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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강화군 여행] 강화 나들길 4코스 시작점, 돌방무덤 고려편 가릉/ 능내리 석실분 편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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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강화군 여행] 강화 나들길 4코스 시작점, 돌방무덤 고려편 가릉/ 능내리 석실분 편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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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4코스에 있는 가련한 여인의 무덤인 가릉!. “먼 여행”이라는 꽃말을 가진 박주가리 꽃이 진 자리에 하얗게 홀
씨가 매달렸다. 겨울까지 남아 있는 꽃씨! 살짝 손만 대도 흐트러져 버릴 것 같다. 호기심이 동한 요염한 여인이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박주가리 홀씨들이 때마침 계곡에서 불어오는 난기류를 타고 날아올랐다. 그 마칼바람에 깃털이 달
린 작은 홀씨는 둥둥 날아간다. 시기를 놓친 홀씨는 그렇게 風散布[풍산포] 산길을 따라 바람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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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북서풍에 쇠털보다 더 가느다란 박주가리 홀씨를 따라 뒤를 쫓는다. 길을 사이에 두고 키 낮은 집들이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낯선 길손이 반갑지 않은지 개들은 컹컹 짖어대고 담장 안에선 빛바랜 삶의 사연들이 흑백의 기
억 속에서 하얗게 피어 흩어진다. 유랑자는 꼬부랑 오솔길을 따라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동네에 있는 嘉陵[가릉]을 찾아가
는 길이다. 능내리 마을 뒷산에는 세월이 켜켜이 쌓아놓은 고려 왕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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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고려 원종의 부인이며 충렬왕의 어머니인 순경 태후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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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마을 뒷산에 무슨 왕릉이 있단 말인가. 그것도 고려시대 왕릉이라니…. 강화 나들길 4코스가 시작되는 능내리
산길! 유랑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그러나 조선의 왕릉처럼 기대했던 왕릉은 없고 자그마한
무덤 한 기가 초라하고도 쓸쓸한 모습으로 마치 묵 묘처럼 자릴 잡고 있을 뿐이다. 사실 안내판이 없었다면 여기가 고려 왕
릉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을 정도로 리모델링 없는 소박한 외관. 보통의 왕들이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그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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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로 조선시대 왕능들은 규모도 크고 대단하던데 여기 이 稜[능]은 그냥 보통의 무덤같이 초라하다. 강화도의 한 시골
마을 뒷산에 조촐한 모습으로 있는 고려 왕능은 어떤 사연으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이름하여 江華嘉陵[강화 가릉]은 고
려 원종[재위: 1259년~1274년] 비 순경 태후의 무덤이다. 그런데 왕비의 무덤이 왜 강화에 있는 걸까. 그것도 고려시대 무
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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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릉의 주인공인 순경 태후는 고려 원종 3년(1262)에 정순 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면서 순경 태후로
높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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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둘러보다 보니 답을 알려줄 안내문 하나가 유랑자 눈에 들어온다. 이 능은 고려 후기 제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
태후 김씨의 陵[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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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내용은 이렇다.
그렇다.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 태후 [1222-1237]의 능이다. 순경 태후는 고종 22년[1235년] 원종이 태자
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 비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아들인 충렬왕과 딸을 연이어 낳고 1237년에 16세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순경 태후는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외손녀로 외증조부는 최충헌이다. 순경 태후의 아버지는 김 약선으로
그는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의 신임을 받던 문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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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릉은 돌방무덤으로 지하에 구멍을 파고 돌로 돌방과 입구를 만든 무덤이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졌으나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이후 2004년에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재정
비하였다. 강화 가릉은 고려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곤릉과 함께 남한 지역에 단 2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 왕비
의 능으로 고려 왕실의 묘지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지정 당시의 “가릉”이라는 명칭은
2011년 “강화 가릉”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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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주변의 부서진 석물과 무너진 봉분은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사적 제3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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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새빨간 거짓말을 설명문이랍시고 걸어 놓았다.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보존의 흔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강화 지역에 있는 고려 왕릉 중 희종[21대], 강종[22대], 고종[23대] 등과 함께 왕비 및 왕
실 인물들이 묻힌 무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앞서 유랑자의 강화도 여행기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와같이 강화 가릉은 고
려시대 몽골 침입에 대응해 1232년부터 약 39년간 강화도로 천도하여 수도 기능을 한 시기에 조성된 왕후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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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왕과 왕비들이 강화에 묻힌 이유로서, 가릉은 당시 고려 왕실의 정치적, 군사적 이동과 역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무
덤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망한 고려의 왕들과 비의 능들이 이렇게까지 비교가 되는 것은 왜일까?
