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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썸&산] 백아도, 감미로운 절경에 갇혔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6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월간산 기사 입력일 : 2022.06.10.
덕적군도의 숨은 보석, 해안선과 미니 공룡능선 취재 르포
본지는 블랙야크·인천관광공사와 협업하여 인천의 섬을 새롭게 조명하는 ‘인천 썸&산’ 연재를 새롭게 시작한다. -편집자 주
이윽고 정적이었다. 시끌벅적하던 객실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굴업도의 인기를 새삼 실감하자, 나래호는 한층 가벼운 몸짓으로 다음 섬으로 향했다. 어느새 나이 들고, 사람 떠나보내는 게 이런 기분일까. 덩그러니 남아 빈 공간을 삼키노라면, 덧없는 파도와 애틋한 파도가 번갈아 출렁이며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인천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10분,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고 1시간 20분. 파도에 일렁이는 몸 하나 감당키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때쯤 백아도였다. 이번 산행의 주인공 오혜진(@genieriding), 김지영(@hello.young)씨가 첫발을 디뎠다.
설렘보다는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아침 배를 놓치지 않으려 새벽부터 일어나 이어온 여정. 6년차 자전거 라이더인 오혜진씨는 이제 막 등산의 즐거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백패킹 5년차이자 블랙야크 의류팀 직원인 김지영씨는 명산100 중 절반을 오른 등산마니아다.
안도감 드는 첫인상이다. 몰디브처럼 투명한 바닷물, 모히토처럼 상큼한 신록. 낮지만 다정다감한 풍경이었다. 우리 말고도 함께 내린 여행객 3명 더 있었으나, 산행 채비를 하는 사이 모두 사라졌다. 파도 소리만 남은 세상. 지도의 서쪽 끝에 온 듯 고요했다.
붓으로 칠한 것 같은 파랑에 살포시 섬 몇이 얹혀 있었다. 구름처럼 고즈넉하게 덕적군도는 흘러가고 있었다. 이토록 강렬한 적막감이라니, 자연 그대로의 고요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맘모스 바위와 빠삐용 절벽
‘흰 상어 이빨을 닮았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는 백아도 등산 안내판 옆으로 산길이 담백하게 나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착장에서 도로를 따라 ‘백아도 공룡능선’으로 불리는 남봉으로 곧장 가지만, 우리는 선착장부터 산줄기 따라 종주하는 느린 방법을 택했다.
자연미 있는 희미한 산길이 백아도의 첫 인상과 잘 맞아떨어진다. 정비를 하지는 않았으나 잊을 만하면 이정표가 있고, 조금 희미하지만 명료한 산길이다. 문득 다가오는 여인의 향기, 분꽃이 분홍 팡파르를 터뜨렸다. 분꽃나무 자생지로 유명한 섬답게 아찔한 향기가 진동한다. 보라색 붓꽃, 흰색 봄맞이꽃, 노란색 애기똥풀도 피었으나, 물량으로 쏟아 붓는 분홍의 화려한 고백에 미치지 못한다.
오르막을 쳐 오르자, 분꽃의 작전을 알 것 같다. 호흡이 깊어지며 몸이 향기로 차올라, 속된 속내가 분홍으로 물든다. 강제로 흠뻑 향기에 젖어 발끝까지 이어지는 아찔한 감각의 천국. 아무도 모르는 섬에서 홀로 황홀하다는 고마운 착각, 백아도의 선물이다.
경치는 없고 삼각점만 있는 봉우리를 넘자 슬그머니 고도를 내리며 숨결을 가라앉힌다. 그러곤 다시 오르막, 100m대 능선의 고춧가루는 힘들기보다 맛있게 매콤하다. 이 정도 오르막도 없었다면 몸이 개운하지 않았을 터.
먹을 수 있는 취나물뿐만 아니라 독성을 지닌 천남성도 지천이다. 숲의 식구가 단순한 보통의 섬과 달리, 의외로 보물 같은 식생이라 경치가 없어도 산행의 재미는 떨어지지 않는다.
