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에 일본어 배우는 '큰형님' 대학생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일대는 요즘 젊은이들의 말을 빌리면 핫플레이스(hot place)입니다. 거리두기가 풀어지면서 밤마다 포차거리로 불야성을 이룹니다. 이웃 익선동 한옥마을의 카페‧맛집 골목과 어우러지는 이곳을 지날라치면 활기 넘치는 도시 서울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지난 초가을 어느 저녁 '큰형님'이 포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오랜만에 상경해서 포차거리 구경을 나갔습니다. 저녁 여섯 시인데 포차마다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기웃거리며 포차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주인이 "혼자는 안 됩니다. 어르신 같은 분은 여기 올 데가 아닙니다."라며 냉대하는 바람에 거의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내 알아차렸습니다. 노인 출입금지라는 것을.
'큰형님'은 '송해거리'를 한 바퀴 돌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후 다른 포장마차로 들어갔습니다. 별로 반가운 눈치가 아닌 젊은 주인에게 아첨하다시피 해서 구석자리에 앉았습니다. 1인분은 안 된다는 주인의 성화에 닭똥집(모래주머니) 2인분을 주문했습니다. 포차거리에 들어왔다는 만족감이 들었지만 허전함이 마음을 적셨습니다. 모두 쌍쌍이 앉아 담소를 나누는 포차에서 말 붙일 사람이 없어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나도 생각은 젊어, 이놈들아" 하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그 옛날 동숭동 문리대 마로니에 그늘 아래서 나라를 걱정하며 토론하고 호주머니를 털탈 털어 '학림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진아춘'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낭만을 얘기하던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철학과를 졸업한 후 당시 우리나라 최대 재벌 건설회사에 취직해 종로거리를 활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반세기가 지난 걸 생각하니 꿈만 같았습니다. "종로는 내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자신도 늙고 서울도 엄청 변했음을 그날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종로의 건물들은 앞으로 누가 관리할 수 있을까 하는,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뀌고 말, 걱정이 들었습니다.
'큰형님'은 대학생입니다. 제주 한라대학교 관광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으로 내년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동갑으로 1942년생입니다. 우리 나이로는 81세입니다. '큰형님'은 그가 학교에서 급우들로부터 받은 자랑스러운 호칭입니다. 그의 급우 30여 명은 거의 모두 2001년 또는 2002년생들이니 손자뻘 되는 아이들입니다.
그는 생각이 있어 여든 넘어 일본어과 신입생이 됐는데 그의 존재는 처음 어린 대학생이나 교수들에게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80세 노인이 일본어 알파벳 히라가나(ひらがな)부터 배우겠다고 덤벼들었으니 말입니다.
'큰형님'은 젊은 학생들과 열심히 어울려 공부했습니다. 수업을 위해 하루 종일 공부하고 성실하게 학생 노릇을 했습니다. 한국인 교수들은 수업이 끝나면 흑판에 쓴 글씨를 그대로 두고 가는데, 일본인 교수는 말끔히 지우고 나갔습니다. 그는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수들이 나간 후 지우개로 흑판에 남긴 글씨를 깨끗이 지웠습니다. 그러자 점차 다음 학생들이 먼저 나서서 지웠습니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급우들에게 저녁도 사고 치맥도 사주곤 했습니다. 학생들은 그를 '큰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치맥집에 자주 가면서 '큰형님'으로 호칭이 점점 굳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게 좋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동급생들이 그를 '큰형님'이라 불러주지 않아 우울합니다. 대신 '선생님'이라 부르는 동급생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뻘 되는 일본어과 교수들이 이 노인 대학생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선생님'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학생들도 교수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그를 '큰형님'으로 부르기가 어색해진 것입니다.
한국의 팔순 노인이 일본어를 배운다니 일본 언론에게는 뉴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작년 여름 동경신문(東京新聞)이 '78세 한국 대학생이 일본어를 배운다'란 제목을 달아 큰형님 스토리를 보도해서 화제가 됐습니다(사진). '제주 역사 연구의 일환' 이란 부제가 붙었습니다.
여든 넘어 "제주 역사 연구를 위해 일본어를 배우겠다"는 이 '큰형님'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자유칼럼 2013년 2월 1일자 '조선시대 최고의 목동'이라는 칼럼에 소개되었던 사람입니다. 이름은 권무일입니다.
'큰형님'은 1990년대 대기업 임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벌이다가 쫄딱 망해 오갈 데가 없자 20년 전 살 방도를 찾기 위해 빈손으로 제주도에 상륙했습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에 의지해 추사 김정희 적거지 근처에 싸구려 방을 얻어 복덕방 간판을 달았습니다. 타관에서 복덕방이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원래 문사(文士)기질이 있는 그는 복덕방 일로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엉뚱한 데 마음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의 역사 속 인물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조선조 전마(戰馬)를 길러 조정에 바쳐 헌마공신이 된 김만일을 소재로 소설을 썼고, 중국 남방으로 표류했던 제주인 이방익의 표류기를 썼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작가로서 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복덕방 사업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지만 10여 년 전 값싸게 경매로 나온 땅을 사두었던 게 중국붐이 일면서 나름 대박이 터져 여생 먹을 걱정은 안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본을 미워했고 일본어를 배운다는 생각을 70세가 될 때까지만 해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에겐 나이 차가 있는 두 형님이 있었습니다. 두 형님이 1944년 일본에 의해 태평양전쟁에 함께 징병으로 끌려갔습니다. 형제를 태운 일본 군함이 필리핀 세부에 상륙하려 할 때 미군 폭격기의 공습으로 침몰했습니다. 형제는 부둥켜안고 바다로 뛰어내렸으나 둘째 형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겐 형님을 징용해간 일본도, 그가 탄 배를 폭격한 미국도 미웠습니다.
그가 일본어를 배우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바로 제주도 역사, 그것도 탐라국 역사를 연구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본 제주도는 4‧3의 역사로만 가득차 있는 것 같아 좀 아쉬웠습니다. 고려시대까지 제주도는 독립된 '탐라국'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는 조선실록 등 가능한 서적을 섭렵했으나 하나의 국가로 존재했던 탐라국에 대한 역사 기록이 너무 빈약했습니다. 그게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일본은 해양국가였으니 일본 도서관 어딘가에 탐라국 기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80세가 넘어 외국어를 배우는 게 어렵다고 하소연합니다. 2년을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지만 일본어 방송을 듣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자권인 일본의 신문과 잡지를 보는 것은 익숙해졌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한 탐라국 역사를 캐보고 싶습니다. 책을 한 권 쓸 수 있는 자료를 모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거기까지 이르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록에 보면 탐라국이 고려의 현으로 편입된 것이 12세기라고 하니 탐라국은 나라의 규모를 떠나 오랫 동안 독립국가의 체제를 유지했던 셈입니다. 탐라 역사를 캐보고 싶다는 권무일 씨의 꿈이 조금이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8순 대학생의 삶에서 젊음과 꿈을 보게 됩니다. 또한 인생이 우연에 의해 얼마나 다양하게 펼쳐지는 것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