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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글 | 이동복 前 국회의원
▲ / photo by 조선DB |
1948년 4월에 있었던 백범 김구의 평양 나들이는 이미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김규식과 함께 북행길에 나선 백범은 평양에서 김일성·김두봉과 ‘4김 회담’을 열어 “독립을 좀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분단이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이건 북이건 ‘단독정부’ 수립만은 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도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북의 김일성은 그러한 백범의 생각을 역으로 이용, 백범의 평양 도착에 때를 맞추어 북한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라는 것을 소집해 놓고 백범과 김규식을 이 행사의 ‘둘러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 뒤 소위 ‘4김’의 모임이 백범이 묵던 여관에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이 모임은 백범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백범은 김일성에게 남한에 대한 전력지원과 옹진반도에 대한 농업용수 공급의 계속을 요청했고 이에 대해 김일성은 응락하는 시늉을 했지만 북한은 백범이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전기도 농업용수도 모조리 끊어버렸었다.
북한에서는 이때 백범의 평양방문 중에 있었던 일에 관하여 북한 나름으로 주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때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백범이 김일성에게 상해와 중경에서 그가 이끌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새(國璽)’를 바치면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늙은이에 불과하니 이제 나에게는 고향인 황해도에서 능금밭이나 하나 주어 여생을 보내게 해 주고 앞으로 나라 일은 김 장군이 도맡아 챙겨달라”고 청했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북한의 ‘주장’은 놀랍게도 바로 <김일성 저작집>에도 담겨져 있었고 또 1972년 필자가 ‘남북조절위원회 대변인’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측 사람들로부터 직접 듣기도 했었다. 과연, 그랬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그 뒤 두고두고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남쪽의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진보’를 표방하면서 ‘친북’의 행보를 보이는 이들을 중심으로 백범에 대한 일종의 ‘재평가’가 고개를 들고 있다. 아마도, 북한의 ‘기록’에 나타나는 ‘주장’에 입각하여 백범의 ‘좌우합작’ 행보를 부각시킴으로써 이 나라 젊은 세대의 역사관을 오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현 정부의 ‘친북’ 행보에 추종하게 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이같은 북한의 ‘주장’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백범의 공산주의관, 즉 공산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백범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은 사실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백범이 스스로 저술한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그의 생각이 소상하게, 진솔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백범의 생각은 <백범일지>(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조선·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吳冕稙)․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대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민족독립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한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 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조완구(趙琬九)·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송병조(宋秉祚)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에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아비를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남군정서’․‘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정세의 우리에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張作霖)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1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 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위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활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229-236쪽]
『이 때에 ‘대일전전 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 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同床異夢) 통일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264쪽]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으로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266-267쪽]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 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해체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金若山)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279-280쪽]
혹자는 위에 인용된 대목들에 담겨진 백범의 생각은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때의 일이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에는 바뀌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에 인용하는 <백범일지>의 다른 대목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위에 인용된 대목은 <백범일 지>의 ‘하권’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하권’은 백범이 아직 중경에 있을 때 기술한 것이 맞다. 그러나 다음에 인용하는 대목이 포함된 ‘나의 소원’은 백범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뒤에 기술하여 1947년 11월에 발표한 글이다. 이 대목에 담겨져 있는 공산주의관을 소지한 백범이 그로부터 불과 5개월 이후인 1948년 4월 평양에 가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수령’이었던 김일성에게 북한이 ‘주장’하는 얘기를 과연 했을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 나라 젊은 세대가 현혹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에서 다음의 대목들을 인용한다. 범우사판 <백범일지>의 ‘(나의) 정치이념’ 가운데 몇 토막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읽기를 권한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한 개인에게서 오는 것을 ‘전체’ 또는 ‘독재’라 하고 한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며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이거니와 이것은 수백 년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 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죽은 세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을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 함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306-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