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단상(土曜斷想)] 이육사 / 청포도
해마다 7월이 오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집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李陸史). <청포도>
이육사가 이 시를 지은 것은 1930년대, 그의 나이 30대 초반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 고장'이라 일컫는 곳이 그가 태어나 16세까지 자랐던 고향인 경북 '안동'인지, 아니면
형무소에서 나와 친척 형 집에 잠시 머물렀던 '포항'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시에 나오는
'하늘빛 푸른 바다'와 '흰 돛단배'로 미루어 경북 포항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됩니다.
안동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른 시들에 비해 시 <청포도>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이 시가 지닌 독특한 시
각적 효과 때문이기도 합니다.마을에 전해오는 오랜 전설처럼, 푸른 포도가 주저리 주저리
열린 바닷가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하늘과 맞닿은 먼 곳에 수평선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수평선을 넘어 흰 돛단배 하나가 바람을 안고 곱게 밀려 옵니다.
그 배에는 시인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왔던 손님이 타고 있을 것이고, 청포를 입고 고달
픈 몸을 이끌며 그가 찾아오면 시인은 그와 함께 식탁의 은쟁반에 놓인 청포도를 두 손이
함뿍 젖도록 따먹을 꿈을 꿉니다. 이 시가 지닌 시각적인 효과를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는 것은 '푸른색'과 '흰 색'의 조화입니다.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청포(靑袍)''가 나타내는 푸른 색과, '흰 돛단배', '은쟁반', '하이
얀 모시 수건'이 상징하는 흰 색의 대비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시를 읽는 이들에
게 한폭의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다운 '순수(純粹)'를 안겨 줍니다.
이 시로서 이육사 시인을 오직 순수한 서정(抒情)을 추구하는 낭만파 시인으로만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열렬한 행동파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의열단(義烈團)'의 열혈 단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가장 적극적이고 치열하
게 맞섰던 독립운동 단체의 행동대원이었지요.
이육사가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17번이나 감옥을 출입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
습니다.'이육사'라는 이름이, 1927년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
역할 때,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요.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생활은 아무런 외부의 지원없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습니
다.
"형제가 서로 의지하여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나, 보잘 것 없어서 아침에는 끼니거
리가 없고, 저녁에는 잠잘 곳이 마땅치 않으니 한탄스럽기 짝이 없을 뿐입니다."
대구에서 동생과 살며 신문기자로 일할 때 친구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베이징에 건너갔던 이육사는 그 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지요.
피체(被逮) 후 중국 베이징 형무소로 이감되어 대나무로 살점을 도려내는 등의 참혹한 고
문을 받다, 결국 1944년 1월 16일 39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순국(殉國)하고 맙니다.
죽는 날까지 이육사가 꿈꾸었던 것은 오직 하나, 조국의 독립이었고, 이에 대한 열정은 그
의 시들에 '기다림'의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시 <청포도>의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올 손님'이라든지, <광야(曠野)>의 '백마
타고 올 초인(超人)'은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애타게 기다려 온 독립된 조국을 상징하
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에 덧붙여, 다른 시 <꽃>에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기다림이
절절한 비원(悲願)으로 잘 나타나 있지요.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망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이토록 애달프게 기다리던 조국의 독립을 못 본채 먼 이역 땅에서 외롭게 숨져간 이육사
의 유해는 1960년 그의 고향 안동에 이장되어 비로소 독립된 조국에서의 안식을 얻게 됩
니다.많은 이들은 이육사를 낭만적인 시인으로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작인
<청포도>가 지닌 아름다운 서정성 때문에 말이지요.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역할은 그의
전 생애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7월을 맞으며, 일제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육사에 대해 많은 분들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생애를
짧게나마 되짚어 보았습니다.
<윤여선>
첫댓글 망국의 독립을 위하여, 열혈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바친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