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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이라 좀 그래서 스크랩은 허용 안 했었는데 해달라는 분들이 계셔서 풀게요
제가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 책만 집에 한가득이라규
레방 오늘 게시물을 보다가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서 처음으로 올립니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이라는 책에 실린 내용이에요.
책은 종이로 된 건 잡고 읽어야 제맛인데 이 책은 전자책으로 읽었거든요.
전 심심할 때 글자 쓰는 걸 좋아해서 낙서도 잘하고 노래 가사 적고
이렇게 책 내용도 적고 그러거든요. 마침 적어 놓은 것이 있어서 올립니다.
책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에 100%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고
간혹 좀 이상한 문장이 보이기도 하고 그랬지만
그냥 흥미를 갖고 읽어 보시라는 의미에서 올려요.
질투심에 두 눈이 멀다
노비 도리 살인사건
성종 5년 10월 흥인문興仁門 밖 야산에서 젊은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너무나 참혹하여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성부 동부東部에서 탐문 수사를 벌여, 살해된 여인이 북부에 사는 참봉 신자치愼自治의 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건의 진상은 신자치의 아내 이씨가 남편과 간통한 계집종 도리道理를 시샘하여 어미 이씨와 함께 그녀의 머리를 깎고 때리고 할퀴고, 또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문을 지져 사망하자 흥인문 밖 산골짜기에 버린 것이다.
신자치의 여종 도리의 참혹한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인근에 사는 나무꾼들이었다. 나무꾼들이 한달음에 야산에서 달려 내려와 한성부 동부의 관령에게 신고를 하자 동부는 한성부의 지휘 아래 검험을 하게 되었다.
“《무원록》에 의거하여 철저하게 검험하라.”
한성부 관리가 영을 내렸다. 동부 관령은 《무원록》을 펴놓고 여인의 시체를 철저하게 검시했다. 여자의 시체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며칠 동안 야산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10월이라 날씨가 쌀쌀한 편이어서인지 시체는 부패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검험을 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오작사령들이 멍석을 깔고 그 뒤에 시체를 옮겨놓자 의생들이 시체의 옷을 벗긴 뒤에 육안으로 살피고 서리들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가슴에 버드나무 잎사귀 모양의 상처…… 길이는 1촌, 폭은 4푼……. 찔린 상처입니다.”
의생이 관령에게 보고했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칼에 찔리면 상처가 버드나무 잎사귀 모양으로 벌어져 유엽상柳葉傷이라고 한다. 목숨이 끊어진 후에 찔리면 상처가 벌어지지 않는다.
“거기 붉고 푸른 점은 무엇인가?”
관령이 여인의 젖무덤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불로 지진 상처로 인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난 것인가?”
“예. 살아 있을 때 불로 지지면 살이 타들어가면서 주위의 살이 오그라듭니다.”
관령은 시체의 참혹한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인은 온몸이 흉기에 찔리고 불에 지져 숨이 끊어졌는데 음문까지 지져, 검험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한성부 동부는 목격자 탐문 수사를 벌여 젊은 여인의 시체가 북부에 사는 참봉 신자치의 여종 도리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살인사건의 전모를 파악했다.
도리는 신자치의 집에서 거느리는 여종의 몸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노비들은 종모법에 따라 어미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도 결정된다. 어미가 신자치의 여종이었기 때문에 도리도 태어나자마자 신자치의 여종이 되었다. 도리는 자라면서 점점 용모가 아름다워지고 여자로서의 태態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리는 신자치에게 겁탈을 당했다. 여종으로 주인의 소유물이니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밤마다 달려드는 신자치의 노리개 노릇을 하던 도리는 어느 날 신자치의 아내 숙비淑非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네년이 감히 나리에게 꼬리를 쳤으니 살려둘 수가 없다.”
숙비는 겁탈 당하여 성의 노리개로 전락한 도리에게 죄를 덮어씌워 잔인하게 사형私刑을 가하다가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성부에서 형조로 보고되지 않았다. 참봉 신자치가 뇌물을 썼는지 사건이 흐지부지되는 듯했다. 게다가 주인이 종을 죽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아도 흔히 있는 사건 중 하나였다. 신자치의 집 종들은 도리가 주인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종이 주인을 고발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고발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을 은폐하려고 해도 소문이 널리 퍼지는 바람에 사헌부 감찰이 알게 되어 성종에게 보고했다.