능선의 흐름이 슬쩍 꺾어지는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지능선 벼랑 숲에 희미한 산길이 있다. 나무 그늘 아래 식사 터와 모처럼 나타난 바위. 점프를 해야만 오를 수 있는 바위에 올라서자 바람이 와락 안겨온다. 지상의 파랑과 하늘의 파랑이 만나는 단순명료한 풍경. 먼 허공 건너오느라 ‘외로워 죽을 뻔했다’며 참아온 속내를 풀어놓는 바람. 가만히 바람 앞에 서 있었다. 백아도 토박이가 된 것 같았다. 젖은 마음, 바람에 마르며 걸음이 갈수록 명랑해졌다.
축제는 지금부터다. 경치에 인색한 육산 능선인줄 알았는데, 맛깔난 경치를 푸짐한 밥상으로 차려 낸다. 벼랑 앞에서 확 터지는 백아도 산줄기. 아담하게 첩첩기묘하다.
조각 같은 해안절벽, 낭만적인 산벚꽃, 지리산 주능선처럼 뻗은 선명한 산길, 더 이상 섬이 없는 망망대해. 하루 한 편뿐인 배는 떠났고, 등산객은 우리뿐이다. 섬 산행 특유의 행복이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들판을 지나 굵고 짧은 오르막을 삼켜내자, 벼랑 끝에서 만나는 작품. 그동안 꽁꽁 숨겨둔 해안선이 드러나며, 맘모스 닮은 거대한 암봉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드라마틱하게 뻗은 커튼 무늬의 절벽, 당장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이 나타나 “이놈들아!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고함지르며 바다로 뛰어들 것 같다.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 같은 여운이 있는 풍경. 100m대 산에서 누리는 호사치곤 과하다.
탑이 있는 봉우리, 탑은 무선기지국 시설이다. 폐허가 된 막사 건물로 봐서 분대 병력의 부대가 상주했던 것 같다. 풍력발전기 3개가 쉬지 않고 돌며, 기지국 전력을 감당한다. 그래서인지 폰이 잘 터진다.
하산길 같은 내리막을 내려서자 드디어 남봉 입구의 도로. 이제야 시작된 만찬의 시간, 조금 지친 혜진씨와 지영씨를 북돋아 산길로 든다. 200m 만에 나타난 공룡은 저돌적이다. 예열 없이 곧장 화려한 바위능선으로 산꾼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고도감 있는 절벽과 파스텔톤 바다, 기암능선이 들려줄 능선 마디마디가 궁금해 참을 수 없으나, 해는 기울고 바람이 차갑다. 적당한 터에 텐트를 치고 배낭을 푼다. 식은 도시락이 이토록 맛있던가, 서로 맞장구치며 초라하지만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저녁을 음미한다.
희멀건 아침. 깔끔한 해돋이는 없으나 어제보다 맑은 오늘이다. 간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남봉 정상으로 향한다. 어렵지 않은 바윗길에 아리따운 낭떠러지의 연속이다.
오른쪽으로 수평선만 펼쳐지고, 왼쪽으로 덕적군도의 섬이 섬섬옥수의 손으로 놓은 바둑돌 같다. 만날 수도 이별할 수도 없는 섬들의 간극에 귀 기울이면, 웅장한 고요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만 같았다. 감미로운 절경의 섬에 갇힌 듯, 기분 좋은 고립감이 들었다.
남봉 정상은 옹색하나, 지나온 용의 등걸을 한눈에 보여 주었다. 정상에서 바다 쪽으로 진행하자 예상 못 한 선물이 있다. 백아도 부속섬인 오섬이 만개한 꽃처럼 예쁘장한 색감으로 에메랄드빛 바다에 솟았다. 산벚꽃, 소사나무 신록이 버무려져 기념사진을 찍기 제격이다.
다시 공룡능선을 타고 돌아가는 길, 백상어의 이빨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걸음이 느려졌다. 하루 한 편뿐인 배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백아도가 계속 물어온다. ‘진정 나를 두고 가나.’
친절하게 뻗은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인데, 섬에 갇혔다.
