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이유!!
정말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우리가 바라는 평안의 유지가 아니다. 가짜 낙원에서 끌어내어 진짜 실재이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구름 기둥을 따라 나아간 이스라엘 앞에 펼쳐진 것은 젖과 꿀이 아니라 시퍼런 홍해였다. 말씀에 순종하여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만난 것은 목숨을 위협하는 광풍이었다. 명령대로 행했는데 배에는 물이 차올랐다. 왜 하나님은 순종의 결과로 기근과 풍랑을 허락하시는가? 우리의 순종이 그분이 주시는 혜택(What)을 사랑해서인지, 그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Who)을 사랑해서인지 가려내시기 위함이다. 당신은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하는가, 아니면 주님이 주시는 그 무엇을 사랑하고 신뢰하는가? 아브라함도 이 시험 앞에서 무너진다. 기근이 찾아오자 그는 하나님이라는 인격 대신 애굽이라는 혜택을 찾아 떠난다. 신뢰가 흔들리자 사람도 인격이 아니라 기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애굽에서 죽음의 위협을 마주하자 그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아내 사라를 기능자로 전락시킨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 지독한 기근과 실패를 뚫고 신뢰를 회복했는가. 그 과정은 자아가 해체되는 처절한 죽음의 시간이었다.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 기다림이 신앙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약속은 거창했고 현실은 공허했다. 그때 사라가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라고 제안한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기록된, 당시로서는 상식적인 가문 계승 방식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을 약속하셨고, 나는 그 약속을 돕는 중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Who) 대신 약속이라는 결과물(What)을 인간의 수단으로 앞당기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마엘이 태어났다. 문제는 해결된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의 시작이 아니라 더 깊고 긴 영혼의 어두운 밤의 시작이었다. 하갈의 임신은 집안에 갈등과 증오를 불러왔다. 가장 뼈아픈 대가는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뒤 13년 동안 성경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기록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만든 결과물에 안착해 살았으나 그의 영혼은 캄캄한 정적 속에서 말라갔다. 16세기의 영성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베푸시는 가장 깊은 사랑의 치료로 보았다. 그가 말한 어두운 밤이란,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소음이 하나둘 음소거되고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비워내는 은혜의 공간이다. 진짜 어둠은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환상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께 굴복하게 되는 때다. 아브라함의 13년은 이스마엘이라는 인간적 대안이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내 모든 수단이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우는 해체의 계절이었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혼에 들려오는 침묵은 버림받은 증거가 아니다. 가짜 통제권이라는 우상을 부수시려는 하나님의 가장 치열한 열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시 찾아오신다. 그리고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며 이렇게 명하신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창세기 17:1 이 구절에서 “완전하라”로 옮긴 단어는 히브리어 ‘타밈’이다. 도덕적 무결점이 아니라 마음이 나뉘지 않은 상태, 곧 온전한 신뢰를 가리킨다. NIV가 이 대목을 “walk before me faithfully and be blameless”로 옮긴 이유가 여기 있다. 두 마음으로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 한 분에게 시선을 고정하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아, 너는 내 약속이라는 무엇을 얻으려고 이스마엘이라는 수단을 계산하며 살았다. 그래서 네 마음이 나뉘었다. 이제 계산기를 버려라. 네 가능성이 0이 된 99세에, 오직 나만 신뢰하며 내 앞에서 걸어라. 그것이 내가 원하는 완전함이다.” 이어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신다. 할례는 이 명령에 대한 처절한 항복 선언이었다. 신체 일부를 베어내는 의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자 인간의 힘을 상징하는 자리를 베어냄으로 “네 생명은 네 힘(What)이 아니라 오직 나(Who)에게서 나온다”라는 것을 몸에 새기는 자아의 장례식이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라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무거우니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라는 것도 아니다. 그 위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바로 그 십자가였다. 옛 자아가 죽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이 머무는 삶이 시작되었다. 할례 이후 아브라함은 완전히 달라진다. 창세기 18장에서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 앞에 허리를 굽힌다. 하나님의 뜻이 들어오도록 문을 여는 겸손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제 자신들의 죽은 몸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이 더 무겁고 실재적임을 믿음으로 확정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신다. “네가 신뢰하는 대상이 그 무엇, 곧 지식과 경험과 건강과 재정이냐? 아니면 정말 나 하나님이냐?” 우리가 붙잡은 지식과 경험, 건강과 재정, 권력, 심지어 내 신념이라는 그 무엇(what)은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아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살라. 하나님은 당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당신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기뻐하신다. 우리의 진짜 본향은 이 땅의 영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품이다. - 믿음의 DNA, 김다위
믿음의 DNA의지하고 가까이 나아가고 행동하라
김다위
† 말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1:9 † 기도
주님, 주님 없이는 나의 가능성이 0%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바라며 주님과 함께하는 친밀함과 그 기쁨보다 더 크게 여겼던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셔서 다른 것보다 오직 주님만 바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적용과 결단
내 자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놓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일치한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