“북부의 참봉 신자치의 아내 이씨가 그 어미와 더불어 신자치와 간통한 계집종 도리를 묶어놓고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계집종의 머리를 깎고 때리고 할퀴었는가 하면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문을 지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어찌 인간으로서 이토록 잔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자치의 아내와 장모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여종의 몸을 뼈만 남게 만들어 흥인문 밖 산골짜기에 버렸으니,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청컨대 이씨 모녀를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소서.”
사헌부의 보고에 성종이 몸을 떨었다.
“참으로 무서운 자들이다. 인간이 어찌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른다는 말인가. 그들을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라.”
성종의 추상같은 영에 의금부가 신자치와 부인 숙비, 장모 막생莫生을 잡아다가 국문했다. 숙비와 막생은 의금부의 조사를 받자 범죄 행각을 낱낱이 자백했다.
“죽은 도리는 저희 집 계집종인데 남편이 범간하고 첩으로 들여서 제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숙비가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진술했다.
“도리를 어떻게 죽였는지 자세히 고하라.”
의금부 도사가 숙비를 엄중하게 추궁했다. 의금부에서 신문을 할 때는 문사낭청問事郎廳이 일일이 기록을 하기 때문에 상세하게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사낭청은 조선시대 때, 죄인의 취조서를 작성하고 읽어주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이다. 국청鞠廳, 정국庭鞠, 성국省鞠, 추국推鞠이 벌어질 때 필요한 기관에서 차출되어 위관, 의금부 당상, 형방승지의 지휘를 받아 도사와 함께 임무를 처리했다.
“소인이 어미와 함께 도리를 발가벗겨 묶어놓고 얼굴, 가슴을 꼬집고 때린 뒤에 쇠를 달구어 지졌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흉악한 짓을 하였느냐?”
“남편의 사랑을 받는 도리가 미웠습니다. 소인이 두 눈이 멀고 두 귀가 먹어 그런 짓을 하였습니다.”
숙비는 더 이상 깊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의금부는 막생과 신자치까지 철저하기 신문한 뒤에 성종에게 보고했다.
“신자치의 아내 숙비가 질투로 인하여 계집종 도리를 죽이고자 얼굴과 가슴, 음문 등을 담금질한 죄는, ‘가장家長이 관사에 고하지 아니하고 노비를 구타해 죽이면 장 1백 대에 처하고, 죄가 없는데 죽인 자는 장 50대에 도 1년에 처하며, 당방인구當房人口를 모두 놓아서 종량從良하게 한다’는 율에 해당합니다. 숙비는 수범首犯이므로 장 60대에 도 1년인데, 여자이므로 장 1백 대를 1)단의결벌單衣決罰하고, 나머지 죄는 2)속贖하게 하며, 막생은 수종隨從이므로 한 등을 감하여 결장決杖 1백 대에 처하고, 도리와 당방인구는 다 놓아서 종량하게 하며, 신자치가 가장으로서 금제禁制하지 못한 죄는 ‘불응위사리중자不應爲事理重者’에 해당하므로 장 80대에 처하고, 고신 3등을 빼앗게 하소서.”
“신자치의 아내는 사족士族의 딸이므로 결장할 수 없소. 전례를 알지 못하니 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겠소?”
성종이 난처하여 대신들에게 물었다. 양반의 부인에게는 곤장을 때려서 죄를 자백받을 수 없었다. 지사知事노사신盧思愼이 대답했다.
“전례는 상고할 수 없습니다. 다만 듣건대 이맹균李孟畇의 아내가 질투로 계집종을 죽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세종께서 이맹균만 부처시키고 그 아내는 죄를 주지 아니하였으며, 대사성大司成 권채의 아내도 질투로 계집종을 죽였는데 권채를 부처시켰습니다.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이는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므로 부처는 과중합니다’하니, 세종께서 곧 소환시켰다고 하는데 신자치의 아내가 어미와 함께 행한 일은 잔인하나 이 또한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므로 결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율에는 ‘죄가 없는 노비를 마음대로 죽인 자는 장 60대에 도 1년에 처한다’는 조목만 있고, 지금 이 범죄는 율에 정조正條가 없기 때문에 신 등이 이 율에 견주어 대조한 것인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미 정률正律이 아니므로 이 율을 써서 속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옳도다.”
