜨릴지라도. 돌판을 깨뜨렸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안 되리라는 것을 하나님도 아신 것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깨뜨려버렸으니 율법은 임시방편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임시로 “몽학선생(夢學先生)”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의 의로움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나의 믿음을 믿는 것도 아니고, 내 기도를 믿는 것도 아니에요.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들이 서로 대화할 때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기도를 믿는 듯한 느낌을 주죠. “내가 기도할게. 기도해줘.“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기도를 믿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데 내 기도를 믿는 게 아니에요. 내 믿음을 믿는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의 믿음을 믿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기도를 믿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무엇을 믿느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의 중보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에요.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 중보의 위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맺으신 언약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어요. 때로는 돌판이 깨진 것처럼 내 마음이 깨질 때가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 거록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가 찬양을 합시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내려가라. 내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내 백성이 부패 하였도다.“남의 백성이 부패했다고 하시지 않고, 네 백성이 부패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이시더라도 당신의 백성이 부패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십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결과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될 수 없고, 인형이나 인공지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네 백성이 부패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한 것이고, 의로운 진노입니다. 만일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덤덤하셨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고, 인간의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뜻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말은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남의 집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죠. 관심이 없습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부패하였도다.”이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에요. 그 때도 하나님의 백성이 부패할 수 있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부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느냐? 구약 시대의 백성과 신약 시대의 백성은 다르지 않느냐? 다른 부분이 있죠. 그 시대에는 백성 속에 성령이 없었고, 그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지 않으셨지만 지금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셨고, 믿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이러한 면은 그 때와 지금과의 다른 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든, 신약 시대든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에요.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부패할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러한 존재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고 뛰노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부패한 당신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첫 반응은,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첫 반응이었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께 간청을 합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중보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뭐라고 간청을 하냐면 12절에,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하게 하였다 하시나이까.“그 말의 뜻은 하나님이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는데 도중에 죄를 지었다고 멸해버리면 그걸 보는 이방인들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기만 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마치지 못하더라.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간청을 하고.
그리고 또 모세가 뭐라고 간청을 하냐면,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기를.“하면서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약속을 기억하소서. 여기서 “기억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기억이 짧아서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이것은 언약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으니 비록 백성이 부패하였을지라도 그 언약을 잊지 마시고 이루어주십쇼.“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구약“이라고 부르는 말은 “옛날의 언약”이란 말이에요. 신약이란 말은 “새로운 언약”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그냥 교훈, 교양, 정보가 아니고 언약의 말씀이에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피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그 언약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우리의 모든 믿음은 우리의 감정에 근거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어떤 선하신 하나님이시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에 근거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에 근거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이들을 진멸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세는 뭐라고 간청하냐면, “그냥 용서하시죠. 한 번만 봐주시죠.”라고 한 게 아니에요. 주의 종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소서. 언약. 하나님이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비록 이들이 부패하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연약함보다 우선이요, 더 오래 가고, 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선한 부분에 호소하려는 그런 경향이 많죠. 내가 애써 호소하면, 내가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정적인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나 성경적인 기도는 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약속의 징표로 이런 이런 징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 약속을 의지하여 내가 간구하오니 약속하신대로 응답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언약에 기초한 기도에요. 대한민국 사회는 법 위에 정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정, 감정이에요. 언약 위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만일 정대로 했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 그들을 진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당신의 감정을 언약 위에 둘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기 때문에 화가 나지만, 언짢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그 피가 하나님에게 증거가 되고, 우리가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간에 아주 중요한 원리를 몇 가지 발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중도에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에요.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시작하셨다면 이루십니다. 시작한 것을 도중에 중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도중에 우리가 넘어지든, 자빠지든, 부패하든, 실수할지라도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 내가 이루는 게 아니에요. 내 의로움으로 이루는 게 아닙니다.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이루시리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저가 또한 이루시리라.”부르기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에요. 부르기만 하고 멈추는 게 아니에요. 불렀다면 또한 이루십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의 은사, 부르심,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면 번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취소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중간에 없던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하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도중에 그들이 부패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내 죄를 사하신 것만이 은혜가 아니에요. 나를 본향에 인도해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부패했어요. 하나님이 그를 버려야 될 것 같은데 버리지 않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칼빈이 말한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 또 성도의 견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는 그렇다고 하나님이 언짢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십니까? 진노하셨다. 내가 보니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게 하는 일을 하게 하라. 내버려두라는 말이에요.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원히 그 진노를 품지 않으시고,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진노를 긍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30편 5절에,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노하실 때가 있지만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 회개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회개는 괴로운 일입니다. 회개. 눈물로 회개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 괴로움을 평강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원칙은, 하나님은 중보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누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했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했어요. “중보”라는 말은 누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한다는 말이에요. 중보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냐?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누가 기도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요한 1서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대언자(代言者)”라고 했어요. Advocate. “변호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에요.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가 중보했지만 모세보다도 더 위대한 중보자가 계시니 그 분이 예수님이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간구하는 중보를 들으십니다. 들으십니다. 모세의 중보를 들으셔서 진멸하려고 했던 이스라엘을 살려줬다면 예수님의 중보는 더 효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부패할 때 그것이 가벼운 일이다, 별 거 아니다, 라는 뜻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를 한 후에 하나님이 새기신 십계명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내려와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뛰노는 것을 보고, 이제는 모세가 화가 나서 그 돌판을 아래에 던져가지고 깨뜨려버렸다고 했어요. 모세도 한 성질 있는 사람이에요.
