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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한 물을 보며 심신을 달랜다.-물의 고장 예천 글/사진: 이종원
한국의 가나안 땅-예천 물의 고장하면 으래 충주호가 있는 단양, 제천이나 임하호가 있는 안동을 꼽는데 그것은 근세기 인간이 댐을 만들면서 생긴 호수다. 엄밀히 말하면 예천이야말로 진정한 물의 고장이다. 醴泉이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술 '예'와 샘 '천'을 쓰고 있다. 땅에서 달달한 식혜가 흘러나올 정도로 풍요의 고장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말해주고 있다. 예천에 명나라 장수가 물맛을 보고 극찬한 주천이 있고, 옷샘, 용정등 좋은 물이 쏟아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예천온천의 수질은 전국에서 알아줄 정도란다. 수질만 좋아서는 물의 고장이 될 수 없다. 멋진 흐름에 따라 물도리도 그 품격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예천 회룡포는 우리나라 최고의 물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345도를 휘감아 돌아 호리병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생명이 숨쉬고 있는 태반을 보는 듯하다. 가느다란 탯줄 하나에 의지한 채 섬아닌 섬은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다. 내성천이 회룡포를 굽이돌아 낙동강과 합류하고, 회룡포에서 태맥의 맥과 소백의 맥이 만난다고 한다. 물과 산이 동시에 만나게 되니 풍수지리학적으로 최고의 길지이며 그 곳에 천년고찰 장안사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하늘에서 보는 장쾌한 맛과 땅을 밟으며 회룡포를 둘러보는 맛은 다르다.뿅뿅 뚫린 뿅뿅다리를 건너면 백옥처럼 하얀 모래가 손님을 맞이한다. 회룡포는 한때 의성김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의성포라고 불리었으며 관광객이 자꾸만 의성쪽에 가서 의성포를 찾으니... 어쩔 수 없이 회룡포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은 9가구 15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빈집에는 소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용의 비늘을 더듬으며 둑방길을 따라 걷는 맛도 쏠쏠하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은서, 준서가 거닐었던 길을 한번 거닐어보자.
늘씬한 미인-향석리석불 용궁향교를 찾다가 길을 잃어 우연히 발견한 석불이다. 여러번 이 길을 누볐지만 이렇게 예쁜 부처상이 있는지 몰랐다. 모놀회원 60명이 무엇인가에 이끌려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네모난 연꽃좌대도 특이하고 그 위에 살포시 앉아계신 부처님의 잘록한 허리곡선도 유려하다. 달걀형 얼굴에 높다란 콧등, 그리고 5백원 동전만한 둥그런 백호도 눈에 띤다. 퍼머가 잘 나온 나발과 유난히 튀어난 육계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유난히 작은 입술에서 품어나오는 수줍은 미소가 나를 설레게 한다. "하리수 부처야" 라고 얘기하면 신성모독일까요?
용궁을 그리며...용궁향교 건물도 나무도 온통 '古'만 보인다. 이쑤시개 같은 전봇대만 없었다면 당장 댕기머리를 휘날리며 달려가서 세심루를 댓돌에 짚신을 고이 놓고 장쾌한 내성천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다라고는 하나 없는 예천땅에서 은근히 용궁 모습을 그리게끔 하는 곳이 바로 용궁향교다.
7칸칸짜리 세심루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예전엔 이곳에서 읍내까지 학교가 멀어 향교가 임시학교가 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향교건물에 국기 게양대가 서 있는 것이 이상스러웠는데 이제사 그 이유를 알 게 되었다. 아쉽게도 세심루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명륜당 툇마루에 앉아 있으며 세심루 창문을 통해 유유히 흘러가는 내성천을 볼 수 있을텐데... 아마 그런 시야를 위해 명륜당 기단을 높게 쌓았는지도 모른다.
누각 마루틈새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세월에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무기둥엔 주름살 같은 결이 그려져 있다. 인고의 세월을 잘도 견뎌냈다.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지나쳤을 때 버릇없이 명륜당 마루에 쉬다가 대들보가 뒤틀렸다는데...우리 모놀식구들은 예의를 갖추었나보다.