노사신의 말에 성종이 무릎을 치고 원로 대신들에게 명하여 의논해서 아뢰게 했다.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윤자운이 의논했다.
“신자치의 아내 숙비는 질투와 사나움이 참혹하여 풍속과 교화에 관계가 있으니 징계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부인은 곤장을 때릴 수 없으므로 다만 외방에 부처하게 하고, 신자치는 공신의 아들이므로 고신만 거두고 역시 외방에 부처하게 하소서. 아내가 이미 지아비를 지아비로 여기지 아니하였고, 질투는 칠거지악의 하나이므로 마땅히 서로 멀리 떨어뜨려 풍속을 바로잡게 할 것이며 그 어미 막생은 딸을 도와 잔인함과 사나움을 부렸으니, 역시 외방에 부처하게 하소서.”
정인지는 정창손 등의 생각과 같았으나 신자치에게는 가벼운 형벌을 내릴 것을 청했다.
“신자치는 마친 그때 다른 곳에 있어 자세한 실정을 알지 못하였는데, 조율照律이 보통보다 지나친 듯합니다. 청컨대 벼슬만 파하소서.”
성종은 정창손 등의 의견에 따라 신자치를 경상도 안음에, 막생과 숙비를 산음에 부처시켰다.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정괄鄭佸 등이 차자를 올렸다.
“신자치는 아내 숙비와 떨어져 있게 하고, 어미 막생과 아울러 외방에 부처하게 한 것은 악랄함을 징계하기 위한 것인데 신자치는 안음으로, 막생과 숙비는 산음으로 숨 한 번 쉴 정도로 가까운 곳에 귀양 보냈으니 그 둘이 다시 합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부부를 떨어져 있게 한 본의가 아닙니다. 또 막생과 숙비의 본가가 함양에 있는 산음과의 거리가 다만 하루 길이므로 완악한 무리를 본가 가까운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은 악함을 징게하는 바가 아닙니다. 원컨대 배소配所를 바꾸어서 징계하소서.”
성종은 신자치의 장모 막생과 아내 숙비의 배소를 충청도 진천으로 옮기게 했다.
도리는 양반 신자치의 부인인 숙비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해 죽었다. 그러나 주인이 종을 죽인 사건이라고 하여 가해자들은 가벼운 형벌을 받았으니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의 여종 도리는 용모가 아름다워 주인 신자치에게 겁탈을 당해 첩이 되었다. 겁탈을 당한 것도 억울한 일인데 한 남자를 놓고 사랑을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여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한 꽃처럼 스러진 것이다.
조선은 남성들의 나라
폭력성과 잔혹성은 남자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살인사건이 주로 남자들에 의해 일어났지만 집에서 거느리는 여종들에 이르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욱 잔혹한 면이 있다. 여종에게 온갖 매질을 하다가 구더기가 들끓는 똥까지 먹여 죽게 한 권채의 부인, 여종의 음문을 불에 달군 쇠로 지진 신자치의 아내 숙비를 보면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여종에게는 누구보다도 여성들이 더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여종들의 처지는 남자들에게는 성적유희 대상에 지나지 않고 여자들에게는 사유물과 다를 바 없었다.
여종을 겁탈하는 방법인 십격묘법十格妙法이라는 말이 당시 양반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조선시대 여종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다.
아호탐육餓虎貪肉 굶주린 호랑이가 고기를 탐내듯이
백로규어白鷺窺魚 백로가 물고기를 노리듯이 여종을 훔쳐보고
노호청빙老狐廳氷 여우 같은 늙은 아내가 잠들었는지 확인한 뒤에
한선탈곡寒蟬脫穀 추운 날 매미가 껍질을 벗듯 여종의 옷을 벗긴다.
영묘농서靈苗弄鼠 고양이가 쥐를 놀리는 것처럼 희롱하고
창응포치蒼鷹捕稚 무서운 매가 꿩을 낚아채듯 여종을 덮친다.
옥토도락玉兎搗樂 옥토끼가 방아를 찧듯이 사랑을 나누고
여룡토주驪矓吐珠 용이 구슬을 토하듯이 정액을 배설한다.