사십일 동안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있었는데 얼마나 은혜를 받았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40일 동안.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로.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걸 보고 화가 나서 그 십계명 돌판을 깨뜨려버렸으니 거룩한 사람이라고 성질이 없는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40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성질이 안 나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화가 나면 돌판을 깨뜨려버렸겠습니까? 이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에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개도 하기 전에 깨뜨려버렸다는 말은 율법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모세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계셨다는 얘기입니다. 백성에게 보여주기도 전에 깨뜨려버렸어요.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에요. 돌판에 새긴 율법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고, 모세도 알고 있었는데 그럼 왜 율법을 주셨느냐?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임시 방편. 임시 방편.
오늘날, 기독교인의 부패, 교회의 모순에 대해서 실망하는 사람들은 모세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모세처럼 실망할 수 있어요. 돌판을 깨뜨리고 싶을 정도로. 사람은 화가 나면 뭐를 깨뜨리는 사람이 있죠. 그래서 화나는 사람 주변에는 깨질 만한 것을 놓아두면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에 대신 뭐라도 깨뜨리려는 마음이 있어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부패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거에요. 모세. 모세가 얼마나 실망하고 화가 났으면 돌판을 깨뜨렸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모세도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 됩니다. 본인이 아무리 화가 나고 실망이 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기로 하셨기 때문에 모세도 자기의 성질대로 하면 안 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거기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한다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긍휼 베풀어주시는 자를 내가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데 내가 성질을 부린다면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가 혼자 오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판을 깨뜨리실지라도 사람을 깨뜨리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당신의 뜻을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돌판을 깨뜨릴지라도. 돌판을 깨뜨렸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안 되리라는 것을 하나님도 아신 것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깨뜨려버렸으니 율법은 임시방편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임시로 “몽학선생(夢學先生)”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의 의로움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나의 믿음을 믿는 것도 아니고, 내 기도를 믿는 것도 아니에요.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들이 서로 대화할 때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기도를 믿는 듯한 느낌을 주죠. “내가 기도할게. 기도해줘.“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기도를 믿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데 내 기도를 믿는 게 아니에요. 내 믿음을 믿는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의 믿음을 믿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기도를 믿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무엇을 믿느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의 중보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에요.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 중보의 위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맺으신 언약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어요. 때로는 돌판이 깨진 것처럼 내 마음이 깨질 때가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 거록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가 찬양을 합시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출 32:7-14 / 피영민 목사
서론
로마서 11장 22절에는 하나님의 두 성품에 대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의 두 성품은 ‘인자하심’(Goodness)과 ‘엄위하심’(Severity)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막연하게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무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과 엄위하신 성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출애굽기 32장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있을 때에 산 아래에서는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주변에서 뛰놀고 먹고 마시며 광란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두 가지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처음에 엄위하신 반응을 보이시다가 모세의 중보기도 후에는 인자하신 반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사건은 매우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얼마 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지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때를 하루나 이틀 전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면 이들은 약 6주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출애굽기 20장 4~5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을 포함해서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셨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출애굽기 20장 22~23절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이나 은과 같은 것을 녹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4장 7절에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6주가 지난 지금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주위에서 벌거벗고 춤추며 난잡하게 뛰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뛰노는 소리가 얼마나 컸으면 여호수아가 모세를 향해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난다”고 표현했겠습니까?