백아도 가이드
인천항이나 안산 대부항에서 배를 타고 덕적도로 와서, 덕적군도를 순회하는 나래호를 타야 한다. 하루 한 편뿐인 나래호가 12시 45분에 닿으면 백아도 여행이 시작된다. 다음날 12시 45분 덕적도행 배를 타고 떠나기까지 24시간의 여유가 있는 것.
도로 따라 3km를 걸어 남봉으로 곧장 가거나, 선착장부터 산길을 따라 종주하는 방법이 있다. 제대로 백아도를 둘러보려면 산길을 따르는 것이 낫다. 능선의 고저가 있으나 100m대 능선이라 오르막이 짧다.
남봉 공룡능선에서의 야영을 최고로 꼽지만, 텐트를 칠 넓은 야영 터는 없다. 1~2인용 텐트 한두 동 칠 수 있는 공간이 드문드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인 야영 터는 남봉 직전, 도로에서 875m 진행한 지점의 마당바위 위다. 알파인 텐트 4~5동은 충분히 칠 수 있다. 텐트 펙을 박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므로 주변 돌을 활용해야 한다. 바닷바람에 노출되고 벼랑 곁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선착장에서 산길을 따라 종주할 경우 남봉 입구 도로까지 4.3km이며, 여기서 남봉까지 1.2km이다. 남봉 정상은 협소해 텐트 치기 어렵고 오섬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터에 1~2인용 텐트 한 동 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남봉 공룡능선은 로프를 준비하지 않아도, 암릉산행 경험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 다만 초반 바윗길은 왼쪽 우회길을 따르면 남봉까지 산행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BAC 인증지점
남봉 정상 N37 04.224, E125 56.895
[백아도 플러스 가이드] 매일 12시 45분부터 시작되는 백아도 여행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6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월간산 기사 입력일 : 2022.06.10.
야영 터, 백아도행 배편, 민박 가이드와 쓰레기 줍기 활동
백아도는 덕적군도의 숨은 보석이다. 인천 앞바다의 공룡능선으로 손색없는 남봉, 거대한 맘모스 바위, 서정적인 해변과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있어 굴업도를 잇는 새로운 스타 섬이 될 가능성이 높다.
홀수 짝수날에 따라 소요 시간이 다른 굴업도와 달리, 백아도는 12시 45분에 항상 도착한다. 배편이 하루 한 편뿐인 걸 감안하면 무조건 1박해야 구경할 수 있다.
남봉 능선은 화려한 경치가 있는 최고의 야영 터지만, 좁은 바위능선이라 굴업도처럼 많은 텐트를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넓은 남봉 직전의 마당바위에도 4~5동 정도가 한계다.
그외에는 1~2동 정도 위태롭게 칠 수 있다. 망망대해에 노출된 바위능선 특성상 강풍에 노출되며, 터가 좁고 텐트 펙peg을 바닥에 고정할 수 없는 환경이다. 야영 터에 따라서는 펙을 고정할 돌도 없어, 주의해야 한다.
인원이 많으면 백아도해변에서 야영하는 것이 좋다. 백아도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인 이곳은 섬 내 유일한 공공화장실이 있고, 선착장에서 1.3km로 비교적 가깝다. 다만 뙤약볕에 노출되므로 타프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민박도 괜찮은 선택이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이곳 특성상 인심이 좋은 편이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보건소마을과 남봉 부근의 발전소마을이 있으며, 각각 민박이 있다. 민박에서 식사 (백반 1인분 1만 원) 가능하며, 방 하나 1박에 6만 원이다. 민박 예약 시 차량이 선착장에 마중 나온다. 보건소마을 해변민박(010-5251-0768), 발전소마을 큰마을민박(032-834-8663). 별도의 슈퍼나 마트, 식당 같은 편의시설은 없다. 덕적도 선착장 앞에 농협 하나로마트가 있으므로 백아도행 배를 타기 전에 이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야 한다.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과 안산 방아머리선착장에서 덕적도행 배편이 운항한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쾌속선 코리아나호·코리아스타호는 1시간 10분 걸리며, 차도선인 코리아익스프레스카훼리는 1시간 50분 걸린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쾌속선이 아침 8시에 출발하며, 평일은 8시 30분에 출발한다. 왕복 요금은 4만8,100원.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차도선은 주말 8시 30분, 평일 9시 10분에 출발한다. 왕복 요금은 3만4,500원.