오우천월吳牛喘月 소가 달을 쳐다보듯이 헐떡거리면서
노마환가老馬還家 늙은 말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성여학成汝學의 《속어면순續禦眠楯》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가 문집에 기록될 정도로 널리 퍼진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여종을 인간 이하의 소유물로 취급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에 여성들이 거처하는 공간은 규방이다. 여성들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다. 대부분 길쌈과 바느질을 하지만 드물게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여성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시집을 간 뒤에도 규방에서 욕구를 누르며 살아야 한다. 여성의 활동 공간은 제약되어 있으며 사대부가의 안주인은 규방을 지배한다. 규방을 지배하는 권위에 도전을 받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데, 남편이 첩을 들이거나 여종을 범간하여 첩으로 거느릴 때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성에 남자가 아닌 같은 여성인 여종이 피해를 입는 데 문제가 있다.
이 사건은 신자치의 아내와 친정어머니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건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조선은 남자가 처첩을 거느리도록 허용하고 있었으며, 질투를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엄격히 금지했다. 남자들은 첩을 두어야 양반 행세를 하고, 벼슬아치가 되어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면 기생의 수청을 받았다. 남자들은 자유롭게 성생활을 즐겨도 여자는 그럴 수 없었다.
오로지 한 남자를 바라보며 살지만 상대는 첩을 두는 것도 모자라 기생집을 출입하고, 집에서 거느리는 여종까지 넘보았다. 당연히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노비 출신의 첩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집현전 학사 권채의 부인이 여종을 학대한 것도 실상은 조선이 남자들의 나라였기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다.
위에 보시면 집현전 학자 권채의 부인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도 역시 비슷한 이야기거든요. 이 책에서도 소개된 내용인데, 집현전 학사 권채는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문장가였는데요. 권채가 죽고 나자 문장 수준이 날로 떨어지고 개탄할 정도로 뛰어난 지식인이었습니다.
권채의 여종이자 첩이었던 덕금이 본처인 정씨에게 감금당한 채 머리를 밀리고, 구더기가 들끓는 분뇨를 억지로 먹이다가 죽게 되는 사건인데요. (죽어가며 실려 나오는 것을 마침 형조판서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덕금은 비천한 첩이고 집안일을 어떻게 형조에서 다스리냐'였답니다. 부인이 질투를 하여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을 했다는 모함을 하여 권채가 덕금을 감금하고, 부인이 덕금을 고문했던 거죠. 당시 집현전 응교(종4품이나 임금을 항상 면대할 수 있어 판서 못지않은 권세를 누림)였던 권채의 행각을 전해 들은 세종은
"그를 조용하고 온유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란 말인가. 이는 그의 아내가 조종을 해 그렇게 된 것일 테니 끝까지 조사해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건을 자세히 보고하며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아내와 함께 모두 잡아와 국문하여 징계하라고 요청하자 세종은 탄식하면서 허락했다고 해요.
권채는 권제와 더불어 문장의 전형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세종이 아꼈던 인물입니다. 요절하자 많은 사람이 경악하고 탄식했다고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을 볼 때 글이라는 것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의금부 당상관들에게 도리어 호통을 치면서 집안일을 형조에서 다스린단 말이냐면서 이런 일로 주인을 신문한다면 장차 많은 노비를 어찌 다스리겠느냐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이에 의금부 제조 신상이 세종에게 보고하기를
"이 사람은 다만 글을 배울 줄은 알아도 부끄러움은 알지 못합니다."
세종이 노하여 양민과 천민을 어찌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느냐며 권채가 복죄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형벌로 신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종은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부처 시켰는데요. 지신사 정흠지라는 사람이 권채를 옹호했습니다.
"권채가 계집종을 학대하고 곤욕 시킨 죄로 그러한 처벌을 받으니 강상의 문란함이 여기서 시작될까 두렵다. 죄에 비해 벌이 무겁다."라는 의견이었는데 이에 세종이 "비록 종이라고 해도 첩이 되었으면 마땅히 첩으로 대우해줘야 할 것이며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잔인하고 포악하니 어찌 용서하겠는가."
하여간 결론은 세종은 정흠지의 변론 때문인지 권채의 관직만 파면시켰다고 합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덧붙이는 보너스로
<무원록>에 나오는 검시법을 몇 개 올립니다. 무원록은 중국에서 건너온 법의학서인데요. 조선 전기부터 이용되었습니다.