더욱 고약한 것은 하나님이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신 아론이 중심이 되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금고리를 모아 녹여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4절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그 송아지를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튿날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축제의 절기라고 공포하고 광란의 축제를 인도하였습니다. 금송아지를 우상이라 하지 않고 여호와라 했으며, 우상숭배를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벌거벗고 뛰놀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잘못된 방법으로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황당한 일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마음이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패한 마음이 우상을 그려내고 타락한 손이 우상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을 다녀보면 전 세계 방방곡곡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널려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상도 가지각색입니다. 온갖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주절주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우상숭배는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로마서 1장 22~23절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금송아지 숭배하는 것을 보고 배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상 앞에서 술을 마시고 벌거벗고 놀고 있던 애굽 사람들의 모습은 마음 속 한편에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애굽 사람들은 멤피스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소 형상을 하고 있는 ‘아피스’라는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배웠던 것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속히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시편 106편 19~21절은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을 세 구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을 쳐 생수를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신속하게 망각해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상이 주었다고 하니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면 진노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경고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 후반에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할아버지도 하고 아버지도 하고 손자도 합니다. 3,4대가 함께 모여 우상숭배를 합니다. 할아버지가 믿는 신을 손자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제사를 많이 지냈습니다. 각종 제기에 음식을 올려놓고 돌아가신 조상을 생각한 후, 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이 다 먹습니다. 절대로 조상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 먹어 치우고선 “조상님 다 드셨느냐?”고 물어봅니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비논리적인 행습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면 삼사 대까지 죄를 갚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4절에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며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어지는 33절에도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너희가 성공하는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우상을 타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이스라엘 대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엄위하신 반응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엄위하신 반응
하나님은 산꼭대기에서 계시를 주시면서도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 후반에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산 아래에서 나눈 백성들의 말을 하나님이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 부패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생각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몰래 숨어서 하는 일도 눈앞에 놓고 보듯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피조물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벌거숭이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다 아시고 엄위하신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10절에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모조리 죽이고 너로 인해 다시 큰 백성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반응입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이처럼 두렵고 무섭고 강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생로병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쇠해지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이처럼 엄중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천사였던 루시퍼 역시 죄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쫓겨나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 때 루시퍼를 따르던 영광스러운 천사들도 귀신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이 지구상에는 1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노아의 가족 8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홍수로 멸망하였습니다.
중세기 스콜라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켄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그는 “사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알게 되면 아무도 죄를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반응이 있다는 사실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일에 담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1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반응은 매우 무섭기 때문에 성도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시는 바른 안목을 가져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인자하신 반응
그러나 하나님은 엄위하신 분만은 아닙니다. 인자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것은 단순히 “친절하시다”는 의미를 넘어서 “택한 백성을 향해 영원무궁한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인자는 중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해 내신 백성들에게 헤세드의 인자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10절에 기록된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는 말씀을 한글로 읽으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새국제역(NIV)에는 “Now leave me alone.”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내버려 두라”시는 것입니다. “모세야, 말리지 마라. 내가 이 백성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리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자살할 테니까 말리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날 좀 말려달라!”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나를 말려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실 때에는 구원의 기회도 더불어 주시겠다는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를 통해 40일 후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주신 것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구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것은 살려주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아무런 경고 없이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신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경고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레위기 10장 1~3절에 보면 다른 불로 분향한 나답과 아비후를 하나님은 아무런 경고 없이 불태워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하는데,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땅을 팔아 그 일부를 드린다고 해도 괜찮을 것을 다 드린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짓의 영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대로 즉사했습니다. 아무런 경고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경고 없이 엄위를 보이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에게 진멸하시겠다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은 지옥에 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옥에 가지 말고 돌이켜 천국에 가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경고문은 죽이려고 붙여놓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기 위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낭떠러지가 있는데, 그 앞에 경고판이 붙어 있으면 가까이 가겠습니까? 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낭떠러지보다도 더 깊은 심연이자 무저갱인 지옥에 가지 말라고 성경에 수도 없이 많은 경고판을 세워두었는데, 사람들이 그리로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막 떨어집니다. 경고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경고의 말씀이 있을 때, 이 말씀을 믿고 지옥을 피하여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중보자 역할을 하는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중보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중보기도한 것은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중보기도 학교를 만들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라기보다는 신사도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도고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보자는 오직 하늘과 땅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간단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세 가지 사실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은혜’(Grace of God)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거래하려는 자세로 나아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은 이만큼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격 없고 부족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도록 간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영광’(Glory of God)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 죽이려고 광야로 이끌고 갔다”고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에 해가 된다고 논리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 of God)에 호소하였습니다. 13절에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약속을 지켜주시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세 가지 간구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모세는 회개의 확실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우상숭배에 대해 모세가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하나님이 주신 두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버렸고 금송아지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린 후, 백성들로 그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우상을 갈아 마셔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출 32:26). 그랬더니 레위 지파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즉, 여호와의 편에 서지 않은 자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 3,000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제야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그 때부터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29절에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상숭배하면 망합니다.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여나 우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다 갖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쓸모도 없을뿐더러 재수도 없는 물건들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라틴어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인데, ‘성도의 삶’은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 앞에 살다 보면 두 가지 감정을 갖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시기에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모든 악한 생각과 행위, 죄악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도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일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성도도 때로는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모세가 중보기도를 했지만, 지금은 모세보다 훨씬 위대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이 사람이 나를 믿는 사람이고, 죄를 지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중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의 다른 중보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가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려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은 사람은 불쌍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편에 설 것이냐?”
