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데이와 구정 연휴가 겹쳤다. 커플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의무적으로 주고받는 시판 초콜릿은 잠시 넣어두고 고진감래의 섬, 쪽빛 거제로 여행을 떠나 보자. 거제는 영남지역 남해 관광의 거점으로 주목받는 만큼 수많은 명소들이 뜨고 지는 자체발광 핫플레이스다. 소소하게 쌓인 추억들은 때론 초콜릿보다 달콤하다.
노란 수선화가 만발한 공곶이의 봄<사진제공·거제시청>
✔ 80대 노부부가 평생 일군 수목원, 공곶이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내도와 마주한 조용한 바닷가에 공곶이가 있다. 지도에서 보면 공처럼 둥그렇게 튀어나온 모양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곳 3만여 평 땅에 수선화, 동백나무, 종려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자란다. 가장 유명한 것은 동백나무 터널이다. 공곶이 입구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333개 계단 양 옆을 동백나무가 에스코트하듯 감싸고 있다. 끝겨울에 찾아가면 빨간 동백이 송이 째 떨어진 ‘레드카펫’을 볼 수 있어 포토존으로 인기다.
[왼쪽/오른쪽]비가와도 끄떡없는 울창한 동백터널<사진제공·거제시청> / 동백의 마지막 선물, 레드카펫<사진제공·거제시청>
3~4월이면 ‘봄의 전령’ 수선화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려 노란 바다를 이룬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 그 뜻에 걸맞은 짙은 향과 색으로 공곶이의 미(美)적 자존감을 한껏 높인다. 공곶이 특유의 이국적인 경관을 완성하는 것은 야자나무과 상록교목인 종려나무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종려나무 숲>이 이곳에서 촬영됐으니 공곶이의 또 다른 심볼이라 할 만 하다. 부채 모양으로 돋아난 잎사귀와 털 덮인 기둥이 거센 바닷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막아준다. 무엇보다 거제의 쪽빛 바다와 종려나무는 서로를 위한 존재인 양 잘 어울린다.
버려진 땅을 꽃밭으로 일구어낸 주인공은 강명식(86)씨 부부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공곶이와 인접한 지세포는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던 마지막 피난처였다.(지금도 공곶이 입구에 천주교인들의 무덤이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강명식 할아버지도 1965년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하루는 예구마을에 살던 여인을 만나 공곶이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빼어난 경치에 반해 터를 가꿀 결심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부족하고 어려운 나날. 결혼 후 12년을 부지런히 모은 뒤에야 100여 평의 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가장 처음 심은 것은 귤나무였다. 당시만 해도 귤이나 유자는 한 그루만 심어도 자식들 학비를 댈 수 있는 효자 품종이었다. 하지만 나무는 한파를 견디지 못해 얼어 죽었고, 부부는 고심 끝에 추위에 강한 수선화를 심었다. 수선화는 초봄에 꽃을 피우고 뿌리는 팔 수 있어 할아버지가 그리는 큰 그림에 보탬이 됐다. 돈이 생기면 다시 땅을 늘리고 길을 만들고 또 다른 꽃을 심었다. 지금의 공곶이는 할아버지가 한손에 호미, 한손에 삽을 들고 땀 흘려 노력한 결실이다. 입장료는 따로 없다. 이맘때쯤 수선화 무인가판대를 운영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가격도 1,000 원으로 저렴하다. 무인가판대를 운영하는 장소는 노부부의 집 앞이다. 333계단 밑, 내도가 보이는 허름한 집에서 노부부는 아직도 행복을 가꾸며 산다.
[왼쪽/가운데/오른쪽]흙과 돌을 실어 나르는데 이용한 레일 / 공곶이를 가꾼 노부부의 집 / 노부부가 기르는 강아지 ‘콩아’
공곶이에 정해진 산책 코스는 없다. 천주교 순례길과 공곶이가 한길처럼 맞닿아 있어 반나절 정도 트레킹하기 좋다. 간단하게 둘러볼 예정이라면 예구마을-333계단(동백터널)-수선화밭(노부부댁)-몽돌해변-해변목조계단-해안둘레길을 따라 걸을 것을 추천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부터 몽돌해변의 청정바다, 내도의 한가로운 풍경, 구조라항을 조망하는 산길까지 두루 경험할 수 있다. 계단이 높고 길이 다소 험해 운동화는 필수다.