1. 무릇 시체를 검험할 때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시체 옆에 가지 말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자리 잡은 다음 가족이나 관계된 사람들에게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청취한 다음 검험해야 한다.
1. 시체가 그대로 있을 때는 집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방바닥에 있는지 땅바닥에 있는지, 혹은 산에 있는지 계곡에 있는지 등을 감안하여 검시해야 한다. 만약 산이나 계곡에 있었다면 산기슭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며, 소유자가 누구이며, 지명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서 기록할 것이며, 집 안에 있었다면 시체가 입고 있는 옷, 깔고 누운 옷 등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1. 검험을 하러 갈 때는 근방이나 혹은 도중에라도 상당한 신분이나 지위에 있는 귀인 또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자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 속임수에 넘어가는 수가 있다.
1. 현장에 옳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거짓으로 말하는 자가 있다는 의심이 들 때는 노인이나 부녀자, 어린아이와 같은 무지한 사람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1. 먼 곳으로 검험을 하러 갈 때는 중간에 유숙하는 장소가 살인자, 혹은 피살자와 연고가 없는지, 살인자나 피살자의 친척들이 검험관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1.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신속하게 사용된 흉기를 가져오게 하여 음미吟味하라. 늦으지면 살인자나 친척이 진실을 감추고 거짓말로 죄를 벗어나려 한다.
1. 시체를 검험할 때는 죽은 사람의 뒤통수나 머리 속도 상세하게 살펴야 한다. 쇠못을 달구어 피가 나오지 않도록 머리에 박아두는 일도 있다.
1. 여자의 시체를 검시할 때는 내실에서 검험해달라고 요구하더라도 잘 타일러서 대로에 옮겨놓고, 이웃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검험해야 한다.
1. 작은 상처를 크다고 기록하지 마라.
1. 검시를 할 때 독물에 의한 것으로 의심이 되면 은으로 만든 막대기를 시체의 목구멍에 넣어봐라. 잠시 후에 꺼내면 검게 변해 있을 것이다. 이는 살아 있을 때 독살되었다는 얘기다. 검험관은 항상 은봉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부녀자의 은비녀를 사용하면 잘못되는 수가 있다. 은은 더러운 것이 닿으면 색이 변하기 때문에 장인이 만든 순도가 높은 은봉이 아니면 잘못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1. 검시할 때 사건을 위장하기 위해 상처를 감추는 일이 있다. 산과 들에서 절로 나는 꼭두서니를 초에 담갔다가 상처에 바르면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는 감초를 물에 달여 씻으면 다시 나타난다.
1. 목숨이 끊어지면 몸은 청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구타한 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의심 가는 데가 있으면 우선 물로 그 부위를 적신 다음 파의 밑동을 짓찧어 살짝 데친 후 바른다. 그 위에 초를 적신 종이를 덮고 한동안 지난 후에 종이와 파의 밑동을 벗겨내면 자국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 타살됐다면 시체의 옷을 벗겨 알몸이 되게 하고, 종이로 시체를 덮고 술지게미를 바른 뒤에 초주를 뿌리고 한찬 후에 그것을 걷어 조사해라.
1. 부녀자의 시체에 상처가 없으면 음문을 봐라.
1. 부녀자의 시체가 미혼인지 기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는 산파를 불러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깨끗하게 깎은 다음 솜으로 감고 음문에 조심스럽게 넣어 보도록 해라. 손 끝에 피가 묻어나면 미혼녀이다.
첫댓글 흥미로운 글이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또 읽어보고 싶은데, 스크랩이 안되네요 ..
스크랩 허용했어요 ~
감사해요~ ^^
저도 이거 봤는데..진짜 조선시대에는 노비는 진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당했고, 주인에게 어떤짓을 당해도 그것을 묵인하는게 당연했더라구요..주인은 무조건 하늘..하늘도 하늘다워야지.....주인답지 못한 행동은 용인되고 노비의 조그만한 목소리는 조금도 들어주지 않고...ㅠㅠㅠ진짜 조선시대 정말정말정말 싫삼!!!!!!!!!!!!!!!!!!!!!!!!!!!!!!!!
