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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묵상글(강론글). 하나가 되게
1차(260520. 21:20), 2차(05:20 ~ :30), 3차(09:50 ~ 10:15).
21일 묵상글, 20일 21시 2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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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1일 목요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하나가 되게 (요한17,20 ~ 26)
제1독서<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22,30; 23,6-11)
30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바오로를 데리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웠다.
23,6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7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8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9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10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려가 그들 가운데에서 바오로를 빼내어 진지 안으로 데려가라고 부대에 명령하였다.
11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복음<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20-26)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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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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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7,20–26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게 될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어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이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가
당시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 모든 믿는 이를 품는 기도임을 보여 줍니다.
곧 우리도 이미
주님의 이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단순한 외적 협력이나 형식적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친교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하나 됨은
서로 억지로 비슷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사랑 안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사람끼리의 타협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수록 깊어지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라고도 기도하십니다.
이는 일치가
교회 내부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증언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분열된 공동체는 복음을 흐리게 하지만
사랑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말보다 먼저
일치와 사랑으로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별히 깊은 말씀은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어
그들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이는 일치가
인간의 선의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생명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수록
서로를 경쟁과 비교의 눈으로 보기보다
같은 사랑 안에 불린 존재로 보게 됩니다.
하나 됨은 기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에서 자라는 열매입니다.
문화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문화가 무엇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묶는지 묻습니다.
세상은 종종
공통의 적, 공통의 분노, 공통의 욕망으로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진리,
하느님 안의 친교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선동과 과장의 문화가 아니라
절제와 신뢰,
경청과 친교의 문화입니다.
하나 됨은 같은 취향이 아니라
같은 사랑 안에 머무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성모님은
모든 갈등에 곧바로 말로 개입하신 분이라기보다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분이셨습니다.
그 침묵은 무기력이 아니라
하나 됨을 지키는 사랑의 침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분열을 키우는 말보다
일치를 살리는 기도와 침묵을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무엇으로 연결되려 하는가?
공통의 불만인가,
내 편 의식인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인가?
나는 하나 됨을 바라면서도
말과 태도로는 분열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사랑 안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상처와 판단의 생각 안에 갇혀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하나 됨의 영광 안으로 이끄십니다.
주님,
저를 당신 안에 머물게 하시고
분열보다 친교를,
과장보다 절제를,
성급한 말보다 사랑의 침묵을 선택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의 길을 걷게 하시고
제가 만나는 이들 사이에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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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들에게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꼭 묻지 않아도 아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성당은 되도록 가지 않는 것입니다. 군 생활도 비슷합니다. 제대했으면 다시 근무했던 부대로 가지 않으려 합니다. 사제가 전에 있던 성당엘 가지 않으려는 것과 제대한 군인이 다시 부대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비슷하지만 이유는 다릅니다. 제대한 군인이 다시 부대로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군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징병제’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에 입대합니다. 20대의 피 끓는 청춘이 3년간 군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누구나 군 생활에 관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들었기에 더 진한 추억이 되는 것입니다. 사제가 전임 본당에 가지 않으려는 것은 후임 신부님에 대한 배려의 차원입니다. 후임 신부님이 사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특별히 초대받지 않았으면 전임 성당에 가지 않았습니다. 혹 교우들이 후임 신부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후임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4곳의 본당에서 8년 동안 보좌 신부로 지냈습니다. 첫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던 일입니다. 어머니의 정성과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뒤로는 ‘덤’과 같이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2년 동안 본당 신부님을 ‘3분’ 만난 일입니다. 덕분에 사제관을 3번 옮겼습니다. 불필요한 짐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세 번째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사제관’입니다. 성당 신축으로 사제관을 따로 얻어야 했습니다. 사제관에서 성당은 6정거장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미사에 늦지 않도록 늘 긴장하며 지냈습니다. 걸어 다닐 때는 운동도 되고 좋았습니다. 네 번째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본당 신부님’입니다. 책을 좋아하셨던 신부님은 제게 좋은 책을 권해 주셨습니다. 본당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셨고,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번째 본당에서 보좌 신부를 마치고 드디어 본당 사제가 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하나 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나를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내 생각, 내 기준, 내 경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일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갈등과 분열의 시작이 됩니다. 원의 중심이 나 자신이라면, 주변의 모든 점은 서로 다른 거리와 방향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중심이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모두 같은 거리에 서게 됩니다.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을 설명했던 세 명의 심리학자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락’을 추구한다고 했습니다. 아들러는 ‘권력과 우월성’을 추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의미’를 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프랭클은 극한의 상황, 죽음이 가까운 수용소 안에서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쾌락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의미’,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 되려 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 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느님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품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 이념, 생각의 차이로 나뉘고 있습니다. “나와 같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서로 멀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함께 서 있다”라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서로 가까워집니다. 신앙은 나를 중심에 두는 삶에서,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제의 불문율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지 않기 위해 물러나는 것, 다른 이를 위해 자리를 비워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 됨’을 위한 작은 실천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서로 다른 상처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중심에 둘 때, 그 모든 다름은 갈등이 아니라 ‘조화’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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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 됨은 한쪽이 소유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너는 내 것이야.”라고 말하는 관계가 아니라 “내 안에 너 있다.”라고 말하는 관계, 서로 존중하며 함께 있어 주는 관계입니다.