천진난만한 동본리석불입상(보물 제427호) 4등신이다. 내아들 성수 4살 때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둥근 연꽃좌대는 발까지 조각되어 있으며 발목 위부터 다른 돌로 조각되어 있었다. 을씨년스런 가을날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었 때 독실한 신도할머니 한분이 우산을 쓰고 이 불상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불상만큼이나 아름다운 장면이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아이를 닮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이 앞에 서면 아이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500년 가풍-예천권씨종택 권문해선생의 조부 권오성선생이 예천땅에 집터를 잡을 때 지관이 만석꾼 부자가 나오는 터와 학자가 나오는 터중에 어느것을 할까요? 그는 부는 거들떠 보지 않고 학자를 선택했다. 만약 내게 그런 선택권이 있다면 조금 고민하다가 전자를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을 비켜가고 좌우익 혼란기 그리고 6.25 전쟁에도 온전히 집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학자적 양심과 가진자의 나눔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6.25때 인민군이 고택 바로 앞에 진을 쳤을 때도 그는 목숨보다 소중한 제사를 지내야만 했다. 봉건지주를 무참히 학살했던 인민군도 종손의 인품과 마을사람들의 신임에는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제사를 지내셔도 좋은데...방문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미군의 폭격 받을 수 있으니까요" 수복이 되었어도 고택은 우익으로부터 해코지를 받지 않았다. 이념보다 고차원적인 500년 가풍인 애민정신이 종택을 구할 수 있었다.
보물인 사랑채 건물이다. 간결한 아자형의 창호가 정갈하게 느껴진다. 임란전 건물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조선초기 뛰어난 건축술을 볼 수 있다.종보위에 연잎받침을 놓고 그 위에 첨자와 얹고 종도리를 받치는 모습이 기가막히게 정교하고 아름답다.
지세가 올라가기 때문에 사랑채는 2층구조로 되었고 다락으로 사용한다.
본채와 사랑채의 연결은 안채 좁은 문을 통해 툇마루를 따라 동선을 만들어 놓았다. 높이가 다른 두 공간 영역을 절묘하게 연결해 놓았다.
사랑채 문간. 봄볕에 메주가 익어가고 있다.
정갈한 안채 대청마루다. 보물 878호인 대동운부군옥,보물 879호인 초간일기등을 보관한 유물관이 있기 때문에 늘 CC TV가 켜 있다. 도무지 종가집과 어울리지 않는다. 대청의 창문틀은 삼각형으로 끼여져 있는데 이는 고려때의 양식이라고 귀뜸해준다.
서까래와 문은 세월을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권영기선생님이 특별히 집안의 보물인 대동운부군옥을 보여주셨다. 유물관의 보안벨이 여러번 울렸고 여러겹의 문을 열고 나서 기어코 가보를 꺼냈다. 그 과정이 더 숨을 죽이게 만든다. 이 가보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대동운부군옥. 우리나로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지리, 나리명, 성시 인명, 효장, 열녀, 나무, 산이름, 나무이름, 꽃이름, 동물이름등 11개 항목으로 분류하고 단군시대부터 조선선조에 이르기까지 여러사실을 운자 차례로 배열되었다.
모놀가족들의 표정이 더 애처롭다. 귀한 것을 보여주신 어른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놀가족 모두가 자랑스럽다.
권영기 선생님. "뭐 볼 것이 있다고 우리집에 오니껴?" 그러나 어른은 예복까지 갖추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고 종택의 아름다움과 역사를를 차분히 설명해주신다. 가풍이란 것이 참 멋지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500년동안 내려왔던 기품이 느껴지니 말이다. 오블리스 노블리제
신선의 세계-초간정 초간 권문해 선생은 49세에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 예천땅에 은거하면서 초간정을 지어 불세출의 명작인 대동운부군옥을 완성하게 된다. 예천권씨 종택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왜 선생은 이리 먼 곳에 정자를 만들었을까? 바로 앞에도 경치 좋은 곳이 많을 터인데.... 선생이 다녔던 오솔길은 이미 없어지고 지금은 농로만 남았다고 한다. 호젓한 산길을 거닐면서 풀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위대한 자연을 배우고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정신적인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그는 신선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s' 자와 'ㄴ' 자로 꺽어지는 물줄기. 작은 금강산인 돌산, 폭포....울창한 나무, 그 한가운데 막돌을 쌓아 기단을 만들고 정자를 세웠다. 누구라도 이곳에 며칠 머물면 근사한 글이 술술 나올 것만 같다.