미국 남북전쟁 중 한 군인이 링컨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편입니까? 마귀의 편입니까? 하나님의 편에 굳게 서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출 32:7-14 / 이윤재 목사
지난 한 주 가을 새벽부흥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많은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은혜를 받고 삽니다. 사랑과 기도입니다. 사랑을 통해 행복의 은혜를 받습니다. 기도를 통해 거룩의 은혜를 받습니다. 사람에게도 두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사랑과 기도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은 기도요 가장 좋은 기도는 사랑입니다.
무더운 여름, 어느 가정에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을 위해 부지런히 음식을 만든 엄마가 유치원에 다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예쁜 딸 오늘 손님을 위해 기도해 주겠니?” 딸이 말했습니다. “나 어떻게 기도하는지 몰라”. 엄마가 말했습니다. “괜찮아. 엄마가 하는 대로 하면 돼”. 딸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이 무더운 날씨에 눈치도 없이 손님이 와서 음식을 만들게 합니까? 오 마이 갓,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 주옵소서”. 기도는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또한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중에 대표기도를 길게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장로님이 얼마나 기도를 길게 하시는지 한번 시작하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다 훓습니다. 어떤 때 인물시리즈로 나가면 에덴동산의 아담에서부터 밧모섬의 사도 요한까지 나갑니다. 한번은 기도하고 눈을 떳더니 교인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뒤돌아보니 목사님만 혼자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교인들이 다 어디 있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갔어요?” “언제요?“ ”아브라함때 나갔어요”.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진심으로 기도해야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만 남을 위해 기도하면 복이 따라옵니다. 우선 그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가 변하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기심을 극복하는 기도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면 결국 그 복이 나에게로 옵니다.
기독교 신문에 여수성광교회 박성자 집사님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14년 전 3월 여수에서 시아버지 생신 때문에 서울에 오다가 서대전역에서 잠시 쉬는 사이, 국수판매대에서 국수를 사먹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타고 왔던 열차가 서서히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5개월 짜리 아기를 안고 달리는 열차를 타다가 발을 헛디디어 열차 바퀴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열차 바퀴에 깔려 죽겠구나” 했는 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는 온데 간데 없고 자기만 바퀴에 옷을 걸려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 살려 주세요”하고 소리쳤는 데 한참있다가 기차가 멈췄답니다. 사람들이 소리쳐서 운전수가 멈춘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얼굴에 약간의 상처만 나고 아기는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는 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친정 어머니가 그 순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서울에 사는 친정 어머니는 아침부터 웬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 서울 근교에 있는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날따라 기도 안하면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기도하고 저녁에 돌아왔는 데 딸이 열차사고를 만나서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달려갔는 데 다행히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기적의 배후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왜 그날 어머니는 기도의 감동을 받았을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어느날 기도의 감동을 받으면 그날은 누군가가 사는 날입니다. 우리가 여기 살아 있는 것도 누군가가 그때 그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의 위력을 믿습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나이 80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백명 천명도 아니고 200만이 넘는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를 전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제가 지난 여름 이스라엘 가서 이 광야를 찝차를 타고 가 보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흔들리는 찝차를 타고 광야를 달렸는 데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해하려고 모험을 시작했지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사방이 뜨거운 사막인 데 어디 내려 달라고도 못했습니다. 그냥 참고 가는 것이 나았습니다. 차를 타고 가도 힘든 데 맨 발로 걸어 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다 정말 힘든 일이 생겨 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는 데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 예배한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도 약간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한번만 올라간 것이 아니고 8번이나 올라갔고 마지막에는 40일이나 거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에 지친 백성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만든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는 데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 섬기는 소리다. 부패한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목소리에는 이미 슬픔과 탄식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출32: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미 진노하셨습니다.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신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웬만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나님의 산, 시내산 앞에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나마 아론을 비롯한 지도자들도 다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정말 화나고 슬픈 날이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꼼짝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야 했습니다. 분노의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때 다급하게 기도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출32:11-12,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아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아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아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죄까지 사랑하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사랑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드러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다 품는 사랑입니다. 온유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엄한 사랑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사랑입니다. 진리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한없는 미움을 베푸십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사랑을 은혜라고 하고 죄를 미워하시는 사랑을 진노라고 합니다. 은혜만 사랑이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는 진노도 사랑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합니다. 두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롬1장의 사랑과 롬3장의 사랑입니다. 1장에서는 먼저 죄에 대한 진노를 말합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불의는 사람앞에서 잘못된 행동입니다. 불경건이 먼저고 불의가 다음입니다. 불경건이 뿌리고 불의는 그 열매입니다. 세상은 밖으로 나타난 불의를 죄라고 말합니다. 살인, 간음, 절도, 사기, 다 불의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뿌리가 불경건입니다. 하나님께 잘못 되었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합니다.