한쪽이 소유하는 관계에서는 소유하고 나면 관심이 식어 버립니다.
소유하면 존중하기보다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일치는 너와 내가 서로 안에 머무는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산헤드린’, 곧 최고 의회 앞에 섰습니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바오로의 한마디에 두 파벌은 다투기 시작합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정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우리는 나뉘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젊은이와 노인, 지역과 인종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기준에 맞추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삼위일체처럼 사람들도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들이 저마다 고유한 소리를 내면서도 하나의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서로 다르시면서도 완전한 일치를 이루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다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며 함께 머무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가 하나 될 때, 세상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내셨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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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하나” 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서로에게 속해’ 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부자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 ‘하나 됨’이란 곧 ‘사랑 안에서 이루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리하여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이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알게 하는 것이 ‘대사제 기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당신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하나’를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나’ 되어 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당신과 함께 있고 하나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 있고, 사랑 안에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서로가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똑같아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 오직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오니,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길 바라오니,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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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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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1 05:21
- 사랑의 갈망과 의지는 있는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바친 기도의 마지막 부분이고,
제자들의 말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된 이들도 하나 되게 해달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신 다음
그들이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심으로써
서로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동의어인 듯 말씀하십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을 때 진정 하나가 됩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우리가 하느님 밖에서 아무리 하나가 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설사 하나 되는 것에 근접했다고 해도 불완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제가 특히 묵상한 것은 현존의식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현존한다는 의식 말입니다.
저로 말하면 이 현존의식이 이젠 확고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저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저는 하느님 안에서 합니다.
문제는 너도 그렇다는 의식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나만 하느님 안에 현존하지 않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 안에서 같이 현존한다는.
그러면서 한번 우리를 솔직히 성찰해야 합니다.
지금 누구하고는 같이 있고 싶은데
다른 누구하고는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닌지.
나는 하느님 안에 현존하고 또 현존하고 싶지만
누구와 같이 현존하는 것은 싫은 것이 아닌지.
또 사랑하는 누구와는 하느님 안에 같이 현존하고 싶지만
싫어하는 사람과는 같이 현존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볼 때 사랑하지 않으면 같이 있을 수 없고,
그 사랑도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같이 있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나의 싫고 좋음을 하느님처럼 초월하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랑이 있는지,
이런 사랑이 현재는 없지만 이런 사랑의 갈망은 있는지,
이런 사랑이 아직은 없지만 이런 사랑의 의지는 있는지,
반성하고 이런 사랑 의지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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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최영근 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id=2132575&menu=477000
성모님의 마음고통, 첫번째
** 성모님의 마음고통, 첫번째
( 마음의 고통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봉헌할것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물과 피를 흘리며 죽으실때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묵상해 봅니다
* 골고타 언덕, 십자가가 있는 풍경을 생각합니다
사랑하시는 아들.. 아무 죄도 없는 아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형벌에 처해져
십자가에 못박혀 물과 피를 흘리시며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성모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다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성부 하느님의 뜻 이라는 관점 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모습을
성모님께서 바라보게 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뜻..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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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모통고 기도 "
- 성모통고 1단
성모님께서 시므온 예언자의 예언을 들으신
고통을 묵상합니다 (누가 2장 34~35).
