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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연암 박지원이 죽다 살아난 이야기
守吾齋 추천 1 조회 183 13.07.15 18:2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실학자로서, 당시 앞선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우리가 잘 아는 양반전 그리고 허생전 또 열하일기등과 같은 소설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스무살이 되기 전에,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게 되어 죽을뻔 한 고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동시대에 살던 민유신이란 칠십삼세의 노인으로 부터, 두어달 재치있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병을 나을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그의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없을 뻔 하였지만, 민유신이란 이야기꾼의 덕택으로 칠십세를 조금 넘길 때 까지 살면서 여러가지 업적을 남길 수 있게 되었던 거지요.

 

이 사례는 말을 잘 한다면, 불치의 병까지도 완치할 수 있게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는 이현정 아나운서이니, 말을 하는 것과 관련된 적합한 강의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사전에서 보는 연암 박지원은 누구신지 공부하여 보았습니다.

 

 

 

박지원(1737~1805)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ㆍ소설가().

 

 

자는 중미(), 호는 연암(). 30세에 실학자() 홍대용(, 1731~1783)에게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西)의 신() 학문()을 배우고, 1780년 진하사(使)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로 가서 중국인()들의 이용() 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뜻을 두었음.

당시()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음

 

그의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ㆍ경제()ㆍ천문()ㆍ지리()ㆍ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소개했음.

또한, 독특()한 해학이 담긴 '(양반전)', '(허생전)', '(호질)', 『열하일기()』 등 10편의 한문() 소설을 써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를 구사(使)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음. 중상() 주의() 실학() 사상()을 (주창)함

[출처]네이버사전.

 

 

 

 

좋은하루

 

 

 

아래 강의를 요약하면..

 

조선 영조 때.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연암 박지원은 그가 18세에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병을 낫기 위해 민유신이라는 이야기꾼으로 유명한 사람을 가까스로 청하게 되었습니다. 민유신의 재치로 웃음이 끊이지 않은 상태에서 두어 달 함께 지내자 박지원은 거짓말처럼 서서히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이 강의를 고화질 동영상으로 보고, 듣고, 즐길 수 있습니다.

http://www.nethyangki.net/ux16R9tUMys

 

 

 

 

안녕하세요? 이현정입니다.
오늘은 연암 박지원이 죽다 살아난 이야기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조선 영조 때.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연암 박지원은 그가 18세에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좋다는 약은 다 써보고 내로라하는 의원들에게 보여줘도 증세는 더욱 심해갈 뿐이어서 부모의 속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다.
여러 의원들이 왔다 가고 또 왔다 가고 숱한 의원들이 약을 써도 안 낫던 중 한 의원이 처방 아닌 처방을 하고 가버렸는데 그 의원의 처방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증세는 도저히 약으로는 고칠 수 없지만 재미있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나을 수도 있을 것이요"라고 하며 가버렸다.
"뭐 이런 처방이 다 있나?"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의 부모는 무슨 수를 다 써본다는 생각으로 백방으로 수소문해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을 찾아보았다.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당시 민유신이라는 사람이 이야기꾼으로 유명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그를 가까스로 청하게 되었다.

민유신 이란 사람은 성현들의 말씀을 좋아해 늘 배우고 익힌 인물로서 7세부터 70세까지 해가 바뀔 때마다 방의 벽에다 줄줄 써넣고 외웠다고 할 정도로 영특하고 조숙했으며 학문에 대한 깊이가 남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매우 영리하고 총명하며, 특히 말을 잘하였다.
특히 옛 사람의 기인한 절개나 거룩한 발자취를 흠모하여 이따금 의기에 북받치면 흥분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한숨 쉬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남양에 사는 민유신은 이인좌의 난에 종군한 공으로 첨사를 제수 받았으나, 집으로 돌아온 후로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민유신은 벼슬길에는 나서지 않고 죽을 때까지 큰 포부를 가슴에 지니고 살았는데 항상 재치 있는 말과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통상 기인으로 알려져 오고 있었다.
이러한 민유신을 박지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신 것이다.