정흠지가 권채를 감싸면서 하는 말이 주인과 종의 관계가 임금과 신하와 같다고 했나. 하여간 그야말로 '하늘' 이 외에도 법 자체가 종은 주인을 고발할 수 없는 법도 있었어요. 왜 예전에는 부모나 자식이 눈 앞에서 살해 당하는 걸 봤을 경우 그 상대를 그 자리에서 죽인다면 정당방위로 인정이 돼서 살인죄가 적용이 안됐는데 노비들에게는 그런 것도 적용이 안됐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눈 앞에서 자식이 살해 당하고 다른 자식이 살해 당할 뻔 해서 자기 주인을 살해한 노비도 형벌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아마 그 노비는 능지처참 됐었죠? 처음엔 다리를 자르고 그다음에 팔을 자르고 이런식으로 서서히 죽여가는.....진짜 끔찍해요..ㅠㅠ
와~이런일도 있었군요. 진짜 무섭다. 저런식으로 범죄를 검사하는군요.. 잔인한거 같으면서도 치밀하네요..
보통 능지처참이라고 많이 말하는데 능지처사라고도 하는 형벌 있잖아요. 이것만 봐도 엄청 잔인하더라고요(검시법은 아니지만) 대역죄인에게 가하는 극형인데요 중국에서 건너온건데 중국에서는 팔다리를 자르고 어깨, 가슴을 서서히 자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벴대요. 그리고 죄인을 묶어놓고 살점을 천천히 베어 내기도 했다니까 소름 끼치죠. 너무 많이 베어내면 출혈과다로 사망할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조금씩 베어내는 거래요. 우리 나라에서 행하는 능지처사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었던 거 같아요. 비교적 ; 가끔 진짜 정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중국에서 능지처사 집행하는 사진 봤는데 완전 ㄷㄷㄷ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싸이에 찾아봄 있을텐데 잔인하다규..
윽 그런게 사진으로 있다는 상상이 더 무섭다규 ㅠㅠ
선리플 후감상... 전 이런 게시물 너무 좋아요,, 잘볼께요..^^
저도 잘 읽었어요.. 스크랩하게 해주시면 더 감사할텐데;;;
잘 읽었습니다 ~
와 조선시대인데 꽤 치밀하게 검사했네요...
악 끔찍해!!!! 글 읽으니까 막 상상되네요 ㅠ
이책 진짜재밌죠!!!!!!!!!!!!!!!!!!!!!!!!!! 나 서점에서 들자마자 다읽어버렸다규... 진짜재밌삼..
전 이북으로 본건데 뭔가 문장이 중간 중간에 엉성하더라고요 뭐라고 해야 되지 문장이 앞이랑 뒤랑 달라요 천천히 읽어 보면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싶고 ㅋㅋ 흥미있긴 하더라고요 제가 워낙 이런거 좋아해서
저도 잘 읽었어요~너무 끔찍하기도 하고...정말 안타깝네요.ㅠㅠ
이런글이 많아지면 더 좋겠어요! 요즘 레방 정말...
222 제가 올리는 거 말고 많은 분들이 흥미로운 이야기들 많이 올려주심 좋겠어요 저도 이런거 좋아하거든요 하나하나 분야별로 찾아 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레방이 그런거 한꺼번에 보기 편한 특성이 있으니까 여기 많이 올려달라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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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무서워.. 님 잘봤어요!!!!
도리 너무 불쌍하다....얼마나 아팠을까 ㅜㅜ
솔직히 우리같은 사람들은 저런 고통 자체가 가늠이 안돼요. 진짜 끔찍해요 전 튀어나온데 머리 한 번 박아도 난린데 아프다고
읽으면서 막 몸이 가렵고 소름돋고 그래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겁탈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당하기까지 도리의인생이 너무 불쌍하다...ㅜㅜㅜㅜㅜㅜ
어머니가 종이면 자식도 종이고 이런 제도 자체가 참 기가 막힌거죠. 그 전까지 여성 지위가 그렇지 않았는데, 조선 시대 여자들 살기 힘들었을 거 같아요. 재주가 있어도 발휘하기도 힘들고. 종살이도 서러운데 결국 비참하게 죽고
아~~진짜 조선시대 맘에 안들어요~~ㅠㅠ 망할 사대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화명이 뭔가 절묘하긔
노비 도리라고해서 외국사람인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