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 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시집 『또 다른 별에서』, 1981)
[작품해설]
이 시는 박수근 화백의 「세 여인」이라는 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이른바 문학의 ‘탈(脫)장르화’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탈장르화’란 문학과 다른 예술 장르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거나 없어지는 예술적 경향으로, 시와 소설이 텔레비전 드라마나 연극, 혹은 영화로 각색되어 영상 예술화되는 일은 이미 일반화된 현상이다. 심지어는 시와 연극을 결합하여 언어 대신 시인이 자신의 몸짓이나 연기로 표현하는 행동시 같은 극단적인 ‘탈장르화’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예술 영역들의 결합이 새로운 작품의 창작과 수용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나, 그것은 전적으로 언어적 차원의 가치 형상화라는 전제하에섬나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고, 언어와 아름다움과 상상력을 십분발휘할 수 있는 예술 영역은 오직 문학이기 때문이다.
박수근 화백은 창작 초기부터 주로 검정과 흰색, 그리고 적절히 섞인 회색을 사용하여,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 풍습을 질박한 느낌으로 담아내고자 하였다. 「세 여인」은 1960년대에 창작된 작품으로, 간결한게 요약된 이미지가 거친 질감과 함께 제시되어, 마치 화강암 암벽에 아러새긴 부조(浮彫)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고단한 삶 속에서 서민들의 일상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를 작품화하였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절구질하는 여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길가의 행상들, 아기를 입은 소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김장철 마른 가지의 고목들은 그의 감성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는 서민의 모습을 단순히 인상적으로만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평면화 작업을 거쳐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평면화 작없’이란 주관적 감정으로 파악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감정에서 독립된 완전한 객체로서 대상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서민의 삶을 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그는 서민이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이른바 존재론적 사실주의를 지향한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삶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절제된 형식으로 잔잔하게 느껴진다.
이 시의 화자는 박수근 특유의 색채와 질감으로 형상화된 아낙네들의 모습을 통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읽어 내고자 한다. 그러나 화려하고 당당한 이미지가 아닌 무채색에 가까운 색감과 입술, 표정, 윤곽도 희미한 인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정서는 서글픔과 애처로움뿐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하나님’에게 이 같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보시니 마땅합니까?’라고 묻는 부분 역시 서민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애처로움을 설의적 표현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이 시는 표정도 윤곽도 형체도 명확하지 않은 아낙네와 아이들로 표상되는 서민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연민의 정서를 표현한다. 또한 그들의 납작해진 모습을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에게 보여 줌으로써 이들의 삶을 ‘납작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고발하는 것은 물론, 화려한 유채색이 아닌 무채색의 납작하고 건조한 이미지를 제시하여 부정적인 현실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가치 없는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데 이 시의 심각성이 있다. ‘걸어 놓고’ ⤑ ‘붙여 놓고’ ⤑ ‘꿰어 놓고’로 바뀌어 간 서술어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연민도 점차 심화되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가 ‘보시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이것이 변주된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는 ‘마땅합니까?’에 중점을 둔 항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작가소개]
김혜순(金惠順)
1955년 경상북도 울진 출생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입선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92년 제6회 소월문학상 수상
1996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 『또 다른 별에서』(1981),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 『어느 별의 지옥』(1988), 『우리들의 음화(陰畫)』(1990),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1994), 『불쌍한 사랑 기계』(1997),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