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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는 있지만 유람록 중 가장 앞서… 백학봉·자하대·죽암폭포 등 이름 붙이며 올라
다음 글에는 퇴계 당시의 소백산 유람을 할 만한 곳과 등정이 가능한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퇴계는 대체로 구경할 만한 골짜기가 세 곳이 있다고 했다. 산의 가운데 있는 초암과 석륜사 골짜기, 산의 동쪽에 있는 성혈사와 두타사 골짜기, 산의 서쪽에 있는 세 가타암 골짜기다. 이는 아마도 죽계를 통해 올라가다가 나뉘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개 이 가운데 한 곳만 갈 뿐이고, 그것도 산행이 가장 편한 초암과 석륜사를 거쳐 국망봉에 오르는 길을 간다고 했다.
신재는 그의 유산록에서 여러 골짜기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기는 했지만, 그가 유람한 것도 초암과 석륜사로 가는 가운데 한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곳의 내용은 산승에게 물어서 듣고 기술한 것이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했다. 퇴계는 세 골짜기 가운데 동쪽 골짜기는 다음날 하기로 남겨두고 서쪽 골짜기로 올라가며, 백학봉·백련봉·자하대·연좌봉ㆍ죽암폭포 같은 절경에 마음대로 이름을 지으며 갔다고 했다.
‘무릇 소백이란 산에는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의 뛰어난 경치가 있으나, 절이 있는 곳과 사람의 자취가 통하는 것은 대개 세 개의 골짜기가 있다. 초암사와 석륜사는 산의 가운데 골짜기에 있고, 성혈사(聖穴寺)와 두타사(頭陀寺) 등의 절은 동쪽 골짜기에 있고, 삼가타(三伽) 등의 암자는 서쪽 골짜기에 있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이 초암사와 석륜사에서 국망봉으로 오르는 것은 길이 편한 코스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 몸이 피곤하고 흥이 다하면 마침내 돌아온다. 비록 주경유처럼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도 지난 곳은 가운데 한 골짜기에 그친다. 그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에 기술한 것이 매우 자세하지만, 실상은 산승(山僧)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광풍대·제월대·백설대·백운대는 모두 가운데 골짜기에 있는 것이니, 동쪽과 서쪽은 미치지 못했다. 나는 쇠약하고 병이 들어서, 한 번 가서 온 산의 승경을 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침내 동쪽은 훗날의 유람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고 오직 서쪽 골짜기만 찾았다. 무릇 서쪽 골짜기에서 얻은 승경, 예컨대 백학봉(白鶴峰)·백련봉(白蓮峰)·자하대(紫霞臺)·연좌봉(宴坐峰)·죽암폭포(竹巖瀑布) 같은 것에 대해 문득 마음껏 이름을 지으며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또한 경유가 가운데 골짜기에서 만났던 곳에 했던 일과 같이 한 것이다. 나는 처음에 경유의 <유산록>을 백운동서원의 유사(有司)인 김중문(金仲文)이 있는 곳에서 얻었는데, 석륜사에 이르니 <유산록>이 현판에 씌어 벽에 걸려 있었다.’
이 내용에는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신재의 유산록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음을 밝혔다. 퇴계는 처음에 신재의 유산록에 대해 백운동서원의 유사인 김중문에게서 얻어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석륜사에 올라보니 이 유산록을 현판에 써서 벽에 걸어놓았다고 했다. 현판에 새겨서 걸어 놓았다는 것을 보면 긴 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재는 1495년생으로 1501년생인 퇴계보다 6세 연장이고, 1543년에 풍기군수가 됐고, 퇴계는 이보다 5년 뒤인 1548년에 풍기군수가 됐다. 따라서 퇴계가 소백산을 유람한 것도 신재가 유람한 5년쯤 뒤인 것으로 보인다. 퇴계는 선배인 신재가 지은 유산록을 좋아하여 “나는 그 시와 글의 웅장하고 빼어남을 감상하며 이르는 곳마다 펴서 읊었다. 마치 홍안백발의 늙은이와 더불어 그 사이에서 마주 이야기하고 수창(酬唱)하는 것 같았는데, 이것에 힘입어 흥이 나서 취미를 얻은 것이 제법 많았다”고 했다.
조망의 철학과 단상
소백산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원래 소백산맥 중에는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ㅂ·ㄹㅁ’에서 유래된 백산(白山)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 소백산이라고 한다. 태백산(1,568m)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 백두대간 중의 산으로 북동쪽에 국망봉(國望峰·1,421m), 남서쪽에 민배기재와 연화봉(蓮花峰·1,394m)이 있어 험준한 연봉을 이룬다. 남서쪽의 연화봉에서 4km 정도 내려가면 제2연화봉(1,357m)에 이른다.
