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실학자로서, 당시 앞선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우리가 잘 아는 양반전 그리고 허생전 또 열하일기등과 같은 소설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스무살이 되기 전에,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게 되어 죽을뻔 한 고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동시대에 살던 민유신이란 칠십삼세의 노인으로 부터, 두어달 재치있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병을 나을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그의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없을 뻔 하였지만, 민유신이란 이야기꾼의 덕택으로 칠십세를 조금 넘길 때 까지 살면서 여러가지 업적을 남길 수 있게 되었던 거지요.
이 사례는 말을 잘 한다면, 불치의 병까지도 완치할 수 있게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는 이현정 아나운서이니, 말을 하는 것과 관련된 적합한 강의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사전에서 보는 연암 박지원은 누구신지 공부하여 보았습니다.
☞ 박지원(1737~1805)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의 실학자(實學者)ㆍ소설가(小說家).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30세에 실학자(實學者) 홍대용(洪大容, 1731~1783)에게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비롯한 서양(西洋)의 신(新) 학문(學問)을 배우고, 1780년 진하사(進賀使)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淸)나라로 가서 중국인(中國人)들의 이용(利用) 후생(厚生)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實學)에 뜻을 두었음. 당시(當時)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領袖)로 청(淸)나라 문물(文物)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主張)했음
그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당시(當時) 보수파(保守派)에게서 많은 비난(非難)을 받았으나, 정치(政治)ㆍ경제(經濟)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문학(文學) 등 각 방면(方面)에 걸쳐 청(淸)나라의 신문물(新文物)을 소개했음. 또한, 독특(獨特)한 해학이 담긴 '兩斑傳(양반전)', '許生傳(허생전)', '虎叱(호질)', 『열하일기(熱河日記)』 등 10편의 한문(漢文) 소설을 써서 고루한 양반(兩班), 무능(無能)한 위정자를 풍자(諷刺)하는 등 독창적이고 사실적(事實的)인 문체(文體)를 구사(驅使)하여 문체(文體) 혁신(革新)의 표본(標本)이 되었음. 중상(重商) 주의(主義) 실학(實學) 사상(思想)을 主唱(주창)함 [출처]네이버사전.
아래 강의를 요약하면..
조선 영조 때.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연암 박지원은 그가 18세에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이 강의를 고화질 동영상으로 보고, 듣고, 즐길 수 있습니다. http://www.nethyangki.net/ux16R9tUMys
안녕하세요? 이현정입니다. [출처]넷향기, 타니아커뮤니케이션 이현정 아나운서.
☞ 이현정님은 누구인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사)한국다문화센터 대변인 겸 상임부소장을 맡고 있다. 다문화 가정 자녀를 위한 멘토링 사업과 다문화 어린이 합창단 창립, 국회다문화포럼 등 올바른 다문화 사회 정착을 위한 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다문화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치적 불운 속에서 찾은 은둔의 여유, 연암에 정착하다 박지원이 연암골에 정착하기 직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유언호는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렸나. 자네에게 심히 독을 품고 있으니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르겠네. 그 자가 자네를 해치려 틈을 엿본지 오래지만 자네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라고 늦추어 온 것 뿐이라네. 이제 복수의 대상이 다 제거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자네일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심히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하기는 어려울 걸세.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에서 재인용)라고 권하였다는 것이다. 유언호 이외에도 정조의 역작인 [무예도보통지] 편찬 실무를 주관하였던 친구 백동수도 이처럼 권하였다. 사실 당시까지도 이렇다할 정치적 활동이 없었던 박지원이었기에 홍국영과 직접적인 마찰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을 중심으로 정조의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776년(정조 즉위년) 11월 기장현에 유배된 심종질인 박종악의 활동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때 박종악이 유배된 것은 정조와 홍국영에 의해 1차 제거 대상이었던 홍인한?정후겸과 밀착되었다는 이유였다. 이를 통해서 유추해본다면 박지원 가문이 이들과 밀착된 것이 아마도 홍국영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했던 요인이 아닐까 한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열하일기의 집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를 경험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하였다. 후금, 후일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대표하던 국왕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조선의 사림들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감함과 동시에 이른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북벌은 한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서서히 북벌의 이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그 자리에 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청나라가 멸망은커녕 오히려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은 뒤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가는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이제 청나라는 정벌해야 할 대상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다 [열하일기]를 발표하면서 주가를 올리던 박지원은 이어 친구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평시서 주부와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한성부 판관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 경상도 안의현감에 제수되었다. 안의현감에 재직하던 1792년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다름 아닌 규장각 직각 남공철의 서신이었다. 이때 남공철이 편지를 보낸 것은 국왕 정조의 명에 따른 것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문체가 바르지 못하니 이를 반성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중앙의 조정에서 국왕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문체반정이란 당대 과거시험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문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바로 문체반정의 주 표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후일 김택영(1850∼1927)이 찬술한 [박연암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열하일기]가 발표되자 이를 얻어 본 국왕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근래 신기한 것만을 따르는 문체의 주범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서 남공철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도록 해서, 속히 문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정하게 수정한다면 관직 제수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장에서 실현된 북학 정신 한때 정조의 문체반정 대상이기도 하였던 박지원은 그가 평소 저술에서 강조하였던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고을 내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 효의식을 고양시키고,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각종의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행길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중국의 실용적인 문명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지원이 후배 박제가의 [북학의]에 대해서 지은 서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조선 내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중략)…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박지원, [연암집] ‘북학의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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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 제 불 도 저 원문보기 글쓴이: 황제 불도저
첫댓글 박지원에 대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서 링크해 보았어요~ 동영상을 클릭해서 들어 보세요 ^^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