박지원의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 민유신에게 부모는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부탁의 부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민유신은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나누지 않고 때마침 피리 불던 이의 뺨을 때리며 음악을 하는 사람이 얼굴이 뿌루퉁 성낸 얼굴이라고 혼을 내는 것이었다.
이 민유신의 나이 그때가 73세였다.
"어디가 아픈가?"
"도무지 밥맛도 없고 잠을 못잡니다. 기운도 없고 살맛도 없고....."
그러자 민유신은 즐겁게 손을 방바닥으로 쳐가면서 박장대소를 해대는 게 아닌가.
"하하하 자네의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밥맛이 없으니 살림이 늘 것이고, 잠이 안 온다니 남보다 인생을 갑절을 더 사는 셈일세. 부와 수를 겸했으니 으하하하하 이거 축하하네 축하해."
민유신의 재치로 웃음이 끊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두어 달 함께 지내자 박지원은 거짓말처럼 서서히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민유신은 누가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져 그를 궁색하게 만들려 애를 써도 그의 대답은 언제나 재치가 넘치고 이치에 맞아 끝내 아무도 그를 골탕 먹일 수가 없었다.

박지원은 병이 낫고 민유신이 세상을 뜨자 몹시 애석해 하며 <민옹전>을 지어 그의 글 <연암별집>, <방경각외전>에 남겼는데, 그와 더불어 나누었던 은어(隱語), 해학(諧謔), 풍자(諷刺) 등을 모아 그를 그리워하는 뜻을 남겼다.

감사합니다.

[출처]넷향기, 타니아커뮤니케이션 이현정 아나운서.

 

 

 

 

 

 

  

 

 

 

 

이현정님은 누구인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사)한국다문화센터 대변인 겸 상임부소장을 맡고 있다. 다문화 가정 자녀를 위한 멘토링 사업과 다문화 어린이 합창단 창립, 국회다문화포럼 등 올바른 다문화 사회 정착을 위한 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다문화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국청년작가전」, 「프론티어 페스티발」, 「한국불교미술대전」, 「한국구상미술대전」등에서 특선, 1998년에는 「A.A.I. 예술대전」, 「동시대전」에 발표하는 등 예술가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90년 Grands Et Jeunes D' aujourd' hui(Grand Palais,Paris)전 입상하고, 1991년에는 독일 뒤셀돌프성 그라이펜호르스트 갤러리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졌다. 1987년 BBS-FM(불교방송) 아나운서 공채 1기로 입사,「기상 가요」「여성 만세」「퀴즈 대장경」「음악의 마을」「트로트 대행진」「BBS 생활 상담실」「아침을 열며」, '부처님 오신 날' 행사 사회 및 뉴스 등 20년간 활동했으며, 현재에는 각 기업체·공무원·대학·지역사회 등에서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다문화 시대를 맞이해 ‘다문화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며 다문화 관련 강의와 국민 캠페인에도 앞장서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명품 대화법』, 『덜렁이 아나운서』, 『도전하는 여성의 지혜로운 화술 성공하는 화법』, 『노무현 화술과 화법을 통한 이미지 변화』, 『바보의 힘』, 『성공하는 스피치 돈 버는 스피치』, 『5분 스피치에 내 모든 것을 걸어라』 등이 있다.
[YES24 제공]

 

 

 

좋은하루

 

 

연암 박지원과 관련한 유용한 글을 옮겨 와 보았습니다.

 

 

박지원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은 그리 유쾌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서울 반송방 야동(지금의 중구 순화동과 의주로 2가 일대)에서 태어나 삼청동 백련봉 아래 이장오라는 인물의 별장에서 세들어 살았고 얼마 뒤에는 백탑 인근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백탑 서쪽 전의감동으로 옮기며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가 20~30대에 [양반전]이나 [예덕선생전]과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을 집필하게 된 것도 이런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당시 탑골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서구이덕무, 유득공 등을 만나 교류한 것이 기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박지원이었지만, 그 당대에는 별로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때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하며 촉망받던 재원이었던 박지원은 끝내 과거를 포기하고 1771년(영조 47)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을 찾고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다. 박지원의 호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같은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의 삶은 선조들의 청렴한 삶과 유람을 즐기는 그의 생활관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그밖에도 당시 실력자 홍국영과의 불화도 한 몫을 하였다.

