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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묵상글(강론글) “나를 따르라” (요한 21, 19)
1차(260521. 22:10), 2차(04:50), 3차(08:00)
22일 묵상글, 21일 22시 1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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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2일 금요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라” (요한 21, 19)
제1독서<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사도25,13ㄴ-21)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복음<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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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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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21,15–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때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맡기십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확인 질문이 아니라
무너졌던 베드로를 다시 세우시는 사랑의 장면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실패를 다 아시면서도
다시 사랑을 묻고
다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에서
사랑이 사명의 뿌리임을 깊이 보았습니다.
양들을 돌보는 일은
능력이나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양들을 바르게 돌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전략을 묻지 않으시고
성과를 묻지 않으시며
먼저 사랑을 물으십니다.
이 질문이 세 번 반복되는 것도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자리에서
이제 세 번 사랑을 고백하게 하심으로
주님은 그를 부끄러움에 묶어 두지 않으시고
사랑 안에서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실패의 기억을 들추는 장면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을 다시 사랑과 사명 안으로 불러들이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넘어졌던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깊은 겸손 안에서
다시 세우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이 없는 봉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로 흐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돌본다는 것은
그들을 내 소유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길은
지배의 길이 아니라 자기 내어줌의 길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에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손을 펼치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려 갈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이 결국
자기 뜻만을 지키는 자유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자유로 성숙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문화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 문화가 어떤 사랑을 말하고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세상은 자주
사랑을 감정의 고조나 자기만족으로만 말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을
돌봄과 책임, 충실함과 자기 내어줌으로 드러내십니다.
참된 문화는
사랑을 소비하지 않고
사랑을 맡겨진 생명을 돌보는 방식으로 살아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자기표현의 문화만이 아니라
자기증여의 문화입니다.
또 성 막시무스를 기억하는 오늘,
이 복음은 더욱 깊어집니다.
베드로는 자유롭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끝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 돌보고,
사랑하기 때문에 따르며,
사랑하기 때문에 마침내 자신을 내어 주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와 사랑이 하나 되는 길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없애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가장 참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가?
그 사랑이 말에만 머무는가,
아니면 맡겨진 사람들을 돌보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나는 자유를
내 뜻대로 하는 권리로만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선택하는 힘으로 배우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사랑을 물으시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라고 맡기십니다.
주님,
제가 사랑을 말로만 고백하지 않게 하시고
맡겨진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게 하소서.
실패의 기억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당신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며
자유를 자기 뜻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하는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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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 이야기를 두 번 하셨습니다. 하나는 루가복음 5장,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님이 티베리오 바다에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신 장면입니다. 먼저 루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와 동료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물은 이미 씻고 있었고, 마음은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사실 이 말씀은 어부의 상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해봤고, 자기 전문 분야인데, 지금은 낮이고, 상황도 안 맞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나는 이미 다 해봤다. 더 이상 할 게 없다. 소용없다.” 기도도, 섬김도, 관계 회복도, 이미 노력해 봤지만, 안 된다고 느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깊이’보다 ‘의지’입니다. 깊은 데로 가는 것은 방향의 변화이고, 말씀에 의지하는 것은 중심의 변화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얕은 곳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네 믿음의 깊은 데로 나아가라. 상식과 경험만 의지하지 말고, 내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려 보라.” 우리가 두려워해서 가지 않던 ‘깊은 곳’은 어쩌면 정직하게 회개하는 자리일 수 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자리일 수 있고, 말씀 앞에 내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주님이 준비하신 풍성한 ‘어획’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옛 일상,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황은 예전과 똑같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자리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오른편’은 단순히 방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를 상징합니다. 같은 바다, 같은 배, 같은 그물, 같은 밤이었지만, 말씀 한마디에 순종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우리도 종종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들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직장, 가정, 교회 상황이 좋아져야 뭔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오른편’으로 그물을 옮겨 보지 않겠니?” ‘오른편’으로 옮긴다는 것은 조금 더 편한 쪽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선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고집을 고집하는 쪽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같은 가정, 같은 직장, 같은 교회, 같은 일상이지만, 조금만 방향을 돌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질 때,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아는 바다, 내가 아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마련하신 은총의 자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3번 하십니다. 베드로는 3번 대답하면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충분히 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3번 질문하신 이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반을 충분히 용서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주님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너의 상식과 경험을 넘어, 내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해 보아라.”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머뭇거리던 깊은 데로 나아가게 하시고, 제 중심의 방향을 ‘오른편’, 곧 주님의 뜻 쪽으로 돌리게 하소서. 같은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리게 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열매와 기쁨을 보게 하소서. 저의 삶 전체가 주님의 말씀에 걸린 그물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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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신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경상도 남편을 둔 아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내가 평소에 사랑 표현에 인색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사랑해’와 ‘안 사랑해’가 살았대. 그런데 ‘안 사랑해’가 죽고 말았대. 그럼 누가 남았게?”