도장포마을 뒤편에서 바라본 바람의 언덕 전경
✔ 아름다운 풍차와 낯선 무덤의 공존,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 역시 도장포마을 한구석에 버려진 민둥산에 불과했다. 넓은 바위 위에 잔디와 억새가 어우러진 모양이 꽤 이색적이긴 하나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는 언덕’ 그뿐인 것이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이름은 거제시가 도장포 발전방안을 두고 고심하다 지명 공모를 진행한 이후에 붙었다. 5억 8천만 원을 들여 풍차와 계단, 길도 만들었다. 노력에 힘입어 점차 유명세를 타던 바람의 언덕은 KBS2 <해피선데이-1박 2일> 출연을 계기로 거제 대표 명소가 됐다. 사방으로 트인 바다와 365일 돌아가는 풍차, 거기에 낭만적인 이름까지, 삼박자가 고루 들어맞은 덕분이다.
[왼쪽/오른쪽]바람의 언덕으로 곧장 이어지는 엔제리너스 옆길 / 마당이 없어 아기자기한 도장포 마을 주택
바람의 언덕의 상징, 11m 높이 풍차
관광객들 대부분은 바람의 언덕과 가장 가까운 도장포선착장에 주차를 한다. 그러나 바람의 언덕과 그 주변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해금강 테마박물관과 이어진 해금강로에 주차를 하는 것이 좋다. 엔제리너스 커피를 마주보고 바로 오른쪽에 난 샛길(도장포 3길)을 따라가면 도장포 마을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곳에 지어진 집들에서 마당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좁은 산비탈에 집을 짓다 보니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당은 없을지언정 창밖으로 바람의 언덕과 푸른 바다가 보일 테니 답답한 마음은 한결 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되돌아 갈 때도 마을길(도장포 2길)을 통과하면 도장포 곳곳에 숨은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마을의 유래인 도자기를 소재로 하여 포토존을 만들거나 타일 시공을 하는 등 해안경관 색채시범사업을 최근에 완료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왼쪽/오른쪽]흡사, 동화 속 마을 / 무덤 맞은편으로 보이는 곳이 몽돌해변으로 유명한 학동이다.
그리고 모두가 간과하는 마지막 포인트 하나. 바람의 언덕 끝자락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무덤이다. 지금은 말뚝이라도 박아 무덤 영역을 표시해 놓았지만 그것마저도 없던 과거에는 함부로 짓밟히기까지 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누구란 말인가.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된 이야기와 옛 문헌자료에 따르면 외딴 무덤의 주인은 여양 진씨 집성촌인 학동마을에 살았던 여인이다. 이곳에서 여양 진씨 성을 가진 지아비와 함께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던 부인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이상한 꿈을 꾸었다. 웬 백발노인이 바람의 언덕 방향을 가리키며 저 곳에 살게 되리라는 말을 남긴 것. 결국 부인은 그 곳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묻힌 바람의 언덕은 남편이 묻힌 학동마을과 바다를 두고 마주한 땅이다. 부부가 사후 150년이 지나도록 먼 곳에서 서로를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고증된 것은 아니기에 재미있는 전설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복항해변을 수호하는 회백색 매미성
✔ 1인 예술의 결정체, 매미성
매미성은 2003년 태풍 매미로 경작지를 잃은 시민 백순삼 씨가 자연재해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홀로 쌓아올린 벽이다. 바닷가 근처에 네모반듯한 돌을 쌓고 시멘트로 메우길 반복한 것이 이제는 유럽의 중세시대를 연상케 하는 성이 됐다. 그 규모나 디자인이 설계도 한 장 없이 지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왼쪽/오른쪽]공사가 덜 진행된 매미성 탑 / 조각난 돌이 근처에 쌓여 있다.
매미성에 가기 위해서는 복항리 마을회관 근처 도로에 차를 대고 약 150m를 걸어야 한다. 차를 가까이 대겠다고 마을 안으로 무작정 들어가면 길이 좁아 사고가 날 수 있다. 주차장을 확충해야한다는 의견에는 거제시도 공감하는 입장이다. 사유지이긴 하나 매미성이 올해 처음으로 거제 관광지도에 표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현 계획은 아직 없다. 시설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주민들에 대한 여행자들의 배려가 필요하다.