- 성모통고 2단
성모님께서 이집트로 피난가신
고통을 묵상합니다 (마태 2장 13~15).
- 성모통고 3단
성모님께서 소년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을 묵상합니다 (누가 2장 41~51).
- 성모통고 4단
성모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만나신 고통을 묵상합니다. (누가 23장 27~31).
- 성모통고 5단
성모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고통 당하심을 묵상합니다 (요한 19장 25~30).
- 성모통고 6단
성모님께서 예수님 시신을 품에 안으신
고통을 묵상합니다 (마가 15장 42~47).
- 성모통고 7단
성모님께서 예수님 시신이 돌무덤에 묻히실 때
당하신 고통을 묵상합니다 (누가 23장 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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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통고 기도는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마음의 고통을
묵상하는 기도 입니다
슬프고 아름다운 기도 입니다.
성모님의 삶 중에서 큰 고통을 느끼신 일곱개 사건을
생각해 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사랑하시는 아들의 비참한 죽음,
십자가가 못박히어 물과피를 흘리시며 죽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의 죽는 모습
예수님의 십자가 즉 인류구원을 위한 성자 하느님의 희생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고통을 성부 하느님께
희생으로 봉헌하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멈추고
성모님의 통고와 봉헌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들 크리스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의 처절하신 십자가 수난은
지난 2천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오고
사람들울 회개시키고, 예수님을 위한 삶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깊히 묵상 하십시요
성모님의 통고에 깊히 공감 하십시요
그리고 마음고통을 희생으로 봉헌하십시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느끼게되는 마음고통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드리는것은 큰 봉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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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
하나)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의 왕관을 쓰고 계십니다.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 4단과 영광의신비 5단이 연상됩니다
둘) 다음 글에는 성모님의 마음고통 두번째를 묵상합니다
부활을 기다리시는 마음 입니다
셋)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슬퍼하고
성모님의 고통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좀더 충실하십시요.
하느님께 더크신 은혜를 기도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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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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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천국의 사냥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곧 각자가 자신의 에고를 넘어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에고는 무엇보다도 분리되고 독립되기를 원하지만,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만 하려 합니다. 그런데 또 묘하게도 우리의 에고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다른 것과 합치려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합일은 아주 낮은 차원의 결합일 뿐입니다.
이런 저차원적 결합을 우리는 '야합'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오늘 사도행전의 독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기 위해 사도들을 두둔하며 사도들과 결합되어 있는 듯한 자세를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파시즘, 군중 폭력, 술과 약물 중독, 각종 강박적 행위들이 그러합니다. 이런 것들은 고립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지만, 결국 에고는 극단 사이를 오가며 점점 더 강하게 반대편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것이 에고가 지배할 때의 삶입니다. 사회 속에서 이러한 에고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되고, 대중문화가 그것을 미화할 때, 사회가 폭력적이고 자기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더 높은 차원의 결합입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결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왜곡되지 않은 본능적 질서라는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참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 새로운 배움은 우리가 참으로 참으로 살아가기 위한 법을 배우는 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일치는 단순한 합의나 사회적 계약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일치의 근원,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확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참된 현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쫓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오직 이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진정한 돌아섬, 즉 회심의 여정을 용기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편견과 미움과 어둠을 과감히 떨쳐내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요!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큰 죄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그 어둠에서 빼내시고자 온 마음을 다 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시인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1859-1907)이 지은 [천국의 사냥개]라는 아름다운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톰슨은 신경쇠약으로 인해 아편을 피우다 중독자가 되었고 런던에서 막노동을 하며 노숙과 가난, 질병에 시달리다 48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의 그 깊은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시가 길어서 전반부만 나누겠습니다.
