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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마르코 16,9-15
이런 상황에도 안 믿으면 그냥 악하여서
세상에는 우리를 속이려는 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도 여러 번 속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속이려고 하는 것을 알아서 주의하는데도 속습니다.
저희를 속이려 하는 이들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강한 이들입니다.
그 속임수가 들통나더라도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놓고 속입니다.
한 번에 목숨을 거는 사기꾼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권력이 있고 돈이 많은 이들이 사람을 잘 속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빵 하나 훔쳐도 큰 벌을 받지만, 힘 있는 이들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속적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은 돈과 권력을 노리고 속입니다.
혹은 결혼하기 위해서도 속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익이 없이 속이는 예는 없습니다.
수산나를 죽이려던 두 노인은 자기들의 분노를 풀기 위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설득력 있는 말로 속입니다.
설득력은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쓴다는 것입니다.
보이스 피싱과 같은 경우는 좀 황당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갑자기 사고가 날 수도 있고 부모님이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긴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세 번째와 비슷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누가 들어도 타당한 말로 사기칩니다.
만약 보이스 피싱을 하는데, 자녀가 지금 달나라에 가서 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황당한 주장으로 속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활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 자체가 악한 마음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죽어서 “당신이 나타나지 않아서 안 믿었어요!”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증언은 절대 누군가를 속일 수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내용들입니다.
첫 번째 이 주장을 한 이들은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당시 숫자에도 들지 않는 여인들이었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도단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잘못 주장했다가는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뒷일도 보지 않고 자기주장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사기꾼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부활의 증인들이 그 주장을 해서 세상에서 얻는 이익이 있을까요? 사도들도 안 믿는데 무슨 이익을 볼까요? 이미 세상은 권력자들에 의해 부활에 대한 말을 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한 이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건 속임수일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이들의 주장은 일관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그냥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예수님이나 천사가 나타났는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주장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그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성적 조작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세상 창조 이래 가장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부처까지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고 하고 죽었는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여기저기서 나타난다는
말은 우리 자녀가 달나라 가 있다고 하는 말보다 당시에는 더 황당한 주장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냥 죽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부활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속임수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그래도 안 믿는 것은 믿기 싫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이 인간이 될 수 없고 또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내 생각이 틀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의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 “네가 하는 말에 네 목숨을 걸 수 있어?”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약자들이 세상 이익과 상관없이 비이성적인 가장 황당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진실일 확률이 그 무엇보다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황당한 주장으로 이미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으면, 그건 그냥 믿기 싫은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6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마르코 16,9-15
부활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등장 앞에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대체로 소극적인 동시에 회의적입니다.
우선 보이는 반응은 ‘설마’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절대 그럴 수 없어’ 같은 불신이 바닥에 깔려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앞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최초 목격 증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의 코앞에 발현하신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엠마오를 향해 길을 걸어가던 두 제자는 자신들의 대화 사이로 끼어든 부활 예수님을 그저 같을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던 나그네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의 예수님 모습과 그 이후의 모습이 꽤나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긴가민가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할 수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맞다.”고 먼저 알려주셔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부활이란 것이 인류 역사 상 전무후무했던 대사건이었기에 인간적인 사고나 눈으로는 절대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거의 모든 사람들,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들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답답했던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다음 죽어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그런 준엄한 꾸지람을 들어도 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당신이 몸소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에 대해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당신의 부활 사건을 향한 불신과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제자들이 너무나 한심하고 답답했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강하게 제자들의 불신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싶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역점을 두고 노력을 기울일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적 시각, 감각적 시각, 세속적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불신과 의혹을 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순수하게 정화된 신앙의 눈, 맑고 깨끗한 마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픈 간절한 염원, 이를 통한 삶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최초로 목격한 요한 사도와 베드로 사도는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의 이동, 빈 무덤 속에 남아있던 아마포와 얼굴 수건을 통해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을 배양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옆으로 굴려진 돌, 아마포, 얼굴 수건은 예수님 부활을 알리는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스쳐지나가는 작은 몸짓 하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요한 사도와 베드로 사도였기에, 그분께서 남겨주신 작은 표시 하나만으로도 그분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던 제자들 위로 주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의혹과 불신을 강한 신뢰심과 투철한 믿음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권력가나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끝까지 달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으로 다양한 주님 부활의 표지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 안으로 던져주시는 그 사랑의 표지들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그래서 부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미약한 신앙을 좀 더 키워나가는 노력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강론>
(2024. 4. 6. 토)(마르 16,9-15)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9-15)”
1) 여기서 ‘믿지 않았다.’ 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사도들 자신들에게도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인데, 이 고백은, “지금은 확신하고 있다.” 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11절의 ‘믿지 않았다.’ 라는 말을 9절의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라는 말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가 됩니다.
막달레나의 과거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 때문에
그의 증언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았다는 말을 10절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이라는 말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사도들의 슬픔이 너무 커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못했다.”가 됩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의 경우도 비슷한데, “사도들은, 그 두 사람이 열두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사도가 아닌 사람들이다.” 라는 편견과 선입관이 작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사도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도들의 편견과 선입관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2)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면, 그런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
분명한 이유는 모르지만, 사도들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막달레나와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는 뭔가 사도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요한 20,29) 세상 사람들에게, 즉 예수님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먼저 사도들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로 훈련시키셨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먼저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어떻든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한테 혼났기 때문에 억지로 믿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보다 먼저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던 사도들의 경험은,
나중에 선교활동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증언’은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 아닙니다.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증언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믿는다. 그러니 너도 믿어라.” 같은 일방적인 태도로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증언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삶’입니다.
삶 전체가 변화된 사람만이 복음을 선포할 자격이 있습니다.
4)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 사명’을 주신, 즉 사도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그 사명을 주신 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완전히 극복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은 글자 그대로 ‘온 세상’입니다.
복음 선포 대상에서 제외되는 지역은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라는 말은, 동물들과 식물들을 포함해서 자연계 전체,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만일에 ‘하느님 나라’에, 구원받은 ‘사람들만’ 있고 동식물은 전혀 없다면, 그곳이 과연 ‘하느님 나라’일까?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사람들과 온갖 동물들과 온갖 식물들과 온갖 자연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완전하게 아름답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전에 정말로 사랑하고 아꼈던 ‘반려 동물들’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보호와 생태계 보전을 위한 노력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