복잡한 듯 단순한 매미성 내부
데이트를 즐기는 풋풋한 커플
해변에 다다르면 매미성의 측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면에서 그 모습을 한눈에 담고 싶거든 파도가 닿지 않는 해변가 바위 위로 올라가 보자. 어안렌즈로 들여다 본 듯 볼록볼록한 성벽이 한층 멋스럽게 느껴진다. 곳곳에는 매미성이 미완의 작품임을 알리는 공사 자재가 흩어져 있다. 지금은 30분 만에 둘러볼 수 있는 규모지만 또 다시 15년이 흘렀을 땐 어떻게 변해 있을지, 저절로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백순삼 씨는 매미성 근처에 살지 않지만 가끔 한 번씩 나와 돌을 쌓고 간다. 운이 좋으면 이 솜씨 좋은 건축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볼리에르 대표메뉴 멜랑쥐, 팬케이크, 딸기석류, 에르트레이, 요거트(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 솜씨 좋은 부부의 수제 브런치 카페, 볼리에르
볼리에르는 거제 서북쪽, 가조도라는 작은 섬에 위치한 전원 카페다. 맛 좋고 분위기 좋기로 SNS에서 입소문이 파다해 여행객들은 꼭 한 번씩 들른다. 외관은 카페라기보다 펜션에 가깝다. 전원주택을 닮은 ㄷ자 건물과 바다를 조망하는 너른 앞마당, 아기자기한 오두막과 조형물, 그 모든 것이 볼리에르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이곳은 부산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사장이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1층은 카페로, 2층은 가정집으로 사용 중이며 솜씨 좋은 아내가 과일청, 생크림, 요거트, 바질페스토 등을 직접 만들어 손님에게 낸다.
깔끔하고 포근한 인테리어
여자들이 좋아하는 귀여운 소품들
고급스럽고 맛있는 수제 브런치(13,000원)는 볼리에르의 대표 메뉴다. 볼리트레이, 에르트레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샌드위치, 샐러드, 스튜, 치아바타의 구성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바질 페스토가 들어간 에르트레이의 카프레제 오픈 샌드위치는 재료의 신선함과 소스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 첫 손에 꼽힌다. 카스피해 유산균을 사용한 요거트에 제철 과일과 그레놀라, 햄프씨드 등을 토핑한 요거트(8,000원)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메뉴다. 부드럽고 쫀득한 질감의 요거트는 그냥 먹었을 때 단 맛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트레이 밑에 꿀이 깔려 있으니 단맛을 원할 때 섞어 먹으면 된다.
고급스럽고 푸짐한 볼리에르표 한 상 차림
이외에도 두껍지만 촉촉하게 구운 팬케이크(8,000원), 딸기와 석류 낱알이 통째로 들어간 딸기석류(6,000원), 아인슈페너를 응용한 달콤한 커피 멜랑쥐(5,500원) 등 다른 카페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메뉴들이 많다. 단언컨대, 맛은 최고다. 그렇기에 ‘섬 속의 섬’으로 찾아 가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연륙교 하나 넘는 일이 뭐 그리 대수일까. 고즈넉한 섬마을 구경도 실컷 하고 올 일이다.
여행정보
-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와현로 257
- 문의 : 055-639-4178(거제 관광안내소)
-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도장포마을
- 문의 : 055-638-2202(도장포 어촌체험마을)
-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복항길
- 문의 : 055-639-3000(거제문화관광)
-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가조로 1292-20
- 문의 : 055-636-9345
- 영업시간 : 11:00~19:00 (마지막 주문 18:00)/ 일요일 휴무 *메뉴 및 가격 변동 잦음
주변 음식점
- 싱싱게장 : 게장정식 /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로 10 / 055-681-5513
- 맷돌순두부 : 해물순두부전골 / 경상남도 거제시 아주1로2길 25 / 055-681-4544
- 티파니횟집 : 모듬회 /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거제중앙로3 / 055-636-2929
숙소
- 한옥스테이 소낭구펜션 :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마전1길83 / 055-682-2141
- 거제더비치펜션 :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거제북로 2738-1 / 055-634-4900~1
- 핀란드빌리지 :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구천1길 13 / 70-4666-7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