아내는 “사랑해.”라는 말을 기대하였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니 뭐 잘못 무긋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사랑의 말은 상처를 낫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며 베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덮어 주시며 사랑의 실패를 치유하시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확장시키는 데로 나아가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뒤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이 따라옵니다(21,16-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이 그 안에만 갇히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를 넘고, 나의 공동체를 넘어서 심지어 나의 원수에게도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양들임을 발견하고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라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만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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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참조)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그러니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17 참조)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주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은 늘 저를 더더 사랑하십니다.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하기에, 일을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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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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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2 04:17
- 우리는 더 사랑해야 할 사람!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생각이랄까 염려를 하게 됩니다.
내가 나이를 먹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몸 하나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이에게 돌봄을 받게 되어도 사랑할 할 수 있을까?
이는 내 코가 석 자인데도 사랑할 수 있냐는 말이지요.
흔히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남의 암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신경 쓰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고 물으시는 뜻도
이런 뜻과 연결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 고통이 크면 남을 생각할 수 없고,
사랑은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서
또 주님의 후계자로 주님의 양들을 돌봐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보통 사람보다는 더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더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바티칸 공의회의 수도 생활 문헌 ‘Perfectae Caritatis(완전한 사랑)’는
수도자란 완전한 사랑을 사는 사람이라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더 완전한 사랑을 사는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인 누구나 원수 사랑을 포함하여 완전한 사랑을 살아야 하지만
수도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보다도 더 완전한 사랑을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말씀하신 다음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제자라면 하느님처럼 완전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여기서 완전은 능력에 있어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완전’이 ‘자비’로 바뀝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그래서 따르지 않을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주님께 사랑에 대한 가르침도 받고 따르기로 한 제자라면
더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사랑하는 것도
남보다 더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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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라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숯불 앞에서
새벽 물안개가 호수 위를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어깨 위에는 지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밤은 단지 노동의 실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마음조차 건져 올리지 못하는 밤을 살아갑니다. 애써 붙들었던 믿음도, 사랑도, 충성도 허기진 그물처럼 텅 빈 채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 호숫가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슬픔과 실패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계셨습니다. 따뜻한 불빛 위에는 생선과 빵이 올려져 있었고, 밤새 실패한 이들을 위해 조용히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인간은 실패한 사람에게 먼저 이유를 묻고 책임을 따지지만, 주님은 먼저 밥을 차려주십니다. 사랑은 심문보다 먼저 사람을 먹이는 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숯불 냄새를 맡는 순간 오래된 기억 속으로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대사제 집 뜰 안에서 차가운 손을 녹이던 그 밤의 숯불. 사람들의 눈길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바로 그 자리. 복음서 안에서 숯불은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배신의 자리였고, 또 한 번은 용서의 자리였습니다.
주님은 상처를 피해 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하느님은 그 자리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군중 앞에서 꾸짖지 않으시고, 새벽 호숫가의 조용한 숯불 앞에 앉히십니다. 그리고 마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듯 천천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칼날이 아니라 손길이었습니다. 정죄가 아니라 회복이었습니다. 주님은 배신의 기억을 다시 들추어 베드로를 무너뜨리려 하신 것이 아니라,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세 번의 부인을 씻어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슬퍼집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한때는 누구보다 큰소리치며 “모두 떨어져 나가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지만, 인간의 의지는 두려움 앞에서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그는 이미 자신의 눈물로 배웠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결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길 뿐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 고백은 실패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기도입니다. 자신의 약함까지 다 아시는 분 앞에 더 이상 숨지 않는 것. 자신의 부끄러움까지 알고 계시는 분의 사랑을 끝내 신뢰하는 것. 어쩌면 참된 믿음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랑을 고백하는 용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고백 뒤에 반드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흘러갑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생명이 되어 움직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높은 언어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드러나고, 거창한 선언보다 작은 돌봄 속에서 증명됩니다.