용선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용문사 백두대간 자락에 자리잡은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때 두운조사에 의해 개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두운조사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산 정상 바위에서 용이 나타나 영접했다고 하여 용문사라고 했고, 태조 왕건이 이곳을 찾았을 때도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회룡포도 그렇고 예천은 용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용문사가 3곳 있는데 양평 용문사는 용의 머리, 예천은 용의 심장, 남해는 용의 꼬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한 전체가 용인 셈이다.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은 대장전(보물 제 145호)다. 맞배지붕 건물로 고려 명종 3년때 건물이라지만 이견을 제시하는 학자가 많은 모양이다. 측면을 보면 풍판을 달지 않고 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거조암의 영산전이나 수덕사의 측면을 보는 듯하다.
물고기를 물고 있는 귀면상은 화재를 막는 벽서의 역할을 한다.
기둥에 붙어 있는 붕어상. 염불 듣는 것을 좋아해서 아미타부처의 화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돌리면 극락갑니다.-윤장대 세계적으로 유일한 윤장대가 없다면 용문사에 일부러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인도고승이 대장경을 용궁에 소장했다는 고사가 나온다. 용이 나타난 이곳에 대장전을 짓고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축원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대장경을 보관하는 용도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고려 명종(1173년) 자엄스님이 처음 윤장대를 조성했으며 대장전 내무 좌우 일자로 모셔져 있다. 좌우의 크기나 모양은 같으나 창호의 형태가 서로 달라 음양의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천장과 마루에 축이 고정되어 있으며 이걸 돌리면 부처님의 법이 시방에 퍼지게 되고 우리나라 지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와 풍년이 들라는 의미가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돌리면 과거급제와 죽었을 때 복을 얻은다고 한다. 예천 사람들중에 판검사가 많이 나오는 이유 역시 윤장대 때문이라고 은근히 자랑을 늘어 놓는다. '나도 돌려 말어.'
층층히 쌓아놓은 포작도 볼 만하지만 꽃창살을 감상하는 것이 좋다.
용궁이나까 물고기가 노닐어야지. 연꽃아래 연못속에 꼬리를 흔들며 유영하고 있다. 그 율동감이 참 좋다.
서쪽윤장대는 화려한 꽃창살인 것에 반해 동쪽 윤장대는 단아한 빗살무늬다.
용문사 후불목각탱 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각탱(보물제 989호)는 우리나라 후불 목각탱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남장사, 대승사 목각탱도 이곳을 본땄다고 한다. 상하가 긴 장방형으로 좌우에 구름광선을 표현하고 있으며 중앙 본존불은 보상당초문이 새겨졌고 오줌쌀 때 들고 다니는 키형 광배를 가지고 있다. 사천왕의 익살스런 모습도 새겨져 있으며 좌우 2 보살씩 8대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목각탱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다.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 왼쪽은 대세지 보살이다.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은 안락과 평온의 극락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아미타불이 한 가운데 모셔져 있다.
용문사 사천왕상은 웅장하고 화려한 조각품으로 알려져 있다.
자운루는 조선중기의 건물이며, 임란때 이곳에서 승별들을 지원하기 위해 짚신을 반들어 조달했던 신발공장이었다. 누각아래는 스님들의 겨울식량인 시레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밖에 권상노박사, 안진오스님등을 배출한 영남제일강원이 있으며 영조때만들어진 범종, 응진전, 원통전도 둘러 볼 만한 곳이다.
이순신을 살려낸 약포대감을 모신-도정서원 반대파의 모함으로 감옥게 간 이순신장군이 죽음 일보직전에 목숨을 구해낸 분이 좌의정 정탁대감이다. 그후 이순신은 권율휘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여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12척의 배로 적을 무찌르게 된다. 만약 정탁선생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도정서원은 약포 정탁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인조때 세운 사당이다. 그 후 사림과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 강당채를 세웠고 도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997년 동재, 서재등이 복원되었다.
도정서원의 가장 큰 볼거리는 유유히 흘러가는 내성천이다. 옛성현들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공부가 되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읍호정을 들어가는 곳에 揖仙基 라고 새겨진 바위가 담 한 가운데 놓여 있다. 신선에게 배알하는 기초석이다. 선현들은 이곳 정자에서 내성천을 굽이보며 도인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가파른 경사면을 깎아 강물을 뜰 듯이 강 가까이 세웠다.