덕적도에서는 덕적군도의 여러 섬을 순회하는 나래호가 매일 오전 11시 20분에 출발, 백아도에 12시 45분에 도착한다. 왕복 2만3,000원. 덕적도에서는 쾌속선이 오가는 선착장과 차도선을 타는 선착장이 300m 떨어져 있다. 간혹 쾌속선 선착장에서 나래호를 기다리다 배를 놓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나래호 표를 발권하는 매표소는 별도의 컨테이너 건물이다.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 하루 주차료는 1만 원. 주말에는 배편이 빨리 마감되므로, 미리 예약해야 한다. 모바일 승선권을 발급 받으면 편리하며, 신분증을 준비해야 한다.
백아도 취재 산행에 참가한 오혜진·김지영씨는 클린마운틴 활동을 했다. 산길에서는 쓰레기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찻길과 해수욕장에서도 쓰레기는 거의 없었다. 다만 대촌선착장에서 보건소마을로 이어진 찻길 옆 좁은 해안선에 밀려온 쓰레기가 있어 수거 활동을 했다. 아직 백패커들의 발길이 드물어서인지 야영 명소인 공룡능선 마당바위에서는 쓰레기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처럼 흔적 없이 다녀가는 방문객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천 썸&산 트레킹 챌린지!
인천 관내 16개 섬 인증 프로젝트
블랙야크와 인천관광공사는 ‘2022 인천 썸&산 트레킹 챌린지’ 이벤트를 4월 25일부터 12월 10일까지 진행한다. BAC 앱을 활용해 인천광역시에 속한 16개 섬을 인증한 회원에게 섬별로 블랙야크 500코인을 지급하고, 5좌(5개 섬 인증), 10좌, 16좌를 달성할 때마다 신청 기준 선착순으로 기념품을 증정한다. 단, BAC 앱 ‘클린마운틴’(섬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되가져오는 친환경 캠페인) 활동을 1회 이상 인증해야 한다.
5좌 기념품은 로고가 새겨진 패치(500명 지급)이며, 10좌는 패치와 인천투어패스(180명), 16좌 20명에게는 패치와 친환경 블랙야크 크로스백을 지급한다. 대상지 16개 섬은 교동도, 굴업도, 대이작도, 대청도, 덕적도, 무의도, 문갑도, 백령도, 백아도, 석모도, 승봉도, 신도, 연평도, 영흥도, 자월도, 장봉도이며, 기념품 신청은 12월 10일까지 BAC 앱 이벤트페이지 내에서 가능하다.
시간이 멈춘 섬, 백아도(白牙島)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19.11.04.
천영기의 인천 섬 기행
백아도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굴업도가 부드러운 능선으로 무엇이든 품어줄 것 같은 섬이라면, 백아도는 남봉의 기세가 날카로워 호탕한 기상을 마음껏 뿜어내는 섬이다. 굴업도가 백패킹의 명소로 알려지면서 백아도는 점점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다. 예전에는 다섯 집 정도에서 민박을 운영했는데, 지금은 세 집밖에 없다. 예약하지 않고 갔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백아도 관광객은 섬의 아름다움에 비해 적은 편이다. 한적한 여유와 원시의 냄새, 적당한 운동 효과, 기기묘묘한 해안절경을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백아도를 추천한다.
트레킹을 즐기거나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 산나물을 채취하려는 사람이 주요 관광객이다. 섬 주민들에게 소득이 될 수 있는 더덕이나 산나물을 싹쓸이하는 관광객 때문에 주민들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보건소 마을’ 숙소로
백아도의 옛 지명은 ‘대동지지’ 덕적도진 항목에 배알도(拜謁島)라고 기록돼있다. 섬 모양이 허리를 굽히고 절하는 것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라 전해진다. 덕적도를 비롯한 섬 사람들은 ‘빼아리’ 또는 ‘삐알’이라고도 부른다. 1910년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백아리(白牙里)로 기록돼 있는데, 섬 모양이 상어 이빨을 닮았다고 해서 백아도(白牙島)로 고쳐 배알도를 대신했다.