지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 약한 이를 귀찮아하지 않는 일, 상처 입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일,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작은 이를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바로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도 끝까지 “내 양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주인이 아닙니다. 맡겨진 생명을 대신 돌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며, 신앙의 중심은 힘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다른 이들이 너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젊은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길, 내가 계획한 미래, 내가 선택한 방향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자기 뜻을 내려놓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를 자꾸만 내가 원하지 않던 자리로 데려갑니다. 용서하기 싫은 사람 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픔 속으로, 침묵하며 견뎌야 하는 자리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십자가의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기를 멈추는 것. 하느님의 선의 흐름이 나를 통하여 흐르도록 허용하는 것. 내가 붙들고 있는 욕심과 자존심과 통제의 끈을 조금씩 내려놓고, 사랑이 나를 필요한 곳으로 데려가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십자가 위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성숙해진 자리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이 이제는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처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들었던 바로 그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갈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은 과거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실패한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넘어졌던 자리 때문에 끝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각자의 삶의 호숫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조용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완벽한 대답을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또다시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실패했음에도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부끄러움 속에서도 다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 아마 신앙이란 완벽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끝내 사랑의 부르심을 따라 다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와 자비의 강물이 되어 사랑의 바다로 흐르는 관계의 신비를 너와 나 사이에, 온갖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매일 매일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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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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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 줍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 이야기는 베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시며 베드로의 눈높이로 내려와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그러하셨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똑같은 마음으로 대해 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예전에도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그리스어에는 "사랑하다"는 동사가 적어도 네 가지 있습니다.
1. ἀγαπάω (agapáō: 아가파오)와 2. φιλέω (philéō: 필레오), 3. ἐράω (eráō: 에라오), 그리고 4. στοργέω (storgéō: 스토르게오)입니다.
우선 ἀγαπάω (agapáō: 아가파오)는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 온전한 자기 내어줌의 사랑을 뜻합니다. 명사는 ‘아가페(Agapè)’입니다.
두 번째로 φιλέω (philéō: 필레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우정을 들 수 있습니다. 명사는 ‘필리아(Philia)입니다.
세 번째로 ἐράω (eráō: 에라오)는 열정적이고 낭만적이며 때로는 육체적 사랑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명사는 ’에로스(Eros)’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στοργέω (storgéō: 스토르게오)는 가족 간의 자연스러운 애정, 부모와 자녀의 사랑, 형제간의 피붙이 사랑을 의미합니다. 명사는 ‘스토로게(Stroge)’입니다.
오늘 복음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 그리스어에는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아가파오(agapáō) 동사였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으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그 영웅적인 사랑, 즉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인 아가페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가파오 동사를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우정의 사랑인 필레오(phileo) 동사로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하며 필레오 동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과 대답에서도 같은 동사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아가페의 사랑에서 내려오셔서 필레오 동사를 사용하시며 베드로에게 문턱을 낮추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시험에 실패했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정 자체가 이미 깊은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고는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하고 말씀하셨듯, 우정은 아가페를 위한 가장 좋은 준비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정에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괴테는 "친구가 곁에 있을 때와 부재할 때, 우리는 그 친구를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해, 친구가 '내' 곁에 없다면 그 친구는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기에 '내'가 만든 '이미지'로서만 존재하지만, 친구가 곁에 있을 때에 그 친구는 자기만의 개성을 지닌 다른 주체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괴테가 말하는 핵심은 우정이란 관계는 자아의 투영에 갇히기 쉽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친구가 부재할 때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그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함께할 때는 그를 다른 하나의 주체로서 독립성과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존재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정의 연약함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그러므로 우정이라는 것은 우리의 에고에 의해 침투되고 삼켜질 수도 있는 사랑인 것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친구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동의하며, '내' 자아상을 지지해 줄 때만 그 친구를 사랑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괴테가 말하는 우정이란 이기적인 사랑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리보의 성 알레르드(St. Aelred of Rievaulx: 1110-1167)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우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친구보다 더 귀한 약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친구는 '내'가 꺼려하는 '나'의 진실을 이야기해 주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겠지요?! 