그 진노를 막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당해야 할 진노를 스스로 당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속죄”, “화목제물”이라고 말합니다. 롬3: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나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롬3: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이 공식을 아시겠습니까? “인간이 죄를 지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자신이 대신 죽어 우리 진노를 막은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 그래서 롬1장의 하나님의 진노가 롬3장의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은혜사이에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중보의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중보자로 살았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처럼 중보자가 살겠다”. 중보기도란 영어로 ”intercess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inter, ”중간에 들어가“, cession,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중간에 내가 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원형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 하셨습니다. 눅22: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은 중보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셨습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른편 강도를 위해 중보기도했습니다. 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승천하신 후 하늘 보좌에 앉아 하시는 일도 중보기도입니다. 히7:25입니다.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롬8:34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중보기도가 위대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가 아름다운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기도를 우리가 하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가 능력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응답받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금 둘 사이에 섰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입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하실 하나님과 그 무서운 진노앞에 선 백성들 가운데 모세가 섰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면 어떻게 중보기도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 12절, 13절에서 모세는 두 가지로 기도합니다. 먼저 12절을 보십시오. 출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아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모세가 하나님께 그 백성을 위해 빌었던 첫 번째는 이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야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이방인들이 “봐라, 너희 하나님은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긍휼이 많은 분 아닙니까?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죄인입니다. 하나님앞에 염치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바랄 것은 다만 긍휼과 자비입니다. 유명한 나폴레온 황제의 병사중에 탈영한 병사가 생겼습니다. 그나마 두 번이나 탈영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온은 그를 살려 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알고 달려와 울면서 애원합니다. “황제여, 내 아들을 살려 주옵소서”. 나폴레온이 말했습니다. “두번이나 탈영한 병사를 살려주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요. 살려줄 수 없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황제여, 저는 왕에게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비를 구합니다”. 나폴레온이 또 말했습니다. “의는 그만두고 자격도 없소. 어떻게 두 번이나 탈영한 병사를 살려주란 말이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내 아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기 때문에 긍휼을 구하지 않습니까? 한번만 불쌍히 여겨 주소서”. 어머니의 간절한 탄원으로 아들이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긍휼입니다. 제가 이번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독일의 비텐베르크를 갔습니다. 거기 루터가 95개조항을 써붙인 교회가 있고 그 옆에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그 박물관에 루터의 많은 유품들과 말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루터가 했던 마지막 말을 읽고 가슴이 서늘했습니다. 루터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We are beggar, it is true"(우리는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 루터는 왜 죽어가면서 자신을 거지라고 말했을까? 그는 평생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는 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루터처럼 하나님앞에서 거지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의 연약한 몸과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직도 어린 내 아들과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늙고 병든 우리 부모님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직도 하나님 모르는 내 친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25년간 드렸던 기도가 이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는 드디어 응답되었고 어거스틴은 25년 후에 돌아와 2천년 기독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간질에 걸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아버지의 기도가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흉악한 귀신들인 딸을 데려온 어머니가 했던 기도도 같았습니다. “주여,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또 하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출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르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이미 약속했지 않습니까?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고, 가나안 온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는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부족하오니 저를 보고 응답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응답하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도 변개함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여 아침마다 새롭지 않습니까? 약속대로 응답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기도할 때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앞에 거지입니다. 우리 보고 응답하시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보다 우리의 열심보다 우리의 정성보다 앞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야곱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창32: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아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사실 야곱이 하나님앞에 내놓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평생 속이고 거짓말하고 욕심부리던 야곱 아닙니까? 그래서 야곱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보면 기도할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그래도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대로 이루어주옵소서”.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시119: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뜻을 돌이키겠다
그렇게 모세가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4절을 크게 읽겠습니다. 출32:14, “여호아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다같이 “뜻을 돌이키사”. 어떤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까? 10절로 돌아갑니다. “내가 진노하여 진멸하리라”. 그 뜻을 돌이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하나님은 기도에 약한 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뜻을 돌이킨 기록이 성경에 10번 이상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떻습니까? 한 나라를 책임짓는 대통령이 어렵게 어떤 정책을 만들었는 데 한 남자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고 그 정책을 바꾸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대통령의 권위는 어떻게 되고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꾸십니다. 자신이 가지신 계획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기도를 듣고 니느웨를 멸망시키겠다는 뜻을 바꾸셨습니다. 요엘시대 백성들이 기도하고 회개하자 민족을 멸망시키겠다는 뜻을 바꾸셨습니다. 진노하고 심판하려는 생각을 기도 때문에 바꾸셨다면 우리를 축복하고 잘되게 하겠다는 생각은 기도 때문에 얼마나 잘 이루시겠습니까? 나쁜 뜻은 돌이키시고 좋은 뜻은 빠르게 이루게 하는 힘, 그 응답의 비밀이 중보기도의 비밀입니다.