난 그로부터 도망쳤네, 밤에도, 낮에도,
난 그로부터 도망쳤네, 오랜 세월을,
난 그로부터 도망쳤네, 내 마음의 미로 속에서,
눈물 뒤에, 지나가는 웃음 아래,
난 그로부터 숨었네,
활짝 트인 희망을 향해 난 달렸고,
높이 올라갔다, 추락했네,
바닥을 알 수 없는 공포의 거대한 절망 속으로,
날 끊임없이 따라오는, 저 둔중한 발걸음에 쫓겨.
서두르지 않는 추적,
흐트러짐 없는 걸음,
조율된 속도, 장엄한 긴박감으로,
발걸음 소리가 울리네 - 그리고 한 목소리가 울리네,
발걸음 소리보다 더 긴박한 -
'모든 것이 널 저버리리라, 날 저버리는 너를.'
이제 저 긴 추적으로부터
소리가 다가오네,
그 목소리는 포효하는 바다처럼 내 주위를 감싸네.
'네 땅이 그렇게 훼손되고,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는가?
보라, 모든 것이 너를 떠나노라, 네가 나를 떠났기 때문에!
이상하고, 가엾고, 헛된 것아!
어느 누가 왜 네게 사랑을 주려고 하겠는가?
내가 아닌 어느 누구도 쓸모없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그는 말했네),
'인간의 사랑은 인간으로서의 장점을 요구하는데,
네게 무슨 장점이 있겠는가 -
인간들로 빚어진 진흙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너에게?
아, 넌 알지 못하네
네가 사랑을 받기에 얼마나 가치 없는가를!
누가 비천한 너를 사랑하려고 하겠는가,
나 이외에, 오직 나 이외에?
내가 네게서 가져간 그 모든 것은,
너를 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단지 내 품 안에서 그것을 네가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네.
네 어린 잘못된 생각에 잃어버렸다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내가 널 위해 집에 모아 두었노라,
일어나, 내 손을 잡고, 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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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내면의 의식(Awareness)과 수용(Acceptance)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 그리고 자애로우신 연민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
내면의 의식(Awareness)과 수용(Acceptance)
2026년 5월 20일 수요일
리처드 로어는 참된 기도와 관상을 사랑의 상호적인 눈길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신비로운 응시라고 설명합니다: [1]
관상의 초기 여정은 자비롭고 판단하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발견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결국 점점 삶 전체를 이 고요한 내적 의식과 수용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관상적 자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한숨 쉬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미워하거나 스스로를 치켜세울 필요가 없니다. 마침내 우리는 하느님의 눈길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으로, 곧 무한한 자비와 사랑, 그리고 자애로운 연민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긍정적인 시선을 시작하시며, 이제 그 눈길은 서로 오가는 상호적인 응시가 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거의 이런 응시가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관상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로운 눈길을 받아들일 때,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와 동기는 서서히 드러나고 마침내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 안에는 불신도, 두려움도,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려 한다면, 곧 방어와 부인, 과도한 보상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아시듯 우리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토 13,12 참조)라는 말씀을 우리 삶 안에서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내면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될 수 있다면, 곧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공동 증언자"(로마서 8,16 참조)인 그 내면에서, 우리의 삶은 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상호 응시는 언제나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안식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보다 덜한 것은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초입니다.
우리 내면의 이 공간을 열어 두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묵상 혹은 명상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참된 기도는 언제나 정신을 비우고, 동시에 마음을 채우는 일이며, 종종 이 두 과정은 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단순히 암송하거나 형식적이며 사회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지성을 마음으로 내려 보내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여러분이 생각 아래쪽에 머무르도록 하십시오. 생각과 싸우지도, 그것을 붙잡아 곱씹지도 마십시오. 떠오르는 모든 것은 파도처럼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더 깊은 차원, 이를테면 가슴이나 명치, 혹은 깊은 호흡 속에 두되, 몸 자체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십시오. 끝없이 반복되는 지성의 판단이나 논평으로 올라가지 마십시오.