이상의 내용만 보아도 소백산이 매우 넓고 험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내용에는 퇴계가 소백산에서 지났던 곳이 잘 드러나 있다. 철암(哲庵)과 명경암(明鏡庵)을 거쳐 석륜사에서 자고, 봉두암(鳳頭岩), 광풍대(光風臺)를 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백운암을 지나 석름봉, 자개봉에 오른 뒤 최종 국망봉에 올랐다고 했다. 영주의 문화축제에서는 퇴계가 오른 코스를 따라 소백산을 오르는 ‘퇴계 등산로’를 축제 아이템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이날 철암과 명경암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다. 철암이 가장 맑고 시원했는데, 맑은 샘물은 암자 뒤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이 물은 암자의 동쪽 서쪽으로 나뉘어 흘렀으며, 맛이 무척 달고 시원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자못 높고 트였으며, 석륜사 북쪽으로는 바위가 매우 기이했다. 마치 큰 새가 머리를 치켜들고 날아가려는 것 같았으므로, 옛 이름이 봉두암이다. 그 서쪽에 바위가 우뚝 선 것이 있는데, 사다리를 놓은 뒤에야 오를 수 있으며, 경유가 광풍대라 부른 것이다. 절 안에는 돌을 새겨 불상을 만들었다. 승려들이 그것의 영험함과 특이함에 대해 말했으나 믿을 만하지 못하다. 날이 밝은 뒤 계해일에 걸어서 중백운암(中白雲庵)에 올라갔다. 이름은 잊었지만 어떤 승려가 이 암자를 지어놓고 그 가운데에서 좌선(坐禪)을 하고 선(禪)의 이치에 자못 통했는데, 하루아침에 떠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 승려는 없으며, 창 앞의 오래된 우물만이 완연할 뿐이고, 뜰아래에는 푸른 풀이 쓸쓸했다. 중백운암 이후로는 길이 더욱 높고 깎아지른듯하여 마치 바로 위에 매달아 놓은 듯하다. 있는 힘을 다하여 밟고 더위잡은 이후에야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견여를 탔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쯤에 석름봉(石峰)이 있었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풀을 엮어 움막을 지어놓았고, 그 앞에는 덫을 엮어 놓은 것이 있었다. 매 잡는 사람이 한 것인데, 그 어려움을 상상할 만했다. 석름봉의 동쪽 몇 리쯤에 자개봉(紫蓋峰)이 있다. 또 그 동쪽 몇 리쯤에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니, 곧 국망봉이다. 만약 하늘이 맑고 해가 밝으면 용문산(龍門山)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보이는데, 이 날은 산 아지랑이와 바다 안개가 드넓고 아득하게 끼어서, 용문산마저도 또한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서남쪽 구름 끝에 월악산(月嶽山)만이 아른 거릴 뿐이었다. 동쪽을 돌아보면 뜬구름과 쌓인 취미(翠微)가 수만 수천 겹으로 쌓여 모습은 비슷하나, 진면목이 자세하지 않은 것은 태백산(太白山)이고, 청량산(淸凉山)이고, 문수산(文殊山)이고, 봉황산(鳳凰山)이다. 그 남쪽으로 문득 숨었다 문득 보였다. 구름 낀 하늘에 떠 있는 것은 학가산(鶴駕山)·팔공산(八公山) 등 여러 산이다. 그 북쪽으로 형체를 감추고 자취를 숨기어 한쪽에 아득한 것은 오대산(五臺山)·치악산(雉岳山) 등 여러 산이다. 물 가운데 바라보이는 것은 더욱 적었는데, 죽계(竹溪)의 하류는 구대천(龜臺川)이 되고, 한강의 상류는 도담(島潭)의 굽이가 되니, 이와 같을 뿐이었다.’