저는 중보기도의 혜택을 참 많이 본 사람입니다. 자라면서 청소년기에 방황했습니다. 교회를 못 나올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그 뒤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제가 돌아올 뿐 아니라 하나님께 목회자로 쓰임받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제가 하나님께 돌아오자 곧 바로 신학교로 갔습니다. 저는 한번도 신학을 하려고 계획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계획대로 되지 않고 어머니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약한 어머니가 강팍한 아들을 기도로 이긴 것입니다. 혹시 자녀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돌아옵니다. 어디 가겠습니까?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부모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돌아올 뿐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사업축복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대 열심히 사업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크리스쳔은 열심히 사업할 뿐 아니라 기도하면서 사업해야 합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에 불황을 이기고 사업에 승리한 분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남편이 사업이 어려울 때 부인이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옵소서”. 그리고 매주 최선의 감사예물을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아들 등록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헌금을 계속했습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부르짖었습니다. 3년만에 천억짜리 사업을 따 냈습니다. 지금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도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부흥되어야 합니다. 많은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영적 지체인 성도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의 한 교회가 갑자기 부흥했습니다. 몇 백명 교회가 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알아보았습니다. 비밀이 있었습니다. 15년전 로라라는 집사 부부가 교회 나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도시에 술집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도시를 살려주옵소서. 이 도시를 악에서 건져주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 교회를 강하게 하옵소서. 우리 목사님을 도와 주옵소서”. 로라부부의 기도가 15년 계속되자 어느날 교회가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영혼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2-3년전 우리 교회 어느 분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판교입주를 맞아 판교의 영혼을 주옵소서“. 매일 기도하다가 한번은 전도를 나가 한 분이 어렵게 전도했습니다. 이 분은 처음 믿는 초신자였는 데 이 분을 위해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분의 믿음이 커지면서 에 남편과 시동생이 함께 교회를 나왔습니다. 이웃에 사는 옆 집 사람도 전도했습니다. 기도 시작하기 전에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 생긴 기적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학생이 아버지 구원을 위해 어느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우리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소식이 없었습니다. 가끔은 실망하고 지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번 가을새벽부흥회에 그 아버지가 교회 나왔습니다. 그나마 자신의 생일날 나왔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중보기도는 능력입니다. 누구나 어떤 사람을 위해 진실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듣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듣고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신 하나님, 어머니의 기도를 듣고 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예수님, 오늘도 그 은혜와 능력은 우리에게 임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서 여러분이 살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그를 살립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모세의 민족을 위한 기도
출 32:7-14 / 이정익 모갓
3∙1절이 1919년에 일어났으니까 벌써 90주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3∙1절 세대는 거의 사망하고 3∙1절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선조들이 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른들에 비해서 행복한 세대들입니다. 현재 8-90세가 된 세대들은 참 기구한 시대를 살아오신 세대들입니다. 우선 그분들은 일제의 압제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냥 압제가 아니고 주권도 말도 나라도 이름도 뺏기고 살았으니 그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식민지 역사에서도 그런 압제의 사례가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런 고민이 많은 삶을 살으셨습니다. 그렇게 인내하며 살아오시다가 해방이 되어 자유를 누리는가 싶었는데 다시 6∙25의 난리를 겪었습니다. 6∙25의 전쟁도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승자도 패자도 다 손해 보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찾아온 것은 극심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때의 가난이 제 어린 시대까지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때 이후 얼마나 배고픈 기간을 보내야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부모님세대들은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평화도 안정도 주어지고 이제는 먹고 살만큼 되니까 돌아가셨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참 행복한 세대입니다. 너무 행복해서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오늘 젊은 세대들은 이 나라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오늘 현재 살아가면서 부족한 것만 생각하고 불평을 합니다.