또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나'의 약점을 사랑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에고가 얼마나 은밀하고 빠르게 타인의 독립적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며 그를 내 입맛에 맞는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와 다른 그 사람의 차이가 나를 가르치고, 도전하며, 내 자아의 최면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우정은 이미 아가페로 변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만한 사랑마저도 이미 높이 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미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했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신의 그 사랑이 얼마나 나약하고 이기적인 사랑이었는지를, 즉 에고에 의해 부풀려진 사랑이었는지를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실 때 순수히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오히려 주님을 결연히 따를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묘한 결론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당신에 대한 사랑이 처음부터 영웅적이거나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적어도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만 있으려는 의지만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당신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예수님의 마음이 하염없이 큰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족한 사랑만으로도 당신의 양 떼인 우리 이웃을 돌보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사랑의 힘을 부여해 주시는 예수님의 영에 의해 예수님의 양 떼를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매형제들을 사랑하고자 할 때 먼저 의식하고 상기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고 기억하고자만 한다면 우리는 이 사랑이 진정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의심할 필요조차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살리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아가페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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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여러분의 목소리를 하느님께 들어올리십시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관상의 수행에 충실해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
여러분의 목소리를 하느님께 들어올리십시오!
2026년 5월 21일 목요일
카르멘 아세베도 부처(Carmen Acevedo Butcher)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관상의 수행 방법을 나누어 줍니다:
제 이름 카르멘은 ‘노래’ 혹은 ‘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저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저는 언제나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특히 어려운 순간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노래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일상 속에서 노래를 관상적 기도의 한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노래는 우리 몸 안에 아름다운 울림을 일으켜 주며, 감정과 에너지가 우리 안을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노래 전체를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에 남는 한 구절이나 한 줄만 기억해도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성가나 누군가가 권하는 노래일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을 찾으면 됩니다. 그것은 콜 아서 라일리의 글귀일 수도 있고, 메리 올리버의 시 한 줄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성경에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와 같은 말씀이나 복음서의 한 구절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작은 카드에 적어 늘 지니고 다니곤 합니다. 이렇게 마음에 새긴 말씀을 읽고, 되뇌며, 삶 속에서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 안에서 자연스레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그 말씀으로 어떤 형태의 성가와 같은 것을 만들어도 좋습니다. 말씀을 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깊이 묵상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선율이 솟아오르곤 합니다.
아세베도 부처는 우리가 삶의 어느 자리에서든지 관상의 수행을 시작하기를 권장합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피곤할 때에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한가운데서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날의 한복판에서도, 힘든 날의 한복판에서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시작한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저 시작하면 됩니다.
노래를 시작하거나 어떤 형태의 관상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가 평화롭거나 합당하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를 실천하면서도 곧바로 평화나 거룩함을 느끼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여기거나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우리가 숨을 쉬듯,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 반복하며 꾸준히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성실히 기도에 충실할 때, 그 안에서 치유와 은총의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때로 저는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오늘은 너무 지쳐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하느님과의 작은 대화로 이어집니다. ‘왜 저는 더 고요히 머물며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는 걸까요?’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맴돌지만, 이 기도—"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를 반복하는 기도—는 우리 안에 침묵과 고요의 공간을 지켜 줍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고요히 머무름"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고, 우리 안에 있는 목소리, 곧 하느님의 목소리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열쇠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 열쇠는 이미 우리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비시오 디비나(Visio Divina: 거룩한 이미지를 통한 관상 기도)에 관한 오늘의 묵상(Today’s meditation)은 제 사무실 벽에 걸린 코리타 켄트의 실크스크린 작품 "겨울에서 봄으로"를 더욱 깊이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그 꽃의 중심에 작은 하트 모양이 있음을 처음으로 발견했는데, 이는 제 삶의 "겨울" 속에서도 제 마음이 꽃의 중심 안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코리타의 작품은 세밀한 묘사보다는 "물감의 흩뿌림"처럼 보이기에, 저는 시시각각 쏟아지는 뉴스의 소용돌이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말고,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가 전한 말씀처럼 더 온유하고 신뢰에 가득 찬 자세를 지녀야 함을 떠올립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Julie B.