굴업도를 지나 백아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섬 끝에 위치한 장군바위가 반긴다. 부인이 바다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이라는데, 그렇다면 망부석일 것이다. 그리 큰 형상이 아니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선착장에 도착하기 전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기차바위다. 선착장 옆 기차는 바다 위를 달리려 힘을 비축하고 있다. 의문을 품지 말자. 은하철도999는 하늘을 날아다녔는데 바다쯤이야. 섬을 여행하면서 만나는 재미 중 하나는 파도와 세월에 깎여 만들어진 기기묘묘한 바위들을 보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형상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해안 방파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보건소 마을에 도착하는데, 양지바른 언덕 위에 빨강과 파랑 등 원색으로 지붕을 칠한 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을 예전에는 ‘어르금 마을’이라 했는데, 백아도에서 가장 끄트머리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작은말’이라고도 부른다. 개량주택들로 바뀌었지만, 돌담은 옛 흔적이 남아있어 정취를 돋운다.
숙소인 해변민박의 음식은 정갈하다. 겉절이ㆍ무생채ㆍ깍두기와 생굴이 기본으로 깔리고 때마다 생선구이ㆍ전ㆍ찌게 등이 조금씩 바뀐다. 이렇게 깔끔하게 반찬이 나오는 섬 민박집은 처음이다. 다들 섬의 토속적 맛이 구수한 느낌이었다면, 이 집은 입맛을 다시는 상큼함이 주인아주머니의 성품을 닮은 것 같다.
백아도 옛집의 흔적
백아도가 한창 성세를 이룰 때는 90여 가구에 달했는데, 지금은 20여 가구만 남았다.
자식들은 육지에 나갔고 거의 노인만 기거하고 있다. 전문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없다. 쇠락해가는 마을, 집들도 개량주택으로 바뀌어 과거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돌담은 그대로 남아 있어 과거로 거슬러 가게 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인간은 시공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상상으로 시공을 초월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개량주택 지붕을 지우고 띳집을 생각한다. 터덜터덜 과거로 걸어 들어간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강렬한 원색의 지붕이다. 기와를 저렇게 원색으로 칠할 수 있을까 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플라스틱 기와다. 아마도 비용절감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 눈길을 사로잡는 건 돌담이다. 큰 돌, 작은 돌, 자잘한 돌들이 어울려 견고한 담을 이룬다. 그 돌틈 사이로 담쟁이 넝쿨이 우거져 균형을 맞추며 세월을 덧칠한다.
집터를 닦으며, 밭을 갈면서 나온 돌들을 이용해 담을 만든 수고로움 덕분에 지금 눈이 호사를 누린다. 집터를 닦으며 들어낼 수 없었던 커다란 바위 위에 돌담을 그대로 올린 것은 더욱 정겹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이 허술한 것 같지만 오히려 더 견고하다. 구멍으로 바람이 빠져나가고, 바람이 지나가며 돌들은 더욱 견고하게 맞물린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서서히 체득한 결과물이다.
마을을 돌다가 한 곳에 눈이 머문다. 지붕선이 교묘하게 산 능선과 맞아떨어진다. 목수의 의도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절묘하다. 잠시 넋을 놓고 본다. 대목들이 지은 웅장한 사찰 건축에서 가끔가다 만나는 장면을 이곳에서도 만나다.
백아도 남봉으로 가는 길
이 섬이 좋은 이유는 바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터덜터덜 느리게 걸어도 된다. 보건소 마을에서 발전소마을로 가는 길은 섬의 가장자리를 깎아 해안도로를 냈다. 혹자는 섬의 풍광을 해치고 자연을 파괴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섬 주민들에게는 생계와 생활의 편리함이 직결되는 문제다.