그저 제가 본능적 평온(animal contentment: 본능적이고 단순한 만족과 평온의 상태로서 몸 깊은 곳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쉼을 갖는 것)이라 부르는 상태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것은 정확히 아무것도 아닌 듯, 공허함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세포 깊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기다리면, 더 깊은 근원께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보편적 사랑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에너지로서 당신을 관통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매일 아침 저는 고요한 시간을 즐깁니다. 책을 읽고,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립니다. 어제는 자연을 내다 보는 창문에 거미줄이 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집 발코니와 식물들, 새들, 나무들이 보이는 창이었지요. 처음에는 빗자루를 가져와 그것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기 거미들과 그 곁에 있는 어미 거미, 그리고 그들이 만든 아름답고 정교한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관상에 머무는’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과, 진정으로 보고,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Joan V.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Just This (CAC Publishing, 2017), 58–59, 62–6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trick Hendry, untitled (detail), 201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요한 밤하늘 아래, 어떤 사람이 “오직 이 순간(Just This)”에 머무는 관상을 하며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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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에 속하지 말고 세상을 초월하십시오!
우리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인드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 세상 그 어떤 보화와도 바꾸고 싶지 않은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버지께 소개하시는데,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당신과 완벽히 하나인 존재, 일심동체인 존재, 언제 어디서든 일치하는 존재로 소개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어떤 분들 가끔 어깨 힘 딱 주고 이렇게 자랑합니다.
“그 잘 나가는 국회의원이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 멋진 연예인이 제 친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말 앞에 조금도 주눅이 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함으로 인해,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아주 작고 예쁜 강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얀색의 쌀 강아지 녀석,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통유리창, 처음 보다 보니 뭔지 모르고 그냥 통과하다가 쿵 하고 제대로 쓰러집니다.
작은 문턱 앞에서 어떻게 넘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 그 선한 눈망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강아지입니다.
녀석을 바라보면서 든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 아십니까?
더 이상 자라지 말고 지금 이 상태로 멈췄으면, 혹시 어디 더 이상 안 크게 하는 약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청정지역에 머물고 있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때로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앞으로 그들 앞에 펼쳐질 세상을 바라보니 ‘짠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도 이런데, 제자들에게 고별사를 건네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요즘 계속되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라고, 세상을 극복하라고, 세상에 속하지 말고 세상을 초월하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한 가운데를 살아가면서 당연히 세파로 인한 고난을 겪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세상 한가운데서도 순수성을 침해받지 않고 동심을 유지하면서 맑고 깨끗하게 살아갈 방도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 나와 이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너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게 하는 것, 작은 것이지만 서로 나누고, 서로의 짐을 져주며, 서로의 부족함을 참아주며,
하느님 안에 서로 굳게 결속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 고별사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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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0-26).”
1)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아버지께
청하는 기도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0절의 ‘이들’은 제자들(신앙인들)이고,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신앙인들의 선교활동으로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즉 ‘모든 사람’입니다.
21절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와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이라는 말씀은, “제가 메시아라는 것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라는 말씀은, ‘먼저 믿은’
사람들의 일치는 ‘아직 안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 되고,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선교활동은 ‘적’을 굴복시키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다른 자녀들을 찾는 일이고, 잃은 형제를 찾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4-19).”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로 사람들 속에 있는 적개심을 없애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없애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 적개심을 없애려는 노력은 사랑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23절의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완전한 일치’는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4-48).”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창조 이전’을 언급하신 것은(24절), 하느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병들고 오염되고 고장 난 세상과 인간들을 고쳐서 천지 창조 때의 좋았던 상태로 원상복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예수님께서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협력하고 동참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로 ‘우리를’(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 사람들이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과는 하나가 되고 싶지 않다.