얼마 전에 한국 청소년 정책연구원이 발표한 한∙중∙일 3국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비교 연구한 통계를 보니까 우리 청소년은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3국 청소년 2천명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느나라에 태어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한 우리나라 청소년은 59.9%, 중국 49,4%, 일본 38,8%로 우리나라가 단연 우세였습니다. “국가에 대한 만족도”는 한 66.9%, 중 88.9%, 일 87.6%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은 한 70.1%, 중 95,7%, 일 76,0%였습니다. 이 통계는 현재 우리 청소년들의 국가관이 너무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가 희박하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국민은 국가관이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알고 보면 참 좋은 나라입니다.
700여회 외침 받은 나라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크고 작은 외침을 700여회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나라는 오늘까지 건재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민족은 참 불가사의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어느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침략한 일이 없는 민족입니다. 오히려 얻어맞기만 한 민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이 우리민족의 약점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우리민족의 강점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오래된 민족은 모두 지배를 받은 민족이고 침략을 받은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지난 주간에 하노이를 잠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천 년간 지배를 받았고 프랑스로부터 100년간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잠간 지배를 받았고 미국과 19년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늘까지 건재하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와도 비슷합니다. 지배하고 칼을 사용하고 독재하였던 나라들이나 권세자들은 모두 도중에 부러졌거나 칼로 망하였거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칭기즈 칸, 나폴레옹, 히틀러, 이등박문, 무소리니, 로마, 바벨론 등 모두 영원할 것 같았지만 오늘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얻어맞은 우리민족은 오늘까지 건재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강자는 소멸하고 약자는 영원한 것이 하나님이 뜻이고 섭리입니다. 넓은 평원을 보십시오. 그곳은 맹수들 천하입니다. 초식동물들을 마구 잡아먹습니다. 초식동물들은 맹수들로부터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먹을 때에도 눈치를 보며 맘 졸이며 먹습니다. 그러다 한눈팔면 속수무책으로 잡아먹힙니다. 얼마 가지 못해 초식동물들은 다 잡아 먹힐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초원의 주인은 초식동물들입니다. 잡아 먹혀도 여전히 늘어나는 것은 초식동물들입니다. 그런데 맹수들은 자꾸만 도태되고 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우주의 질서입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우물을 팝니다. 이웃 부족들이 와서 우물을 뺏으면 말없이 줍니다. 아주 바보같이 그냥 주고 떠납니다. 이사 가서 우물을 또 팝니다. 파면 또 물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삭은 그런 이치를 아니까 싸우지 않고 달라면 그냥 주고 떠나 또 우물을 팠습니다. 우리들이 겉으로 보면 이삭이 우매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이삭이 강자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 망했어도 이삭은 영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바보같이 살아야 합니다. 약고 강하게 살면 안 됩니다. 강하면 부러집니다. 강자는 당장은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 같지만 곧 사라집니다. 곧 부러집니다. 반드시 꺾입니다. 이와 혀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이와 혀가 싸우면 상대가 되지 않지만 좀 멀리 보면 어느 이빨도 혀를 이기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틀니를 해 박은 사람은 있어도 지금까지 틀 혀를 해 박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민족은 그렇게 유약했지만 속으로는 아주 강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신 나라
그럼에도 우리민족은 오늘까지 유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재수도 아닙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일본이 강압으로 우리민족과 이 땅을 정복해서 합병하려고 이름도 말도 성도 다 뺏었습니다. 아주 화학적으로 하나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때 함석헌이 “일본이 힘이 있어 우리의 주권을 뺏고 이름도 뺏고 나라도 뺏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뺏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힘이 있어 우리를 오랫동안 지배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해방이 도적같이 왔다, 그래서 오늘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6∙25 승리나 8∙15해방은 우리들이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때 우리민족이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애굽에서 압제받던 이스라엘 민족의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출애굽을 시키셨듯이 우리민족의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해방도 6∙25의 승리도 주셨습니다. 6∙25가 발발하고 종전되는 과정에 있었던 국제적인 숨은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역사하셨는지를 보고 모두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남궁억은 당시 독립운동을 일본이 너무 강하니까 힘으로 못하고 글을 통해서 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하고 독려했습니다. 여기 “일하러 가자”는 말은 “독립 운동하러 가자”는 말입니다. 당시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어느 장로는 조선의 여인들은 수를 놓을 때 “무궁화”를 수놓으라고 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방금 떠오르던 태양이 지금 교회 종탑위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시를 썼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희망과 소망과 기댈 곳은 오직 교회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있었는데 일본으로부터 사임압박을 받다가 어느 날 사표를 던지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로 가서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뻣뻣이 서서 세수를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광수가 무슨 세수를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나는 조선이 독립하는 날까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세수를 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와 우리민족이 약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강합니다. 이런 강한 정신과 의지와 호소 때문에 하나님이 이 민족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오늘 사람들이 좀 불만족하고 부족하다고 다시 태어나면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철없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고마운 이 나라를 위해서 우리들이 무엇을 할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수고자 헌신자가 많은 나라