 

정치적 불운 속에서 찾은 은둔의 여유, 연암에 정착하다

박지원이 연암골에 정착하기 직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유언호는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렸나. 자네에게 심히 독을 품고 있으니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르겠네. 그 자가 자네를 해치려 틈을 엿본지 오래지만 자네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라고 늦추어 온 것 뿐이라네. 이제 복수의 대상이 다 제거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자네일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심히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하기는 어려울 걸세.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에서 재인용)라고 권하였다는 것이다. 유언호 이외에도 정조의 역작인 [무예도보통지] 편찬 실무를 주관하였던 친구 백동수도 이처럼 권하였다. 사실 당시까지도 이렇다할 정치적 활동이 없었던 박지원이었기에 홍국영과 직접적인 마찰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을 중심으로 정조의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776년(정조 즉위년) 11월 기장현에 유배된 심종질인 박종악의 활동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때 박종악이 유배된 것은 정조와 홍국영에 의해 1차 제거 대상이었던 홍인한?정후겸과 밀착되었다는 이유였다. 이를 통해서 유추해본다면 박지원 가문이 이들과 밀착된 것이 아마도 홍국영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했던 요인이 아닐까 한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열하일기의 집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묘호란병자호란 두 차례를 경험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하였다. 후금, 후일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대표하던 국왕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조선의 사림들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감함과 동시에 이른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북벌은 한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서서히 북벌의 이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그 자리에 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청나라가 멸망은커녕 오히려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은 뒤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가는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이제 청나라는 정벌해야 할 대상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다

[열하일기]를 발표하면서 주가를 올리던 박지원은 이어 친구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평시서 주부와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한성부 판관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 경상도 안의현감에 제수되었다. 안의현감에 재직하던 1792년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다름 아닌 규장각 직각 남공철의 서신이었다. 이때 남공철이 편지를 보낸 것은 국왕 정조의 명에 따른 것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문체가 바르지 못하니 이를 반성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중앙의 조정에서 국왕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문체반정이란 당대 과거시험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문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바로 문체반정의 주 표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후일 김택영(1850∼1927)이 찬술한 [박연암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열하일기]가 발표되자 이를 얻어 본 국왕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근래 신기한 것만을 따르는 문체의 주범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서 남공철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도록 해서, 속히 문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정하게 수정한다면 관직 제수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장에서 실현된 북학 정신

한때 정조의 문체반정 대상이기도 하였던 박지원은 그가 평소 저술에서 강조하였던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고을 내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 효의식을 고양시키고,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각종의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행길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중국의 실용적인 문명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군직(軍職)을 받고 상경한 박지원은 이후 계산동(오늘날의 종로구 계동 일대)에서 생활하던 중 역시 벽돌로 총계서숙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제용감 주부와 의금부 도사, 의령 령 등을 거쳐 1797년 면천군수에 제수되었다. 면천군수에 재직하던 1799년에는 농서를 구하는 교지에 응하여 농서인 [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과농소초]는 그가 금천의 연암골에서 생활하던 당시 경험에 바탕한 농서로써, 여기에 그가 후일에 찬술한 [한민명전의]를 첨부하여 올린 농서였다. [과농소초]에서 박지원은 중국 농법의 도입 및 재래 농사 기술의 개량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제안해, 심각한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박지원은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면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박지원이 후배 박제가의 [북학의]에 대해서 지은 서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조선 내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중략)…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박지원, [연암집] ‘북학의서’에서)

 

 

[열하일기]의 일부. 홍대용 등으로부터 시작된 북학 논의는 박지원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열하일기]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금천의 연암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서울로 돌아왔다. 직접적인 계기는 아마도 그 동안 불화를 겪었던 홍국영의 정치적인 몰락이 아닐까 한다. 서울로 돌아와 생활하던 중 박지원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같은 해 5월
삼종형 박명원이 고희를 맞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진하 겸 사은사의 정사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권유를 받고는 그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하였다.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http://db.itkc.or.kr)>

 

박지원의 저술인 양반전(왼쪽, 1947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발행)과 허생전(오른쪽, 1924년 시문사 발행)
<출처 : 독립기념관(https://search.i815.or.kr)>

 

 [출처 및 더 자세하게 보러가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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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7.15 19:44

    첫댓글 박지원에 대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서 링크해 보았어요~ 동영상을 클릭해서 들어 보세요 ^^

  • 13.07.16 09:24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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