고려 왕실의 역사와 비운을 상징하는 가릉은 24대 왕 원종의 왕비인 順敬太后[순경 태후]의 무덤은 강화 천도기에 사망하
여 강화에 묻힌 왕실 인물의 대표적 묘제로 정체성과 위상을 드러낸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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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陵[가릉]"
一片鎭江碧幾層 (일건진강벽기층)- 진강 한폭 편에 겹겹히 푸른 기운 감돌고
白雲多處是嘉陵 (백운다처시가릉)- 흰구름 많은 곳에 가릉이 있다네
年年杜宇東風淚 (년년두우동풍루)- 해마다 두견새는 동풍에 눈물짓고
每向開花百感增 (매향개화백감증)- 개경을 향할 때 마다 만감이 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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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南[화남] 高在亨[고재형:1846-1916]이 지은 시 "嘉陵[가릉]"이다. 이 시는 1906년 발간한 심도 기행에 256수 중 하
나이다. 고재형은 강화 사람으로 강화에서 태어났고, 강화에서 자랐으며, 과거시험에는 합격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는 강화의 거의 모든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각 마을을 주제로 256수의 한시를 지었다. 심도 기행에 마을의 유래, 풍광,
인물, 생활상, 관습 등 산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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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화유산으로서의 중요한 가치가 있다? 는 것은 일반적인 고려 석실분과 달리 가릉은 지상에 석실을 설치하고 8각형
호석을 배치하는 등 왕릉만의 독특하면서도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고려 왕릉 대부분은 개경 주변
에 집중되어 있으나, 강화도에 있는 왕릉군[석릉, 곤릉, 홍릉, 가릉] 등은 몽골 침입기에 강화가 임시 수도였음을 실물로 증
명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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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왕조! 고려는 태조 왕건이 자신의 주군이었던 태봉의 국왕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면서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
를 건국, 918년부터 1392년까지 무려 474여 년간 한강 이북 땅을 대부분 지배했던 왕조이다. 그러나 그 왕조 역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고로 강화 왕릉들은 몽골의 압박과 무신 정권기의 어려움을 겪던 고려 왕가의 비운을 반영한다 할것이다.
