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흥사 가는 길은 운치가 있다. 쌍둥이 형제 같은 바위 둘이 호수 위에서 여행자를 맞이한다.
와룡리,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은 더 이상 없다. 갈 수 있는 길이라곤 운흥사 산길 뿐이다.

운흥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여지 없이 겨울 바람이 몰아 친다. 절로 차가 들어 갈 수 있게 주차장 옆으로 길이 나 있다.
불사를 새로 하고 난 후의 변화이다. 여행자도 날씨 탓으로 돌리고 차를 타고 갈까 망설이다 원래의 마음을 애써 다잡는다.

이 선택은 길을 들어서는 순간 잘된 일로 판명되었다. 아름드리 벗나무에 둘러싸인 돌길은 걷기만 하는데도 상쾌하다.
이 계단길이 있어 운흥사의 운치를 보태 준다. 겨울 산사의 쓸쓸하고 고즈넉함을 이 돌길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전라도 부안의 개암사 돌길도 그러하다. 채 백미터도 되지 않는 짧은 길이 여행자에게 주는 감동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호젓한 돌계단도 잠시 이내 괘불지주가 있는 넓은 뜨락에 이른다. 차로 들어온 이들이 주차를 하는 곳으로 높은 축대를 쌓아 올려 위압감을 준다.
그 위압감이 대웅전의 자비와는 거리가 먼 듯하여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그마한 석등이 눈에 들어 온다.
운흥사의 예전 사진을 보면 장독대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다.

돌아온 길을 다시 내려다 보니 정겹기는 매 한가지이다.
사찰 부속 어린이집으로 사용되다 이제는 빈 집이 된 건물이 숲 속에 덩그러니 있다.
이 조용한 산사에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면 선계의 목소리가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대웅전의 지붕은 육중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맞배지붕이다. 공포도 다포계 양식인데 말이다.
사찰의 대웅전은 보통 화려하고 육중하여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태가 많은데 다소 의외다.
그러다 보니 수려함보다는 약간은 답답하면서 묵직한 느낌을 준다.
산신각 산신각으로 오르는 돌층계도 한 번 굽어 올라가게 설계되어 독특함을 준다.
산신은 원래 토속신앙이었으나 불교가 전래되면서 다른 토속신앙들과 같이 불교에 흡수되었다.

운흥사의 마스코트는 이 어여쁜 장독대가 아닌가 싶다.
낮은 흙돌담을 둥글게 쌓고 그 안에 장독들을 모아 두었다.
보통의 장독대가 외진 곳에 있는 반면
이 곳의 장독대는 예쁨을 뽐내려는지 누구의 눈에도 띄는 절마당에 위치해 있다.

산사의 저녁 공양을 위해 절마당에 가마솥을 걸어 두었다.
아직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감들과 저녁 짓는 연기에 여행자는 오랫만에 고향의 푸근함에 빠져 본다.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자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전각이다.
대개 대웅전의 오른쪽 뒤 외딴 곳에 있으나, 운흥사는 공간배치의 특이성으로 대웅전 바로 옆에 있다.

정갈한 장독대를 돌아 돌층계를 오르면 영산전이다. 영산전 옆 공터에서 여행자의 눈길을 잡는 것이 있었다.
그 하나는 앙증맞은 굴뚝이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굴뚝을 종종 보아 왔지만, 여기처럼 앙증맞은 굴뚝은 처음인 것 같다.
전각 뒤로 굴뚝대를 별도로 내기 보다는 축대를 이용해 굴뚝의 지붕을 얹은 형식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김장독이었다. 겨울에 시골이나 절에서 땅 밑에 김치 등을 보관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행여 비나 눈이 들어 갈세라 정성껏 만든 움집이 대견스럽다. 영산전 처마 밑에는 시래기를 말리고 메주도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속과 승이 둘이 아니듯 사람들의 일상의 흔적들은 어디든 흡사하리라.

이리저리 구경하다 또 하나의 신기한 집을 발견하였다. 참, 정겹게 보이는 건물 한 채,
입구에는 물이 맷돌을 돌아 절구에 떨어지고 있었다. 울타리도 나무 판자로 소담하게 둘러 놓았고 주변의 대숲과 너무나 잘 어울려 보였다.
뭘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여 가까이 다가 섰다. 대략 난감이다. '큰 거는 다른 화장실로' 안내판 글귀가 낯이 익었다.

화장실임을 눈치 채고 그렇다면 옛 해우소가 따로 있을텐데.....
바로 아래 오솔길로 접어 드니 숲 속에 소담한 해우소가 보인다.
사각사각 낙엽 소리와 대숲에 부는 바람 소리, 깊은 산사의 새소리, 멀리 풍경소리까지
이 해우소에서 볼 일 보면 정말 해우하겠다.

해우소 옆길을 곧장 가면 천진암과 낙서암에 이른다. 날이 어두워져 암자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운흥사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주목할 것은 임진왜란때 이 지역 승병의 본거지였다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와룡산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어 사명대사의 지휘 아래 승병 6천여 명이 머물렀다.
이순신도 수륙양면 작전 논의 차 세 번 정도 방문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운흥사는 불가의 화원 양성소로 이름을 날렸다. 영조 때에는 불화로 이름을 날린 의겸(義謙)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대웅전 안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는 수월관음도와 감로탱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감로탱을 그린 의겸이 남긴 괘불이 있다.
이 괘불은 일제 때에 일본인들이 가져 가려고 하다 사천 앞바다에서 세 번이나 풍랑을 만나 결국 실패하였다고 한다.
매년 음력 2월 8일에는 임란 때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영산제를 지내는데 이날 가장 많은 승군들이 전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날씨가 너무 추워 삼월 삼짓날로 옮겨 영산제를 지내는데, 이 때 거대한 괘불을 볼 수 있다고 한 보살님이 말씀하셨다. |
첫댓글 사진찍기 좋더라. 얼마전에 가 봤거던 삼천포 백천사 가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