‘저 사람’만큼은 사랑하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과 생각부터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장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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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상호 간에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믿음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 기도는 우리 신앙의 가장 깊은 중심을 열어 보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 됨은 단순히 마음이 잘 맞는 인간적 화합이 아닙니다. 갈등이 없고 의견이 같은 상태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신 하나 됨은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안에 머무르시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일치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초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밖에서 그분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불림 받은 존재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받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으시며 다시 성부께 돌려드리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랑의 흐름 안에서 끊임없이 생명과 친교를 이루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은 소유의 생명이 아니라 내어줌의 생명입니다. 붙잡는 생명이 아니라 흐르게 하는 생명입니다. 자기중심의 닫힌 완성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자신을 비우고 건네는 영원한 선의 흐름입니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바로 이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닙니다. 가난은 하느님의 선이 내 안에서 막히지 않도록 나 자신을 비워 드리는 영적 태도입니다. 내가 가진 생명도, 내 안의 선한 마음도, 내가 받은 은총도 본래 내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받은 것을 감사로 되돌려드리고, 되돌려드린 것을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았던 가난입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붙들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형제로 맞아들일 수 있었던 가난입니다. 태양도 형제요, 달도 자매요, 물과 불과 바람과 대지도 하느님의 선을 전하는 친교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붙잡는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가난입니다. 내 힘으로 나를 완성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나의 부족함과 무력함까지도 하느님 앞에 열어 드리는 신뢰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언제나 겸손을 낳고, 겸손은 언제나 친교를 낳습니다. 자기 안에 가득 찬 사람은 타인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타인의 다름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다름 안에서 하느님 선의 또 다른 빛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은 군림하는 영광이 아닙니다. 높아져 남을 누르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어 살리는 사랑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 되는 길도 권리를 주장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내 뜻을 관철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먼저 낮아지고, 먼저 들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리를 내어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 가운데 드러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믿음은 결국 관계 안에서 검증됩니다. 기도 안 에서 받은 은총은 이웃 앞에서 자비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깨달은 진리는 공동체 안에서 견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 머문다는 고백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말 한마디와 겸손한 몸짓 하나로 드러나야 합니다.
내적 가난은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나를 되찾는 일입니다. 내 안에 가득 찬 두려움과 소유욕과 자존심을 비울 때, 그 자리에 하느님의 선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중심이 되려 하지 않고 도구가 됩니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사랑이 지나가도록 허용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찬미받으소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 찬미는 가난한 영혼의 가장 깊은 고백입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영혼만이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선물임을 아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다시 찬미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더 많이 소유하는 믿음이 아니라 더 깊이 비워지는 믿음입니다. 더 강하게 주장하는 믿음이 아니라 더 넓게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는 믿음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서 선을 흐르게 하는 믿음입니다.
오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
우리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나누시는
거룩한 사랑의 대화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내 영혼의 가장 가난한 자리에서
하느님의 선이 시작되게 하소서.
내가 움켜쥔 것을 내려놓을 때
이웃을 살리는 은총이 흐르게 하소서.
내가 비워진 만큼 주님의 사랑이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 되게 하소서.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게 하소서.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품게 하소서.
서로를 이기려 하지 않고 살리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인 것은 같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사랑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하느님의 선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상호 간에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이 우리에게 열어 주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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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1. 부활 제7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7,20-26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살기가 점점 더 팍팍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나와 입장과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결국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것을 간직한 상태로 ‘하나’가 되어야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텐데 그러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대체 왜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걸까요?
첫번째 이유는 그 사람이 싫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좋은 것에 이유가 없듯, 누군가가 싫은 것에도 이유가 없지요. 그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즉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나와 맞지 않는 모습들이 너무나 불편하고 싫은 겁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맞춰보려고 하지는 않고, 철저하게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라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모습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나 자신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꿈쩍하지 않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자신’이란 나라는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좋고 싫음’을 기준으로 하는 나의 주관적 성향들, 즉 취향 기호 입맛 같은 것들을 가리키지요. 어린 아이가 편식에서 벗어나야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며 건강하게 자라듯, 우리도 ‘좋고 싫음’이라는 편협한 기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삶이 주는 참된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는데 그걸 절대 안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분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신 ‘하나 됨’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이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나’를 내세우는 상태에서는 절대 하나로 일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렵사리 하나가 된다고 해도 그건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억지로 다른 이를 굴복시켜서 일시적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일 뿐 진정으로 일치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그분 뜻을 충실히 따르면 우리 마음 속에 ‘참된 믿음’이라는 공통분모가 생겨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진정한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하면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 자연스레 하나가 될 수 있게 되지요. 이처럼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면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 안에 깊이 머무르며 참된 기쁨과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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