강화도에 조성된 왕릉들은 역사적 격동기를 상징하며,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강화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임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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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능내리 석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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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외할아버지(최우)도 아버지(김 약선) 도 또 시아버지(왕철)와 남편(왕식), 그리고 아들(왕거)까지 이름이 다 역사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순경 태후의 이름은 없다. 그녀를 나타내는 말은 모두 '누구의'로 통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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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의 나이로 아들을 낳은 이듬해에 병에 걸려 요절했던 비운의 왕비! 그녀의 죽음은 당시 왕실과 무신정권 사이의 정치
적 긴장 속에서 비극적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강화도에 집중된 왕릉들은 고려 왕실의 역사적 변천과 그 시대의 어려움
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그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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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강화도 鎭江山[진강산] 자락에는 알려진 고려 왕릉만해도 3기에 이른다. 고려 희종[1204년~1211년]의 무덤인 석
릉을 비롯한 고려 강종[1211~1213] 비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 그리고 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가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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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에서 여자는 이름 없는 존재였다. 자신 단독으로는 그려지지 않고 누구의 딸로 또는 누구의 아내로 그리고
누구의 어머니로만 그려지고 존재한다. 오만 원 권 화폐에 올라가 있는 신사임당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율곡
(栗谷)의 어머니로 더 크게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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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릉 뒤에 있는 능내리 석실분까지 합하면 4기나 된다. 최근에 석릉 인근에서 또 고려시대 고분을 발굴 조사 중이라 하니,
도대체 진강산 남쪽 자락에 안긴 고려 왕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 참고로 진강산은 고려시대 이래로 유명한 전강
목장이 있던 곳으로 조선조 효종 임금이 타시던 명마 벌대총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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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를 알면 한반도 역사의 절반을 안다는 섬,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강화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1231년 몽골
이 쳐들어왔다. 고려 조정은 난리를 피해 강화로 江都[강도](1232년 7월)] 후 다시 개경으로 還都[환도(1270년)]하기까지
39년간 강화는 고려의 실질적인 수도였다. 당시 강화 인구가 삼십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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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 했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과거 삼종지도에서 가르쳤던 덕목이었다. 여성을 독자적이고 온전한 한 인격체
로 대우하지 않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생산과 노동력으로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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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이라면 긴 시간이다. 그동안에 수명을 다한 사람들은 강화에 묻혔을 것이다.
그 시기에 죽은 고려 왕과 왕비들도 그렇게 강화 高麗山[고려산 436m(원래 이름은 오련산)] 자락에 묻혔다.
아무튼 영원한 삶을 기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계층 간의 구별이 뚜렷했던 과거 신분
제 사회에서는 무덤을 통해서도 묻혀 있는 사람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被葬者[피장자]의 신분
에 따라 무덤의 명칭이 달랐으니 陵[능], 園[원], 塚[총], 墳[분], 墓[묘]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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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陵[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왕세자와 세자빈 또는 왕세손과 세손빈의 무덤에는 '園[원]'을 붙인다. 왕족이라 하더
라도 왕위와 관계없는 이는 일반인과 같은 '墓[묘]'라 불리었다. 규모로 봐서는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그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塚[총]'을 붙인다. 또 발굴되지 않아 무덤으로만 추정되는 것들을 통틀어서 '墳[분]'이라고 한다.
설명문에서 본 바와 같이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비 순경 태후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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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둥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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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남성의 그늘 속에 존재했던 여성은 죽어서도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제사 때
쓰는 지방에도 여성은 본관과 성만 기록할 뿐 이름은 없다. 족보에도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세상의 절반은 여자인데 실제 기록 속에서는 여성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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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경 태후의 외할아버지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이고 외증조부는 최충헌이다. 최우는 정실부인에게서 딸 한 명밖에 얻
지 못했는데 그이가 바로 가릉의 주인인 순경 태후의 어머니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시쳇말로 순경 태후 김씨는 '금수저' 중
의 '최고 금수저'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三從之道[삼종지도]를 따라야만 했던 여성들의 이름은 없다. “삼종
지도“ 란 예전에,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의 도리를 이르던 말이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
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쫓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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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순경 태후가 세상을 떴을 때 시아버지인 고종은 이규보로 하여금 '東宮妃主哀冊[동궁비주애책문]'을 짓게 하였다.