보건소 마을에서 해변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니 모래사장 뒤로 백아분교 터가 나온다. 1933년에 개교해 백아도가 성세를 이룰 때는 학생 150여 명이 다녔다는데, 해군부대가 철수하고 학생들이 인천 뭍으로 중ㆍ고등학교 진학을 한 후 섬으로 돌아오지 않아, 1996년에 문을 닫았다. 1970년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던 산업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섬에 갇혀 육지를 그리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유학은 달콤한 유혹 그 이상이었으리라. 이제 섬들도 사라져가는 향수 속 존재가 될 것 같다. 마치 해무 속에 숨어있다가 희끗희끗 드러나 자태를 뽐내는 아련함이 아닐는지.
계속 터덜터덜 남봉을 향해 간다. 굴곡진 길 한쪽에 차량 안전거울이 꺾여 있다.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간 것 같다. 태풍이 심하게 불면 지붕이 날아간다 하니, 섬사람들의 생존 투쟁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길을 내면서 생긴 절벽에서 해국이 방실 웃는다. 어느새 주인 아주머니가 해안 끝에 오셔서 굴을 캐고 있다. 우리 저녁 반찬을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저녁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 해안도로가 끝나고 발전소 마을로 가는 길에 해삼 종묘장이 있다. 봄에 사먹는 해삼은 별미다.
해삼 종묘장부터 남봉으로 가는 길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하다. 아무 생각 없이 타박타박 걸어간다. 좌우에 늘어선 나무들과 풀이 뿜어내는 냄새, 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길에서 태고의 울림을 맛보는 나는 누구인가. 나무가 됐다가 풀이 됐다가 다시 그들이 뿜어내는 진한 냄새에 취해 두둥실 떠간다.
공룡능선 남봉암릉으로
발전소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왼쪽으로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갑자기 바위들이 가로막고 왼쪽으로 흙길도 나온다. 흙길로 가면 정상에 오르지 못할 것 같아 바위들이 난 길로 갔다. 그 절벽을 오르락내리락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 어느 정도 올라오니 남봉암릉이 까마득히 펼쳐진다. 좁은 평지가 나타날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아찔한 해안 절경이 발목을 움켜잡고 가지말라 한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는 동아줄이 드리웠다. 능선 아래로 까마득히 절벽이 떨어져 내리고 하얀 포말이 절벽에 부딪혀 부서진다. 조심조심 절벽의 끝으로 발을 내딛는다.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찌릿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진다.
절벽을 올라 고개를 들다 깜짝 놀랐다. 멀리 바위 위에 고양이가 걸터앉아 있다. 저게 왜 사람이 오는데도 꼼짝 않고 있지? 간이 철렁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가 돌을 쌓아놓은 것이다. 근시인 내 눈을 탓해야 하나. 암릉에 올라서 왼쪽을 바라보니 해삼 종묘장과 보건소 마을 선착장이 보이고, 바다 쪽으로는 선갑도ㆍ지도ㆍ부도ㆍ울도 등 올망졸망한 섬들이 백아도를 병풍처럼 에두르고 있다. 뒤쪽으론 발전소 마을과 송신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말 멋진 풍광이다.
해안 절벽 끝에 해송이 누워있다. 오랜 세월 거센 바람을 맞으며 뿌리를 바위에 내리고 버티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뿌리를 깊게 내리자. 몰아치는 폭풍우도 해송처럼 비끼며 허리를 한껏 뒤로 눕히고 툭툭 쳐내자. 김주대 시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산정의 어떤 나무는 바람 부는 쪽으로 모든 가지가 뻗어 있다. 근육과 뼈를 비틀어 제 몸에 바람을 새겨놓은 것이다.”
암릉이 거의 끝나는 곳에 소사나무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발걸음을 돌린다. 수직 벼랑을 보며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들다. 등 뒤에서 흔들흔들하는 카메라가 신경 쓰이지만 바위들을 붙잡으며 발을 조심스럽게 딛는다.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더 위태롭다. 다리의 근육에 전달되는 몸의 하중이 버겁지만 아직은 버틸 만하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옹진군 백아도 남봉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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