References
Adapted from Carmen Acevedo Butcher with Mike Petrow, “Taking the Practice Out of the Monastery,” Essentials of Engaged Contemplation, Trimester 1, mod. 3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5).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trick Hendry, untitled (detail), 201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요한 밤하늘 아래, 어떤 사람이 “오직 이 순간(Just This)”에 머무는 관상을 하며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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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오늘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도가 있으니, 바로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모를 편안함과 안도감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좌충우돌,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으로부터 혹독한 질타도 많이 받았습니다.
네 복음서에는 베드로 사도와 관련된 기사가 상당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베드로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 주지 않습니다. 나머지 행적을 밝혀 줄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에, 전승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추정컨데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코린토 등 여러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로마에서 보내셨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자행된 대박해 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는 엉뚱하게도 사도단 안에서 언제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 사가의 운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게 몹시 궁금했던가 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셨던 것처럼, 요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호기심을 반기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그 사람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저마다 지닌 역량이 다르고, 부여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궁극적인 도착점은 동일하지만, 목적지로 나아가는 길은 조금씩 다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거나 눈치 보지 말고 당당히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주변 사람들 의식하느라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피곤하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고,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살다 보니, 내 삶에 나도 사라지고, 주님도 사라져버린 어색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 인생도 주관하시고 안배하시니 대폭 신경을 꺼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분산되는 에너지들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대신 내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좀 더 충만히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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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5-19).>
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일은, 사실은 예수님 쪽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이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신 일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1요한 4,10).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 때문입니다.
그 일에 초점을 맞추면,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너는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래도 너에 대한 내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직후에 곧바로 회개했습니다(루카 22,62).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은, 그의 회개를 인정하셨고 받아주셨으며, 그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사랑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하고 실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은, 사도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할 직무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직무 수행을 잘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직무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1코린 13,1-3).>
3)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은, 당신이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은(마태 16,18-19), 변함없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일부 종파에서 베드로 사도의 잘못을 비난하고,
그가 사도의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하면서 교황 제도를 부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넘어진다는 것도 알고 계셨고,
다시 일어선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그를 예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떻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과 보호’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
이 말씀은,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받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잘못과 배반자 유다의 죄는 거의 비슷한 죄이고, 둘 다 큰 죄인데, 베드로 사도는 회개했고, 배반자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5).
유다도 자기 죄를 뉘우치긴 했지만(마태 27,3), 그냥 자살했기 때문에 그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던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도 그 전에 용서하셨을 텐데, 유다 자신이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주님의 ‘용서’도 ‘사랑’처럼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회개는 그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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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2. 부활 제7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55 추가
요한 21,15-19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신 후 주님께서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물으시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은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기 전 어부로 살아갈 때 쓰던 세속의 이름입니다. 주님께서 그 이름으로 그를 부르시면서, 다른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신 건 그가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힘만 믿고, 다른 제자들이 다 주님을 배신해도 자기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지요. 그러나 그의 호언장담은 채 반나절도 가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히실 때 그분을 두고 달아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그분과의 관계를 세 번이나 부정하는 ‘배신’의 죄를 저지른 겁니다.
그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남과 나를 비교하며 나를 돋보이려 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지요. 그래서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신 주님의 사랑에 비해, 그분을 향한 자기 사랑이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지를 알았기에 마음이 겸손해진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건 당신을 향한 사랑의 ‘크기’나 ‘양’을 재보시려는 게 아니지요. 부족함과 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의지’가 있는지, 실패와 절망,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당신을 사랑할 ‘용기’가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할 의지와 용기만 있다면, 그 사랑에 필요한 은총과 힘은 주님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배신한 죄로 그의 영혼에 깊이 남은 상처를 치유해야만 했습니다. 영혼이 죄책감과 후회로 병든 채로는 주님을 제대로,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영혼에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사랑의 보속’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즉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내 이웃,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다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보속’을 주십니다. 그 보속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베드로는 자기 마음과 영혼에 남은 죄의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과 영혼을 회복하여 주님을 온전히, 제대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보속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즉시 최선을 다해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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