퇴계는 석름봉, 자개봉, 국망봉에 올랐다. 그 가운데 국망봉이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그곳에서의 조망에 대해 말했다. 퇴계가 국망봉에서 언급한 조망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그의 지리에 대한 식견이 매우 넓고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는 오대산(五臺山)·치악산(雉岳山) 등이 보인다. 날이 좋으면 용문산, 서울까지도 보인다고 했으니, 아마도 국망봉이란 이름은 서울이 바라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월악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태백산(太白山)·청량산(淸凉山)·문수산(文殊山)·봉황산(鳳凰山)이고, 남쪽으로 보였다 숨었다 하며 구름 속에 아스라한 것이 학가산(鶴駕山)·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
퇴계가 산에 올랐을 때에는 하루도 흐린 날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쾌청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종수가 가을날 서리 온 뒤, 혹은 오랜 비가 내리다가 새로 갠 날이 조망하기에 좋다고 했다. 퇴계는 이에 대해서 산에 오르는 등산의 묘미는 꼭 멀리까지 바라보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자연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즉 산 위에는 기온이 한랭하고 바람이 거세니 나무가 한쪽으로 기울고 크기도 매우 왜소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거처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바뀌는 것이, 식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후천적 환경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종수가 말하기를, “산에 올라 바라보기에는 가을날 서리 온 뒤나, 혹은 여러 날 비가 내리다가 새로 갠 날이 곧 아름답습니다. 주 태수께서는 닷새 동안 비에 막혀 있다가 날이 개어 곧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고 했다. 내가 가만히 그 뜻을 헤아려 보니, 처음에는 막혀 답답했던 것이 끝내는 시원함을 얻는다. 내가 온 뒤로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찌 만 리의 시원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등산의 묘처는 반드시 시력이 다하는 곳까지 보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 위의 기온이 매우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나무가 나면 모두 동쪽으로 엎드려 있고 가지와 줄기는 굽어 작았다. 4월 그믐이 되어야 나무 잎이 나고 꽃이 피기 시작하여 1년 동안 자라는 것이 몇 푼이나 몇 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튼튼하게 어려움을 이겨내어 모두 힘써 싸운 형세를 하고 있다. 그것은 깊은 숲과 큰 골짜기에서 나는 것과는 크게 같지 않았다. 사는 곳이 기운을 바뀌게 하고, 기르는 것이 체질을 바꾸는 이치는 사물과 사람이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
그리고 퇴계는 산에 올라 8, 9리에 이어지는 그곳의 철쭉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 오늘날 소백산의 철쭉 축제가 매우 유서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석름·자개·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에 철쭉이 숲을 이루어 바야흐로 한창 피어 있었는데, 활짝 피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비단 장막 사이를 다니는 것 같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서 취한 것 같기도 하였으니, 매우 즐길 만하다. 봉우리 위에서 술을 석 잔 마시고 시 일곱 장(章)을 지으니, 해가 벌써 기울었다”고 하여, 소백산 철쭉에 흠뻑 취했던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전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해 일곱 장으로 이루어진 시를 지은 바 있다.
유람록을 남기는 까닭과 그 의미
퇴계는 유람록을 남긴 까닭을 ‘기록을 남기면 후대에 산을 유람하는 사람에게 참으로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선대에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 그리고 특히 그곳에 터전을 잡고 오랫동안 살아온 순흥 안씨들도 이에 대해 남긴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했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기록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기록이 있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데 유익함이 있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느낀 것이 또 있으니, 경유(景遊) 앞의 문사로서 와서 유람한 사람 가운데 산인(山人)들이 일컫는 바는 오직 호음(湖陰) 정선생(鄭先生)과 태수 임제광(林霽光)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기술한 것을 찾아보자면, 임태수는 편언척자(片言隻字)도 찾을 만한 것이 없고, 호음의 시는 겨우 초암사 가운데에 있는 절구 한 수가 보일 뿐이다. 또 그밖의 것을 찾아보면 석륜사의 승려가 황금계(黃錦溪)의 시를 가지고 있고, 명경암 벽에 황우수(黃愚)의 시가 있을 따름이며, 이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아아, 영남은 곧 사대부에게 기북(冀北) 같은 고을이다.
영주와 풍기 사이에는 홍유와 석사들이 잇달아 일어나서 환히 빛났으니, 와서 유람한 사람이 고금에 어찌 한이 있으랴? 기술하여 전할 만한 사람이 또한 어찌 이것에 그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죽계(竹溪)의 여러 안씨(安氏)들은 이 산 아래에서 빼어남을 길러 이름을 중원(中原)에 떨쳤다. 그 가운데에는 반드시 여기에서 노닐고 여기에서 즐기고 여기에서 읊고 노래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에는 벼랑에 새긴 것도 없고 선비들이 입으로 외는 것도 없으니, 사라져버려 찾을 수 없다. 무릇 우리나라 풍속이 산림의 아려(雅麗)함을 좋아하지 않고, 전술(傳述)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명성을 세우기를 드높이 여러 안씨들과 같이 하고, 큰 산과 이름난 구역이 높기가 이 산과 같은 경우도 끝내 전할 만한 문헌이 이와 같이 없으니, 다른 곳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산언덕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천년 동안 참다운 은자(隱者)가 없었으니, 참다운 감상(鑑賞)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관청의 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임시로 산의 문 앞이나 거니는 우리들 무리가 어찌 이 산의 경중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퇴계는 산을 찾아가고 산을 즐기며 산을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함을 말했다. 그 산을 제대로 알고 산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했다. 위에서 퇴계가 말한 ‘참다운 은자’는 산을 진정으로 좋아하여 산을 찾아들어간 사람이고, ‘참다운 감상’이란 바로 산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산을 찾으면서 등산의 즐거움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퇴계와 같이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산의 가치를 드러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우리가 산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옛날 유람록을 발굴해 읽어야 하는 이유를 퇴계가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것이다.
글·사진 | 윤호진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남명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