고목. 약포선생의 셋째아들 청풍자 선생은 당대 이름난 성리학자이자 초서의 대가란다.
단체 60명이 드나드니 강아지가 먼저 목청을 높인다. 그리고 나서 서원지기가 우릴 맞이한다. 약포선생님을 소개해주시고 봄가을 제사지내는 이야기도 구수하게 해주신다. 일부러 약포사당 문을 따서 위패까지 보여주셨다. 유교가 다 죽어갔다고 애석해 하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송구스럽기 까지 한다.
오늘따라 '道正' 이란 글씨가 유난히 힘차게 느껴진다.
괴짜원장님 천호예술원 일정에는 없지만 천호예술원을 꼭 들르고 싶었다. 괴짜로 소문난 최도성원장님을 꼭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뭐 몰 것 있다고 우리집에 옵니까?" "선생님의 조각작품 보고 싶어서요." 물의 고장 예천사람처럼 물흐르듯 사시는 분이다. 교실마다 작업실을 만들어 놓아 창작열에 불타는 신인작가들의 작품산실도 제공하고 있다. 운동장에 놓여 있는 작품 하나 하나 둘러보는 맛이 그만이다. 웅장한 백두대간을 볼 수 있다.
불교유적지, 향교, 서원에다 현대미술까지...예천에서 시공을 초월한 미술을 감상하게 된다.
탐욕으로 빠지게 한 개심사지 5층석탑 나는 늘씬한 미녀가 논길을 거닐고 있는 줄 알았다. 마음을 열리게 하는 탑이 아니라 탐욕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게 하는 탑이었다. 은은한 석양빛을 받은 부조는 황금빛 개금을 한 부처처럼 화려하다.천 년을 지켜온 수문장의 연륜이 느껴진다.
조각을 보면서 고려무사를 상상해본다. 도깨비 방망이도 보였고 무시무시한 철퇴도 있었다. 마장가제트에 나옴직한 8명의 무사들은 화려한 갑옷을 감상하는 것도 즐겁니다. 저 정도 세련미라면 밍크코트 모델을 해도 좋으련만.... 하층기단. 관복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십이지신상과 대비가 된다.
예천을 떠나며 예천에는 화려한 볼거리는 없다. 그러나 말초적인 콜라맛보다 은근한 식혜가 더 좋다면 예천 땅을 밟아라. 곱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오는 유물들이 곳곡에 산재해 있어 자꾸만 발길을 닿고 싶은 곳이다. 내가 꿈꾸는 면의 고향은 바로 예천땅이 아닐까 자꾸만 나이를 먹을 수록 젊은 아가씨보다 배불뚝이 마누라고 좋고, 화려함보다 이런 소박미가 편안하고 옛스러움이 더 그리워진다. 아마 세파의 때가 자꾸만 쌓여서 내마음이 자정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이제 예천땅을 벗어나야 한다. 마지막 개심사탑을 뒤로한 채 논길을 거니는데 왠지모를 서글픔이 복받쳐 오른다. 순박한 고향 처자를 놔두고 치열한 도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들어가는 것처럼 서글프다.
1.승용차 서울-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 -함창점촌 IC-34번국도-예천 (2시간 30분소요) 2. 버스 동서울→예천=1일 13회 운행(06:20∼18:40). 3시간 소요 3. 예천군청 홈페이지: http://www.yecheon.go.k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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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천에 다시 다녀 온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참..좋다~~노래도 어쩜 저렇게 청승맞은 ㅎㅎ 너무 좋네요. 역시 대단하세요~~~너무좋아요~~감동 가득안고 나가요~~^^
이제는 예천사람보다 예천을 더 많이 아느건 아닐까?..대장님 예천답사자료 보면서 구경다녔더니 누가 예천에 대해 물어보면 설명해줄 수 있겠더라구요! 좋은곳 알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예천답사도 잘 다녀오신 듯 하구요. --------- 道正 -----
예천에 대해서 이토록 상세히 올려주셨네요.. / 이 자료 하나 복사하고 싶어요....
답사는 비록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대장님의 글과 사진을 통해 예천에 대해 더 많은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요즘 하는일이 바쁘다 보니 자주 찾아 뵙지못해 죄송하고 이참에 어머님의 빠른 쾌유와 정수 어머니의 생일 마음속으로 축하드리며 나서는 백두산 장정 조심히 잘다녀 오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