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12](금) [동녘글밭] ‘집단 우매’를 넘어 ‘집단 지성’으로
https://youtu.be/41gmJXrkR4g
민주주의는 구성원 각자가 주인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 제도입니다. 이런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다들 욕심을 가지고 있어 그 욕심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타협을 찾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을 ‘협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타협과 협치는 뒤로 밀리기 마련입니다. 결국. 타협과 협치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으로, 힘으로 주장을 펼칩니다. 욕심의 속성이 그대로 발동하여 양보를 이끌어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서로 목숨을 빼앗는 전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따라서 그런 불행을 미리 막기 위하여 ‘다수결’이라는 제도를 두었읍니다.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다수의 생각에 따르는 제도이지요. 어쩔 수 없을 때는 다수결의 원리, 원칙에 따릅니다. 아주 제도로 만들어 더 이상 불필요하게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마련해 놓은 셈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아주 가끔씩 이 민주주의는 큰 혼란을 겪습니다. 다수결에 따르는 것으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지만 실세로는 다수의 뜻이 아닌 소수의 이익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되어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크게 훼손하고, 흐려 놓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어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으로 값을 아주 낮게 매긴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른바 플라톤의 ‘중우 청치’입니다. 여기서 중우는 군중, 대중, 민중, 시민으로 풀어도 될 듯싶네요. 바로 이것이 시민 중심으로 ‘다수결 원칙’에 바탕으로 한 ‘민주 정치’가 ‘중우 정치’로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일 테지요.
이러한 플라톤의 걱정을 ‘우리들’은 우리나라 정치에서 무수하게 보고,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법치를 내세워 합리를 가장하여 불법을 저지르는 ‘윤석열 검찰 정권’이 하는 짓이 바로 그렇습니다. 모두에게 평등해야 할 법은 법치에 깔려 신음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실상입니다.
이처럼 민주 정치는 많은 미비한 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런 약점을 이겨내며 성큼성큼 성장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겪어 본 여러 정치 제도 중에서 그나마 으뜸가는 제도로 여겨집니다.
그러한 사실을 실제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요, 우리 ‘한겨레’라는 생각에 이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이 세계를, 인류를 이끌어 가야 할 몫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여길 정도니까요.
여기에서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집단 지성’입니다. 이 ‘집단 지성’이 반드시 늘 옳은 방향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람의 뿌리 얼’을 제대로 갖추는 일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파시즘, 나치즘을 비롯한 유사 독재들이 겪는 진통을 고스란히 겪어야 하니까요. 이것은 사람의 목숨을 희롱하여 결국 사람의 진을 다 빼놓는 짓입니다. ‘집단 지성’이 한 순간에 ‘집단 우매’로 둔갑하는 일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글밭 제목도 ‘집단 우매’를 넘어 ‘집단 지성’으로 잡은 것입니다.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늘 모자랄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나의 행복, 우리의 행복이 고스란히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되기까지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람 노릇’입니다.
이런 오늘도 고마움으로 ‘사람 노릇’을 하는 하루로 열어 갑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도 늦지 않게 새벽에 글밭을 일구었읍니다.
'‘집단 우매’를 넘어 ‘집단 지성’으로'라는 제목입니다.
민주주의를 하면서 늘 걱정이 되는 것은
이 '민주 정치'가 '중우 정치'로 타락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민주 정치'의 장점을 살리는 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읍니다.
그러자면 '집단 지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글밭으로도 일구게 된 것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