종교철학자 르낭은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으로 구성된 거대한 조직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지난날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평화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국립묘지에 가 보십시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나라에 평화가 주어진 것입니다. 미국의 워싱턴에 가시거든 웰링턴 국립묘지를 꼭 한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묘지 정문으로 들어가서 오른 편 섹션으로 가보면 그곳에 3,193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전사자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데 이 나라에 와서 죽어갔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합니까. 유관순이 14세살 때 이화학당 고등과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15살이던 1919년에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다녔습니다. 천안 ,연기, 진천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독려하다가 체포되어 재판받는 도중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본인 검사에게 의자를 집어 던져서 괘씸죄까지 보태져서 7년형을 받았고 마침내 옥사해서 죽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던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고 강경초등학교 여교사였고 강경성결교회 여집사였던 김복희였습니다. 이 교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펼치다가 아이들은 모두 퇴학당하고 김복희교사는 면직 당했습니다. 한 나라나 국가는 이런 희생으로 만들어지고 지탱되고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요즘 일본에서 잘 팔리는 책이 “한국은 망해가고 있다”라는 책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지금 망해가고 있는 징조를 몇 가지 제시를 했는데 그중 하나는 과소비입니다. 미국 LA에 가면 베버리 힐스라는 고급동네 앞에 로데오 거리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비싼 옷과 보석류를 팔고 있는데 그곳의 단골은 한국인들이라고 합니다. 그곳으로 원정가서 물건을 사더니 이제는 서울에 로데오 거리를 똑같이 만들어 놓고 고급물건을 파는데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꼬집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저축은 안하고 차부터 구입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또 기업인들은 노사분규로 기업 문을 닫고 은행에 돈을 넣어놓고 편히 살려고 한다고 했고 한국은 고임금의 나라라서 기업들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국제경갱력을 상실해서 이제 곧 한국은 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와 같은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1900년대 초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으로 날을 지새웠습니다. 나라를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이 나라를 집어 먹은 것입니다. 6∙25 전쟁도 해방 후 이 나라가 안주하면서 공산주의의 조짐을 알고도 대비를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절단 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미리 연구하지 않으면 국가도 기업도 교회도 개인도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방력은 무기나 병력수가 아니다
나라를 지키고 평화를 지키는 일은 국방력이나 병력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67년 6월 5일 중동전이 발발했습니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가 연합군을 형성해서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인구 2억 명이 인구 500만인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곧 망할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개전 2시간 만에 연합군의 주력부대가 마비되었고 48시간 만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를 정복하고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6일 만에 끝내고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에 비해서 두 배나 늘렸습니다. 이런 결과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때 종군기자가 전투에 참여한 이스라엘 여군에게 “전쟁하기에 무섭지 않느냐”고 묻자 “죽는 것 보다는 낫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은 벙커에서 전쟁을 진두지휘한 것 이 아니고 방송국에 앉아 전투에 참전한 병사들을 향하여 시편 27편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일어나 나를 치려하여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라”는 말씀을 낭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그 나라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전쟁은 무기나 병사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 책임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사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중보 기도하는 일 즉 나라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기도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가장 빛나는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 산에 올라가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하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이 백성들에게 신물이 났다, 이제 내가 이 백성을 멸하리라, 그리고 네 자손으로 다시 나라를 세우리라(10).” 이 말씀은 모세 개인에게는 영광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 백성은 부패하고 타락하고 심판받아 마땅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것은 자신에게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눈물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죽이려 하십니까, 이 백성이 언제는 의롭고 선했습니까, 여기서 이 백성을 죽이시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며 애굽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이 백성을 용서치 않으시고 여기서 죽이신다면 나도 이 백성들과 함께 죽겠습니다(11-13).”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나만 잘 살고 잘 먹겠다고 골몰하는 것은 직무유기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를 살면서 나라를 걱정해야 합니다. 내 나라가 건강해야 내 삶과 내 가정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5-60년이 지나면 다 소멸하고 사라질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영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우리 자손들과 우리민족이 영원히 살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700여회의 외침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일제로부터 하마터면 합병될 번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6∙25때 하마터면 이 나라가 공산화 될 번하였는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민족은 경제성장을 이룬 매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민족에게 이제 할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들입니다. 세계를 돌아다녀 보면 우리민족이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잘 사는 것만 목적은 아닙니다. 그 보다 더 큰 사명이 우리 민족에게 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어야 한다. 모세와 같은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나라와 내 민족 살려주소서.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복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