태후의 미덕을 칭송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하는 문구도 보이는 걸로 봐서
순경 태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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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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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릉의 주인인 순경 태후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녀를 나타내기 위해서 외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시아버지와 남
편, 아들까지 망라했다. 그녀는 그 모두와 연관이 있지만 그녀 자신은 아니다. 여전히 순경 태후가 누군지 우리는 알지 못
한다. 이름은 무엇이었으며 언제 태어나고 또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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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가 썼다는 東宮妃主哀冊文[동궁비주애책문] 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하늘이 金櫃[금궤]를 내리니 경사의 근원이 처음으로 열렸다. 바른 혈통이 서로 이었는데, 너는 그 후손이었다. 외가는
어떤 집인고. 대대로 帶礪[대려]를 맹세하였다. 적선이 모인 곳에 유전하는 꽃다움이 침체되지! 않았다. 순하고 곱디고운
淑[숙원]은 유순하고 또 은혜스러웠다. 난초처럼 빼어나고 옥처럼 고왔다. 동궁에 배필이 됨은 빈틈없이 맞는 일이었다. 마
땅히 집안을 이어서 능히 영원히 전하리라 생각하였더니, 어찌 그리도 복록이 없어서 홀연히 갔는고. 14세에 嬪[빈]으로
와서 16세에 가버렸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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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櫃[금궤]: 여기서는 순경 태후의 조상인 경주 김씨 시조 金閼智[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다는 고사를 가리킨다.
帶礪[대려]: 功臣[공신])의 집이 길이 爵祿[작록]을 누리게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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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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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가문에 태어나 태자비가 되었던 금수저 순경 태후는 운이 좋은 홀씨였던 셈이다. 비록 제 이름으로는 살지 못했지
만, 그것이 그 시대의 마땅한 이치였으니 어찌하랴.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녀도 제 이름으로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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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는 순경 태후를 둘러싼 이들의 행적은 남아 있지만 정작 그녀는 없다. 누구의 외손녀, 누구의 딸, 그리고 누구의
아내였고 누구의 어머니로만 기록되어 있다. 가릉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 여인들을 생각해 본다.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만
기억되는 그녀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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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아래 더해만 가는 북서풍, 솔바람 소리 끝에 와닿는 이름 모를 산새들만이 지저귀는 조용한 산자락이다. 가슴을 파고
드는 찬바람, 옷깃을 여미고 유랑자는 고개를 돌려 또 하나의 묘를 바라본다. 가릉 근처에 또 한 기의 고려 고분이 있다. 봉
분 둘레를 꾸민 난간과 난간 지대석으로 봐서 가릉보다 더 규모도 크고 화려하다. 그렇다면 저 무덤도 왕릉일까?
고려시대 무덤은 맞는데 주인은 없다. 이를테면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塚[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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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시간대다. 위 사진처럼 쇠 백로의 외로움 보다는 다 함께 바라보는 우리 역사의 문화 유산이 되었음
하는 진정한 바램 간절하다. 고구려나. 고려나. 조선도 다 망한 왕조들이다. 오늘날 대한민국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의
문화 유산처럼 고려의 문화 유산도 위대하게 찬란하게 빛나는 우리의 문화 유산이 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바다는 차갑게 숨을 고르고 서산에 기울어 뉘엿뉘엿 지는 해와 붉게 물드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솔 향기 한 모금 머금고
조용한 여유를 가져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닌가 싶어 소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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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릉 찾아가기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1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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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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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여행 가이드
*관광 안내소: 032-932-2302.
*강화군청 문화 관광과: 032-930-3568
*관광 통역안내: 1330(24시간 운영)
*한옥관광 안내소: 032)932-5464
*터미널 안내소: 032)934-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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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여행 정보는 여기에서 확인 요.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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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8경
#제1경 전등사/. #제2경 보문사/. #제3경 연미정/. #제4경 갑곶돈대/.
#제5경 마니산/. #제6경 광성보/. #제7경 초지진/. #제8경 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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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성곽길, 강화 나들길 도보 여행 시 유의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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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코스를 숙지 후, 시간과 거리를 감안한 자신의 체력에 맞는 여행을 하십시오.
*여러 사람과 함께 여행하며, 위급 시 119나 소리를 내어 주변에 알리도록 합니다.
*해안제방 길에서 밀물과 썰물 및 군사 보호지역 통행시간을 고려하여 여행하십시오.
*해안가 근처에는 폭발물 등의 위험물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강화 나들길 여행시간은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입니다.
*코스 중에는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으니 훼손하지 않도록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 중에 주민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할 수 있으니 조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위한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시고, 쓰레기는 반드시 회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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